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9화

미래를 열 열쇠

*잠뜰 TV 스토리 콘텐츠들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흰 화면으로 감상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9화

미래를 열 열쇠


하나. 혼돈의 시대가 도래했다.

둘. 폭풍전야에 속지 말라.

셋. 비성편은 위협받을 것이며,

넷. 붉은 혜성의 움직임이 시작될지니.

"선인, 내일 제사가 있다고 합니다."

제사?

"언제 말입니까?"

"천문관이 적절한 시간을 계산할 예정입니다."

제사라, 성주께서 어지간히도 불안하셨나 보군.

하긴, 나라가 망할 징조를 보이는데 뭐라도 할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 실제로도 이대로라면 크게 잘못될 것이 뻔하니.

"천문관에게 찾아가 보시지요. 하늘의 일은 비성편의 수호와도 직결되어 있는 만큼 중대한 일이니, 도움도 줄 겸 해서 말입니다. …아, 그리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떠나는 신관을 말로 붙잡았다. 신관이 떠나 있을 때는 곧, 또 다른 일을 티 나지 않게 처리할 기회다.

"혹 낯선 옷차림을 한 이가 팔성국 내에 나타나거든 제게 알려주시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신관이 문을 닫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천 년간 건재했던 하나의 국가가 무너질 참이었다. 혹여 팔성국이 무너지지 않더라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변화를 맞으리란 것은 자명했다. 가령, 왕실의 종말이라거나.

신분 체제에 기나긴 시간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입장으로서, 왕실이 사라지고 신분제가 폐지되는 것은 좋은 결말이었다. 다만, 나는 이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것.

왕실과 비성편을 수호해왔던 존재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야 사람들은 비성편의 정체를 온 나라에 알리고 싶어 하겠지. 그들이 그토록 집착하고 수호하며 숭배해왔던 비성편이라는 것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고. 그 까발려져선 안 될 진실이 알려지는 순간 벌어질 일은 나조차도 예상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것의 쓸모를 알아내려 연구할까? 그것을 없애기 위해 커다란 폭탄을 떨어뜨릴까?

무엇이 되든 간에, 그것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인류가 종말을 맞이할 것임은 확실했다. 그리고 운명은 인류의 그 '종말'을 향해 위해 온갖 수단들을 만들어 내고 있고.

이상 천문 현상과 붉은 혜성.

과거에서 온 두 가지 존재들.

"당신이나 나나, 둘 다 죽지 못해 사는 신세 아니냐 이 말입니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짓던 그 비릿한 미소. 그것은 아마-….

"…원망?"

만일 그림자를 꿰뚫어 보는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천건성을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기우일 확률은 거의 없는 것 같으니, 인간들, 적어도 백성들이 보기엔 기우인 것처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에겐 죄가 없으니까.

"…밖으로 내세울 수 있는 증거가 없으니 심증이 있어도 해결을 하지 못하는구나."

아무래도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늘 가던 곳에서.

지곤성에는 지곤성 지하의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호수가 있다. 이 통로는 가끔은 암살자를 피하는 대피로가 되었으며, 어느 순간에는 중요한 물건을 옮기기 위한 비밀 통로가 되었다. 대전쟁 이전의 인류에게 '하수도'라 불리었던 이 거대한 시설은, 청소를 위해 매일 들르는 인원을 제하면 항상 고요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석재 통로는 소리가 울리기 딱 좋은 조건을 갖춘 상태인지라,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이 그가 가고자 했던 우물가로 향하는 통로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려댔다. 두통이 살짝 일어날 정도로.

"놈이 창고 근처에 있다! 잡아!"

창고라면 그다지 멀지는 않은 곳인데. 실수로 돌을 발로 건드려 소음을 만드는 일을 벌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는 벽 뒤에 숨어 창고와 우물의 갈림길을 흘끗 내다보았다.

총을 든 무관들이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부리나케 사라지는 짙은 색 옷자락만이 보였고, 추적당하는 자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궐 내의 의관(衣冠) 중에 저런 색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새 바뀌었나? 아니면 외부인?

"인원을 둘로 나누지. 그쪽 셋은 우물가로 가고, 나머지는 날 따라 창고로 간다."

아, 생각을 하겠다며 이대로 있다간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다. 길이 하나가 아니라 어찌나 다행인지. 평소엔 헷갈린다며 투덜거렸던 구조에 감사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다행스럽게도, 그가 애용하던 통로는 다른 이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길이었다.

좁은 길 사이로 사라진 순백의 옷자락을 발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인적이 외딴 길을 통해 거처로 돌아왔을 땐, 익숙한 뒤통수가 가만히 서 있었다. 태음신관이었다.

"아, 신관. 와 있었군요."

"드릴 말씀이 있어 조금 이르게 돌아왔습니다, 선인."

"무슨 일이기에 그러십니까?"

신관은 잠시 말을 골랐다.

"첫째는 선인께서 말씀하셨던 낯선 옷차림의 이를 발견하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무관들이 그 낯선 옷의 이방인을 역적의 하수인이라고 판단하여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뭐라고?

