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작

D로부터

10주년 합작 | 미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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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홀 사건으로 무마...행방 모호....

-...정보누설 가능성은 적어.... 기억 조작은....

-...검증 필요...추가 확인 요망....

-그렇다면 D를-


안녕하세요, 덕개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Duckgae라고 써요. 아, 요즘 취업할 땐 영어이름이 꼭 있어야 한다더라고요. 현재 취업이 고민인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몇 달 전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학교 홈페이지에서 유명한 기업 미스틱의 취업 지원 프로그램 공고를 봤고, 메일로 그 프로그램에 신청했었어요. 그리고 미스틱에서 답변받고, 미스틱의 회사로 초대받아 본사로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프로그램 담당자라고 소개한 분과 만나서 어느 방으로 안내받았어요.

그리고 그 뒤의 기억이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니 제 방이었고, 아침이었습니다.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집에 어떻게 온 건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납니다. 핸드폰을 켜서 확인해 보니까 다음날이더라고요. 그런데 핸드폰 화면 날짜 밑에, 은행 어플 알림이 하나 떠 있었습니다.

(주)미스틱으로부터 20,000,000원 입금되었습니다.

저는 그 알림을 뚫어져라 쳐다봤어요. 일, 십, 백, 천, 만, 십만... 하나하나 숫자를 센 뒤에야 그 금액이 이천만 원이 맞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죠. 이천만 원이나 되는 금액을 받고, 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어요.

알림을 확인하고, 그렇구나 싶고, 그 알림을 옆으로 슥 밀어 핸드폰 화면에서 없앴습니다. 핸드폰 화면을 끄고 침대에 앉아, 무언가 생각하듯 잠시 천장을 바라봤어요.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일어나서, 공부할 책을 챙겨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죠.

저는 미스틱을 방문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다른 것은 다 기억 못 하는데, 미스틱으로부터 이천만 원이라는 큰 금액을 받았는데도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거요. 기억도 없는데 돈을 받았으면, 뭔가 착오가 있었거나 내가 무슨 계약을 한 건데 기억 못 하는  거잖아요? 어느 쪽이든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왜 저는 미스틱에 다시 연락해서 물어보지 않고, 그 금액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을까요? 

그냥 많은 돈이 들어왔으니 입 꾹 다물고 있으려고 한 걸까요? 저는 그런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꽤 오래전 일이라 그냥 기억이 희미한 걸까요.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 저는 기억이 한 번 더 사라져 버린 일이 있었어요. 거의 한나절이 통째로 날아갔죠. 뉴스에서 거대한 싱크홀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린 지 얼마 안 된 후의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죠. 혹시 이게 그 청년 치매라는 건가? 아니면 내가 기억도 못하는 사고를 당했나? 

그렇지만 그냥 또,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냈어요. 최근 좀 바빴으니까 깜빡했을 수도 있지, 어차피 수업하는 날도 아르바이트하는 날도 아니었으니 중요한 일은 없었을 거야. 그렇게 어물쩍 넘어갔어요.

"이야, 잘 지냈어?"

그리고 그 이후에, 내가 공부하는 우리 학교 도서관으로 이상한 사람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공룡같은 이상한 녹색 모자를 쓰고, 생글생글한 웃음을 지으며 처음 보는 저에게 대뜸 친한척 하는, 아주 이상한 갈색머리 아저씨가요.


To. 기다리고 있을 B_D.

From. 진실을 알아가는 D.


"아저씨 언제까지 나 찾아올 거예요."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랬지~"

덕개는 자신의 맞은편에서 태연하게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떠먹는 공룡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열흘째다. 자신을 공룡이라 소개한 저 사람은 열흘 동안 매일 꼬박꼬박 덕개가 공부하는 도서관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밥을 먹을 때마다 억지로 자신을 끌고 나가 매일 함께 밥을 먹고 있다.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다. 처음 만났을 때 덕개 자신의 이름을 부르길래 자신을 아는 사람 같았지만, 덕개의 기억 속에 이런 이상한 남자 따위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자신이 그를 기억 못 한다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저 태연하게 자신은 방송일 하는 PD 공룡이라고 소개하고는, 대뜸 같이 밥 먹자고 하였다.

