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17화
또 다른 장, 그리고 공백
*잠뜰 TV 스토리 콘텐츠들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흰 화면으로 감상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17화
또 다른 장, 그리고 공백
하나. 이제 그는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
둘. 그러니, 조금만 더.
셋.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넷. 과연 그대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재앙을 넘긴 백성들은 어떻게든 일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력했다. 뿌리째 흔들려버린 오랜 것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당장 당면한 새로운 것들만을 떠들기 바빴다.
"지금 감옥에 들어간 천문관 말일세."
그 짧고 굵은 서두에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아닌 척 하며 듣고 있는 행인들 중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 머리칼을 길게 기른 남성도 있었다. 전 태양선인, 각별이었다.
잠뜰 천문관이 감옥에 들어갔다고? 평범을 가장하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벽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청각에 집중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양의 정보가 들어왔다. 가령 현재 궁궐의 상황이라거나, 그 이방인이 머나먼 곳으로 떠나갔다거나, 그리고…
"그 작자가 천건성군의 끄나풀이었단 설이 있소. 천문관이 시간을 번 사이에 성군이 도망갔잖수!"
"그게 짜고 친 판이었다고?"
"그래! 천문관이 천건성 출신이라잖나. 분명 같은 편이었을 게야."
…헛소문까지.
정정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나섰다가는 여론의 뭇매를 맞을 것이 분명했기에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실패한 역모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어 무엇 하랴.
각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는 그와의 연관 따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는 아무 말 없이, 또 다시 수레바퀴의 방관자로서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각별은 선인의 직책을 내려놓은 이후로 궁궐의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신관에게 말한 것이 모두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별자리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지금은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무대의 장식을 바꾸고 소품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결국 인류의 문명이란 절대적 존재들이 보기엔 끝나지 않는 짤막한 연극들의 흐름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태양선인은 각별이 되었다. 이 이름이 겨울 신이 지어낸 이름인지, 신앙을 먹고 살던 시절의 전부터 쓰던 것이었는지, 어느 생명공학박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각별이었고, 당장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는 평범한 옷과 챙이 넓은 모자를 갖추고,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부채를 들었다. 옷을 구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관은 그가 떠나갔다-그 형태가 죽음이든 소멸이든-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낯짝 두껍게 그리로 찾아갈 수 없었고, 얼핏 봐도 값비쌀 것이 분명한 비단옷은 좀도둑의 목표물이 되기에 가장 적절했다. 은 장신구는 모두 떼어낸 뒤였지만, 그가 천 년간 입어왔던 비단옷이 귀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운 좋게도, 지곤성 외곽의 자그마한 옷 가게의 주인은 전쟁 직전 태양선인이 아이를 구해주었던 그 여인이었다. 처음 그 모습을 본 선인은 조용히 가게로 들어갔다. 그 여인이라면 한 번쯤은 눈을 감아줄 것 같다는 기묘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웃돈을 줄 생각이었다. 슬프지만 인류의 가치 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돈으로 전향된 지는 오래되었으니.
"어, 나리?"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당연히 기억하죠!"
태양선인과 태음신관이 구했던 아이가 어머니의 다리 뒤에 숨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인이 아이를 앞으로 잡아 빼며 말했다. 얼른 인사드리렴. 감사한 분이 오셨잖니. 쭈뼛대던 아이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고개를 숙이며 웅얼거렸다. 잘 들리진 않았지만 아마 인사말일 터였다. 각별은 고개를 까딱여 아이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이구, 내 정신 좀 봐. 무슨 일이셔요?"
"옷 가게까지 온 이유에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옷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평범한, 옷이요?"
여인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야 이런 변방의 옷 가게까지 와서 주문을 하는 이라면 특별한 무언가를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마침 여인의 가게는 수려한 노리개로 유명했더랬다. 더군다나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이 화려한 은 장신구를 걸친 모습이었으니 그런 생각을 할 법도 했다.
"의문스러운 주문이라는 것 압니다만, 도와주시겠습니까? 설명하기엔 긴 사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유, 은인이신데 안 될 리가요."
맞춤으로 하실 건가요? 아님 기성복? 노래하듯 물은 여자가 옷이 모인 곳으로 그를 안내했다. 열린 문의 너머에는 옷감과 가위가 가득한 작업장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와 아이 모두 대피소로 향할 때도 특이한 옷차림이었지. 각별은 독특하게 차려입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정성과 사랑이 느껴지는, 아이와 아주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기성복으로 부탁드리지요."
