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4화
친애하는 오랜 벗
*잠뜰TV 스토리 콘텐츠들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흰 화면으로 보시는 것을 권장 드립니다.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4화
친애하는 오랜 벗
하나. 나는 선택형 불멸자다.
둘. 불멸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 내 눈앞에 있다.
셋. 즉 난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삶을 끝낼 수 있다.
넷. 그리고 나는 차마 그리할 수 없다.
그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나의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몇백 년의 시간이 지나도 팔성국과 왕권은 견고했고, 타지와의 무역과 정보적 교류가 없으니 '바다 너머의 땅'을 죽음이 가득한 저주받은 곳으로 덮는 것 또한 수월한 일이었다. 진실에 거짓이 섞였을 때 거짓을 구별해내기 가장 어려운 법이라지. 총리는 그 사실을 이용할 줄 알 만큼 똑똑한 사람이었다.
수십 명의 지곤성 성주들이 땅에 묻히고, 다시 왕관을 쓰기를 반복했다. 그 기나긴 수백 년의 시간 동안 인간이 폭탄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하려 노력했다. 다른 기술들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많이 발전할 무렵 결국 흘려놨지만. 적어도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학살할 만큼 부정확한 무기의 수준을 벗어났을 때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우라늄을 연쇄적으로 폭발시킬 수 있음을 최대한 돌려서 알려주었다. 다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름을 바꿔놓아서 자연스럽게 말하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어느날, 아마 약 200년 전, 이들이 도력이라 부르는 과학 기술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도사가 왔었을 때였을 것이다. 그 도사가 처음으로 핵분열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고, 건너건너 그 기술에 대해 전달받은 나는 무고한 사람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죽을 것이란 이유로 그의 기술을 반려(返戾)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재능을 활용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당시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으니까. 아직은 그 기술을 풀었다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갈 확률이 크다고 생각했으니까. 수많은 목숨보다 눈앞의 발전을 더 중요히 여기는 인류의 특성이 걱정스러웠고, 그 힘을 이겨내기엔 조악하기 짝이 없는 나의 핑계는 괘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은 인간이 갈망을 억누르게끔 도와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인."
봄의 신을 만났다.
왜, 어째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나처럼 신으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렸나? 하지만 그런 일을 벌일 이는 결코 아니건만.
심지어 날 알아보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대에겐 아주 짧은 시간이겠지만 저는 당신의 지식에 평생 감사하게 되겠지요."
혼란스럽다.
"언제나 그랬듯 비성편을, 팔성국을. 부디 수호해주소서."
다른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어야 해. 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지곤성의 새 성주 수현-놀랍게도 이름까지 같았다-은 제가 알던 봄의 신과 성격도 비슷했다. 나긋나긋하고, 쉽게 화를 내는 법이 없으며, 얄팍하게 보면 유약한 것도 같지만 결코 쉽게 휘어지지 않는 곧은 성격. 그래, 외유내강을 지닌 군자(君子)였다.
생각에 골몰한다고 답이 나오나. 그저 닮은 사람이겠지. 이만큼 살았으면 한 번쯤은 만나볼 때가 됐다. 마음은 그렇게 넘어가지 못했고 결코 그러지 못하겠지만 머리로 애써 혼란을 덮었다.
봄, ···성주가 떠나고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 애쓰면서 책상에 팔꿈치를 얹었다. 새하얀 부채를 만지작거리며 등 뒤로 몇 번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태양 빛을 느꼈다. 늙은 태음신관이 문을 두드렸을 땐 밖이 유독 소란스러웠다.
"선인, 신입 도사가 할 말이 있다면서 문 앞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돌려보내세요."
"선인께서 바쁘시니 가라고 몇 번이고 말했는데, 꼭 선인과 대화해야 한다면서···. 매일같이 찾아와서 창문 쪽에서 계속 소리만 지르고 있습니다. 지금 여시면 눈 마주치실 테니 열지 마십시오."
창문에 손을 뻗자 신관이 재빠르게 말렸다. 어차피 조금만 열 텐데, 얼마나 심하길래.
툭, 벽에 무언가 닿는 소리가 들렸다.
"…저게 무슨 소리인지 압니까?"
"글쎄요, 돌이라도 던졌으려나요….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네요. 목과 머리가 분리되기 딱 좋은 행동으로 저것만 한 것이 없을 텐데."
"태양선인이시여! 제발 딱 한 번만 대화하게 해주십쇼! 아 딱 한 번만!"
"저 젊은이를 어떡할까요, 선인?"
