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2화
무능력한 신
*잠뜰TV 스토리 콘텐츠들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흰 화면으로 보시는 것을 권장 드립니다.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2화
무능력한 신
하나. 인간의 몸은 연약하다.
둘. 인간에겐 다른 종보다 뛰어난 두뇌가 있다.
셋. 그렇게 이룩한 문명은 인류의 축복이 되었다.
넷. 그리고 그것은 머지않아 인류의 저주가 되었다.
날이 밝았다. 그리고 그건 다시 연구소로 가야 한다는 걸 의미하지. 그래, 출근이다.
후배가 하던 말을 생각해봤을 때, 평소엔 출퇴근을 모두 후배의 마차에 타서 해결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또 다시 후배에게 붙잡혀 그 모든 난리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길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연구소까지 찾아가 보기로 했다. 출근 시간이 8시 30분까지라고 했으니 길을 헤매는 시간을 생각해서 7시에 나왔다. 오후보다 조금 더 차분할 뿐, 이 시간에도 거리엔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예전에 교회의 종탑을 기준으로 길을 구분하려고 시도-성공한 적은 없어서 결국 몸이 외울 때까지 헤맸었지만-했었듯, 이번에도 우선 높은 건물로 가보자. 그러니까, 저 구름을 뚫고 올라간 건물로. 그러나 길이 복잡하고 건물은 하나같이 네모나고 길쭉하고, 푸르거나 잿빛이라 저 건물들의 숲속에서 길을 잃고 미아가 될 확률이 훨씬 높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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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얻어 걸렸다'고 표현하던가. 운 좋게도 가장 높은 건물이 연구소였다. 어제는 바짝 긴장하고 혼란스러워서 건물 외부를 구경할 틈조차 없었는데, 이게 이렇게 맞아떨어질 수가.
어제 어깨너머로 봤던 대로 신분증을 검은 판에 대서 낮은 문을 열었다.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그는 엘베를 이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창밖을 구경하고 먹먹해진 귀를 달래느라 제 후배가 어떻게 방을 이동시키는지 보지 못한 것이었다.
어떡하지.
"박사님? 왜 혼자 멀뚱히 서 계세요? 후배는요?"
아, 어제 내게 잔소리를 쏟아냈던 무리 중 한 명이다. 이젠 내 구원자가 될 사람이다.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렇게 됐습니다."
"용케 혼자서 여기까지 오셨네요."
구원자는 피식 웃고는 나에게 손짓했다. 아무리 현대 인간들의 소통 방식을 잘 모른다지만 저건 명백한 '날 따라오시오' 였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반드시 엘베의 사용법을 숙지하고 말리라 다짐했고, 조금은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엘베는 아주 쉽게 작동했다. 위에서부터 다섯 번째 동그라미만 건드리면 알아서 움직인다니, 이렇게 단순할 수가!
"엥? 박사님 애착 인형은 어디 두고 혼자 오셨어요?"
"혼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멍때리고 계시더라. 어쩌다 보니 오신 듯."
"오, 발전하셨어!"
몸 주인의 절망적인 길 찾기 능력에 운명이 개입했음이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주변인들의 반응이 이 정도일 이유가 없다. 박사-본래 몸 주인. 각별이라고 칭하자니 내 이름과 같아 뭔가 우습다-가 조금은 가엾게 느껴졌다.
이후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내가 대화에 낀 상황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알아듣지 못 할 말들-'팔라듐을 대체할 금속이 필요해요'-을 쏟아냈다. 내게 붙은 시선이 없는 틈을 타 신속하고 조용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이 운명의 가벼운 장난질은 아닌 것 같으니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정보가 필요하다. 나의 밑천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의 지식은 쌓아둬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인간의 삶은 짧다. 기껏해야 수십 년간 문제 없을 수준으로만 마련하면 된다. 그 이후면 날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정보를 수집해야 할까. 사실 가장 익숙하고 만만한 건 책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장서실이 있겠지. 이 커다란 건물에 책 한 권 없는 것이 말이 되나. 그리고 이 방에도 책은 넘쳐나고.
