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대관식 의복
혁명 | 라더
별의 나라 에투알. 이곳도 한 때는 사람들이 나름의 소박한 꿈을 꾸며 살던 평화로운 나라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는 시간 속에 흐려질 과거의 일이 되었다. 현재의 에투알은 크고 작은 시위가 끊이지 않는 위태로운 나라였다.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나라는 이제 새로운 왕을 맞이하게 되었다.
라더는 왕성의 한 회랑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그의 신분을 상징하듯 무거운 왕관이 얹어져 있다. 흰색 벽에 걸린 커다란 초상화 두 점에 그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한 그림 속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검은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있었다. 다른 그림에는 날카로운 인상에 굳은 표정의 갈색 머리 남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라더는 말없이 그 두 그림을 응시하였다. 늘상 긴장하고 있었던 것인지 일이 쉼 없이 많아서였는지, 그의 눈가는 피로로 가득했다.
복도 끝에서 인기척이 났다. 구두가 바닥을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인기척을 느낀 라더는 그림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는 이의 얼굴을 확인하자, 짙은 피로도로 굳어있는 그의 얼굴로 놀라움이 퍼졌다.
그녀는 질 좋은 원단으로 만든 고동색 자켓을 입고, 하얀 크라바트를 단정히 메고 있었다. 손등을 반만 덮는 검은색 가죽 장갑 낀 손은, 사용감이 가득한 수트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회색 레이스로 장식된 검은색 모자 아래로 갈색 머리카락이 그녀가 걸을 때마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흔들린다.
놀란 라더와는 다르게 잠뜰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떠오르지 않았다.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모자를 벗고, 검은색 부츠를 신은 발 하나를 뒤로 빼고,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예를 올린다.
"골든 살롱 소속, 디자이너 잠뜰입니다."
"…다른 사람이군."
잠뜰의 예를 받으며 잠시간 그녀를 바라보던 라더는 한숨처럼 작게 그 말을 내뱉었다. 누군가와 그녀를 착각한 것일까? 그러나 잠뜰은 그것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 것 같았다. 혹은 이미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했었다거나.
"제가 기다리게 하였나 봅니다."
"그댄 정시에 왔다. 내가 일찍 왔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이만 가지."
라더는 따라오라며 손짓하고는 복도 끝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잠뜰은 벽에 걸린 초상화를 곁눈질하다가 라더의 뒤를 따랐다.
붉은 융단이 드리워져 있는 그곳은 커다란 책상이 서너 개 놓여있고 벽에는 옷감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 다양한 옷본이 놓여있고 갖가지 색상의 실이 놓인 책장이 즐비하게 있는 것이 궁중 사람들의 옷을 만드는 곳 같았다. 잠뜰은 진열된 옷감을 살짝 만져보았다. 흔히 볼 수 없는 고급 원단이었고 상태도 좋은 것들 뿐이었다.
"그대에게 의뢰하고 싶은 건 내가 대관식에서 입을 옷이다."
"대관식 의복 말씀입니까?"
"그렇다. 본래는 왕실 디자이너들에게 맡겨야 하는데, 나라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혼란을 틈타 전부 도망가버려서. 기존에 있는 옷으로 대관식을 치르려 하니 근위대장이 그건 절대 안 된다고 펄쩍 뛰길래 그대를 불렀다. 신분도 출신 나라도 비밀이나 그만큼 에투알과는 관계없는 사람이니, 나와 연관된다고 하여 문제가 생길 걱정도 없을 것 아닌가."
잠뜰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 좋은 의상실이 있는데도 왜 외부 디자이너인 자신에게 왕의 대관식 의복 같은 중요한 일을 의뢰했는지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오는 길에 봤던 에투알의 길거리에서 긴장감과 혼란이 느껴지는 것이 나라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왕을 모시는 자라는 이유만으로 눈총을 받을 수도 있고, 의상 제작을 핑계로 왕에게 접근해 그를 공격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에투알과는 전혀 관계없는 외부인인 잠뜰이 가장 적합한 선택지였을 것이다.
"이곳은 그대가 옷을 만들 동안 작업 공간으로 사용하거라. 필요한 것은 웬만하면 다 있겠지만 혹여 더 필요하다면 시종에게 말해두도록. 아, 치수에 관한 것은 이전에 기록해 둔 것이 저쪽 서랍에 있다 들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작업하는 데 소요될 시간은 어느 정도일 것 같은가? 열흘 정도는 걸리겠지?"
