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10화
피비린내 나는 유희
*잠뜰 TV 스토리 콘텐츠들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흰 화면으로 감상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10화
피비린내 나는 유희
하나. 재앙을 해결하고 싶은 자여.
둘.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셋. 그 파도 속으로 들어가라.
넷. 찰나의 괴로움은 가치 있을 테니.
선인은 성주가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재로서 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사용했건만,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생각이 필요했다. 아니, 정리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뒤죽박죽 섞인 머릿속의 편린을 들여다보던 태양이 말했다.
"신관,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습니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신관도 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걱정되는 것은.
"그대는 성주를 지켜주십시오."
xXx
익숙한 지하 수로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지상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괴수의 울음과 사람들의 동요, 무기의 폭음이 지면 아래의 공간까지 울려 퍼졌다. 이 시기에 궐에 괴수를 풀 자는 정해져 있었다. 천건성군, 그대는 도대체 어디까지 갈 셈이란 말입니까?
이내 뒤에서 들려오는 단단한 발소리. 태양선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영리하고, 또 그를 닮아 어리석은 불멸자가 끊기지 않는 목숨을 만든 원흉의 뒤에 서 있었다. 선인은 천천히 운을 뗐다. 성급히 시작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현명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성한 궁에 천박한 장난을 치셨더군요, 성군."
"제 천성의 천박함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감히 성군 폐하를 해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벌인 일은 아니니 제 작은 유희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지요."
유들유들하게 말하는 천건성군의 목소리를 듣자 시야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궁에 괴물을 푸는 것이 그대에겐 그저 작은 유희로군요."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을 텐데. 분명, 그 약하기 그지없는 몸뚱이가 괴수의 공격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많은 목숨이 힘없이 스러졌을 터인데.
"그러는 선인께서는, 제 방종을 계속 지켜만 보시는군요. 언제까지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야트막한 인공 호수 속에 고여있는 물을 바라보던 노란 눈이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입술을 잘게 짓씹다가 등을 돌리자, 빨간 눈에 어렴풋이 서린 광기가 보인다. 아, 그 눈에 담긴 것이 허망과 절망에서 비롯된 공허임을 진즉 알아챘어야 했는데. 결국 죄 없는 이들이 죽고 나서야 깨달았구나.
…몇 사람분의 피가 바닥에 흩뿌려지고 나서야.
어째서, 과거의 나와 같은 실수를 범하려는 겁니까.
그리고 나는, 어째서 다시 뒤늦게 깨닫고 말았나.
"그대를 잡아 죽인들, 그대가 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대 역시 나를 살려두고 있는 것 아닙니까?"
"선인과 저는 근본적으로 닮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존재 이유도, 원하는 바 역시 결국은 같지요."
저 자는 이미 눈치채고도 남았겠지만, 선인은 제 멋대로 경련하려는 손을 애써 등 뒤로 돌렸다. 그는 초조함을 감추고자 손안에서 부채를 굴렸다. 억지로라도 모르는 척을 해야만 했다. 그가 알아야 하는 것은 성군의 목표였다. 저 자가 무고한 자들의 부서진 몸으로 쌓은 산을 딛고 무엇을 이뤄내려 하는지, 그가 종막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원하는 바가, 무엇이 같단 말입니까?"
선인의 목소리가 조금은 떨렸다. 천년의 세월 간 절대자로서 군림했던 그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나라를 지키는 비성편. 그것을 없애 버리는 것."
당신께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선인. 힘 주어 말한 문장을 덧붙인 천건성군이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그 속은 두려우리만치 텅 비어 있었다.
그 속내를 꿰뚫어 보려는 듯 붉은 혜성을 바라보던 태양이 다시 작은 호수에게 시선을 주었다. 참지 못한 한숨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선인은 궁극적으로 비성편, 슈팅 스타라는 무기를 없애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하나 두 존재에겐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방법.
천건성군이 걷고자 하는 길은 선인이 겨울의 주인이었던 시절의 황혼 무렵, 잔혹한 운명의 수레바퀴를 멈추겠단 이유로 수많은 목숨을 새하얀 눈으로 덮으려 했던 것과 같았다. 몹시 잘못되었다. 저 자는 옳지 못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잘못된 것은 선인일지도 모른다. 미련하게, 연약한 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이유로 온 인류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천천히 밀어 넣은 것은 누구인가?