학교 도서관은 학생증이나 관계자 출입증이 없으면 출입이 불가능하니까 신원이야 확실한 사람이겠으나,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기억 못 하는데 자기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며 달라붙는 이 사람은 좀 이상했다. 아니 애초에 불편한 티를 팍팍 내는데 와하하 웃어넘기며 식사 자리에 계속 끼어드는 이 사람이 이상했다. 눈치가 없는 건 아닌데 일부러 이러는 건가.

"아저씨, 대체-"

"형."

"하.... 형 대체 여기 뭐 하러 왔어요?"

"뭐하긴, PD로써 자료조사 하러 왔다고 말했잖아?"

자료조사는 무슨, 이 인간은 그냥 땡땡이치러 온 게 분명하다. 자료조사 하러 왔으면 자료조사답게 책을 읽거나 전자 정보관에 가서 옛날 비디오를 보거나 하다못해 드라마 장소 사전 답사로 쓰게 건물 이곳저곳을 돌아보거나 해야지, 열흘 동안 이 인간이 도서관에 와서 한 거라곤 덕개의 맞은편에 앉아서 공부하는 자신을 부담스럽게 쳐다보거나 대놓고 졸거나 핸드폰을 만지는 것밖에 없었다.

공부에 방해된다. 진짜 방해된다. 도서관에서 다른 층으로 자리를 옮겨도 대체 어떻게 아는 것인지 자신이 있는 곳으로 바로 찾아왔다. 할 수만 있으면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데 돈 안 내고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는 곳이 근처에 학교 도서관뿐이라 달리 피할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리고, 덕개가 싸가지가 그 모양이라 같이 밥 먹을 친구도 없으니까 내가 밥친구 해주러 오는 거잖냐."

"밥친구 따위 필요 없고 혼자서도 잘 먹으니까 그만 오시면 안 될까요."

"거 봐라 거 봐라, 죽어도 다른 밥친구 있다고는 안 하지? 다른 친구도 좀 사귀고 그래라 야. 내가 볼 때 저 친구가 딱 괜찮을 것 같은데."

누굴 가리키는 거야? 공룡의 헛소리에 약간 짜증이 올라온 덕개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홱 돌려 공룡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창가 쪽 자리였다. 여자애의 밝은 회색 머리카락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아래 부드럽게 빛났다. 밥이 맛있는 건지 아니면 원래 웃는 상인 것인지 얼굴은 생기 넘치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왠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고 표현하기도 어려울 만큼 짧은 시간 시선이 교차했다. 시선이 스치자마자 덕개는 무언가에 놀라기라도 한 듯 곧바로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리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던 공룡의 표정을 보게 된다.

"왜 그딴 표정이에요?"

"말본새 하고는. 너도 저 친구 얼굴 보니까 뭐 좀 느껴지는 표정이길래. 뭐, 관상에서 '쟤랑 나는 절친이 되겠구나~' 같은 거 느껴졌어?"

"혹시 도 같은 거 믿어요?"

"얘가 날 사이비 취급하네?"

덕개는 휴지로 입가를 신경질적으로 닦았다. 공룡은 창가 쪽 자리의 여자를 한 번 흘끗 보더니, 다시 덕개를 바라보았다.

'또, 저런 눈으로...'

공룡은 종종, 덕개를 관찰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치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상대도 딱히 숨기려는 기색은 없을 만큼 긴 시간, 그러나 이의를 제기하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덕개가 마주 쏘아보면 공룡은 그저,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 먹었으면 가죠."

"그래, 오늘은 형이 사줄게."

"감사합니다 형님."

"예의상으로라도 괜찮다는 말이 한 번을 안 나와요."

"취준생은 가난하단 말이에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비싼 거 시킬걸, 살짝 이기적인 아쉬움을 생각하며 덕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에 먼저 가 기다리니, 한 박자 늦게 따라온 공룡이 결제하고 경쾌한 목소리로 잘 먹었다며 직원에게 인사했다. 가게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거리로 나왔다. 오후 햇살이 한가로운 거리를 비추었다.

"끝나고 어디 가?"

"가긴 어딜 가요, 다시 도서관에 가야죠. 가방도 다 놓고 나왔는데."