"에투알의 대관식 의복이 특별히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까?"
"푸른색 어깨띠를 하는 것 이외에는 따로 정해진 것은 없다."
"그렇다면 몇 시간 정도면 충분합니다."
라더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리 실력 좋은 디자이너라 해도 그렇지, 여러 명이 함께 며칠씩 걸려 만드는 옷을 단 몇 시간 만에 혼자서 하겠다니. 허풍을 넘어서 왕을 기만하는 말이었다.
"농이 지나치구나. 그렇게 대충 만들 옷이 아니다."
"대충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손이 조금 빠른 것뿐입니다. 믿기지 않으신다면 제작과정을 지켜보셔도 됩니다."
잠뜰은 자신의 수트 케이스를 열며 담담히 말하였다. 허세가 아니라 진실이라고 말하는 그 당돌함에 라더는 기가 찼지만, 이 젊은 디자이너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마침 오늘 일정은 다 마친 터, 잠깐 이 디자이너의 실력을 지켜보다 갈까. 그리 생각하고 라더는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자신의 짐에서 이것저것 꺼내는 잠뜰을 지켜보며 라더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잠뜰의 수트 케이스는 가로는 사람의 팔 하나 길이, 높이로는 그것의 반 정도 되는 크기였다. 그러나 잠뜰이 그 안에서 꺼내는 의상 도구들은 그 가방에 담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게다가 가방 안을 뒤적이는 소리로 보아 그 안엔 여전히 도구들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잠뜰은 라더의 그런 의아함을 알아차린 것인지 먼저 입을 열었다.
"디자이너의 가방은 요술 주머니랍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니다, 됐다."
라더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애초에 의뢰를 넣을 때도 선금으로 준비한 돈주머니가 눈앞에서 사라진다거나 의뢰에 응한다는 답신이 공중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등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런 디자이너의 수트 케이스가 평범한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잠뜰은 기초적인 준비를 끝내고 옷감을 고르려는 듯 옷감이 쌓인 곳으로 이동하며 물었다.
"폐하께서 추가로 원하시는 사항은 없습니까?"
"형태나 자수는 그대 뜻대로 하라. 다만 외투 색상은 검은색 계열로 하면 좋겠군."
"검은색 말씀입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대관식 의복으로 밝은색을 선호하시는 분들을 주로 만나봤던 지라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선왕께서 떠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대관식에서 밝은 색상을 입고 싶진 않네."
라더는 짐짓 별거 아니라는 듯 덤덤히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잠뜰은 그의 눈에 그리운 빛이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검은색 옷감 몇 가지를 살펴보다 두어 필을 고른 잠뜰이, 그것을 책상 위에 펼쳐놓으며 물었다.
"폐하의 어머니셨습니까, 아버지셨습니까?"
"아버지셨다. 어머니께선 오래전에 먼저 떠나셨지."
"선왕께선 폐하께 어떤 분이셨습니까?"
"…멋진 아버지였지."
"그 짧은 문장에 담기엔 더 많은 것을 추억하게 하는 분 아닙니까."
"하하, 바쁜 사람 앞에서 감성적인 추억팔이 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지. 의뢰 내용에 신세 한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잖은가."
"그저 손만 놀리기엔 긴 시간이니 이야기를 듣는 것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원치 않으신다면 이야기하실 의무는 없습니다."
잠뜰은 자신의 수트 케이스에서 또 다른 옷감 한 필을 꺼냈다. 이곳에 있는 옷감에는 정확히 자기가 원하는 색상이 없었던 것 같다. 작은 가방에서 나온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주름 없이 깨끗한 옷감을 펼치며, 잠뜰은 목탄으로 몇 가지 표시를 그렸다.
"저는 에투알에서 아주 먼 나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나라의 과거도, 폐하의 과거도 모르는 사람이고, 제가 보고 들은 것을 에투알에 흘리고 갈 일도 없습니다. 폐하께서 이 방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주시든 간에, 그것이 다른 곳으로 새 나갈 일은 없단 말씀입니다."
"…."
