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Go Away
저 넓은 세상을 향한 비행, 그리고 추억
*[초능력 세계여행]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창작 설정(소위 날조) 포함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 흔히들 인생에서 가장 큰 중요한 시기라고들 하지만, 잠뜰에겐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었다. 여전히 의대 진학을 강조하는 아빠는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인생의 주인이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데 어찌 타인이 자신의 희망을 강요하겠는가. 설령 그 타인이 가족이라 하더라도.
수능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쩌면 그 탓에 더욱 잘 봤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음고생이 없어서인지, 그간 보았었던 그 어떤 시험보다도 편안한 마음으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덕분에 성적은 의대를 갈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나는 대학 진학을 조금 미뤄두었다.
당연히 아버지는 크게 반대하셨다. 의사가 되기 위해 보냈던 시간과 돈을 헛되이 만들지 말라며. 네 어머니를 실망하게 하지 말라며.
나는 내가 의사가 되어도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엄마는, 나를 돌보지 못하며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걸 하는 모습을 보고 더 기뻐하실 거라고.
아빠는 대학 진학 포기를 허락하셨다.
또니와 티티는 내 선택에 의아해했다. 예전이라면 덥석 의대에 갔을 애가 왜 갑자기 여행이냐며 의문을 표하는 친구들에게 약간의 거짓말을 했다. 그 모든 소동을 설명했다가는 추억 속에 남은 친구들과 IPS의 철창 속에서 눈물의 상봉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여행을 다녀온 뒤 해명해야 할 것이다.
나는 세계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경비는 의대 진학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던 순간부터 모아왔던 돈과 앞으로 꾸준히 하게 될 아르바이트 비용. 취직을 하는 것도 고려해봤지만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은 명문 대학을 나온 사람을 원했다. 서류에 적힌 이름있는 대학. 취직을 못한 것도 이유라 하면 이유였으나, 짧게 일하고 훌훌 떠나버릴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이과에 더 가까웠던 나는 해외에서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여러 언어들을 익히는 것에 긴 시간을 투자했다. 효율성을 위해 첫 여행지인 유럽에서 주로 쓰이는 언어들 위주로. 독일어, 프랑스어 등. 불어를 배우던 도중 인내심의 한계가 찾아오는 것을 느끼긴 했다. 물건은 그저 '이것'이나 '저것'으로 통일하는 한국어와 영어와는 달리, 무생물에도 성별을 붙여 구분하는 표기는 내 머리에 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언어를 배우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무작정 맨땅에 헤딩하는 것이라지만, 일단 기본적인 회화는 알고 가야 부딪혀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의 심신의 안정을 위해 필요했다. 그럭저럭, 기본 의사소통은 가능한 수준이 되고 나서 나는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지구를 한 바퀴 감싸듯이 유럽에서부터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순으로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유럽을 한 바퀴 훑고 가는 게 편하다는 결말에 도달한 나는, 모아온 돈으로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xXx
나는 손에 들린 비행기 표를 바라보았다. 평소였더라면 한 귀로 흘리고 말았을 졸업식의 훈화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첫걸음. 남들이 선망하는 탄탄대로가 아닌 다른 길. 비록 반대에도 부딪혔었지만 상관 없었다. 남을 위한 내가 아닌 진정한 나를 찾아갈 여정일 뿐이었다.
조그마한 여객기의 창가 자리. 내 좌석은 무릎도 펴고 앉기 힘든 비좁은 일반석이었지만 내 마음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이미 목적지인 런던에 도착해 있었다. 맑은 날씨나 맛있는 음식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모든 국가에는 그 지역만의 분위기가 있으니.
생각해보니 내 인생 첫 비행기 탑승이었다. 여행은 그렇게 많이 다녔건만 비행기는 처음이라니, 아이러니함에 헛웃음만 나왔다.
공룡 선배가 있었다면 드디어 비행기가 되는 꿈을 이루는 거냐고 놀렸었겠지. 덕개 선배는 머리 대자마자 잠들었을 테고. 지금 돌이켜 보면 가만히 있는 라더랑 수현 선생님이 제일 얄밉더라. 빨리 탄 바람에 시간이 남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비행기는 이륙을 위해 천천히 활주로로 이동하고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나는 넓은 세상을 향해 비상하였다.
흔들거리는 느낌도 잠시, 금세 공항과 도시가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덕에 저 멀리 푸르른 바다도 눈에 들어왔다. 잠을 청하기에도 아깝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얼기설기 거미줄처럼 얽힌 도로와 그 사이 공백을 채운 도시를 카메라에 담았다. 앞으로 수없이 많이 볼 광경이겠지만, 내게 '처음'이 지니는 의미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xXx
나는 몇 달간의 여행으로 익숙해진 유럽의 버스에 다급히 올라탔다. 여행을 하며 현지인들의 여유로운 마음가짐에 익숙해졌는지, 이전이었더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실수를 했다. 시계도 안 보고 여유를 부리다니, 대체 얼마나 게을러진 거냐 잠뜰. 정각이 얼마 안 남았다고!
늦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모르는 체 하는지, 줄줄이 적색의 신호와 느긋한 운전이 막아섰다. 이왕 늦는 거 다음 정각을 노려볼까 싶을 정도로 체념했을 무렵, 버스는 정차했다.
정각 5분 전! 다행히도 종이 치기 전 도착한 버스에서 가장 먼저 뛰어내려 대략 100M 정도 떨어져 보이는 시계탑 정면을 향해 달려갔다. 사람들은 발등에 불 떨어진 관광객이 익숙한지 한 번 흘끗 보고는 말았다. 무관심이 이렇게까지 고마운 적은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정각 3분 전,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초침이 열심히 돌아가는 거대한 시계를 바라보았다. 몇 년 뒤에 다시 보며 추억팔이를 하겠다는 다짐으로 큰맘 먹고 돈을 모아 구매한 카메라를 점검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데!"
해외에서 들으면 가장 반갑다는 모국어. 하지만 내용은 그리 반갑지 못했다. 소매치기라도 당하셨나. 인형이 움직이기까지는 1분 정도 남아있었다. 잠깐만 보고 오자, 아주 잠시만.
"무슨…"
"아 거기 신입회원님~, 안 오시면 두고 갑니다!"
몇 년이 지났어도 익숙한 목소리. 설마. 나는 인형이 움직일 시간이 채 30초도 남지 않았음을 망각하고 탑 앞을 빼곡히 매운 관광객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목소리를 향해 달려갔다.
댕, 댕. 종소리가 정각을 알렸다. 정확한 움직임으로 설계된 인형들이 움직임과 동시에, 늘 계획과는 다른 움직임을 취하던 우리는 잊지 못할 추억을 마주했다.
점점 커져가는 마냥 장난기 가득한 미소도,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도. 전부 날 웃음 짓게 만들었다. 선배들이랑 라더, 예나 지금이나, 정말 바뀐 게 없네요.
"야, 우리 신입 회원님 오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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