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모든 것이 하얗게 지워진 세상

*[겨울신화]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퇴고 X, 미완.


겨울이 하얗게 지워진 세상을 바라보았다. 교회의 첨탑은 새하얗게 얼어붙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롭고, 장엄함을 뽐내던 성은 드높은 지붕이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종잇장처럼 무너졌다.

이젠 봄도, 여름도, 가을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하얀 눈만이 대지를 뒤덮을 뿐. 낮의 따가운 햇살조차도 이 얼음을 녹이지 못한다.

아마 수레바퀴가 제대로 굴러가고 있었다면, 다른 계절들이 겨울의 폭주를 제재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아마 지금은 뜨거운 여름일 터였다.

신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산을 오른다. 맨발에 닿는 눈은 부드럽기만 하다. 이내 작은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신이 무릎을 꿇어 직접 눈가루를 털어내자 초라한 비석 두 개가 고고(孤高)하게 남겨져 있다.

신이 가장 사랑했던 인간의 흔적이오, 또한 유일하게 파괴하지 못한 인간의 자취다.

"오랜만입니다. 나의 친애하는 벗이여."

나 그대를 위해,

그대가 떠나는 길에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대의 손주 녀석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그대들이 건네준 따스한 온정의 보은이자

그대들을 짓밟은 잔혹한 세상에 대한 복수.

"가끔은 그대들이 원망스럽더군요."

이 거대한 고통의 수레바퀴를 산산이 부수어,

그대의 발 앞에 대령할 수 있건만.

"적어도 선한 사람을 더 보여주고는 갔어야지."

그대들도,

나의 동료들도,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인간들도.

"다 어디로 사라진 거요, 대체."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렸나.

왜 다시 찾을 수도, 볼 수도 없나.

"그립군. 모두가."

뒤늦은 후회일까.

의미 없는 행동일까.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늦어버린 것을."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전해줄 수 있다면,

나 그대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노라고.

나 그대들을 진심으로 존경했노라고.

신이 비석을 쓰다듬는다. 차가운 돌에 미약한 온기가 스며들자, 신은 맥없이 웃는다. 나의 냉기 때문에 스러진 그대에게 너무도 늦게 따스함을 쥐여주었다는 생각에, 눈물 섞인 웃음이 나왔다.

만일 내가 소멸되었다면, 그대들을 다시 볼 수 있었을까. 지금 내가 죽는다면, 그대들뿐만 아니라 내가 생을 앗아간 수많은 자들도 다시 보게 되겠지. 그것이 대가라면, 기꺼이 그 값을 치를 수 있으련만. 신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은 이미 겨울의 창끝에 무너진 뒤. 되돌아갈 다리는 망설임없이 얼려 깨부순 지 오래.

겨울은 또 다시, 어리석음이라는 실수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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