"맨날 도서관에서만 공부하면 답답하지 않아? 카페에서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하지."

"하긴 형은 도서관에서 폰만 만지니까 지루하긴 하겠네요."

"어허! 그것도 나름 다 일하는 거거든? 지금도 착실히 조사하는 중이라고."

"조사하긴 대체 뭘 조사한다는 거-"

"앗, 저기요!"

영양가 없는 두 남자의 대화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덕개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꼭 저를 부르는 목소리는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한적한 거리에 다른 사람도 안 보이니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리란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분명 처음 듣는 그 목소리에서 어째선지 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묘하다, 그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고개를 뒤돌아보겠다고 결정한 그 짧디짧은 시간에 스쳐 간 느낌이었기에,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정의하기엔 시간도 여유도 부족했다.

'...저 사람은...'

뒤돌아본 시야에 담긴 것은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아까 가게 안에서 봤던 여자였다. 회색 머리카락에 동그란 회색 눈동자. 그 회색 머리카락은, 가게 창문을 통해 한 번 걸러 들어오던 햇살을 받았을 때보다, 지금 오후의 거리 아래에서 더욱 윤기 있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거림을 눈에 다 담기도 전에,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이거, 가게 안에 두고 가신 것 같아서요."

뛰어오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며, 그 여자는 갈색 지갑을 덕개를 향해 내밀었다. 겉모습은 자신의 지갑과 똑같았다. 가게 안에서 떨어뜨린 건가? 주머니 안에 깊숙이 넣어두고 다녀서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는데. 하지만 자신의 주머니를 더듬어보니 안이 텅 빈 것이 느껴졌다. 점심을 공룡이 대신 계산하느라 지갑이 없어진 줄 몰랐나 보다.

"감사합니다."

"뭘요! 전 이만 가볼게요. 좋은 하루 되세요!"

지갑을 건네준 여자는, 밝게 웃으며 인사하곤 반대쪽을 뛰어갔다. 뛰어간 방향을 살펴보니 버스 한 대가 막 떠나고 있는 정류장이 있었다. 그녀가 타려 했던 버스였는지, 그 사람은 있는 힘껏 뛰다가 못 타겠다는 것을 깨닫곤 한숨을 쉬며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이야, 다행이다 그치? 하마터면 다시 가게에 와야 할 뻔했네."

"...그냥 가게에 맡겨놓지. 버스도 놓쳤잖아요."

"뭐, 그냥 착한 사람인가 보지."

공룡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지만, 덕개는 버스 정류장에서 한동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독특한 회색 머리카락도, 그 머리 색깔을 꼭 닮은 동그란 눈동자도, 둥그런 선을 그리는 입꼬리도. 분명 전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기분 탓이겠지, 최근에 피곤해서 기억도 없는 날도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지독하게도 사라지지 않는 이 느낌은 뭘까.

강렬하지도 않고, 선명하지도 않다. 다만 그저, 마치 길을 지나가다 어디선가 맡아본 향기가 옅게 코끝을 간질이는 것 마냥, 흐릿하면서도 익숙한 느낌이 잔잔히 퍼져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작은 후회가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뭐야... 누구지...?

'먼저 가 있어, 이따 보자.'

...안 돼, 같이....

'나 잊으면 안 돼, 알겠지?'

"허억!"

덕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호흡이 가빴다. 짧게 심호흡을 몇 번 반복해 보았다. 시야에 담기는 것은 익숙한 천장, 자신의 방이었다. 손을 더듬어 핸드폰 화면을 켜보니, 새벽 세 시는 넘은 시간이었다.

덕개는 식은땀으로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한 번도 꾼 적 없는 꿈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처음 보는 장면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지금은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을 향해 말을 걸고 있었고, 자신은 아무 말도 못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도.

"대체 뭐냐고...."


"우와... 너 안색 왜 그러냐."

덕개를 보고 내뱉은 공룡의 첫마디였다. 웬일로 오전에 일이 있다 하여 점심 때를 다 지나 찾아온 공룡은 덕개의 안색을 보곤 기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덕개의 안색이 평소보다 창백했기 때문이다. 눈 아래 옅은 다크서클이 더욱 그의 피곤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것 때문에 안 그래도 사나운 인상이 더욱 부드럽단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오늘 나 없다고 점심 거른 건 아니지?"

