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11화

파동

*잠뜰 TV 스토리 콘텐츠들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흰 화면으로 감상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11화

파동


하나. 생각하라.

둘. 반드시 생각해내야만 한다. 

셋. 모든 무고한 목숨을 지킬 방법을.

넷. 피를 흘리지 않고 승리할 방법을.

선인은 지끈거려오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천건성군의 태도를 보아 반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머지않은 듯했다. 모두가 살아남을 방법이 있을까? 머리의 톱니 사이사이가 모래로 가득한 듯 뻑뻑해 생각이 느리게 흘러갔다. 선인이 스스로 물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우문현답을 기대한 것이 어리석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 계셨었군요, 선인."

"신관? 여긴 어떻게…."

답지 않게 놀란 선인이 묻자, 신관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직감이라고 해두지요. 그리고, 말씀을 안 하실 뿐 원래 자주 찾으시는 곳 아닙니까?"

선인은 실없이 웃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다 들켰군요. 그 억지로 만들어낸 웃음은 금세 꺼지고 말았다. 즐겁게 미소하기엔 현실이 너무도 무겁게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태양선인이 주변의 작은 돌 장식에 쭈그리듯 몸을 구겨 앉았다. 품위라고는 내다 버린 행동이었지만 신관은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어쩌면 선인이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는 것에 당황했거나, 안심한 것일 수도 있었다.

"…신관. 곧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태음신관은 말이 없었다. 그간의 태양선인은 이토록 약한 소리를 한 적이 없었거니와 그의 입으로 이곳까지 온 이유를 직접적으로 말한 적 또한 없었으리라. 그것에 의한 충격이든 침묵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든, 선인은 고요한 지하 호수의 앞에서 처음으로 신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티티. 난 더 이상 무고한 이들이 죽어 나가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이 피를 흘리는 것도, 인류가 맹목적으로 비성편을 신봉하고 지키는 것도 바라지 않아요."

"선인이시여, 하지만 그건—"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 알아요. 하지만, 신관. 공포와 압도적인 힘으로 평화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감히 건드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강력한 무기를 사용해 전쟁을 피하는 것이?"

그것은 옛 인류가 저지른 과오였다. 무기의 존재만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오만, 무기가 보관된 장소만 공격하지 않으면 된다는 어리석음. 전 인류를 상대로 자행되었던 인질극은 아직도 끝을 맺지 못했다.

난 당신의 대답이 필요해요, 신관. 선인이 말을 덧붙이며 신관의 옷자락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존경하는 가을, 친애하는 태음신관. 나의 무능을 한심하게 여겨도 좋으니, 부디 날 미워하지만 않기를.

"가능은 하겠지만, 올바른 길이라고는 할 수 없겠죠. …저는 가끔은 당신이 안쓰럽기도 합니다. 태양선인이라는 이름으로 천 년째 인간의 모든 비밀을 짊어지고 있으니까요. 당신께서 아무리 절대자라 한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그는 절대자가 아니었다. 저 드높은 하늘, 광활한 세계 너머의 어딘가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존재들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지구를 관장하는 신 중에서 전지전능한 이는 없었다. 지구에서만큼은 격이 꽤 높은 편에 속하는 계절들마저 실수를 범하는데, 다른 신들은 오죽하겠는가.

신관이 불완전한 절대자의 옆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의 물은 여전히 느리지만 착실하게 정해진 방향으로 순환하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운명처럼.

"그래서 당신께서 이곳에 자주 오시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는 영원히 알지 못할 그 진실들이 너무도 무거워서, 늘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물에서 안정을 찾는 것 같아서. 그런데 오늘은,"

그 정해진 방향 탓에 괴로우신가 봅니다. 나직하게 말을 끝맺은 신관이 선인을 바라보았다. 신관의 짙푸른 두 눈에 비친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쳐 보였다. 이내 선인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절절하게 묻어나온 피로감을 씻어내기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의미 없는 미련이며 후회에 불과하죠.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손을 썼더라면, 하는 무가치한 것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공백을 채웠다. 어쩐지 둘의 사이가 어색해진 듯한 기분에 계속되었던 침묵을 깬 것은 태음신관이었다.

"어차피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 그만 생각하는 건 어떠신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선인은 단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과거를 미련(未湅)하고, 현재를 들여다보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고자 모든 시간과 지혜를 사용해왔다. 그것은 태양선인의 의무였다. 그 누구도 부여한 적 없지만, 그 스스로 인류의 수호자로서 마땅히 해야 한다고 여겨왔던 것들.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이, 말 그대로입니다. 과거를 후회하면 끝도 없는 법이잖습니까. 안 그래도 남들보다 기억할 과거도 많지 않으신가요?"

끝물에서 농담이 섞인 신관의 말에 선인이 웃었다. 이번엔 조금 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신관. 내겐 전부 곱씹기엔 너무도 긴 과거가 있죠."

두 사람이 함께 일어났다. 흰 옷에 묻은 약간의 먼지는 유심히 봐야만 눈에 들어왔으니 조용히 무시했다. 선인이 주변에 있는 돌멩이를 주워 호수에 던졌다. 퐁당, 파문(波紋)을 일으키는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선인이 숨을 들이켰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유레카.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꿀 생각을 한 것이 잘못이었다. 결국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인류에게 비성편을 서서히 공개하거나 그것의 격(格)을 떨어트릴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그러니 흐름의 방향을 정반대로 비트는 것이 아니라, 작은 변화로 흐름을 잠시 흔들어야 했다.

태양선인이 만들어야 하는 것은 파동이었다.

나름 과학자의 두뇌였던 것이 이리저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작아 보이는 것을 던지더라도 그 결과로 만들어진 파동은 커야만 했다. 그래야 시선이 분산될 테니. 최대한 밀도 있는 것을 미끼로 삼아 던진다면 그가 바라는 효과가 어느 정도는 나타날 것이다. 이 얄팍한 수가 천건성군에게도 통할지는 미지수였지만, 찬물 더운물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기뻐 보이시는군요. 제가 도움이 되었나 봅니다."

태양선인은 그 이름에 걸맞게 눈을 빛냈다. 역시 그대는 예로부터 늘 현명했다. 과거의 그대가 만들어낸 곡식의 풍요는 곧 지식과 문화의 보급을 불러왔고, 지금의 우리는 음과 양의 이름을 나눈 만큼 서로가 예상치 못한 부분을 말하곤 했다.

"당연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대는 언제나 그랬지요."

신관의 눈썹이 잠시 올라갔지만, 이내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xXx

두 사람은 함께 처소로 돌아갔다. 축축한 통로를 지나 지상으로 올라오고, 수수한 듯 특색 있는 목조 장식이 가득한 복도를 지나는 동안 소소한 잡담이 두 사람의 주위를 채웠다.

"구름이 많진 않으나 짙은 것이, 천문관들은 애가 타겠습니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맑은 날이 많으니 다행이지요."

"예전이라 함은…?"

"…그것도 벌써 몇 세기 전 이야기군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신관이 처소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오셨습니까, 선인."

그들은 붉은 혜성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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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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