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신화의 끝에 입을 옷
이방인 | 각별
나무바닥을 밟는 구두소리 신기한 울림을 내었다.
잠뜰은 건물의 문양과 이음새를 신기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여러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이런 목조건물의 형태를 보는 것은 드물었다. 곡선과 직선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형태가 자신이 살던 세계의 건축물과는 또 다른 멋을 내었다.
건물 구경을 끝낸 잠뜰은 어느 방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나자 잠뜰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늘 그랬던 것처럼, 허리를 굽히며 자신을 소개하였다.
"골든 살롱 소속, 디자이너 잠뜰입니다."
잠뜰을 본 남성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잠뜰은 그의 모습에 그저, 이번에도 변함없다고 속으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긴 시간 동안 돌아다닌 세계에서는 늘 자신을 닮은 사람이 있는 것인지, 의뢰인들은 늘 자신을 보곤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대는...아주 먼 곳에서 오신 분이군요."
평소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조금 의아해하며, 잠뜰은 고개를 들어 의뢰인을 쳐다보았다. 검은색 머리카락에 호박색 눈, 하얀색 의복을 갖춰 입은 남성이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낯선 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잠뜰 님. 저는 태- 아니, 각별이라고 합니다."
"간단한 외출복을 하나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각별이 쟁반에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오며 말하였다.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고 잠뜰의 맞은 편에 앉으며 각별이 말을 덧붙였다.
"보시다시피, 지금 제 옷은 너무 치렁치렁해서요. 지금 이 시대 사람들과도 안 맞고. 그래서 간소화한 형태의 옷을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형태는 지금 이 옷과 비슷하게 해서요. 음, 요즘 시대에 맞게 개량해달라고 하면 될까요?"
"흠..."
잠뜰은 생각할 것이 있는 듯 한 손을 턱에 가져다 대고 각별의 옷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각별이 미소를 지으며 잠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챈 잠뜰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실례를 범했습니다. 제가 의뢰인께서 입은 옷의 형태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오래전에 몇 번 만들어보긴 했습니다만, 정확히 만들기 위해 자세히 확인하고 싶어서 그만 실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확히 전통 복식을 따를 필요 없어요. 말했잖아요, 간소한 형태를 원한다고. 편하게 입을 수 있게 지퍼나 단추를 추가해도 돼요."
잠뜰은 각별의 '지퍼'라는 단어 선정에 조금 놀랐다. 잠뜰이 바라본 각별의 옷과, 적어도 그녀가 다녀온 그와 비슷한 옷을 입는 사회에서는 그런 용어는 없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잠시 살펴본 그의 옷의 형태도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이내 그저 조금 특이한 세상인가보다, 그렇게 넘어갔다.
"특별히 원하시는 색상이나 문양이 있습니까?"
"너무 튀는 색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박물관에서 일할 때 입을 옷이라."
잠뜰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의 가방을 열어 천을 골랐다. 비단도 좋겠지만 일할 때 입을 것이면 마가 들어간 원단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음에 드는 원단 두 세 개를 꺼낸 후 이번엔 형태에 대해 고민을 하였다. 기존 전통 복식을 닮되 형태를 간략하게 해야 하기에, 기존 도면이 아닌 새로운 도면을 그려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돌아다니며 본 세계의 다양한 옷의 형태를 생각해낸 잠뜰은, 머릿속으로 몇 가지의 도면을 그려보더니 이내 결정한 듯 목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천 위에 선을 막힘없이 그어냈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지 그녀는 중간에 선을 두어 번 겹치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빠르게 그렸다. 천을 자르고 있을 때, 그런 잠뜰을 조용히 지켜보던 각별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꽤 긴 시간 동안 이 일을 하셨군요."
뜬금없는 말에 잠뜰은 두 눈을 깜빡였다. 각별을 잠시 바라보던 시선을 다시 천으로 돌린 잠뜰은 천을 마저 자르며 답하였다.
"이 일을 오래 하긴 했습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각별은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더니,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이 고정된 채 여러 세상을 돌아다니신 지 오래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가위질 소리가 멈췄다.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천과 가위를 든 잠뜰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탁자에 내려놓고 잠뜰이 각별을 바라보았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각별은 잠뜰을 향해 말했다.
"실제 나이는 외관보다 조금 더 많지요? 그렇다고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진 않고... 십 년은 안 된 것 같은데, 맞나요?"
"그걸, 어떻게..."
놀라움으로 잠뜰의 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 번도 맞닥뜨린 적 없는 상황이었다. 눈앞의 자를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을 때, 각별은 부드럽게 웃었다.