"때로는 입 밖으로 내뱉는 것만으로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잠뜰은 라더의 대답을 기다리며 옷감을 잘랐다. 왕의 자리는 무겁고 그 자리에서는 한 마디 내뱉는 것조차도 많은 계산을 해야 하는 곳이다. 자신의 말이 어떻게 왜곡되고 어떤 의도가 심어질지 모르는 곳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곳에서, 부모의 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감정 표현은 극히 제한되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억지로 짓눌러 가라앉히는 것뿐이었을까.
"…그럼, 들어주겠는가."
잠뜰은 말없이 단지 실 색상을 고를 뿐이었다. 격한 반응이나 지나친 동정 같은 것 없이, 그러나 말을 허투루 흘려듣지 않겠다는 듯이. 스스로 말하기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자신의 일을 하며 조용히 기다렸다. 라더는 그 점이 편하였는지 조금 긴장을 누그러진 듯하였다.
"아바마마께선… 멋진 아버지라 하긴 했지만, 사실 어렸을 땐 썩 좋은 기억은 없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성년이 되기 전까지 별궁에서 자랐는데, 아바마마께선 본궁에 지내시며 거의 오지 않으셨거든. 일 년에 용안을 뵌 날들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생일 때도 궁인들의 축하를 받기만 하였지, 아바마마께 무언가 받은 기억은 없어. 나중에 안거지만, 어마마마를 잃은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던 거였다. 나의 생일이, 어마마마의 기일이었거든."
잠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라더 역시 잠뜰의 반응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바늘이 옷감을 통과하는 소리 사이사이로 라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니께선 날 낳자마자 돌아가셨기에 얼굴도 뵌 적 없고 목소리도 들은 적 없다. 유일하게 아는 얼굴은 아까 자네도 본 초상화에 그려진 얼굴뿐이지. 그 물감 붓칠 몇 번이, 내가 어마마마에 대해 아는 전부다."
잠뜰은 이곳에 오기 전 복도에서 봤던 초상화 두 점을 떠올렸다. 여성의 초상화가 남성의 초상화보다 더 오래되어 보였던 것이 그 이유여서였을까.
"뭐, 지금은 괜찮다. 아주 어릴 때 일이라 잘 기억도 안 나거니와,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무렵부턴 아바마마께서 자주 와주셨거든. 어렸을 때 소중한 친구도 만나서 외로운 시간을 이겨낼 수 있기도 했고…. 그래서 지금은 서운한 마음 같은 건 남아있지 않다. 그저, 조금 더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만이 남아있을 뿐이야. 그렇게 급작스럽게, 그렇게 고통스럽게 가시지 않았다면…."
라더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버지가 독살당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힘든 기억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느리게 내쉬는 소리가 들린다.
"아바마마께서 별궁으로 오시기 전에 매일같이 날 찾아와준 건, 각별이라는 대신이었다네. 바쁜 일정이 있어도 날 찾아와 이야기를 하다 가고, 생일이면 커다란 선물을 가져다주곤 했어. 무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말이야. 외로운 궁에서 그만큼은 믿고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피 하나 이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를 내 가족, 내 삼촌처럼 따랐지. 그런데…."
조금 전보다 더 긴 침묵이 이어진다. 잠뜰은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며 소매에 달 단추를 골랐다. 에투알 왕가의 문양이 생긴 금색 단추를 선반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대가 오기 조금 전, 부하가 어떤 사건의 조사 결과를 보고해주었다. 아바마마께서 급작스럽게 떠나게 된 사건과, 어마마마의 마지막에 대한 의문점에 대한 조사였지. 그런데, 그 사건들의 범인이…."
촛불이 살짝 흔들린다. 그에 따라 벽에 비친 라더의 그림자가 크게 흔들렸다.
"20년간 가족이라 믿었던 이가 나의 부모님을 살해한 자라면, 그대는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잠뜰은 바느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라더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맞잡은 두 손이 떨리는 것은 볼 수 있었다.
"믿고 싶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어. 평생 내 앞에서 나를 이끌어줄 거라 믿었던 아바마마께선 갑자기 눈을 감으셨고, 가족과도 다름없다고 생각한 이는 나의 가족을 죽이고 내 숨통을 죄어오고 있어. 사랑하고 아끼라 배웠던 백성들은 나를 원하지 않고, 소중한 나의 친구는 아주 잔인하게도 그 사실을 내 앞에서 직접 말해줬지."