새어나오는 한숨을 막지 않자 태음신관의 주름진 눈에 웃음이 맺혔다.
"신관이 보기엔 어떻습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 같던가요?"
"판단을 이 늙은이에게 맡기시면 안 되지요. 선인께서 물으신다면, 적어도 대뜸 선인께 무기를 겨눌 사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요즘 유능하다고 이름을 떨치는 중이라더군요."
"…들여보내십시오. 신관을 믿어보겠습니다."
"허허, 잠깐 보는 사람을 너무 믿으십니다."
"그대들의 신뢰만 하겠습니까. 어찌 하나같이 내게 인생을 거는 것인지. 따지고 보면 내겐 그대는 스쳐 지나갈 뿐이고, 온 삶을 바치는 것은 당신들이잖습니까."
신관이 부드럽게 웃었다. 중간에 그만두겠다고 말하면 충분히 고즈넉한 여생을 즐길 수 있음에도 늙은 몸을 이끌고 내 곁에 남겠노라 선언한 한 인간이.
"선인께서는 이 나라의 중심이시니까요."
xXx
"도사 덕개가, 태양선인을 뵙습니다."
…덕개?
목 끝까지 올라온 친애하는 옛 벗의 이름을 억지로 꾹 눌러 삼켰다. 시선이 눈앞의 고개를 조아린 인간의 정수리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밖에서 그렇게 고함을 질러대더니 정작 차분하게 고개를 숙인 그 모습에서.
왜?
의문이 몸을 타고 기어오른다. 그것은 마치 다리가 달린 뱀처럼 내 무릎에 제 손아귀를 뻗고, 날름거리는 혀로 나의 심장을 건드렸다.
나 때문에 죽었으면서 어째서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왜? 도대체 왜? 날 괴롭게 만들려는 운명의 수작질인가? 아니, 애초에 운명이 아직도 내게 관심을 두고 있나? 그들에게서 난 잊혀진 것 아니었나?
그리고, 그대도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떨리는 손으로 부채를 집어 얼굴 근처에서 펼쳤다. 그렇게 얼굴을 가리고 나서야, 그에게 고개를 들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익숙하고도 낯설며, 또한 지독히 그리워했던 얼굴을 보며 일그러지는 눈가를 어찌 감출 수 있을까!
다시는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혹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예?"
그래, 날 기억할 리가 없지.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며 당연하게 느껴야 할 안도감은 오질 않고, 입 안은 왜 이리 씁쓸하기만 한지.
"아니, 됐습니다. 왜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까? 내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도사로서의 삶은 끝나버릴 텐데."
"조언을, 받고 싶었습니다."
현대의 인간들은 내가 누르면 미래와 운명을 고려해 최고의 선택을 알려주는 마법의 존재쯤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원래 나는 비성편에 손을 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로 존재했건만.
"제가 어떤 것을 만들어내야 할지, 무엇을 위한 것을 만들어내야 할지. 아직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단순히 제 이름을 떨치기 위해 물건들을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유명세를 원했다면 다른 길을 갔을 것입니다. 제게 그 길에 대한 실마리를 비춰 주십시오. 저는…,"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작게 말했다.
"-싸움을 막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면까지 닮는 건지. 속에서부터 울렁거리며 올라오는 덩어리를 삼켰다. 아팠다. 오랜만에 출렁이는 감정의 파도가 낯설기 짝이 없었다. 적어도 그가 이곳에서 나갈 때까지, 이 파도를 견뎌내야만 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로 기억되는 나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나는 나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감춰야만 했다.
"무엇이든,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겠지요. 군사력은 반역을 막을 수준이라면 충분합니다. 다만, 인간을 돕기 위함이라면 얼마든지 발전해도 좋습니다. 싸움을 막기 위한 삶은, 다르게 말한다면 타인을 위한 삶이 되지요. 남을 먼저 도우려 나서는 이들이 상처받지 않을 방법을 찾아보십시오."
한참을 무언가를 삼켜내다 한 말은 성에 차지 않았다. 기껏해야 당신이 알려준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 밖에 되지 않았다. 선한 마음을 가진 자를 소중히 하라. 나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마음 같아선 당장 옷자락을 붙잡고 나를 기억해달라고, 당신의 오랜 벗을 알아봐달라고 호소하고 싶었다. 그대가 그토록 아끼던 가난한 나그네가 눈앞에 있다고. 그대에게 거짓말을 하고 책임지지 않은 어리석은 친우가 그대를 또 다시 속이려 들고 있다고. 그래도 난 당신을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잊지 않았으니, 그대도 나를 알아봐달라고. 외롭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이기심을 타고 흘러넘쳤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라,
"이것이, 그대를 위한 답이 됐을지는 모르겠군요."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대가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은 없도록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또 맹세했다. 누구에게 했는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절대 넘을 수 없는 벽 너머의 방관자일까, 당신일까, 혹은 나 자신일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그대가 날 원망하고 미워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만큼은 살려낼 것이다.