"오래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 있는지라."
잠뜰은 의문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각별은 그것이 재밌다는 듯 짧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잠뜰 님, 저는 노화가 멈춘 이 몸을 가지고, 이 나라의 건국부터 지금까지 지켜봐 온 사람입니다. 제 몸의 시간이 고정된 채로 족히 수백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왔죠."
그의 대답에, 잠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육체의 시간이 고정된 채 살아가고 있는 자였다. 그 역시-
"오랜만에 동지를 만나니 감회가 새롭군요."
자신과 같은 자였다.
시간 길이는 제가 훨씬 선배군요? 각별은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잠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런 곳에서, 이리 먼 곳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몰랐다.
"의뢰인께서 어쩌다 이렇게 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각별은 잠시 대답을 미루며 자신이 가져온 찻주전자로 손을 가져갔다. 소매를 살짝 걷고, 주전자를 찻잔을 향해 기울이자 맑은 색의 차가 흘러나왔다.
"속죄를 위해서?"
"...!"
"잠뜰 님은요?"
주전자 입구로 흘러나오는 찻물을 따라, 은은한 차향이 퍼져 나왔다. 차향이 잠뜰이 있는 곳까지 잔잔히 퍼져나갔다.
"저도... 비슷합니다."
"역시 그랬습니까."
각별은 찻잔 하나를 다 채우고는 다음 찻잔에도 차를 따랐다. 잠뜰이 괜찮다고 했으나 각별은 들지 않을 거면 향이 좋으니 따라놓기라도 하라며 두 번째 찻잔도 찻물을 채웠다.
"제 눈엔 잠뜰 님이 많이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더군요. 옛날의 저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
"원하신다면 같은 처지의 선배 되는 사람으로 이야기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이래 봐도 세월을 허투루 먹진 않았는지라, 해결책을 알려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죠."
잠뜰은 흔들리는 눈으로 각별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잠뜰은 누군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물으면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마법 같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기부터 쉽지 않았고, 말한들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였고, 무엇보다...
"제가...감히 해결하려고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과거의 그날을 마주 보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날의 일을 후회하며 이리 시간이 고정된 채로 떠돌아다니고 있지만, 그날의 기억을 똑바로 떠올리는 것 역시 두려웠다. 그날로 돌아가 바꾸고 싶은 마음과, 그날의 일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 모두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자신의 죄를 조금이라도 털어놓고 가벼운 마음이 되려고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럼 그저 이야기만 해보십시오. 때로는 입 밖으로 내뱉는 것만으로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과거에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리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자신이 의뢰인에게 제안했던 내용을 거부하는 건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잠뜰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었다. 각별은 여유롭게 웃으며 찻잔 하나를 자신 앞으로 가져왔다. 찻물에서 하얀 김이 나며 부드러운 향이 전해져왔다.
"저는 차 향을 오랫동안 즐기며 마시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시간은 충분하니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각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잠뜰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원할 때 스스로 털어놓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원하지 않는다면 애써 힘들여 말할 필요 없다는 그의 생각이, 그의 태도에서 전해져왔다.
참 이상했다. 늘 잠뜰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이었는데, 이제는 그녀의 의뢰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본래는 아무리 물어본들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끼던 비서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안도감에서였을까, 잠뜰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그날의 기억을 어렵사리 꺼내보았다.
"저는 골든 살롱이라는 옷가게를 하나 운영하고 있는 사장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열정도 많고 야심도 많은 사람이었던지라, 여왕 폐하의 옷을 직접 만드는 위치에 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왕실의 인정을 받는 로열 워런트를 받으며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죠. 다만 로열 워런트는 경쟁 상대가 많았었고 그만큼 더러운 뒷수작을 부리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 치들 눈에 제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잠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과거의 일을 이어나갔다. 중간에 힘겨운 듯 말을 멈추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날은 제가 폐하께 제가 만든 옷을 가져다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늘 옷을 폐하께 직접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옷을 만든다고 몇 날 밤을 새웠더니, 그만 몸살을 알아버리고 말았지 뭡니까. 어쩔 수 없이 그날 하루만 제 비서에게 대신 옷을 전달해 드리고 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가야 했다. 폐하 앞에서 추태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비서가 아니라 자신이 가야 했었다.
"비서를 보내고 작업실에서 쉬고 있었는데, 몇 시간 후에 왕실과 경찰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러고는 제게 믿을 수 없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골든 살롱 마차에 타 있던 제 비서가 살해당했으니, 수사에 협조해달라고요."