"아니거든요? 잘 챙겨 먹었어요. 이건 그냥... 꿈 때문에 잠을 못 자서 그래요."

"악몽 꿨어?"

"악몽은 아닌데...아니, 맞나? 누가 저더러 잊지 말라고 말하더라고요."

"뭐야, 원한 있는 귀신이 들러붙었나? 머리 풀어 헤치고 피눈물 흘리고 있진 않디?"

"뭐래요, 얼굴도 기억 안나요. 그런데 그런... 원망하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무섭다기보단, 뭔가... 익숙한 느낌도 들고...."

덕개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악몽 때문에 잠을 설친 적은 없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지. 어제 있었던 일이라곤, 처음 보는 사람이 지갑 주워준 것밖에 없었는데....

공룡은 덕개의 말을 듣고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제거는 제대로 됐을 텐데. 꿈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연구된 게 거의 없으니까, 이런 것도 가능하려나."

"네?"

"아니야, 그보다 이럴 땐 당수혈해야 해. 카페 가자."

"공부해야 되는데..."

"지금 그 안색으로 퍽이나 공부가 잘 되겠다. 따라 나와, 내가 사줄게."

덕개는 다시 한 번 거절하려다가, 공룡이 사준다는 말에 순순히 펼쳐놓았던 책을 정리하였다. 집중이 계속 안됐던 건 사실이었다. 도서관에 오는 길엔 제대로 못봐서 누구랑 부딪치기까지 했으니, 공룡 말대로 카페에서 한숨 돌리고 오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도서관을 나와 어제 걸었던 한적한 거리를 다시 걸었다. 공룡은 요 앞에 되게 귀여운 곰돌이 쿠키를 파는 카페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자 하였다. 귀여운 걸 싫어할 사람은 없지, 덕개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공룡을 따라갔다.

"어, 덕개야 너 뒤에 뭐 붙었다."

"예? 뭔데요...? 설마 거미는 아니죠?! 악 빨리 떼줘요!"

"하여튼 거미는 여전히 무서워하네. 가만히 있어봐."

공룡은 키득거리며 덕개의 등 뒤를 살펴보았다. 덕개는 제자리에서 얼음이 된 채로 빨리 떼달라는 말만 반복하였다. 잠시 후, 공룡의 손가락이 덕개의 등 뒤에 닿았다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뭐였어요?!"

"...."

"...형?"

공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덕개는 뒤돌아 공룡을 바라보려다가, 공룡이 잡았을 거미-혹은 그보다 심한 무언가-를 직접 볼 자신이 없어 망설였다. 그래도 공룡이 너무 오랫동안 말이 없어 무서움을 참고 돌아보려는 찰나, 공룡이 입을 열었다.

"거미는 아니고, 다른 벌레였어. 떼어냈으니까 걱정 마."

"휴우, 다행이다 고맙.... 이 아니지! 다른 벌레라고 괜찮은 게 아니라고요!"

"그래 그래, 카페나 가자."

공룡은 손을 흔들며 앞장서 걸었다. 덕개는 괜스레 자기 옷을 툭툭 털어보았다. 벌레가 붙어있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공룡이 없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텐데, 다행-

'하여튼 여전히 거미는 무서워하네.'

...내가 형한테 거미 무서워한다고 말한 적 있던가?

덕개는 걸음을 멈췄다. 그런 적 없다. 애초에 형이랑은 이제 만난 지 겨우 열흘쯤 되었다. 그 안에 거미 무서워한다고 말한 적도 없고 거미를 최근 본 적도 없다. 

이름 정도야 찝찝하긴 해도 학부에 명단이 있으니 어떻게든 알 수 있다고 쳐도, 자신이 무서워하는 것 같은 건 어떻게 안단 말인가.

"...형, 저기..."

"덕개야, 혹시 오늘 나 기 전에 누구 만났어?"

"네?"

덕개가 물으려던 찰나, 공룡이 먼저 물었다. 평소와 어조가 조금 달랐다. 똑같은 목소리였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딱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조금 더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반문한 덕개의 말소리는 카페 문에 달린 도어벨이 딸랑이는 소리에 가려졌다. 공룡은 말없이 카운터쪽으로 걸어가기만 하였다. 걸으며 나는 공룡의 신발 소리가 덕개가 대답하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묘한 침묵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때문에, 덕개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아뇨, 형 오기 전엔 계속 도서관에 있었어요."