낮은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책들 중 한 권을 펼쳐 들었다. 곧바로 다시 덮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아예 바닥에 앉아 책등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살펴봤다. 「한눈에 보는 생명공학」, 「쉽게 배우는 의학의 역사」. 제목에서부터 쉽다고 언급했으니 이게 그나마 이해할 만 하겠지.
아니었다. 어렵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대충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는 알겠다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박사의 두뇌가 조금 영향을 끼치기는 했나. 적어도 그가 기록해두었던 기이한 서류보단 쉬웠다.
생각난 김에 그 종이를 다시 읽어볼까. 뭔가 새로운 것을 알아낼 수도 있으니. 어제 날 심란하게 만들었던 그 공책을 주섬주섬 꺼내 어제 읽었던 부분을 다시 정독했으나 머리에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책장을 탁 덮고 잠시 의지만으로 얼려버릴 작정으로 노려봤다. 역시나 아무런 변화조차, 하다못해 시원한 감각조차 없었다. 그래, 기대한 내 잘못이지.
결국 하릴없이 종잇장을 손톱 끝으로 넘기며 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 하려 했으나. 공책의 거의 끝자락에 까만 글씨가 보였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 몽롱하던 머리가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순식간에 가라앉듯 차분해졌다.
2057년 7월 14일.
바깥에 나가면 날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 내 손을 잡으며 힘내라는 사람도, 날 손가락질하며 남들에게 다 털어줄 생각이나 하는 호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전쟁 극구 반대파의 상징이라도 되었나. 그런 거창한 자리를 바라지는 않는데. 그냥 사람을 살리고 싶었을 뿐.
'그들은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관심이 많다.' 공룡 박사가 한 말이 머릿속에 반복해서 맴돈다. 그래도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 내가 하는 일이, 나의 시약이 이 전쟁 속에서 단 하나의 무고한 생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길이라면.
…정부는 아직도 내게 답하지 않았다.
공룡 박사의 화성행에 더 무게를 둔 것이겠지. 6개월 전에 통신이 끊긴 화성의 과학자들에게 기댈 생각이라니. 죽었거나 지구의 전쟁에 엮이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할 이들에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공룡 박사는 낙천적인 마음으로 떠났다. 그저 종종 있는 통신 오류에 불과할 것이라며,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해봐야 한다며.
박사는 그런 마음으로 슈팅 스타를 만들었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그 모든 것에 수십억의 삶을 앗아갈 무기도 포함된다는 것인가.
…과연 우리가 살아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난 모르겠다. 이젠 모르겠어. 전부.
전쟁, 전쟁. 또 싸움이로군.
이젠 많이 나아진 줄 알았건만, 아직 그 무엇도 깨닫지 못했어. 혹은 그 깨달음을 망각했나.
기나긴 화평(和平)의 길을 두고 전쟁이나 벌이려는 꼴이 언짢았다. 압도적인 힘으로 이뤄낸 평화는 평화가 아닌 공포로 쌓은 침묵임을, 한낱 모순에 불과함을 직접 깨달은 입장으로서. 인간들이 괘씸하고, 원망스럽고, 또 안타까웠다. 왜 수천, 수만의 목숨을 담보로 이미 얻었던 것을 다시 받으려 하는가. 어째서 편리함을 이유로 직접 내버렸던 진리를 괴로운 길을 통해 다시 깨달으려 하는가.
그대들이 잃어버릴 감히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들은 생각지 않고. 왜 나와 같은 실수를 하려 하나.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인류의 삶은 발전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 또한 바뀌지 않았다. 난 여전히 인간을 사랑했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저주했다. 어찌나 미련한지. 어찌나 어리석은지.
xXx
"박사님 오늘따라 말이 없으시지 않나?"
"원래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니시잖아요."
"밖에 한 번도 안 나오시고."
"에이, 원래 솔플하시잖아요."
"그래도, 오늘은 끼니도 거르시고."
"원래도 일에 심취하면 종종 굶으셨는데요 뭘, 새삼스럽게."
"출근도 혼자 하시고."
"그러고 보니 그건 좀 이상한데."
"이상의 기준이 좀 희한하단 생각은 안 해봤나?"
바깥에서 수군수군 내 이야기를 하더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지요."