평소였다면 맞춤복을 요구했겠지만, 이곳까지 오는 데에도 많은 시선이 그에게 꽂혔었으니 최대한 빠르게 이 화려한 옷에서 벗어나야 했다. 여인, 재단사가 두어 종류의 옷을 들고 왔다.
"나리께는, 어떤 옷이 어울리려나?"
일을 즐기는 것이 분명한 재단사는 옷을 이것저것 그에게 대보고 선별하기를 반복했다.
"선호하시는 분위기라도 있으셔요?"
"전문가에게 맡기겠습니다."
재단사가 기분 좋게 웃었다.
.
.
.
…잠깐만. 값을 치르려던 각별이 어딘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엽(葉)을 셈하던 손을 멈췄다. 다시 봐도 뭔가 이상했다.
"이 가격이 맞습니까?"
"당연하지요."
너무 저렴한데. 각별이 중얼거리며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자 재단사는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제값을 받으셔야지요."
"아유, 어떻게 생명의 은인께 값을 온전히 받겠어요."
"하지만-"
"나리가 아니었다면 이 가게는 없었을 텐데요."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셔요. 가볍게 붙인 재단사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내놓을 수 없었다. 이건 마치, 심장을 무언가로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깨달음. 그는 이 마음을 그렇게 명명하고자 했다.
그렇게 제값을 내기 위한 설전은 고객의 실패로 끝을 맺고 말았다. 재단사가 고집을 꺾지 않으리란 것을 눈치챈 각별은 그대로 가게를 빠져나가려던 몸을 멈췄다.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흑백의 몸체에 노란색 술이 달린 화려한 노리개였다. 몇 개의 금속 장식까지 붙인 그것은 제 꽁지깃을 뽐내는 공작처럼 햇살을 받아 빛을 냈다. 노리개의 옆에는 그것과 짝을 이루는 생김새의 부채도 있었다.
"저것도 부탁드리지요."
"예, 가져가셔요."
"아뇨, 저건 값을 치러야겠습니다."
재단사가 몇 번이고 그를 만류했지만, 각별은 아랑곳 않고 막무가내로 재단사의 품에 엽을 쥐여주었다. 표기된 값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이었다. 목표를 달성한 그가 빠르게 점포를 탈출했다.
xXx
그 여름이 음식점 주인이라니!
무언가를 먹지 않아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만큼 무언가를 섭취한 일은 손에 꼽건만, 몸은 어느새 주막의 안으로 들어서 있었다. 여름이 음식점이라니. 여름은 오히려 소홀히 보관된 음식물을 부패하게 만드는 주범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아니었던가.
식당의 코앞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멀뚱히 서 있자니 힐긋힐긋 넘겨보는 시선들이 느껴졌기에 각별은 자리에 앉았다. 여름이 다가와 물었다.
"뭐로 드릴까?"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워 잠시 들여다보던 그가 말했다.
"가장 자신 있는 것으로."
선인은 엽전을 굴리듯 상 위에 내려놓자 여름이 의아한 눈으로 그 놋쇠 덩어리들을 보았다.
"고작 국밥인데요?"
"…이곳은 처음이니 알아서 가져가시란 뜻이었습니다."
아하.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조금은 머쓱하게 말한 국밥집 겸 주막 주인이 동전 두어 개를 챙겨갔다. 각별은 주인과의 거리가 멀어지자마자 참았던 호흡과 한숨을 한 번에 터뜨렸다. 제법 훌륭한 임기응변이었다.
금방 상 위에 올라온 국밥을 한두 숟갈 떠 먹으며, 각별은 주막 손님들의 곁에서 웃는 여름을 응시했다. 처음엔 영 황당하기만 한 조합이었건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잘 어울리기도 했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아왔구나."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리자 옆 상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물었다.
"그건 누가 쓴 시요?"
"그저 깨달음일 뿐입니다."
"오호. 옷차림도 그렇고, 좀 배운 분이신가 보오."
그 추측성 가득한 말에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박사'라는 학위를 달고 있었으니 많이 배운 사람은 맞지만, 그가 배웠다고 주장하기엔 애매했던 까닭이다. 배웠다기보단 덧씌워졌다는 말이 옳으리라.
대화를 빠르게 끊은 그는 다시 생각으로 돌아갔다. 나름 지구의 신 중에서는 고위급에 속하는 그가 알기로, 영혼은 늘 비슷한 텀을 두고 환생한다. 하지만 계절들을 닮은, 심지어는 이름마저 같은 인간들은 운명의 작품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계절들이 존재를 내놓을 만큼 그들의 힘이 약해졌거나, 혹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들이 신의 자리를 박탈당했거나.