"그럼 모르는 사람이랑 우연히 마주친 적은?"

"저 도서관에 있었다니까요? 모르는 사람이야 지나가다가 많이 만났죠. 실수로 누구랑 부딪치기도 했는데."

"흐음, 그래?"

"어서 오세요~!"

의미심장한 말만 이어가던 중, 카페 직원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공룡과 대화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져가는 와중에 주위가 환기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운터 너머 있는 직원의 얼굴이 익숙했다.

"아, 어제 그..."

"어머, 안녕하세요!"

회색 머리카락에 회색 눈동자, 밝은 웃음이 어울리는 얼굴. 어제 지갑을 주워주었던 그 사람이었다.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세상에 이런 우연도 다 있다.

주문하겠냐는 말에 덕개는 메뉴판을 보며 공룡을 곁눈질로 흘끗거렸다. 공룡은 잠시 표정 없이 점원을 바라보더니, 이내 늘 짓던 생글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이 카페 시그니처 쿠키 있죠? 그거로 한 세트 주세요. 덕개는?"

"아, 저, 초코라떼로 할게요."

주문과 결제를 마친 공룡은 먼저 자리를 골라 앉았다. 덕개는 그를 따라 앉으며 눈치를 살짝 살폈다. 아까 전 날카로운 눈빛은 거두어진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웃는 표정으로 가려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덕개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금 전, 자신이 거미를 무서워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을 다시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음료가 나왔다는 안내 소리가 질문을 가로채 갔다. 이건 묻지 말라고 세상이 도와주는 건지,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해보며 덕개는 자신이 가지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맛있게 드세요!"

그 사람은 아까와 같이 밝게 웃으며 쿠키와 음료가 담긴 트레이를 내밀었다. 덕개는 그 웃는 얼굴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를 받아 들었다. 곰돌이 모양 쿠키가 그릇에 옹기종기 담겨있는 모양이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이를 들고 자리로 돌아오니, 공룡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풍경을 보고 있다기엔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된 것 같았다. 턱을 괸 채로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티나는데...."

"형?"

"아, 왔어?"

공룡은 고맙다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을 가져갔다. 덕개도 잘 마시겠다며 초코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라떼를 목 뒤로 넘기며 아까 하려던 질문도 같이 넘겼다. 왠지 물어봐도 정확한 답을 듣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 

대신 질문을 한쪽은 공룡이었다. 

"덕개야, 동물 실험 해본 적 있어?" 

"예? 아뇨, 저희 과는 그런 거 안 해서요." 

"나도 안 해봤어. 그런데..." 

공룡은 빨대로 컵 안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잔잔하던 수면이 요동쳤고, 커피 안에 동동 떠 있던 얼음이 컵 안에서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실험용으로 기르던 쥐가 있었는데, 그 쥐가 우리를 부수고 나왔거든." 

...방금 동물 실험 안해봤다고 하지 않았나? 덕개는 앞뒤가 맞지 않는 공룡의 말에 속으로만 의문을 띄웠다. 공룡은 자신의 말에서 모순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렇게 탈출했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줄 알았는데, 계속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더라고. 왤까?" 

공룡은 커피를 휘적이던 빨대를 들어 올렸다. 빨대에 맺힌 물방울이 빨대를 타고 천천히 흐르더니 잔 안으로 똑하고 떨어졌다. 공룡은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덕개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인지, 아니면 높이 들어 올린 빨대를 바라보는 것을 핑계로 창밖의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글쎄요? 평생 그 안에 있었으니까 막상 나오면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혹은 그 실험을 한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거려나?" 

"네? 쥐가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해요." 

"하하, '쥐'라..." 

공룡은 덕개의 말에 쿡쿡 웃었다. 왠지 그 웃음에 짜증이 났다. 아니 자기가 먼저 쥐라고 했잖아. 덕개는 살짝 신경질을 내며 물었다. 

"아 그래서 정답이 뭔데요?" 