"박사님, 퇴근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커피 한 잔? 아니다, 원래 아침 안 드시는데 점심도 굶으셨으니까 지금 빈속이잖아요. 커피 안 돼."
"밖에서 하는 말 들었습니다."
"앗."
들으셨구나, 그렇구나…. 뻘쭘한 듯 같은 말을 반복하던 후배는 멍청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제가 왜 왔는지…, 아시겠네요."
"네."
후배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시계에도, 책장에도 한 번씩 시선을 주다가 내 눈을 바라봤다. 어제만 해도 눈 주변이 거뭇할지언정 맑기만 하던 그의 눈동자가 흐릿해 보였다.
"그냥…, 아랫사람들도 생각해주세요, 네? 어제도 오늘도 평소랑 다르게 행동하시잖아요. 그, 거, 그…"
후배가 발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더니 고개를 미묘하게 숙였다. 표정이 보이질 않았다.
"…뭡니까?"
"아, 당신 걱정된다고요, 눈치 없는 상사야!"
아이씨, 창피해 죽겠네. 작게 뇌까린 후배가 고개를 들자 새빨갛게 물든 얼굴이 드러났다. 오, 신기하다. 추운 겨울날 바깥에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아무 이유 없이 발그레해진 얼굴은 처음이었다.
"걱정돼요, 걱정된다고. 지원 받으려고 마음고생 한 것도, 우리 몰래 실험했단 것도 알아요. 하지만 걱정된다고요. 박사님이 없으면 저흰 뭘 해요."
눈앞의 앳된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 일렁거렸다. 어, 어쩌지. 뭘 해야 하지. 내 앞에서 원인 불명으로 우는 인간은 처음이란 말이다. 날씨가 춥다고 원망의 눈물을 흘리며 내 욕을 하는 인간은 봤어도, 이건 처음이란 말이다.
일단 쭈뼛거리며 일어서봤다.
"그, 그…,"
망할. 이름을 모른다.
"됐어요. 지금 퇴근할 거니까 나와요. 오늘은 야근한다고 해도 끌고 갈 거야."
쿵,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리던 바깥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온 몸에 힘이 빠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짓눌리는 듯한 공기 속에서 억지로 호흡하는 것을 관두고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책상 위에 꺼내두었던 검은 약병에 시선을 빼앗겼다. 영생이라는 저주를 끝낼 해독제, 혹은 마지막 자비가 될 죽음을 위한 독을 주머니에 밀어 넣고 방을 나섰다. 아무리 숨을 크게 들이쉬어도 심장의 갑갑함은 도저히 해소되질 않았다.
xXx
숨이 막히도록 조용한 마차 안에서 억지로 창밖만 쳐다봤다. 반짝거리는 도시의 야경 속, 창문에 흐릿하게 비치는 후배는 내가 알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엔 원망이자 분노가 서린 눈이, 비애이자 비탄에 잠긴 눈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은 찰나의 순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도착했어요."
후배가 항상 능글맞게 농담이나 하던 사람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차에서 내려 가볍게 묵례만 하고는 돌아섰다. 감히 그 표정에 대고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집 안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잠긴 출입문을 용케 열고 들어왔고, 문을 닫자마자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일제히 불이 켜지는 광경이 창백한 집 안을 더 쓸쓸하게 만들 뿐이었다. 단 하루 만에 너무 많은 일들이 몰아쳤다.
애면글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저절로 켜진 텔레비전 속 사람은 신문 기사들을 줄줄 읽고 있었다. 사막화된 땅에서 난 불이 2개월째 꺼지질 않는다. 대양 한가운데의 섬을 바다가 집어삼켰다. 한쪽에서는 물이 말라 재난이 벌어지고, 한쪽에서는 물이 너무 많아서 재난이 벌어진다. 신기하게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그 몸뚱이가 재해를 버텼을 리가 없는데도.
텔레비전에서 억지로 고개를 돌려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은 책장을 쳐다봤다. 여기도 책이 빼곡하긴 마찬가지였다. 연구소보단 종류가 다양해 보였다. 종교 시설에나 똑같은 책이 수십 권 쌓여있던 시절을 산 입장에선 모양도, 색깔도, 크기도 다른 책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떻게 이 많은 책들 중에 종교에 관한 책이 단 한 권도 없-,
있다. 책장의 맨 아래 층, 가장 구석에. 새하얀 가죽 표지의 자그마한 책이었다.