탁자 위에 올려진 잠뜰의 손이 떨렸다. 그날 밤 세차게 내리던 빗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각별은 여전히 조용히 잠뜰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폐하께 물건을 바치러 가는 길에 해를 당한 일이었다 보니 왕실 인력도 수사에 가담하여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허무하리만치 쉽게 잡힌 범인은 로열워런트를 두고 경쟁하던 한 사업체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제가 폐하께 가는 날인 걸 알았으니, 그때 마차를 습격한 것이라고요."
각별은 그 말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어쩌면 이미 예상했을지도 모르는, 뻔하고 슬픈 결말.
"그렇다면..."
"네, 저를 노린 자들이었습니다."
자신을 노리던 자들에게, 자신 대신 죽은 동료. 잠뜰이 줄곧 후회하고 있는 과거의 진실이었다. 하필이면 몸살에 걸려, 하필이면 비서에게 대신 가 달라고 부탁한 그 날, 하필이면 범행을 계획한 그들. 한낱 운이 없어서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우연이었다.
"제 비서의 부모가 사건의 경위를 듣기 위해 궁에 왔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왜 자신의 아들이 죽었어야 하냐고 외쳤습니다. 옷을 만든 것도 저고 전달해야 했던 것도 저인데, 왜 내 아들이 당신의 일을 하다 죽어야 했냐고 외치셨습니다. 저는... 저는 그 말에, 한마디도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모두 당신 탓이라고 외치는 그들 앞에 서서,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진정하라며 알현실 밖으로 경비들이 그들을 데리고 나갈 때까지, 잠뜰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그곳에 서 있을 뿐이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렇기에 사장직을 내려놓고, 폐하께 제 죄에 대한 벌을 간청 드렸습니다. 폐하께선 제게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봉사하며 속죄하라 하셨고, 그래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그날의 일에 대한 죄책감과 그 일을 위한 속죄를 위해, 잠뜰은 오랜 시간동안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의뢰를 맡고 있었다. 여왕의 명에 따라 속죄를 행하며, 그날의 일과 자신의 죄를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 생각하며, 잠뜰은 그 긴 시간을 버텨왔다.
잠뜰의 이야기를 다 들은 각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뜰은 각별이 자신의 과거를 듣고 자신을 경멸하듯 바라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괜히 말을 꺼냈나 후회하고 있을 때, 각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왜 잠뜰 님 잘못입니까?"
"네?"
각별의 물음에 잠뜰은 퍼뜩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각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잠뜰을 마주 보았다. 잠뜰은 당황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제 자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잠뜰 님."
각별은 그녀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단호한 호박색 눈이 잠뜰을 향했다.
"잠뜰 님의 동료가 죽은 것은 그 날 잠뜰 님의 부탁으로 잠뜰 님 대신 마차에 탔기 때문이 아니라, 가해자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잠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녀의 눈이 당혹과 혼란스러움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날 비서를 살해한 범인의 탓이라고, 당신의 탓이 아니라고. 그런 말을 들은 것이 처음인냥, 잠뜰은 멍하니 앉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각별은 잠뜰을 짓누르고 있는 죄책감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지금껏 누구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은 것인가, 혹은 그런 말들이 그녀의 죄책감에 눌려 그녀에게 닿지 않은 것인가.
"원인을 피해자분과 잠뜰 님 안에서 찾지 마십시오. 원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가해자이지, 남겨진 피해자들의 몫이 되어선 안 됩니다."
"하, 하지만... 제 비서의 부모님의 원망은 절 향했습니다. 그걸 아는데 어떻게 떳떳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어느 순간에나 아프고 약한 순간이 있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차마 마주 보고 이겨낼 수 없어서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해버리는 것이죠. 아마 그분들도 진정 원망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잠뜰은 말문이 막힌 듯 멍하니 각별을 쳐다보았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이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잠시간 시간이 흐르더니, 힘겨운 목소리가 다시 새나온다.
"잘...모르겠습니다. 제가 그 땅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뵈었던 모습은 절 원망하시던 모습이었기에, 의뢰인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생각하는 것이, 저의 자기 위안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흠..."
각별은 호박색 눈으로 잠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뜰은 조금은 흔들렸지만 여전히 각별 자신의 말을 전부 받아들이는 것은 거부하는 기색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쌓아서 굳어버린 죄책감이 각별의 말을 거부하고 있었다.
"제 이야기를 잠깐 해드릴까요, 잠뜰 님."
