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green

완전한 공백 by 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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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데드 밸리로부터 우리를, 우리의 미래를 끌어올려 삶의 불안과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덜덜대며 돌아가는 에어컨이 내뿜는 시원찮은 바람, 정오가 아니더라도 외벽을 달궈대는 태양, 그렇게 살을 태우는 볕을 막기 위해 치는 암막 커튼과 그 때문에 한낮에도 늘 켜 두어야만 하는 조명의 열기. 숨 막히는 이 상황의 나열조차 데드 밸리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호사다.


사막을 초록으로, 가난한 마음을 풍요롭게.


등 뒤의 스크린이 슬로건으로 채워진다. 모순되게도 물 한 모금을 찾지 못해 말라가는 이들을 대변하며, 그는 평화와 신록의 꿈을 꾸었다. 모두가 자신과 같은 꿈을 꾸기를. 하다못해 자신이 보고 있는 것과 같은 하늘 너머의 색을 보기를.

 

잠뜰TV 상황극 컨텐츠 ‘데드 파더스’ 에 등장하는 스포일러 인물

‘릴리’와 릴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개인 해석 및 임의 설정이 등장합니다.


“릴리, 이 프로젝트가 정말 잘 되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쳐다보던 이가 남아있는 자료를 모아 정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물음은 지극히 당연하였으나, 어쩐지 맹점을 찌르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져서. 릴리라고 불린 이는 쓴웃음을 짓고는 자기 가운에 달린 명찰을 건드린다. 명찰에는 직급과 릴리,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직급이 바뀌며 새롭게 지급받을 때를 제하곤 그 자리에서 떨어져나온 적이 없었다.

 

“… 세상 어느 연구자가 검증도 전에 확신을 할 수 있겠어?”

“뭐, 뭐어? 그러면 왜 그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을 한 건데? 너도 알잖아,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너 이외에는 누구도 긍정적인 반응을 안 보였던 거. 거기다 다들 네 이론을 ‘과감하다’고 말하고 있잖아? 근데도 그렇게 확신에 찬 얼굴을 하면서…….”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니까. 그 외의 이유는 없어.”

 

그렇게 말하는 릴리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조금 전의 프레젠테이션에서 보여주었던 것보다 더 강한 의지, 혹은 그보다 더 강한 것이다. 릴리의 눈이 모순되게도 신록의 색으로 불탄다. 그 시선은 옆에 있는 이를 벗어나 천장을 향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을 향하듯.

 

“… 난 이 데드 밸리가 무정함으로 사람을 집어삼키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는 듯 침묵하는 공간으로 끝나지 않길 바라. 살아가기 위해 누군가를 해치고, 외면하는 일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야 하는 거잖아?”

“릴리.”

“물은 이미 말라버렸고, 생명은 불타 죽어버린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이곳에서 태어났고, 살아갈 것이라는 이유로 끝이 보이지 않는 외나무다리 위를 걸어야 한다는 건, 평온과 희망 따위를 꿈꿀 수 없다는 건 불공평하고, 가당치도 않은 소리인 게 아닐까? 난 말이지, 더 이상 가진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죽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이 데드 밸리에 희망이라는 말이…….”

“릴리 에버그린!”

 

릴리는 반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릴리는 데드 밸리에서의 생존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프로젝트의 방향을 이렇게 잡은 것 또한 릴리다. 누군가는 그를 보고 멈추는 법을 잊은 전차와도 같다 했다. 그 말도 맞았지만 이런 모습을 보일 때면 주변의 모든 것과 멀어져 이 문제 앞에 혼자 남은 사람처럼 보였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다른 연구원에게도 성공에 대한 바람이 없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으니까. ‘터닝 그린’을 통해 데드 밸리가 정말로 메마른 사막이 아니라 나무와 풀이 자라는 대지로 변모한다면 그 수혜를 가장 크게 입는 것은 데드 밸리에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다. 더 이상 위험하지 않고, 더 이상 누군가의 총칼에 목숨을 잃지도, 잃는 것을 보게 되지도 않을 테니까. 더군다나 릴리에게는…. 그는 생각을 멈추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네 연설은 이미 다 들었으니까 그만해도 돼. 그 사람들이야 한 번 들은 거지만, 다른 연구원들이 그걸 몇 번째 듣는 건지 기억하고 있지?”

“… 뭐, 셀 수도 없겠지.”

릴리의 멋쩍은 대답. 상대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고 있다니 다행인걸. 어쨌든 네가 얼마나 이번 프로젝트에 많은 걸 걸고 있는지 알아. 네가 무엇을 위하는지도. 그러니 연구자인 너를 믿고 말하는 거야. 이걸 잊지 마.”

