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15화

별들의 몰락

*잠뜰 TV 스토리 콘텐츠들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흰 화면으로 감상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15화

별들의 몰락


하나. 몰락의 활시위는 팽팽히 당겨졌고,

둘.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을 넘은 지 오래.

셋. 수레바퀴를 파괴할 것인가.

넷. 수레바퀴를 재건할 것인가.

"…뭐라고?"

성주의 희미한 반문이 정적 속에서 흩어졌다. 더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것에서 느껴지는 막대한 공포가 성주를 집어삼켰다. 그는 말을 듣지 않는 몸 대신 눈동자를 옮겨 태양선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지금껏 성주가 보아오지 못했던 종류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그와 같은 인간이 결코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절망과 비탄과 괴로움 그리고 슬픔과 분노, 또 한 줌의 기묘한 쾌감과 동질감이 뒤섞인 얼굴은 천건성군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다시 문명을 세울지도 모르지요. 성주도, 성군도, 폐성촌도 없는. 고통 없이 새로운 세상 말입니다."

천건성군 라더. 그는 고개를 오만하게 들어 올리고 고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양선인이 붉은 혜성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음을 감추는 데 능한 자였다. 혹은, 마음을 잃었거나.

태양선인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이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한들, 지금의 인류는 처참히 무너질 것이다. 당장 천건성군이 수레바퀴를 부술지언정 살아남은 소수가 또 다시 과업을 반복할 것이며, 이 거대한 수레바퀴는 부활하리. 권력으로 인한 상하 관계도, 고통도 없는 세상. 천건성군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작은 소망을 품어왔던 것이리라.

유토피아.

그것은 실존할 수 없기에 생겨난 것이다.

결국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세상이라고는 지위와 권력의 쏠림이 존재하는, 선한 자의 고통과 잘난 자의 지루함으로 가득한 세상뿐이었다. 그리고 그간 인류는 오로지 잘난 자들의 유흥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했다.

절망이 만연히 퍼져가던 그때였다.

탕, 단 번의 소리와 함께 혜성의 몸이 힘 없이 쓰러졌다. 붉은 혈이 푸른 옷자락을 넘어 차가운 돌바닥에 스며들었다. 잿빛이던 줄눈의 사이마다 검붉은 빛이 퍼져갔다. 불멸자의 피도 결국은 붉은 색이로구나.

이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궐의 중정을 울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선인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덕개?

"폐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사옵니까!"

"덕개, 살아있었구나!"

"방금 도사님께서… 이 세상을 구하신 것 같은데요?"

제 친우를 닮은 이와 나타난 천 년 전의 이방인은 도사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는 성주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선인뿐이었고, 그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지 않았다.

고개를 가로저은 선인은 제 옛 친우를 닮은 이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었다. 어느새 궁궐 최고 도사의 자리에 올랐다던 덕개의 얼굴은 과거의 그가 보았던 노인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분명 두 눈으로 보고 있건만, 그리움이 사무쳐 그의 목덜미까지 올라왔다.

같은 영혼이라면 기억이 연결될 가능성이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대가 나를 알아볼 날이 올 수 있을까? 망각을 목표로 삼았었고, 시대의 변화를 위해 잊혀야만 하는 선인은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미련하기도 하지. 이성이 금세 그를 막아 세웠다.

네 친구가 널 알아본다면, 제대로 얼굴을 볼 자신이나 있겠어? 이성이 그에게 속살거렸다.

흔들리던 마음은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마는 것이다. 그대는 나를 기억해선 안 된다고.

"폐하, 곧 성군들의 군대가 지곤성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우두머리를 잃은 반역자의 무리를 당장 처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쓰러졌던 천건성군의 몸이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일어섰다. 맑고 푸른 옷자락에 묻은 혈흔은 그대로였다. 역시나, 몸을 관통하는 상처를 남기는 것으로는 턱도 없었던 것이다. 독 탄환을 쓴다고 해도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는 몸뚱이에게 관통상이 대수가 될 리가. 선인은 내심 이대로 붉은 혜성의 숨이 끊기길 원했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우두머리를 잃은 반역자의 무리? 애초에 사지가 잘리고 손가락 마디가 모두 꺾인다 해도 우두머리를 잃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집단이다.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끔찍한 광경을 본 덕개가 하얗게 질린 채 중얼거렸다.

"어떻게, 분명 적중했는데…?"

"선인. 우리는 서로를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일 수 없었던 것이죠."