"…「겨울 신화」."
책이 내게 손짓을 하기라도 하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어느새 하얀 책을 뽑은 뒤였다.
태초에, 계절의 신들이 있었습니다. 온화한 봄, 활발한 여름, 다정한 가을, 냉랭한 겨울. 네 명의 신은 거대한 순환의 수레바퀴를 따라 돌고 돌았습니다. 신들은 봄이면 꽃을 피우고, 여름엔 따사로운 햇볕을 내리쫴주고, 가을이면 곡식들이 무르익어가도록 하고, 겨울엔 1년간 살아온 모든 것들을 죽였습니다. 겨울은 이것을 휴식이라 불렀어요.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겨울은 힘든 겨울에도 인간들이 서로 돕고 사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겨울은 가난한 노인의 모습으로 인간 세계에 내려가 구걸했습니다. 하지만 다들 모질게 말하며 거절하거나 무시했어요. 겨울이 힘 없는 사람의 모습이라 도와주지 않았어요.
겨울이 인간들에게 실망할 무렵, 어느 어린아이가 다가와 빵을 내밀었습니다.
"이거 드세요!"
아이의 할아버지는 겨울을 낡은 집으로 데려가 따듯한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 수프 한 그릇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음식이었지만 그들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겨울은 두 사람의 따듯한 마음씨에 감동해 그날 밤에 식량 창고를 가득 채워두고 떠났어요. 다음날 찾아가자 마을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는 모습을 보고는 창고를 한 번 더 채워주었죠.
하지만 두 사람을 질투한 마을 사람은 노인과 손주가 신전의 제물을 빼돌렸다고 신고해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노인과 손주는 차가운 감옥에서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갇혀 있었지요. 겨울은 노인의 몸으로 두 사람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결국 크게 다치고 말았어요.
크게 분노한 겨울은 인간들과 인간의 흔적들을 모두 하얀 눈으로 덮어버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인류가 존재하지 않았던, 태초의 순수한 모습으로요. 겨울은 다른 계절의 신들이 있는 신전을 찾아가 여름과 가을을 봉인시키고 봄의 능력을 빼앗아버렸어요. 그렇게, 3년간의 기나긴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간과 다름없는 몸이 된 봄은 인간 마을로 도망가 촌장의 집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촌장의 손녀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봄과 함께 겨울을 끝낼 여정을 떠났습니다. 겨울의 신전에서 손녀는 몸이 아픈 할아버지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기나긴 통로를 걷다가 쓰러져 도착한 곳에는 겨울의 모든 기억들이 있었습니다.
손녀가 신전에서 나올 무렵, 봄은 여름과 가을의 봉인을 해제하고 겨울과의 전투에 나섰습니다. 세 신과 겨울의 싸움이었지만 3년간 사람들의 두려움을 먹은 겨울은 아주 강했습니다.
하지만 겨울이 방심한 틈을 타 촌장의 손녀가 활로 겨울의 약점을 공격했습니다. 기억의 장소에서 본 기억들이 도움이 되었지요. 그 사이 지키고 싶었던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이제는 기나긴 겨울을 끝낼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겨울은 차가운 눈 속으로 쓰러졌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겨울은 마지막 남은 힘으로 손녀를 축복했습니다. 그가 바꿔 가는 길에 늘 새하얗고 순수한 눈처럼 찬란한 빛이 함께할 것이라고요.
그렇게 세상은 사계절을 되찾았고, 촌장이 새로운 겨울의 신의 자리를 맡았습니다. 거대한 순환의 수레바퀴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온전하고 제대로 된 본래의 모습으로요. 손녀는 새 촌장이 되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상에 책을 떨어뜨렸다. 겨울 신을 묘사한 삽화가 실린 장이 펼쳐졌다. 하얗고 긴 머리칼, 마찬가지로 하얀 옷과 얼음으로 빚어낸 창까지. 세부적인 모습은 달라도 특징은 전부 같았다.