"몰라. 실험하는 사람들은 그게 궁금해서 쥐를 계속 바라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우리를 부술 수 있는 실험쥐라니, 흥미롭잖아. 아, 아니지. 그게 아닌가." 

공룡은 관찰을 끝냈는지 빨대를 컵에 꽂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시선은 이제 완전히 창에서 거두어져 있었다. 

"그 우리를 부술 수 있게 조력한 실험자를 찾아내고 싶은 건가..." 

마지막 말은 덕개에게 하는 것이라기보단 혼잣말 같았다. 말끝을 흐리며 힘없이 중얼거리는 것이 마치 덕개가 앞에 있는 것도 까먹은 것 같았다. 

"형 오늘 좀 이상해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러게, 나 좀 이상하다."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애매모호한 긍정의 답변만이 내뱉어졌다. 

그 순간 핸드폰 알림음이 났다. 덕개의 핸드폰 알람 소리는 아니었다. 공룡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확인했다. 표정은 변화 없었지만, 눈은 화면으로부터 떨어지지 못했다. 

한참이나 화면을 들여다본 후, 공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나 지금 가봐야겠다. 상사 호출이라." 

"드디어 농땡이 부리던 거 걸렸군요." 

"그래 원하는 대로 불러라. 먼저 일어난다." 

"네, 내일 봐요." 

"...." 

짐을 챙겨 나가려던 공룡은 문득 걸음을 멈추곤 덕개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곰돌이 모양 쿠키를 먹으려던 덕개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었다.

"아 뭐야, 머리는 갑자기 왜 쓰다듬어요." 

"...." 

"...형?" 

이상하게 공룡은 오늘 말수가 적었다. 덕개는 고개를 들어 대답 없는 공룡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약간의 아쉬움 정도만 겨우 알아차릴 수 있는, 오묘한 표정이었다. 

"잘 지내." 

차마 그 의미를 물어보기도 전에, 공룡은 덕개의 머리에서 손을 떼곤 몸을 돌렸다. 카페 문에 달린 도어벨이 딸랑이는 소리가 났다. 덕개는 공룡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제 머리카락에 손을 올려보았다.

"...'잘 지내'....?" 

그 말은 자신이 말한 '내일 봐요' 와는 확연히 다른 단어였다. 비록 공룡이 지금까지 한 번도 내일을 기약하는 인사말을 한 적은 없지만, 오늘처럼 확실히 끝맺는 단어를 말한 적도 없었다. 

그때 카페 문이 다시 열렸다. 들어온 것은 어떤 여자 손님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문틈 사이로 보이는 바깥 거리의 풍경엔 공룡의 모습은 없었다. 

"...."

덕개는 이상한 기분을 애써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며 다시 몸을 돌려 앉았다. 다른 곳을 보며 공룡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려 하였다. 그러니 방금 들어온 손님이 카운터의 직원에게 인사하는 것이 보였다.

"야, 뭐야! 너 오늘 일하는 날 아니잖아?" 

"오늘 급한 일이 생겼다 해서 바꿔 드렸어."

"또? 야, 그거 너 만만하게 보고 그러는 거라니까! 너 마감도 얼마 안 남았다면서."

"진짜 사정이 있어서 그러신 거라니까~"

"그러니까 그게 다 거짓말일 거란 생각을 왜 못해! 호구야 진짜."

"열 올리지 말고, 테이크아웃 해갈 거야?"

좁은 가게라 대화가 그대로 들렸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덕개는 쿠키를 오독 깨물었다. 들어보니 저 사람은 예전에도 종종 카페 알바 대타를 뛰어주었나 보다. 본인도 할 일이 많은데 남 알바를 대신해주다니, 세상 답답하게 사는 사람이다. 저와는 완전 다른 부류의 사람. 

'뭐, 나랑은 상관없지.'

어차피 남인데, 저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덕개는 초코 라떼의 빨대를 입에 물었다. 직원의 친구로 추정되는 사람은 테이크아웃 메뉴를 들고 곧 떠났다. 

이후로도 몇몇 손님이 들어오고 나갔다. 카운터의 그 사람은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응대하였다. 덕개가 보기에는, 서비스직인 것을 생각해도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냥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사람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였다.