아무튼간에, 그와 연이 있던 존재들은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삶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그가 이런 운명의 장난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사이, 그들의 목숨이 몇 번이고 피고 졌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그대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xXx
그렇게 평범하되 흔하지 않은 삶을 영위하던 전 태양선인, 각별은 시끌시끌한 마을 광장 속 인파에 섞여 소란의 근원을 향해 움직였다. 조악하게 쌓인 나무 상자의 무대 위, 한 청년이 사람들의 중앙에서 열정적인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 천문관 말이오, 죽을 뻔한 걸 면했다지?"
"바다 밖 세상의 저주를 풀 방법을 알고 있다잖소. 나 같아도 살리겠는걸."
"하긴,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으니."
"두렵기도 하지만 말이오."
"허허! 이 친구도 참! 유능한 천문관이 있는데 무엇이 걱정인가?"
수군수군, 인파의 한구석에서 바람을 타고 흘러온 소리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대는 또 다시 이 세상을 구원하겠구나.
"그 이방인이 사라졌는데 걱정도 안 되는 거요?"
"자네도 그 소문을 믿나? 이방인? 그거 다 헛소문일세. 영웅을 내세우려다 포기한 흔적을 숭배하지 말게나. 성주께서도 말씀하셨잖아. 이방인은 없다고."
"그 구시대의 산물인 성주 나으리? 난 그 사람을 믿느니 길거리의 소문을 믿겠어."
"에헤이, 왜 그러나. 그래도 나름 현명한 분이셨단-"
계속되는 논쟁으로부터 신경을 돌려 얼굴이 벌게지도록 연설을 펼치는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나무 상자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텅 빈 삶을 살 겁니까! 새 시대를 엽시다! 성군도, 성주도 없는 삶을 누립시다!"
서로 눈치를 보느라 제 의견을 제대로 표하지 않는 군중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청년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고, 사람들은 저들끼리 대화를 시작했다.
"꼭 지금 갈아엎어야 하나? 이미 성주께서도 물러날 준비를 하고 계시는걸."
"수동적으로 세상이 바뀌기만을 기다려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법이지."
긍정이 반, 부정이 반이었다. 혁명의 첫 시작치고는 훌륭한 여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시작되리라.
"차별과 고통이 없는 삶을 누립시다!"
청년의 외침에 누군가의 붉은 눈이 떠오른 그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그대의 바람이 이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라더. 조금은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 그대가 꿈꾸던 고통 없는 세상을 원하는 이들이 나타났군요. …보고 있습니까?
"나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허름한 옷차림을 한 여자가 물었다. 폐성촌이 열렸다고 했지.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고민하듯 부채를 두어 번 젓던 그가 말했다.
"음, 차별과 고통이 없는 삶이라. 실현되기만 한다면 참으로 이상적이겠군요."
여자는 더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도록. 신중하게 고른 말이 느릿하게 입 밖으로 나왔다.
"이참에 천 년간 이어온 낡은 체제를 바꾸는 것도 괜찮겠지요. 누가 뭐라 말한들, 하늘과 신화의 시대는 막을 내렸으니."
그의 나직한 말에 사람들이 중얼거렸다. 아직은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이들의 생각이 기울고, 그 분위기에 휩쓸려 개혁을 불안한 눈으로 보던 이들에게 다른 바람이 불었다. 새 시대를 직접 열고자 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세를 불려갈 때, 그 새로운 불길에 기름을 들이부은 자는 조용히 혁명의 자리를 빠져나왔다.
혁명이 실패하면 난(亂)이 되고 성공한 난은 혁명이 된다지. 이 움직임은, 필시 하나의 거대한 혁명이 되어 세상을 뒤바꿀 파도를 불러오리라.
"이래서야 원, 마음 편히 떠날 수가 없잖습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지켜봐야겠다. 새로운 팔성국이 세워질지, 새로운 폐성촌이 나타날지. 어쩌면 새로운 비성편이나 붉은 혜성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지를.
겨울신, 생명공학박사, 태양선인 각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언제나 내 곁에 있었던 그대를 위하여, 나와 우정을 나눌 수도 있었던 그대를 위하여, 늘 그리웠으며 앞으로도 그리울 그대를 위하여, 과히 희망적이었던 그대를 위하여. 그리고…,
"-그대가 바꿔 나갈 모든 것들이, 부디 저 태양보다 찬란하기를."
언제나 그 자리의 중심에 존재했던 그대를 위하여.
-1부 完.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