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지난한 헤맴을 겪었다지만, 우린 결국 다음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기 때문에.
“경위님. 여기 계셨습니까?”
“라경장? 무슨 일이라도 있나?”
몸을 돌려 출입문 쪽을 쳐다볼 것도 없이, 어느새 난간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라경장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붉은 머리카락 위로 노을이 내려 한층 더 짙은 색으로만 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는 한 쪽 손을 들어 들린 것을 잠경위에게 보여주었다. 캔커피였다.
“이거, 티순경이 사왔더라고요. 드리려고 보니까 자리에 안 계셔서.”
“나 원…. 그냥 자리에 두면 될 것을 뭣하러 날 찾기를 찾나?”
라경장이 건넨 캔커피를 받아든 잠경위는 자연스럽게 캔의 고리를 잡아당겼다. 한 모금을 넘기자 느껴지는 맛은 약간 씁쓸함이다. 입에 남는 것은 언제나처럼의 입이 텁텁해지는 단맛과 프림 맛. 익숙해졌다는 것이 슬프긴 하지만, 피곤할 때는 이만한 게 또 없었다.
“…뭐, 그 김에 저도 숨 좀 돌리는 거죠. 그나저나 수경사님 흉내라도 내시는 겁니까? 웬일로 옥상에 다 오셔서.”
“……그냥. 생각을 좀 정리할까 싶어 말이지.”
“생각이라면, 오늘 서로 들어온 용의자 건 말하시는…….”
잠경위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쓴웃음을 지으며 캔커피를 마셨다. 무언의 긍정이다.
늘 그렇지만 성화경찰서는 조용하게 일 없이 넘어가는 때가 없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모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어, 무기력한 낯으로 잡혀들어와서는 얌전히 수경사에게 취조를 받던 용의자가 취조 도중 소란을 피워 제압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 잠경위가 마침 취조실 근처를 지나가고 있어 곧바로 뛰어들어갔기에 큰 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용의자가 한 말이 신경쓰이는 겁니까?”
이번에도 대답 대신에 잠경위는 커피를 들이켰다. 잠경위의 팔에 구속되어 제압당하던 용의자는 몸부림을 계속하며 말했었다. 그러면 자신은 도대체 뭘 할 수 있었던 것이냐고. 나에겐 아무것도 없었는데, 뭘 어떻게 해야 했던 것이냐고.
글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물론 잠뜰 경위라는 사람은 그 사람을 위한 대답 같은 것을 내려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자신은 그저 가진 것을 쥐고 걸으며, ‘일 것이다.’ 를 ‘이다.’ 로 만드는 사람이므로.
“라경장.”
“예, 듣고 있습니다.”
“…라더야. 우린 참 운이 좋은 걸지도 몰라.”
해가 저물며 빛이 서서히 떠나가고 있었다. 잠경위는 도로 너머로 사라져가는 해를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는 우리 신념 같은 걸 참 빨리도 찾았잖아. 누군가는 그걸 찾을 기회가 삶에 있는지조차, 삶에 신념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 사는데 말이야. 손을 떠나지 않는 믿음을 가지게 된 우리가 정말, 운이 좋은 거야.”
라더야. 잠뜰이 나직한 목소리로 올곧은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해가 숨어 세상이 어스름이다. 따로 라더의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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