"…선인께서는 참 신기한 분이십니다. 무턱대고 찾아온 새파랗게 젊은 도사를 들여보내 주시질 않나, 정성스럽게 의문에 대한 답까지 해주시질 않나."
들여보내준 것까진 별 의미 없었지만, 어떻게 그대의 질문에 답해주는 것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을까.
"선인이시여, 이미 무례한 짓은 다 했으니 질문 한 가지만 더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저 액체는 무엇입니까?"
그의 시선 끝에 놓인 것은 내 영생을 끝내줄 해독제였다. 아까부터 계속 궁금해서…, 낯설게도 앳된 얼굴을 한 늙은 벗이 소심하게 덧붙였다. 그대에게 어떻게 알려주어야 할까.
"…저건, 선택입니다."
젊은 도사는 한참 말이 없었다.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시는군요."
해독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도사 덕개는 아주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표정과 목소리엔 읽을 수 없는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내심 그 똑똑한 머리로 나의 말속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봐 주길 바랐건만. 젊은 도사는 결국 선인의, 팔성국의 비밀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다. 혹은 그러지 못한 척을 하고 있거나.
"당신에겐 수수께끼가 아니려나요."
그의 마지막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입 모양으로 미루어보아 아래와 같은 말을 했으리라 추정할 뿐이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인.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나가려는 그를 멈춰 세웠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찾아오는 일은 없도록 하십시오. 그대가 한 행동은 지나가다 본 무관이 그대로 목을 쳐도 살인의 죗값을 치르지 않을 정도이니."
도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문이 닫혔다. 바로 들어오려는 태음신관을 물러내고 부채를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운명이 원망스러웠다.
왜 다시 만나야 하는가. 왜 다시 나의 죄악을 마주쳐야 하는가. 운명이여! 왜 내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운명은 본디 계절의 신들과 친밀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들의 틈에 숨어들어 한 번씩 예언자-넘쳐나는 가짜들 말고 진짜 예언자 말이다-행세를 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더 즐겼다.
그리고 그는 유독 내 곁에 자주 머물렀다.
운명에겐 뚜렷한 형체나 정해진 외형이 없다. 정확히는 모든 존재들에겐 말이다. 기본적인 외형은 있는 신들과 달리 존재들은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존재들에겐 본래의 모습이라는 뿌리이자 제약이 없다. 그들은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고 인간들, 혹은 신들의 사이에 숨어들었다. 어느 날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어느 날엔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어느 날엔 내 동료의 모습으로. 운명은 그런 다양한 형태들로 날 당황하게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죽음과 운명이 유독 외형을 바꾸는 것을 즐겼지. 죽음이 영혼의 기억을 보고 생전에 고인이 사랑하던 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바람에 이런 속설도 생겨났다고 들었다. 죽음은 가장 사랑하는 이의 모습으로 찾아온다.
운명의 입장에선 날 놀라게 하는 것이 한참이나 어린 신을 괴롭히는 일종의 취미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에게 가장 가까운 겉껍데기를 꼽으라면 무조건 어린아이의 모습일 것이다. 실제로 그도 그 모습을 선호했다. 무릎까지 오는 갈색 반바지에 하얀 로브를 뒤집어쓴 천진한 꼬마 도련님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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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봄의 모습으로 찾아왔을 때의 일이었다. 그날은 봄이 지을 리가 없는 얄궂은 미소와 눈빛으로 날 쳐다보기에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알아봤었다.
"운명이시여. 오셨군요."
"그렇게 빨리 알아보면 재미가 없잖아!"
"그런 거였습니까…?"
"자네가 애초에 그렇게 활발한 성격은 아니니 재미있는 반응이라고는 놀라거나 당황하는 것 뿐인걸."
"그, 봄의 신의 모습부터 벗고 말씀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 이런 거!"
그때의 운명은 제 모습으로 돌아오며 -원래의 모습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한참을 키득거렸었다. 그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품고 있던 의문을 내놓았었다.
"운명께선, 왜 이리 제게 관심을 보이시는 겁니까?"
운명은 입을 벌렸다. 마치 그걸 여태껏 모르고 있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자네 놀리는 게 재미있으니까."