각별은 찻잔을 들어 올려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하얀 김이 그의 손이 움직인 길을 따라 옅은 자국을 공기 중에 그려내었다.
"저는 잠뜰 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아주 오래 살았답니다. 이 나라가 건국되는 순간부터 줄곧 지켜봐 왔으니, 수백 년은 족히 되겠지요. 제가 태어난 나라는 이 팔성국이 세워지기 전에 이 땅에 자리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아주 멍청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지요."
다음 말을 잇기 전에 각별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짙은 차향이 전해져온다.
"제가 살던 시대는 전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저와 제 동료는 사람들을 더 많이 살릴 수 있도록 연구를 이어가고 있었죠. 어느 날 제 동료는 상부의 명을 받아 이 전쟁을 끝낼 대안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모든 인류를 상대로 인질극을 벌인다는, 아주 멍청하기 짝이 없는 계책이었지요. 동료는 세상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무기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터뜨리면 모든 세상이 파괴될 테니, 이를 만들어두면 서로를 공격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결과 나온 계책이었지요."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잔 안에 담긴 찻물에 작은 파문이 생겨 동그랗게 퍼져 나갔다.
"그런데도 그 세대의 우리는 멍청했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내 그 무기만이 있던 작은 섬만 남기고, 모든 문명이 멸망하고 말았지요. 이 땅이, 그날 그 무기를 품고 있던 땅입니다. 인류를 상대로 인질극을 벌인 대가로 살아남은 땅조각이지요."
잠뜰은 손을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의뢰인들의 이야기는 늘 일을 하며 들었는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 저는 제 동료의 계획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잔인한 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동료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의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달라도, 모두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하고 있었지요."
비릿한 쓴웃음이 그의 입가를 따라 퍼졌다. 호박색 눈에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감정이 담긴다.
"이 땅에 살아남은 자들은 그제서야 그들이 어떤 짓을 하였는지 깨달았습니다. 늘상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야만 깨닫고 변하게 되는군요. 얼마나 아둔한 일인지... 하지만 후회해봤자 이미 일어난 일이었지요. 우리는 이 무기가, 이 힘이 함부로 사용되게 해선 안 되었습니다. 우리 세대가 저지른 멍청한 과오를 우리 후세대가 되풀이하게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이 재앙을 만들어버린 우리가, 제가 책임져야 했습니다."
과거의 기억이 각별의 머리를 스쳤다. 재앙으로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사라진 세상에서, 자신이 만든 약물의 부작용으로 겨우 살아남은 각별은, 어떻게든 생존자를 찾기 위해 헤매었다. 타버린 폐허의 잔해를 뒤져 엉성한 솜씨로 뗏목을 만들어, 그의 동료가 숨겨둔 가장 큰 재앙이 있는 섬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재앙을 숨긴 채 나라를 이루고 살아가는 생존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각별에게 부탁했다.
'우리가 겪은 일들의 증인이 되어주십시오. 그리고 신화가 되어 주십시오. 박사께서 부디 인류를 위해 영원히 이곳을 지켜주십시오.'
"그래서 저는, 그날 그들의 요청대로 이곳에 남아, 신화가 되었습니다."
각별은 그의 과거를 웃으며 말하였다. 잠뜰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의 무게와, 그로부터 오는 부담감이 그의 말에서 느껴졌다. 이 이야기를 웃으며 말할 수 있게 되는 데에는, 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을까.
"생각해보면 참 잔인한 사람들 아닙니까? 인류를 위해, 평범한 인간더러 신화가 되어달라니. 나는 그런 무게까지 감당하기엔 버거운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내 세대와 내 동료들의 죄가 있고, 내 연구 역시 사람을 지키고 싶어 시작한 것이었으니, 나는 그들을 위해 영원을 견디는 신화가 되었습니다. 제가 영생이라는 독배를 마시게 된 것도, 그 일에 대한 대가이자 속죄하라는 뜻이었을 테니까요."
영생은 평범한 사람이었던 각별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가 기억하고 있던 것들은 서서히 사라졌고, 그의 기억에서조차 잊혀갔다. 모든 것이 변하는데 그만이 이곳에 고여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다. 새로 정을 붙인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먼저 스러졌고, 오직 그만이 영원히 그의 세대가 만든 재앙을 막는다는 의무에 묶여, 팔성국에 태양선인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잠뜰은 그 말에 각별을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각별의 표정에서 평안함이 읽혔다.