선인, 열 세기 전의 과학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그대 또한 내 시약의 복용자니까."

그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 사람, 성주와 신관, 그리고 도사를 돌아보았다. 어깨 너머에 있는 그들의 표정을 메운 혼란. 선인의 비밀이 폭로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들의 태양이 죽어가는 때를 즐길 이가 넘쳐나건만, 지금을 기록할 사관이 없다는 사실이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해볼까요? 여유롭게 말을 붙인 천건성군이 턱에 튄 혈흔을 닦아냈다. 한색(寒色) 소매에 뜨거운 흔적이 묻었다.

"생명공학박사 각별의 방사능 면역 시약. 그것을 마시는 대가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난 이대로 죽을 순 없었습니다. 약을 구하지 못해 눈앞에서 죽어간 나의 가엾은 어머니. 그녀와 같은 끝을 맞이할 순 없었기에 그 약을 찾으러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았지요.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의 나는 어리석을 정도로 죽음을 피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이 축복임을 알지 못하고."

선인 또한 그 순간을 기억했고, 기록했다. 영생이라는 독이 든 성배를 마신 또 다른 인간을. 어쩌면 태양선인의 동료가 되어줄 새로운 불멸자의 탄생을.

"그대가 그 약을 마시는 순간, 나는 영원의 짐을 함께 짊어질 벗이 생겼다 생각하며 수백 년을 기다렸습니다. 하나 수백 년 뒤에 나타난 그대와 나의 신념이 다르니, 우리는 서로를 죽이지도 못하는 원수가 될 수밖에."

"선인과 제가 어찌 같은 신념을 가진단 말입니까. 평생을 호사스러운 궁궐에 숨어 비성편의 수호자로 칭송받은 선인과 지옥 같은 폐성촌의 고아로 자라 수백 년간 몰락한 고대의 유적을 떠돈 제가, 같은 신념을 품길 기대하셨단 말입니까?"

온실 속의 우아한 화초와 강인한 야생화는 같은 화분에 둘 수 없다. 둘을 같은 화분에 심는 순간, 야생화는 화초에게 가야 할 영양분까지 빼앗을 테니까.

천건성군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아주 맑게 웃어 보였다. 그 얼굴엔 즐거움이 아닌 원망과 감은(感恩)이 어려 있었다. 자신을 죽을 수 없는 몸으로 만든 이를 향한 원망, 그와 동시에 자신을 살린 이를 향한 감은.

하지만 후자는 너무나도 흐릿했다. 이미 천건성군은 원망에 잡아먹히기 시작한 것이다.

"제가 지킬 것은 모두 사라지고, 내가 파괴할 것만이 남은 이 세상을 같이 지키자 하면. 제가 선인의 말을 따를 것 같았습니까?"

태양선인이 서글픈 눈으로 천건성군을 바라보았다.

"영원한 삶을 고작 증오와 원망에 바치기로 결정했군요."

"증오와 원망? 그런 것들 또한 기나긴 삶 속에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라더의 눈은 공허했다. 아무것도 없는, 그저 확신만을 가진 눈. 선인은 붉은 혜성의 말을 알고 있었다. 증오와 원망 따위의 소모적인 감정들은 긴 시간이 지날수록 썩어간다는 것을 그는 지난 수천 년간 직접 경험했다.

"선인께서도 아시겠지요. 긴 삶이 계속될수록 우리의 신념은 오히려 단순해지고 단단해진다는 것을."

그래. 알 수밖에 없지.

그 변화를 어찌 모르겠는가!

황량하고 버림받은 제 신전을 내려다보던 순간과 제 기억의 장소에 어린아이와 동물들이 강제로 바쳐지던 순간, 겨울의 믿음이 어떻게 변화를 맞이하였는지.

총리의 부탁을 받던 순간과 백성들을 까마득한 과거의 은신처로 대피시키던 순간, 선인의 믿음이 어떻게 굳건해졌는지.

"누군가의 신념은 이 세상을 지키는 것.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신념은, 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

장전을 끝마친 비행선은 인류의 몰락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 함선을 조종하는 이름 모를 이는 자신의 손길 한 번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는 있을까? 모르겠지, 모를 것이다. 무기의 발사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대는 인류의 학살자가 될 텐데. 부디 극심한 죄책감 속에서 허우적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전쟁의 끝은 결국 몰락임을, 홀로 오랜 기간을 살아온 항성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항성만이,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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