"그건…, 부수적인 이유잖습니까. 수많은 신들 중에 저와 성격이 비슷한 신이 꽤 많을 텐데요. 그것 말고 진짜 이유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하, 둔해 보이는데 은근히 눈치가 빠르단 말이지."
운명은 턱을 괸 손으로 뺨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했다.
"이거 말한 거 시간한테 들키면 완전 혼날 텐데."
"그런 거면 말씀하지 마십시오. 괜히 저까지 휘말리고 싶진 않습니다."
"에이, 시간이 널 소멸시키기라도 하겠니! 어차피 죽음이 귀찮다고 신의 소멸로 끌고 가지도 않을 걸?"
"그건 존재들께만 해당하겠지요. 존재들에 비하면 신은 아주 나약하잖습니까. 그리고-, 신은 대체할 자를 찾는 것이 쉬우니까요."
운명이 아주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들키면 나 혼자 혼날게. 그러면 되지! 그러고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자네의 운명을 만들었거든."
"…예?"
"말 그대로. 내가, 자네의 운명을, 빚어냈다고."
얼마 안 됐어. 한, 일주일 정도? 그동안은 간만 보고 있었거든. 운명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 방금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극소수에게만 내려지는 운명을 내게 줬다고 말한 얼굴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언제나 그랬듯 눈을 가린 채 휘날리는 하얀 로브, 그리고 뒷배경의 봄과 여름이 열심히 가꾼 녹음의 정원. 그리고 환하게 웃는 운명의 모습까지. 그날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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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그렇게 말간 얼굴로 나의 그 최후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에 약간의 배신감이 들고는 했다. 다 가지고 놀았으니 버리는 건지, 다른 방법으로 가지고 놀기 위한 행동이었던 건지. 이젠 후자임을 알지만.
운명은 내가 겪은 일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봄의 신을 닮은 인간을 내게 보내고, 옛 벗과 같지만 다른 이를 이곳에 보냈다. 생명께서는, 운명은 워낙 그런 부탁을 자주 했으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테고.
운명은, 그 운명이라면, 아마 날 지켜보고 있으리라.
"아직 옛 버릇을 버리질 못하셨군요, 운명이시여."
그 맹랑한 존재는 분명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한껏 기대하며 키득거리고 있겠지.
"…이젠 만족하십니까? 그대의 충직한 친구가 내비친 감정에 만족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기를."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한가.
"솔직히 말해, 꽤 바쁘시잖습니까? 사랑과 열심히 사냥감 수색이나 하십시오. 오래전에 자격을 박탈당한 무능한 신만 붙잡지 마시고."
혀에 독을 올려 열심히 뱉어댔지만 속은 후련하지 않았다. 차라리 운명이 아니라 시간이나 죽음에게 대들었다면 확실하게 소멸당할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을 무시한 생명체라. 시간에 따른 소멸을 관장하는 두 존재의 분노를 부르기 딱 좋은 조건 아닌가?
…덕개, 덕개. 나의 가엾은 친우여. 벗을 잘못 사귀어 고생이 많군, 안 그런가?
나도 자네를 처음 만날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내가 알았더라면…, 그대의 창고를 꽉 채우기 전 나중에 자네를 고발할 자를 하얗게 지우고, 자네를 한기 속에서 사그라들게 만든 감옥을 얼려 깨부수고.
자네가 '원한다'는 한 마디만 해준다면 어리석은 왕실을 멸할 수도 있었으련만! 내가 알았더라면 진즉에….
진즉에 자네가 내게서 피할 수 있도록 했을 텐데.
지금은, 지금은 자네가 내게서 떨어져 평안한 삶을 간직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붙여 자네를 이 자그마한 섬의 맨 끝으로 유배 보내버릴 수도 있지. 난 태양선인이고, 내겐 권력이 있으니까.
다만 나는 그럴 자신이 없네.
"겁이 많은 날 알아주게, 친구여. 용서는 감히 바라지도 않아. 그저 이해라도 해 주게."
영생을 끝낼 용기도, 친애하는 고우(古友)를 멀리 떨어뜨릴 용기조차 없다. 난 겁이 많다. 난 힘이 있으면서도 내 친우를 돕지 못하는 자였다. 고작 나의 안위가 두려우니까.
아니지. 나의 안위가 두려운가, 다가올 예측하지 못할 미래가 두려운 건가. 무엇이 됐든 내가 겁의(怯疑)에 빠졌단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리고 자네가 망연자실할 것이 뻔한데, 그 인생을 두 번이나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이것도 공포라면 공포겠지.
나는 언제나 그랬다.
아마 영원히 바뀌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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