"붉은 혜성이 찾아와 내 세대의 재앙을 없애주었습니다. 제 기나긴 속죄의 길이 끝나는 순간이었지요. 그 순간의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의 속죄는 기나긴 어둠을 영원히 걸어야만 하는 것 같았는데, 그 영원에 끝이 있었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눈앞에서 내 수많은 시간들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는 듯, 단숨에 재앙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을 때를, 저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각별은 찻잔을 다시 입가에 가져가 남은 차를 전부 마셨다. 찻잔을 내려놓고, 각별의 시선이 잠뜰을 향했다.
"잠뜰 님. 전 당신의 일이 당신의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들고, 정녕 잠뜰 님이 속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먼저 그 길을 걸었던 선배로서 당신의 끝을 응원하겠습니다. 그 어둠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당신이 나아갈 더 밝은 나날들이 당신의 위로가 되어주기를, 바라겠습니다."
각별은 잠뜰을 향해 밝게 웃어주었다.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는 잠뜰을 두고 각별은 찻물을 다시 끓어오겠다며 자리를 비워주었다. 혼자 생각할 수 있게 시간을 준 배려였다.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던 잠뜰은 각별이 찻물을 들고 오기 전에 다시 바늘을 잡았다. 그러곤 옷을 다 완성할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각별이 권하는 차를 받을 때를 빼고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각별은 그런 잠뜰에게 더는 무엇도 묻지 않고 조용히 차향을 즐겼다.
부드러운 차향이 방을 가득 채웠다. 완성된 옷을 각별에게 건네주자, 각별은 크게 기뻐하며 지금 입어보고 오겠다며 옆방으로 갔다. 잠뜰은 그를 기다리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방을 가득 채운 차향이 잠뜰의 마음을 조금 안정시켜주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죄송합니다, 이런 형태의 옷을 너무 오랜만에 입어보는지라."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뜰이 뒤돌아보았다. 자신이 만든 옷을 입은 각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잠뜰이 만든 옷은 각별이 입고 있던 옷의 형태에 잠뜰 자신이 살던 세계의 옷의 형태를 추가한 복식이었다. 갈색 저고리는 끈으로 여미던 형식을 버리고 입기 쉽게 옷의 앞면에 단추를 달았지만, 깃과 소매의 형태는 기존 옷과 동일한 모양으로 디자인하였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색 바지 역시 비슷한 형식이었다. 전체적인 옷의 느낌은 기존과 유사했으나 각별의 요청대로 많이 간소화하고 편의성을 높인 형태였다.
“어떠십니까? 불편한 곳은 없나요?
“불편하다뇨, 전혀요."
각별은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였다. 옷을 입은 각별은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정말 가볍네요. 이전 옷은 제게 너무 무거웠거든요."
잠뜰은 각별이 입고 있었던 옷을 생각하며 조금 의아했다. 무거워 보이는 소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각별은 잠뜰의 생각을 읽었는지 웃으며 말해주었다.
"그 옷을 입고 있었을 때, 저는 사람이 아니라 신화를 이어가야 했던 선인이었으니까요. 나의 속죄와 책임이 그 옷에 매달려 나를 짓눌렀지요. 저는 그저 눈앞의 참극을 막지 못했던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 선인도 신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그런 제가 견디기엔 선인으로 살아온 제 시간이 너무 길었고, 너무 무거웠습니다."
"아..."
"이젠 재앙이 사라지고 저의 속죄 역시 끝이 났는데도, 저는 여전히 영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사실 실감이 그리 크게 나진 않았습니다. 잠뜰 님 덕분에, 드디어 저 옷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네요."
그래서 저 옷이 너무 무거웠다고 한 것이구나. 잠뜰은 그제야 이해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이제야 다시 사람이 된 것 같네요."
크게 내뱉은 그의 한숨엔 안도와 후련함이 담겨있었다. 그의 표정은 오랜 짐을 덜어낸 듯 후련하고 기뻐보였다. 비성편을 수호하는 선인, 팔성국의 신화를 이어나가는 태양선인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 각별로서의 기쁨이다.
"제가 다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뜰 님."
각별의 호박색 눈이 잠뜰을 향한다. 기나긴 속죄의 영원이 끝나고, 이제 그저 조금 역사를 잘 아는 평범한 사람이 된 자의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웃는다.
"...저야 말로..."