 

앞으로 판에 놓을 것이 어떤 수가 되든 간에, 최후의 최후까지 고민하고 확신한 뒤에 움직여야만 해. 릴리는 그 말을 곱씹다가 씁쓸한 낯으로 호선의 미소를 그리는 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가 마지막 자료까지 박스에 챙겨 담고 먼저 나가자 사무실에는 릴리만이 남게 되었다.

적막만이 찾아든 사무실. 릴리는 등 뒤편의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아직 끄지 않은 빔프로젝터는 프레젠테이션의 마지막 페이지를 계속 쏘아내고 있었다. 다른 내용보다도 더욱 강조되도록 적어넣은, 후원자가 되어줄 자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도록 혼자서 고심의 고심 끝에 짜낸 슬로건 한 줄. 릴리는 그것을 다시금 가슴에 새겼다. 그에겐 이상향을 포기할 수 없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진동, 한 차례의 섬광. 시야를 가득하게 메우는 시린 광채와 불길한 공명음이 사위를 메웠다. 위와 아래의 변환, 중력의 정의 변환. 눈앞의 기계장치가 출력해내는 결괏값은 이 상황 속에서 무엇보다도 안정적이었고, 동시에 예측 가능선을 벗어난 수치이기도 했다.

섬광이 한 차례 더 릴리의 눈을 덮쳤다. 모든 이들이 ‘가능성은 희박하다’라고 말할 때 멈춰 섰어야 했었던 걸까? 스스로 내린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받아들이고 묻어뒀어야 했던 걸까? 하다못해 언젠가 동료가 말했던 최후의 최후까지 고민한 뒤에 움직이라는 말이 최종 합성 장치의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떠올랐을 때, 그 망설임을 따랐어야 했던 걸까?

 

하지만 이제 와서는 모두 늦은 일일 뿐이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어떤 것으로도 증명할 수도, 해석을 할 수도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 어떤 후회도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우습게도 버튼을 누르는 순간 릴리는 이 모든 것들이 예정되어 있던 수순이었을 뿐이라고까지 느꼈다.

 

“제이스! 나야. 나 드디어, 데드 밸리를…….”

 

릴리는 본능적으로 긴급 연락용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렸다. 무얼 전해야 하는가에 대한 망설임조차 없었다. 자신은 거듭 문장을 내뱉고 있고, 예견된 실패 앞에 이 전화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건만. 야속하게도 전화기의 선을 타고 넘어오는 이의 목소리는 희미했다.
할 수 있는 것은 이 목소리가 제대로 닿길 바라는 불확실함 뿐이기에. 릴리는 균열로 변해가는 섬광 앞에서 처음으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음에도 인지를 뛰어넘어 보이는 허무가 어둠보다 더 짙게 어두운 몸으로 세상을 뒤덮었다. 그것은 곧 릴리가 되었고, 연구소에서 살아 숨 쉬던 모든 것이 되어 그 숨을 삼켰다.

 

어느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해 ‘인지’를 할 수 있게 된 릴리 에버그린은 자신이 세상에 존재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깐은 자신이 살아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에너지실의 비상 발전 장치가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복도의 불이 선명히 켜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나, 발전 장치를 조작하거나 조명을 끄는 걸 할 수 없다는 것을 머잖아 알게 된 그는 자신을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오래도록 고민했다. 다행스럽게도-혹은 불행하게도- 시간은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자신은 말하자면 지성을 가진 홀로그램인 것 같았다. (육신은 ‘너머’로 빨려 들어가 소멸하고 방출된 에너지에 가장 강하게 노출되어 분리된 정신이 전기 에너지를 통해 추상적 개념화된 듯하다는 가설이었다) 에너지실의 가동이 멈추면 더 이상 모습을 유지할 방법이 없어 소멸하게 되겠으나, 만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몸에 지니고 있던 수첩과 펜뿐인 그로서는 보안 장치를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공도 실패도 하지 못해, 자신을 잃어버린 이는 죽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정말로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으나 지금은 그것 이외의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으므로.

 

“…정말, 잔인하네.”

 

공허한 울림. 그는 색을 잃어 반투명한 회백색이 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고인 희미한 물기 위에는 제 모습이 비치는 대신 일렁임 같은 이상 현상만이 관측될 뿐이었다. 그런 것이 자신의 처지를 더욱 선명하게 상기시켰기에.

그나마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자신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것 정도였다. 그가 지니고 있던 물건만은 만질 수 있었고, 가진 것 중에는 펜과 수첩이 있었다. “기록하는 습관의 덕을 이런 때에도 보게 될 줄이야.” 그가 허공에 대고 농담을 던져보았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백색의 LED 조명 속에서. 잠들 수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하거나, 잉크를 아껴가며 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이었다. 일기라고 해 봐야 청승맞게 홀로 중얼거릴 만한 말을 소리 없이 옮겨내는 것에 불과한 일이었으나 그것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위안이 되는 일이긴 했다.

