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바랐던 것은
뜰팁 전력 '혁명' | 혁명
만약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상상하면 행복해지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기에 더욱 잔인해지는 가정이죠.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백성들의 얼굴엔 모두 기쁜 미소가 걸려있었다. 경사스러운 날이라며 집마다 국기가 게양되고, 잔뜩 뿌려진 꽃잎이 거리를 뒤덮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라더는 분위기에 덩달아 들뜬 마음이 되었다. 옆에 서 있는 덕개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리 웃는가?"
"폐하께서 그리 들뜬 표정이 되신 것은 어린 왕자님일 때 말고는 없었던 것 같아서요."
"실없는 소릴. 그리고 아직 폐하가 아니다."
"뭐 어떻습니까. 오늘은 폐하의 대관식 날이 아닙니까? 그 덕분에 백성들이 저리 기쁘게 거리를 나다니는 것이고요."
덕개는 기쁘게 웃었다. 오늘은 라더의 대관식이다. 공룡 폐하께서 선위를 하겠다고 선언하신 게 벌써 몇 달 전이다. 건강하신 분이 왜 선위를 하느냐고 대신들이 물었더니, 여생은 엘레나 왕비와 한적한 곳에서 지내고 싶다고 했다나 뭐라나. 남들이 다 대관식 준비를 할 때 두 분이서만 별궁으로 갈 준비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여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해야지, 기쁜 표정으로 그리 말하며 여행계획을 짜는 자신의 부모님을 보는 것도 라더에게는 나름 즐거운 일이었다.
대관식을 간소하게 치러도 상관없다고 한 라더였으나, 각별 대신은 자신이 대신으로 있는 한 그럴 순 없다며 정해진 예산 내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기 위해 근 한 달은 서류에 파묻혀 지냈다고 한다. 그 삼촌은 예전부터 그러셨지. 라더도 덕개를 따라 짧게 웃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곧 갈색 머리의 소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라더야!"
"와주었구나, 잠뜰. 아버지는 잘 모셔다드렸고?"
"응, 네가 대관식이 있을 홀의 귀빈석에 자리를 마련해줬잖아. 거기서 너희 아버지, 아차 이리 말하면 무례하려나? 공룡 폐하와 이야기하고 계셔."
네가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멋진 아이였는지 거의 1시간째 자랑하고 계신다, 잠뜰은 그리 말하며 쿡쿡 웃었다. 왠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면서, 덕개는 말 편히 나누라고 하며 방을 나섰다.
"진짜 왕이 됐네?"
"그럼, 가짜로 왕이 될 수도 있나?"
"하하, 그런 의미가 아니야. 친구가 왕자였던 것도 신기한데, 이젠 내 친구가 에투알 국왕이라니까 그렇지."
"뭐, 네가 예전부터 뭔갈 잘 안 믿긴 했지. 내가 왕자라고 했을 때 네 표정도 꽤 볼만했는데. 진짜 왕자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면서, 그래서 그건 언제쯤-"
"경사스러운 날에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시죠, 폐하?"
둘은 서로를 보며 소리 내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잠뜰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자, 우리 왕이 되신 내 친구를 위한 선물!"
흰 튤립 꽃다발이었다. 처음 만났던 그 어린 날 받았던 튤립처럼, 싱그럽고 어딘가 그리운 향이 나는 꽃다발이었다.
"고마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것도 훔친 건 아니겠지?"
"야 넌 무슨 옛날 일을 그렇게 잘 기억하냐... 아니거든? 이건 내가 직접 산 거거든? 뭐, 오는 길에 걸려있던 화관들에 비하면 볼품없긴 하지만, 그래도-"
"볼품없지 않다."
라더는 잠뜰에게서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싱그러운 향이 라더의 코끝을 간질였다. 어린 날 잠뜰과 함께 놀았던 그 숲의 싱그러움도 담겨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중한 친우가 준 선물이지 않은가. 내가 대관식에서 쓰게 될 왕관만큼 값진 선물이다."
진심을 담은 고마움의 말이었다. 낯간지럽다면서 잠뜰이 웃었다.
"폐하!"
밖에서 덕개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아직 대관식 전이니 폐하로 부르지 말라는 데도 저러는군. 그래도 얼마나 자신이 왕이 되는 게 좋으면 저렇게 부를까 싶었다. 대관식 시간이 되어서 부르는 건가? 라더는 이만 나가자며 잠뜰을 부르려고 돌아보았다.
없었다.
"잠뜰?"
방금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 있던 잠뜰이 보이지 않았다. 방안을 돌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밖에서 기쁘게 웃던 백성들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대낮이었는데, 갑자기 방이 깊은 어둠에 잠겼다. 오직 들리는 것은 폐하, 하며 자신을 부르는 덕개의 다급한 목소리뿐이었다.
"이 무슨....!"
돌연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라더가 들고 있던 꽃다발의 튤립 꽃잎들이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어두운 방에 하얀 꽃잎들이 나부꼈다.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로,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았던 잠뜰의 모습이 보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거센 바람 때문에 눈을 뜨기 힘들었지만, 잠뜰의 입 모양은 분명히 라더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를 말하고 있었다.
'도망쳐.'
"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폐하!"
"덕개...?"
라더는 자신을 흔드는 덕개 때문에 잠에서 깼다. 눈에 담긴 풍경은 아바마마의 집무실, 아니, 이젠 자신의 것이 된 왕의 집무실이었다. 엎드려 있던 책상에는 잠들기 전까지 검토하던, 혁명군에 의한 피해 상황을 정리해둔 서류들이 놓여있었다. 삭에 가까운 그믐달의 약한 빛만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내가 잠들었었나 보군."
"괜찮으십니까?"
"괜찮냐니?"
덕개는 말없이 라더를 쳐다보았다. 젊은 국왕은 그제야 자신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손가락 끝에 묻어났다.
"아...."
"...많이 무서운 꿈을 꾸셨나 봅니다."
자는 도중에 눈물을 흘리시길래 악몽을 꾸는 줄 알고 깨웠습니다, 덕개가 말했다. 그 말에, 라더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젊은 왕은 이내 픽 웃으며 말했다.
"무섭다니, 전혀. 오히려 반대였지."
"어떤 꿈이셨길래...?"
"행복한 꿈이었지."
라더는 눈을 거치게 비벼, 남아 있던 눈물을 닦아냈다.
"아바마마도 어마마마도 살아계시고, 내가 왕이 된 것을 잠뜰이 축하해주었다. 백성들이 모두 즐겁게 웃고 있었어."
"...."
"혁명의 총소리도, 비명도, 고통도 없는... 아주 행복한 꿈이었지. 사실은 이쪽이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야."
"폐하...."
잔인하다. 정말 잔인한 꿈이다. 가장 바라는 것을 보여주고,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며 현실로 내동댕이친다. 이렇게까지 잔인해야 했을까. 신이 존재한다면 묻고 싶었다.
동이 트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백성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건 꿈속에서 자신의 대관식을 축하하던 자들의 소리가 아니라, 자신을 몰아내려는 혁명군의 목소리다. 조금 더 쉬라는 덕개의 말에 라더는 고개를 저었다. 곧 눈물 자국이 있는 서류들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덕개는 말없이 주군을 바라보다 방을 나왔다.
에투알 왕국의 마지막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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