나의 희망은, 나의 슬픔은, 나의 절망은. 교훈을 위한 동화가 되어 인간들을 떠돌고 있었다. 그저 착하게 살라는, 남을 위하며 살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그들의 입맛대로 바뀌었다.
그러나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을 만만하게 보고 해치지 말라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 벗을 해친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진정한 재앙을 불러온 인간은 그들의 이기심이건만. 왜 아직도 재앙의 뿌리를 뽑을 생각은 않고 목숨 바쳐 재앙을 막을 사람을 만들어내려 하는가.
책상에 붙은 쪽지가 날 조롱했다.
약만 완성한다면 전쟁을 멈출 수 있어. 설령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무고한 생명들은 지킬 수 있겠지. 그저 그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로 죽는 사람을 없앨 수 있어. 약만 완성한다면.
여전히 재앙을 막기 위해 나서는 선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어린 인간의 말대로 제 주변 사람들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이기적인 인간일까. 아니면 신화를 읽고 교훈을 주입받은 인간일까.
이걸 열심히 따져 무엇 하나. 인간들의 이기심에 의해 이미 재앙은 촉발되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존재 자체가 무능한 신에 의해 사라져버렸는데. 무능한 신 때문에.
내가 얌전히 소멸한 상태로 외부의 개입 없이 있었더라면, 박사가 인류를 구할 수 있었을까? 마치 까마득한 예전의 그 인간처럼.
그 순간 텔레비전에서 큰 소리가 났다.
「속보입니다. D국 상공에서 기사를 취재하던 H국 뉴스팀의 헬기가 추락했습니다.」
하늘을 날던 물체가 무언가에 맞아 추락했다. 열린 문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던 인간이 축 늘어진 채 멀리 날아갔다. 가슴팍에 길고 두꺼운 금속 막대가 꽂힌 상태였다. 현장에서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진다.
「H국의 정부는 이 일을 D국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겠다 선언했으나, D국 측에서는 아무런 답변이 없었습니다. 한편 헬기에 타 있던 취재진은 V국가를 향한 D국의 협박을 처음 취재했던 팀으로, D국의 포격에 의해 모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이들의 장례식을-」
수만 년간 인간을 지켜봐 왔고, 아주 강한 확신이 들었다. 머지않아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리라. 내가 봐왔던 부족이나 작은 도시 국가, 혹은 영지 간의 싸움이 아니라 전 지구 단위의 전쟁이.
「총리는 이런 일에 대해 자신이라도 책임지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평판을 챙기는 것 아니냐는 일부 의견도 나오고 있으나, 여론은 긍정적입니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안전하고 넓은 벙커로 피신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막고 싶었다. 그러나 막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이 나를 괴롭게 했다. 시약을 만들 수 있는 실력도, 위험을 감수하고 내 몸에 실험을 진행할 배짱도, 하다못해 정부의 지원조차 없었다.
「유족들은 D국 국방부 장관에게 '확인조차 하지 않고 경고 사격 없이 공격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강하게 주장-」
책상을 꽉 쥐자 책상 표면이 싸늘하게 식었다. 분명 잔재하는 신의 능력이긴 했으나 권능이라 하기에도 우스울 지경이었다.
미완성된 약을 제공하는 건 미친 짓이야. 각별아 온 세상 사람들을 불멸자로 만들 생각이니???
"차라리 그거라도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인류의 숙원을 이루어준 과학자가 되는 것."
지금의 '나'는 인간도, 신도 아니다. 난 진짜가 될 수 없다. 기껏 해봐야 어느 과학자의 탈을 뒤집어쓴 고대의 소멸해버린 신에 불과하지 않은가.
난 또 다시, 나의 무능과 어리석음으로 무고한 목숨을 무너뜨려야만 하는가.
더 이상은 인류의 학살에 관여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직접 죽이든, 내가 만든 상황 속에서 서로 죽이도록 방치하든, 대규모 학살에 기여하든.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키고 싶었다. 누군가 죽어 나가는 것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희망사항만 가득할 뿐, 내겐 이를 실현할 용기 따위는 없었다. 난 빌어먹게도 한결같았다.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책상에 엎어졌다. 달이 저물고 태양 빛이 내 등에 손짓할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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