비통함에 목이 멘다. 이렇게까지 속내를 깊이 내보인 적이 없어서인지, 점점 감정적으로 격양되어간다. 그의 어조는 담담했지만 마치 소리치는 것 같았다.
"이 자리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도, 내게 포기하고 도망가라고 말했던 친구는, 그 말이 내게 얼마나 잔인했을지 알았을까? 그 말이 나를 조롱하거나 무시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내 안위를 걱정해서 나온 말이란 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고 있을까?"
그날의 일이, 지금 저의 앞에 있는 이와 똑같은 얼굴의 친우가 내뱉은 말들이 비수처럼 자신을 겨냥하던 그 일이 떠오른다. 화를 내며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감추고 급히 궁으로 돌아온 그 시간이 비참하게도 뚜렷이 떠오른다.
라더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 격양되었던 전과 다르게 이제 그의 목소리는 슬프게도 가라앉아 있다.
"나는 지금, 누굴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네. 내가 모든 것을 망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태어났기에 어마마마께서 돌아가셨고, 내가 왕좌를 물려받게 하려고 아바마마께서 비참하게 눈을 감으신 것 같고, 내가 그를 신뢰했기 때문에 각별 대신이 손쉽게 내 주변 이들을 헤칠 수 있었던 것 같고, 나와 친구이기 때문에 내 친우를 곤란하게 하는 것 같고, 내가 이 자리를 지키겠다고 고집하는 것이 백성들을 더 괴롭게 하는 것 같네. 내가 이 왕성을 떠나는 것이 옳은 선택인 것 같아서 괴롭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 내 이상과 바람, 내가 평생을 목표로 해오고 노력했던 것이, 모든 것을 망치기만 하는 것 같아서, 내가 살아온 삶이 전부 틀린 것 같아 괴로워."
얕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그가 느끼고 있는 불안함을 보여준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자신을 내모는 이 상황이 두려웠다. 자신이 노력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착잡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도 포기하라고 말하는 이 상황에 억지로 가라앉혀지고 있었다.
"살다 보면,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잠뜰이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책상 위 자신이 만드는 옷에 있었다.
"절대 도망쳐서 안 되는 상황에 도망가고만 싶게 만드는 순간들도 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조차 우리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아니겠습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오는 길에 폐하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아마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라더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지지한다는 백성들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괜찮아질 거라고 자신을 믿어주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나라 전체에 비하면 그들의 수는 적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의 숫자가 적은 것도, 그들의 목소리가 작은 것도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총탄 소리가 날 수도 있는 이곳에서 폐하를 지지하고 있는데, 그들의 마음이 어찌 작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이들의 믿음을 받고 있는데, 어찌 폐하의 길이 틀린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도 결국 내 고집 때문에 불행해진 것 아니더냐. 내가 진작 포기했으면 그렇게 투쟁할 일도 없고, 궁 안에 남아있는 내 사람들도 불안해할 필요 없을 텐데. 내 고집으로 그리된 것 아니냐."
"그들의 선택을 그리 깎아내리지 마십시오, 폐하. 그들은 폐하의 고집 같은 것으로 억지로 이곳에 남은 것도, 들고 일어선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폐하도, 그리고 폐하의 이상도 지키고 싶어 그들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인 것입니다. 폐하의 이상은 폐하 혼자만의 고집이 아니라, 그들도 동의하고 함께 이뤄가고 싶은 꿈인 것입니다."
라더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껏 그는 자신을 믿어주는 자신의 근위대와 백성들에게 무척 고마워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그들이 힘든 상황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만 포기하면 모두가 편하리라 생각하였는데, 실상 자신이 포기하면 그들의 바람도 저버리는 것이었던 건가.
"폐하, 우리는 사람을 믿기 때문에 배신당하고 힘들지만, 동시에 사람을 믿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도 있고 더 나아갈 수도 있는 법입니다. 폐하의 머리에 씌워진 의무가 괴롭고 무겁기만 하여 도망가고 싶은 거라면, 그러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무게가 무겁긴 하더라도. 당신이 평생을 목표로 살아왔던 것과 당신의 곁에 있는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싶다면, 저는 폐하의, 제 의뢰인의 뜻을 지지하고 싶습니다."