"…역적의 하수인이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이미 성주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어도 목이 날아가진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살아 있으니 아직 완전히 늦지는 않았다. 다만 좀 서두를 필요는 있었다.

"신관도 짐작하셨겠지요. 나는 그자를 만나야 합니다. 당장 성주에게 전하십시오. 태양선인이 그 이방인을 찾고 있노라고."

xXx

잠시 후 어리둥절한 얼굴로 신관을 따라 들어온 것은 역시나 공룡 박사였다.

"오랜만입니다."

"아니, 당신이 여기 어떻게… 박사님이 왜 여기서 나오시는 거예요?"

박사라,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하지만 추억에 잠길 틈도 없이, 나는 꽤 오래 고민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결국 설명은 포기하고 둘러댈 말을 찾아냈다.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뭐,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이렇게 만나는 게 천 년 만인가요?"

"네, 우주선에 문제가 생겨서 천 년간 얼어 있었으니까…."

공룡 박사는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박사께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결국 인류는 멸망했고, 오로지 소수만이 살아남아 문명을 재건했습니다. 당신이 만든 비성편, 아니, 슈팅 스타가 파묻힌 땅 위에요. 인류 역사상 최강의 무기를 밟고 세워진 이 문명은 지금 위태롭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공룡 박사가 고개를 숙였다.

"슈팅 스타 때문이겠죠?"

"뭐, 반은 그렇고 반은 맞지 않습니다. 슈팅 스타를 비성편이라며 신격화했던 결과, 지난 천 년간 그 존재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은 아주 많았거든요. 다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다고 해야 할까요? 제가 여태껏 살아있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겠습니다."

무너진 문명의 두 생존자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둘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이 숨조차 쉬기 불편한, 말 한마디 하기 버거운 상황을 만들었다.

"당신은 슈팅 스타를 잘 알고 있지요. 당신이 모르는 끔찍한 진실은 묻어두겠습니다.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니 이미 짐작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겐 당신이 하려는 일을 모두 묵인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겐 이 상황을 타파할 지혜가 있지요."

공룡 박사가 입술을 짓씹었다. 괴로움, 혹은 슬픔, 혹은 절망이라 명명할 수 있을 법한 그 표정이 선인의 눈에 꽂혔다. 하지만 그는 공룡이 그 제안을 수락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전 생에도, 어쩌면 지금도. 그는 선한 사람이었으니까.

"이 문명을 도와주십시오. 이건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천 년간 군림했던 절대 권력이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다시 살려내든, 뿌리까지 뽑든. 인류를 구원해주십시오."

박사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관사(官舍)를 나섰다. 축 처진 어깨를 보며 태양선인은 알량한 죄책감을 품었다.

"신관. 성주를 불러주시겠습니까?"

xXx

"선인, 어째서 그자를 살려주신 겁니까? 그자는 비성편을 노렸습니다."

은은한 노기가 서린 말이 태양선인에게 날을 드러냈다. 섬찟할 법도 한 말투였으나 선인은 그저 지그시 미소할 뿐이었다.

"이번엔 다소 급하셨습니다, 성주. 비성편에 관련된 일이라면 신중히 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제 기억상 한 번뿐이니, 절 선대 성주들과 겹쳐 보지는 마시지요."

"그렇습니까?"

내가 겹쳐본 것은 당신의 윗세대가 아니라 어느 강단 있는 신이었다. 선인은 자신이 이기적으로 두 존재를 겹쳐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침묵했다. 그러한 약간의 이기심은 영원을 사는 이에게 베풀어지는 자비라고 생각했다. 이것마저도 없다면, 내가 이 상황을 감당해낼 수 있을 리가.

묘하게 요점을 벗어난 대화에 성주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수인 따위는 없어도 그 배후는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선인은 제 삶을 끝낼 해독제를 바라보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또 내쉬고. 대화에서 두어 박자가 밀리자 성주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려는 기색을 보였다. 그래, 속이 타들어 가겠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머리를 차갑게 유지해야 하는 법이다. 수천 년 전에도 언제나 지금처럼 잘 해왔으면서, 당신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겹쳐 보지 말라는 말이 다시 머리를 지나갔다.

아무래도 당신들은 다른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가 된 듯했다.

"확신하시는군요. 하지만 전에도 말씀드렸듯 그자는 역적의 하수인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성주께만 드렸던 말씀입니다."

성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로 했다. 얇은 방석 위에 앉은 일국의 왕이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자는 열쇠이지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던 선인은 결정했다. 이건 언제까지고 덮어둔 채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가진 수를 모두 사용해야 이길까 말까 한 싸움.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만 했다.

"그자는 비성편을 만든 자입니다."

성주의 주황색 눈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빠르게 세를 넓혀가는 홍채와 위축된 동공을 바라보던 선인이 손톱으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물은 엎질러졌다.

"성주의 눈에는 그자가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다만, 열쇠가 무사히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시지요."

떨리는 동공을 흔들림 없는 노란 눈으로 응시하던 선인이 덧붙였다.

"그자의 손에 팔성국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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