잠뜰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차향으로 조금은 안정된 덕분일까. 그녀도 생각이 많이 정리된 것 같았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이리 깊이 털어놓은 적 없었다. 의뢰하러 다니며 긴 시간 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그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을 뿐 그녀의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과거 그날에 시간이 묶인 채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자신의 사정을 이해해주는 자를 만났다. 누구의 말대로, 단지 털어놓기만 하는 것만으로 많은 것은 달라진다.
"잠뜰 님, 저는 이제 평범한 사람으로 살 것입니다. 여전히 영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변인들을 먼저 떠나보내겠지만, 선인이 아닌 인간 각별로 열심히 살 것입니다. 연이 닿는다면 옛 동료와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느 날은 잠뜰 님처럼 저와 같은 동지를 만날 수도 있겠지요."
신화의 끝에 선 사람이, 잠뜰을 바라보았다. 밝게 웃는 표정이 그녀를 향한다.
"잠뜰 님도 다시 그 평범한 나날을 누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먼저 그날을 맞이한 선배로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잠뜰은 각별의 배웅을 받으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기차를 탈 장소로 이동하며, 잠뜰은 자신의 겉옷 안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 티켓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의뢰인들을 만나러 갈 때 사용하는 티켓, 한 번에 늘 다섯 장씩 받던 기차표였다. 잠뜰이 다섯 번째 의뢰인의 의뢰를 해결하고 나면, 어느새 자신의 안주머니에 티켓 다섯 장이 새로 들어와 있었다. 처음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지 의아했으나 나중엔 마법이겠거니 하며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새로 받은 티켓은 다시 1부터 시작하는 번호가 붙어 있었고, 잠뜰은 그 티켓을 들고 기차에 다시 올라탔다.
늘 그래 왔기에, 잠뜰은 지금 자신의 손에 있는 이 티켓이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받는 여섯 번째 티켓, 그 티켓은 목적지도 의뢰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일련번호가 적혀있어야 하는 부분마저 물음표로 채워진 티켓이었다. 이래서는 어디로 가는 지, 의뢰인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잠뜰 씨, 오랜만이에요!"
"…?"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잠뜰은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두꺼운 외투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잠뜰은 두 눈을 잠시 깜빡이다가, 이내 이 세상에 사는 자신과 닮은 누군가를 착각한 것이리라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가는 세계마다 늘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이변 없이 그럴 거라 생각하였다.
"죄송합니다만, 사람 잘못 보신-."
"어라? 아닐 텐데. 골든 살롱 소속, 잠뜰 씨 맞잖아요?"
-뭐라고?
잠뜰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어떻게? 어째서? 이곳에도 골든 살롱이 있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을 때, 잠뜰은 눈앞 남자의 차림새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의뢰를 시작하기 전, 여섯 장의 티켓을 확인하던 그 역참에서 마주쳤던 자. 분명 자신을 편지 배달부라고 소개했던 그 남성의 차림과 닮았다. 하지만 그곳과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인데, 앞뒤가 맞지 않았다.
잠뜰이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남성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세계를 이동하며 옷 만들어주는 사람도 있는데, 세계를 돌아다니며 편지를 배달하는 사람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요?"
"당신은, 대체…!"
놀란 잠뜰을 보며, 남성은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깊게 눌러쓴 그의 모자챙 끝을 잡으며 말했다.
"날 못 알아보다니 섭섭하네요, 잠뜰 사장."
"…!"
잠뜰은 이 일을 맡은 이후로 줄곧 자신을 디자이너라고 소개하고 다녔다. 그 땅을 떠날 때 사장직을 내려놓았으니 그것이 맞는 일이었다. 그러니 자신을 사장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 일을 시작하기 전의 자신을 아는 사람, 즉 자신과 같은 곳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추궁하려는 찰나, 남성은 그의 모자를 벗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빠르게 그들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은, 모자 아래 짓눌려 있던 남성의 검고 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모자를 벗은 남성의 옷차림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두꺼운 외투는 사라지고, 고급진 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백정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옷의 색과 형태는, 잠뜰이 아주 잘 알고 있는 형태였다.
“...각별 백작.”
여왕의 집사, 백작 각별이었다. 그의 호박색 눈은 예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형형이 빛났다. 흰 장갑을 꺼내 낀 각별은 먼지가 묻은 듯 여유로이 자신의 어깨를 툭툭 털어냈다. 각별과 달리 잠뜰은 그리 여유로울 수 없었다. 어째서 찾아온 것인가. 오래전 그날 이후, 왕성과 그 땅에서 도망치듯 떠난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긴장감에 각별을 바라보고 있는데, 각별이 잠뜰을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왕 폐하의 전언입니다, 잠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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