잠뜰은 장식 마감을 마친 실을 가위로 잘랐다. 그 날카로운 소리가 라더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의 굴레를 끊어버리는 것 같았다. 잠뜰이 옷에서 눈을 떼고, 라더의 눈을 마주 보았다.
"포기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위해 노력하셔도 괜찮습니다. 폐하가 가고자 하는 길을, 폐하께 소중했던 사람들이 반대할지라도, 폐하께서 걸어오신 길이 전부 부정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맑은 회색 눈동자가 국왕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눈동자다.
"폐하의 삶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선 아주 자상한 왕이 되고 싶었던, 아주 자상한 왕자였을 뿐입니다."
불안으로 가득했던 그 시간들을, 이토록 단호하게 부정해준 이가 있었던가. 자기 스스로조차 믿지 못해 허우적거리던 시간들을, 눈앞의 사람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너무나도 명확하게 말해주었다.
잠뜰은 책상 위에 있던 옷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라더에게로 걸어왔다. 몇 시간 안에 옷을 완성하겠다고 단언하더니, 정말 이뤄낸 것이다.
"이 옷은 제가 드리는 응원선물입니다. 대관식을 직접 볼 수는 없겠지만, 폐하께서 이 옷을, 이 자리를 받겠다고 떳떳하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응원하겠습니다. 이 옷을 볼 때, 폐하의 길을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 주십시오."
잠뜰은 라더에게 옷을 내밀었다. 자신이 요청한 대로 검은색 계열의 외투는 소매와 어깨 장식으로 금술이 장식되어 있었고, 소매에는 에투알의 문양이 새긴 단추가 반짝였다. 옷 끝단에 있는 황금색 장식들이 화려하진 않지만 왕의 위엄을 보여주도록 소박하지 않은 멋을 내었다. 왕을 상징하는 푸른색 어깨띠는 섬세한 자수가 놓여있었다.
라더는 한동안 멍하니 그 옷을 바라보았다. 잠뜰은 작게 미소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저는 제가 대관식용으로 만든 옷이 수의가 되게끔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폐하께서 제 옷을 입고 오래오래 사셔야 제 이름도 널리 알려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실없는 농담도 할 줄 아는군."
라더는 피식 웃으며 잠뜰에게 옷을 건네받았다. 응원선물이라던 잠뜰의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래, 역시 포기하지 말아야겠지.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믿어주는 백성들이 있으니."
부드러운 미소가 국왕의 표정에 스며든다. 불안함이 사라진 눈빛엔 평온함과 작은 열의마저도 느껴진다.
"결심이 서게 해줘서 고맙다. 덕분에 도망치지 않을 용기가 생겼어. 여전히 쉽지 않은 길일 것이고, 어떤 날은 또 버티기 너무 힘들겠지. 하지만 그대의 응원선물을 받았으니, 힘내보겠다. 나의 아버지께서 내게 물려주신 것과, 나를 가르친 모든 선생의 지혜가 헛되지 않도록, 나에게 준 백성들의 믿음이 부서지지 않도록. 어떤 결말을 맞게 되든, 나는 끝까지 이곳을 지킬 것이네."
"어떠한 결말이 나더라도, 폐하의 삶은 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맙다며 라더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뜰은 정중하게 예를 올리며 겸양을 표했다. 그녀가 이곳에서 할 일은 이제 다 마친 셈이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별이 뜰 시간이 되었다.
자신의 짐을 정리한 잠뜰은 수트 케이스를 들고 라더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후, 방을 나섰다.
"그 말을 자네와 닮은 내 친구에게 들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문이 닫힐 때 작게 중얼거린, 미련과도 같은 말이었다. 작은 말이라 문 너머의 잠뜰에게는 닿지 않았을 것이다.
잠뜰은 올 때와 똑같은 차림새로 왕성을 떠났다. 한 손에 오래된 수트 케이스를 들고, 검은색 모자를 단정히 쓴 채 말이다. 검은 반장갑을 낀 그녀의 손이 외투 안주머니에서 기차표 한 장을 꺼낸다. 다음 의뢰자에게 가게 해줄 기차표이다.
구두 굽 소리가 왕성에서 멀어진다. 잠시 후, 어디선가 증기기관차의 증기 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그러나 너무 희미하여 주민들은 바람 소리를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순간 많아지는 듯하더니 다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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