곱씹는 것을 거듭할수록, 그는 자신이 멈춰 섰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만 하게 되었다. 만일 일찍이 멈췄더라면 후배들이 이유조차 모른 채 소멸하지 않았을 것이고, 동료들에게 푸념을 좀 늘어놓은 뒤에 다시 모여 데드 밸리를 구원할 수 있는 다른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버튼을 누르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그는 침울한 낯으로 종이 위에 일렁이는 글자를 거듭 남겼다. 후회를 써 내려가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인제 와서는 의미 없는 후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연구소가 정지되면, 당신은 없어지잖아요?”

“…….”

 

대답 대신의 침묵. 시간이 거듭 흘러갈수록,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상태가 자신이 부려온 오만의 대가로 적절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내가’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움직여왔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결의가 오만이었다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위했던 것은 오로지 데드 밸리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였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죽어버린 아들을 위해서였다고 생각했고 믿어왔으니까.

 

그에게는 잔인한 말이나, 그렇기에 더욱이 오만이고 망집이었다. 그는 카드키를 든 채 선 소년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눈앞의 이 소년마저 자신이 만들어 낸 슬픔의 부산물일지도 몰랐다. 아니, 반드시 그럴 것이다. 알겠다 대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소년은 무엇에 사로잡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일까. 무엇이 그에게 긴 고난을 헤치고 이곳에 도달하게 만들었을까. 여기까지 오며 어떤 선택과 어떤 망설임을 거듭해왔을까. 그는 감히 소년을 보며 잠시나마 짐작해 보았다. 소년에게 거듭 눈이 가는 것은 비단 소년이 제 아들의 또래처럼 보여서만은 아니리라.

 

“… 있잖니, 꼬마야. 너는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길 바랄게.”

 

살아가는 데에 후회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적어도 소년만은 굴레를 끊어내기를 바랐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들려오는, 자신은 어떻게 해서도 누를 수 없던 키패드 눌리는 소리가 마치 심박계의 소리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소리가 멎으면, 멈춘 지 오래된 심장을 따라 자신도 멈추게 될 것이다.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이후로 그토록 부정해왔던 죽음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는데 도리어 후련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드디어 이 지난했던 후회에 마침표가 찍히기 때문이었던 것일까.

 

“뭐, 이제는 나 스스로도 아무래도 좋은 거겠지.”

 

소년이 카드키를 집어넣고, 잠금을 해제하는 최후의 소리가 들렸다. 오랜 시간 동안 에너지를 만들어온 장치들이 꺼지고, 튀던 불꽃이 꺼져 사그라들 듯, 한 번도 꺼진 적 없던 에너지실 복도의 불이 멀리서부터 꺼져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감기는 눈이 일순, 본래의 신록을 머금었다 눈꺼풀 뒤로 숨어 사라졌다. □□는 이렇게 찾아드는 어둠을 알고 있었다.

 

“……제이스.”

 

□□는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이끌어냈다.

당연하게도 그것이 전해지는 일은 없었다. 이 또한 벌이라는 듯이.


데드 밸리의 태양에 달궈진 공기가 폐부를 익힐 듯 달궜고, 속에 섞인 희미한 화약내와 모래 먼지가 깔깔함을 남겼다. 여정의 첫 출발과는 달리 인원수가 한 명이 더 늘었음에도 모두가 죽을 고비를 넘겨온 탓에 트럭 안은 조용했다. 개조된 엔진이 내는 낮은 울림통 소리만 윙윙거리며 아지트로 돌아가는 길 위에 오른 네 사람의 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에요, 연구소 안쪽에서 그 사람을 만났어요.”

“엉? 누구를 말하는 거냐?”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던 건지 라더가 잠뜰의 목소리에 반응해 입을 열었다. 흘끔, 백미러를 향해 잠시 시선을 올려 뒤편의 짐칸을 쳐다보았다. 잠뜰은 한참을 희미한 구름이 드문드문 뜬 하늘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있잖아요, 그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다는 사람.”

“리리인가, 릴리스인가 하는 사람? 뭐야, 살아 있었어?”

 

잠뜰이 공룡의 물음에 낮은 침음을 흘렸다.

 

“릴리요, 릴리! 아무튼 살아있다고 하긴 애매하고…. 그렇다고 죽었다 하기엔 저랑 대화했거든요.”

“…유령 같은 거라도 만났다는 거야?”

 

무엇을 생각하는지 몰라도, 내내 말이 없던 조수석의 덕개까지도 잠뜰의 말에 질문을 툭 던졌다. 입을 비죽인 채 한참 생각하다가, 잘 모르겠다는 말로 잠뜰은 답을 이어갔다.

