by 레부
각별의 집에는 오래된 장롱이 하나 있다. 그의 할아버지가 아끼던 장롱은 오래된 만큼 아귀가 다 맞지 않았고, 그랬기에 다 닫히지 않아 좁은 틈이 있었다. 언젠가 고쳐야지 생각은 했지만 크게 불편하지 않았기에 그 장롱은 오랫동안 그렇게 아귀가 맞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 그 장롱을 진작 고쳤어야 했는데. '각별아, 여기 꼭 숨어 있거라. 할아버지가 나가보
그림자에서 숨죽이며 사는 우리는 빛을 하염없이 동경하기만 하였고 빛에서 사는 너희는 우리의 어둠을 결코 알 수 없으리라 도시는 어두운 밤에만 머물지만 빛나는 건물들에 사는 너희는 너희의 빛으로 만들어진 그림자를, 절대 알 수 없으리라. "청장님, 야괴가 출현했습니다!" 평화로운 저녁, 공룡은 경찰서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한 경찰관이
황혼기 1. 해가 지고 어스름해지는 무렵. 2. 사람의 생애나 나라의 운명 등이 한창인 고비를 지나 쇠퇴하여 종말에 이른 때. 깊은 밤이다. 잠뜰의 집에 머물던 봄의 신 수현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중간에 잠이 깨어 잠시 밤공기라도 쐬고자 나온 것이다. 하얗게 눈이 쌓인 마당에 서서 그는 겨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뱉은 숨이 찬 밤공기를 맞
"..그래서 이 문장을 해석해보면, '길을 잃었었던 그는,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길을 찾을 수 있었다.'란다. 주의해야 할 문법은..." 녹음이 짙어가는 여름. 여로 고등학교 1학년 1반에선 영어 수업이 한창이다. 붉은 색 펜으로 중요하다고 별표 표시를 하던 잠뜰은,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방금 수현이 해석한 문장을 다시 읽어 보았다. "자, 그럼 오늘
저 거대한 바다는, 언제나 저곳에 있었다. 영원히 건널 수 없는 벽인 마냥, 이 곳에 갇혀 지내야 한다는 것이 너희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 마냥. 해가 없기에 어두운 하늘 만큼이나 깊고 어두운 저 바다는, 그래서 끝이 보이지 않아 감히 건널 엄두도 들지 않게 하는 저 검은 물은, 우리를 이곳에 가두기에 무엇보다 적합한 울타리였다. 도시 이름을 해광(海恇,
쉘터에 머물던 사람들은, 수현이 가져온 물건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수현이 가져온 것은 한 때 이 쉘터에서 머물던 덕개의 기타였기 때문이다. 수현이 자신이 간 곳에 덕개의 사진도 있었다고 말했을 때, 잠뜰이 입을 열었다. "사진은 안 가져온 거야?" 잠뜰은 득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전쟁 중에 헤어진 동생을 추억할 물건 정도 챙겨
만약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상상하면 행복해지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기에 더욱 잔인해지는 가정이죠.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백성들의 얼굴엔 모두 기쁜 미소가 걸려있었다. 경사스러운 날이라며 집마다 국기가 게양되고, 잔뜩 뿌려진 꽃잎이 거리를 뒤덮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라더는 분위기에 덩달아 들뜬 마음이 되었다. 옆에 서 있는
우린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물속이니까 첫 호흡도 마지막 숨도 우릴 둘러싼 물에 녹아있고 떠나간 이를 그리며 흘린 눈물도 물속에 담겨있기에 이 물이야말로 우리의 삶이 녹아있는 것이리라 수면 아래로 수 백 미터나 되는 깊이에 있는 곳인데도, 신기하게 용궁은 햇빛이 잘 들어오는 곳이었다. 물결칠 때마다 용궁의 건물을 비추는 햇빛이 춤을 추듯 흔들렸는데,
"아, 또 저 소리..." 눈이 내리는 호두나무 숲의 한쪽에 있는 작은 나무 오두막. 그곳엔 호두까기 인형 덕개와, 언제부터 이 숲에 산건지 알 수 없는 요정 필립이 차와 함께 호두를 즐기고 있었다. 조용한 그들의 휴식을 방해한 건 누가 들어도 홀릴 만한 감미로운 노랫소리였다. 공방주인이 항상 찬향하듯, 신의 목소리와 같이 아름다운 노랫소리지만, 호두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