단순히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것은 그리 간단하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느리고 착실하게 굴러간 눈덩이처럼, 사소한 시작이 불러온 너무나도 큰 결과물은 결국 처음 손가락을 튕긴 이에게 책임의 화살이 향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첫 시작을 열었던 이 누구인가?
그것은 태양선인이었다.
그가 시간을 관장하는 존재였다면 지금의 상황은 달랐을까. 생각을 이어가며 먼 곳을 바라보던 금빛 눈이 굳게 닫혔다. 헛된 상상을 계속한들 과거와 운명은 바뀌지 않았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뿐이었다.
"성군께서는 이만 돌아가시지요. 천건성에서 해야 할 업무가 많으실 듯한데."
선인의 딱딱한 말에 천건성군이 소리 내어 웃었다. 즐거워 보이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인정에 가까웠다. 할 일이야 많을 것이다. 가령 반역이라거나, 반란이라거나, 역모라거나.
"예, 가보겠습니다. 선인께서도 속히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요즘 궐 내가 영 흉흉한 것 같으니."
그 흉흉함의 원인을 눈앞에 두고 있자니 줄어들 수도 없는 수명이 깎이는 기분이었다. 붉은 혜성이 눈앞에 있건만, 결국 그는 또 혜성을 없애지 못했다.
xXx
천건성군이 사라진 이후, 선인은 한참 지하 호수 앞에 서 있었다. 물이 조금만 더 화려하게 떨어졌다면 분수라고도 불렀을 듯한 그것은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물을 흘려보내곤 했다.
순리. 아, 그것이 주는 안정감이란!
조용하고 꾸준하게,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물을 본 이들 중 대다수는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말하겠지만 선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마치 운명이 그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자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결과는 같을 거야. 그러니 22포기하는 게 어때?
우아한 물결이 오늘만큼은 보기 싫었다.
선인은 물결의 방향을 거슬러 손끝을 휘저어 보았다. 찰나의 순간 선인의 인도를 따라 움직이던 파동은 금세 본래의 길을 되찾았다. 선인 또한 한때 이렇게 흘러가는 물결에 위로를 받았던 때가 있었더랬다.
폐허가 되어버린 연구소에 수 세기 동안 방치되었던 시약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는 알 수 없다. 천건성군을 없애는 것이 가능할까? 그를 반역죄로 처형한들 무엇이 남지?
이 나라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음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비성편의 정체와 태양선인의 거짓말이 밝혀질 것이고, 어느 먼 미래에는 혁명이 벌어질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리라. …마치 저 물결처럼.
어디선가 울분이 치밀어 오른 그는 신경질적으로 흐름의 반대로 다시금 손을 저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물이 반대로 흐르는 기적은 볼 수 없었다. 차라리 예전처럼 싸늘하게 얼려버리고 싶었다. 그리 하면 적어도 흐름을 멈출 수는 있을 텐데.
이제는 한때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척, 가리키기만 해도 그것을 영원히 얼려버릴 수 있었던 신은 없었다. 손에 들린 부채는 정갈하게 접혀 있었다. 이것으로는 얼리기는커녕 시원하게 만드는 것도 힘들긴 하다만, 길쭉한 모양새가 겨울의 충실한 동료였던 창을 연상시켰다.
태양선인은 물결을 끊임없이 만드는 수원(水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투박하고도 온화한 석재 조각은 그저 제게 주어진 임무를 다할 뿐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지금껏 그리 해왔으니 앞으로도 그러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대단히 타의적으로.
"너무도 오랜 시간을 방관해왔구나."
만일 지금의 체제가 다져지기 전에 그가 나섰더라면 상황은 달랐을까? 아무리 후회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도, 결국 가정을 멈출 수는 없었다.
선인은 쓰게 웃었다. 인간과 비슷한 점이라고는 없으면서, 단순히 오랜 시간 붙어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정말 인간이 되어버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당신은 틀렸어요, 겨울! 모두가 눈 속에서 얼어 죽는 건 해결책이 아니었다고요.”
다시 그의 귓가를 두드리는 까마득한 과거의 목소리. 각별, 겨울, 태양선인은 귀를 막고 싶었다. 수천, 수만 년을 넘기는 삶의 시간. 그간 과히 오랫동안 숨을 쉬어왔다.
하지만, 숭고하고도 이기적인 인간이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젠 기억하는 이 하나 없는 과거의 후회는 이미 기억으로만 남아 반성의 가치를 잃었고, 미래에 대한 나의 두려움이 인류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그대여, 알려주시지요.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니. 무엇을 해야 했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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