 

“유령 같아 보이기는 했어요. 목소리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던가, 보석의 합성 때문에 그렇게 됐다던가. 그런 소리는 했는데 솔직히 이해는 안 됐어요. 아마도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정말로 유령이나 다름이 없었던 거네. 근데 그 사람은 왜?”

“… 그냥 갑자기 생각났어요. 저보고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길 바란다고 했거든요.”

 

잠뜰은 올려보던 시선을 내려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말을 하던 릴리의 표정이 기억에 남아서였을까. 아니면 그것이 릴리의 마지막 말이기 때문이었을까. 떠나지 않는 문장이 모든 일이 마무리된 지금, 그를 생각하게 만든다.

 

“후회 없는 선택이라는 건 뭘까요.”

 

잠뜰이 나지막이 뱉은 말이, 이번에는 나머지 세 사람을 생각 속에 잠기게 했다. 공룡까지 다시 조용해지고 만 것을 본 잠뜰은 뒤에 몸을 푹 기댄 채 계곡 사이의 희미한 지평선에 눈을 두었다. 연구소는 이미 너무도 멀어져 그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후회 없는 선택. 잠뜰은 그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어쩐지 그 사람이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신을 미련한 사람이라고 칭할 때, 소중한 것을 저버렸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은 슬퍼 보였고 쓸쓸하게도 보였다. 그런 우울감을 뭐라고 말하더라? 그러니까.

 

“…자책할 만한 일을 하지 말라는 거였을까요? 모르겠다.”

“그런 거였다면, 어려운 이야기네.”

 

잠뜰의 말에 덕개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이내 덕개가 창문을 내려 밖을 쳐다보듯 고갤 돌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의 가느다란 눈매가 자신들로부터 멀어져가는 구름을 쫓는 듯 미세하게 움직였다.

 

“―세상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은 없어. 선택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명답도 없는 거지. 그냥 그때 할 수 있는 최선만이 존재하는 거고…. 그 최선도 당장 다음 날 되짚어보면 내가 왜 이걸 선택했지? 하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는 거야. 자책도 마찬가지겠지. 후회랑 자책은, 사실상 같은 말이거든.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

“…진짜로 어렵네요.”

 

응. 덕개는 그 말을 끝으로 하늘만을 쳐다볼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신 말을 꺼낸 것은 다름 아닌 공룡이었다.

 

“그러면 꼬맹이.”

“예? 왜요, 아저씨.”

“너는 지금 후회해?”

“예에? 뭘요?”

“뭐든지 말이야. 그 릴리 씨가 그랬다며. 후회 없을 선택을 하랬다고. 그런 선택을 한 것 같아?”

 

마치 점심 메뉴가 마음에 들었냐는 듯 한없이 가볍게 물어서. 잠뜰은 순간적으로 가볍게 대답해버릴 뻔한 것을 멈췄다. 입을 조금 벌린 채 운을 떼진 못하고 있는 모습에 공룡은 자신이 뭔가 잘못 물었나 싶어 미묘한 낯으로 고갤 갸웃댔다.

유언이라는 말의 무거움을 아직 다 알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기고 간 것이 중요하다는 것까지 모르지는 않았다. 그런 막연함이 이제는 일종의 정의감이 되어 있었던가? 그리고 자신은 마지막의 순간에 여기까지 짊어지고 왔던 유언을 놓아주었다. 두 보석은 이제 깊이를 모를 모래 밑에 묻힌 채였다.

 

그 대신 자신은 여기 있는 이들을 택했다. 잠뜰은 반사적으로 두 사람과 한 사람을 눈에 담았다. 자신들이 사악하다고-그러나 실상은 유하고 멍청한- 믿는 이들과 이제야 악의 속에서 벗어난 이. 살아남은 사람들이자, 앞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데드 밸리를 또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갈 사람들. 그리고 자신. 잠뜰은 저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음, 뭐. 후회 안 해요. 당장은.”

“그래? 그거면 됐지, 뭐~. 우리가 내일을 사냐, 오늘을 살지!”

 

속 좋은 소리를 하며, 공룡은 제 팔을 베개 삼아 뒤에 몸을 편히 기대어 앉았다. 그 모습에 잠뜰도 가방을 베고 짐칸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계속 앉아있었더니 피곤하던 차였기에.

올려다본 하늘은 늘 그렇듯 지독하게 파란빛이었고, 드문드문 희미한 구름의 자국만 있을 뿐. 잠뜰은 그런 하늘을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덕개의 말처럼 내일이 되면 아버지의 말을 지키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공룡의 말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결국 오늘이고, 미래는 사실 오늘의 반복이니까. 지금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줌마도 이젠 후회나 자책은 안 하면 좋겠네요.” 잠뜰의 중얼거림이 엔진음과 사막의 모래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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