대부분 테이크 아웃 손님들이라, 어느새 카페 안엔 덕개만 남아있었다. 슬슬 가려고 마지막 쿠키를 입에 무는데, 젊은 남자가 새롭게 가게로 들어왔다. 그는 곧장 카운터로 가더니, 대뜸 카드를 매대에 던졌다. 

"라떼."

"-카페 라떼 한 잔 말씀하시는 거 맞을까요?"

"어."

"핫으로 드릴까요, 아이스로 드릴-" 

"차갑게." 

우와 뭐 저런 진상이 다 있대. 덕개는 조금 전 자신이 먹은 게 쿠키가 아니라 아주 쓴 약인 마냥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도 그 회색 머리카락의 직원은 웃는 얼굴로 그 진상을 응대하고 있었다. 서비스 직원으로서는 완벽한 응대지만, 진상의 눈엔 아니었나 보다.

"시럽 넣어 드릴까요?" 

"...야, 알바. 나 몰라?"

"네?"

"네? 하 참, 야. 내가 여기 얼마나 자주 오는데, 다른 직원은 시럽 세 번 딱 넣어주던데?"

"아하, 네. 그럼 시럽 세 번 넣어서 드릴-"

"뭘 생글생글 웃어? 웃기만 하면 뭐 다 서비스인 줄 알아? 고작 알바 주제에 왜 손님 말에 토 달고 있어? 너 그따위로 서비스하라고 배웠어?"

진상의 목소리가 커졌다. 인터넷에서나 보던 그린듯한 젊은 진상이었다. 그런데 점점 목소리뿐만 아니라 손으로 카운터를 치거나 직원을 향해 팔을 크게 휘두르는 등 행동도 커졌다. 

-가서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덕개는 순간 떠오른 생각을 고개를 휙휙 저어 내보냈다. 내가 뭐라고? 직원이 더 잘 알 거 아냐. 이런 일에 나섰다가 말려들기라도 하면 귀찮아지잖아. 게다가 나랑 상관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어제 지갑 한 번 주워준 사람인데. 

"내가 좋게좋게 말하면 알아서 딱딱 해야지, 어? 너도 내가 우습냐?"

"그게 아니라-"

"아 긴말 할 것 없고, 당장 이쪽으로 나와서 잘못했다고 빌어."

돕지 않을 이유는 수십 가지도 있었다. 덕개는 본인이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남에게 살가운 사람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거짓으로라도 살갑다는 소릴 듣지 않는데, 저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 아닌가. 여긴 그저 우연히 들른 카페고,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애초에 자신은 누굴 돕는 사람도 아닌데, 이 상황에 개입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내가 우습냐고! 어?! 당장 나오라고!"

"고객님 이거 놓아주세요!"

"그만 하세요!"

정말 상관없는 사람인데.

진상이 그 사람의 손목을 잡아끄는 순간,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손 놓으세요."

덕개는 진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이런 막무가내 진상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따위는 전혀 알지 못했다. 직원이 말해도 들은 척도 안 하니 괜히 말주변 부족한 자신이 어설프게 끼어들어서 상황만 더 나빠지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걸 다 따져보아도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 이미 나서 버렸다. 

이다음엔 뭐라고 소리 지르려나 싶어 진상을 바라보는데, 의외로 그쪽에서 순순히 직원의 팔을 놓더니 주춤거리는 게 보였다.

"뭐, 뭐, 뭐, 뭐야?! 너, 아니, 당신은 뭐, 뭡니까?"

"...여기 손님인데요. 아까부터 다 들었는데, 적당히 좀 하세요."

"내, 내, 내가 뭘 어쨌다고..."

"직원분께 소리 지르고 손목도 잡아끌었잖아요, 왜 발뺌하세요?"

"그, 그, 그건... 그러니까..."

우물쭈물거리며 말을 더듬더니, 남자는 바로 몸을 홱 돌아 냉큼 가게 문 쪽으로 도망쳤다. 어이가 없었다.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그 태도에 헛웃음까지 나왔다. 직원 앞에선 기고만장하더니, 외부인이 개입하는 순간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바로 부리나케 도망치는 건 또 뭔가. 자기가 판단하기에 만만한 사람에게만 열불 내는 글러 먹은 족속인가 보지.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싶다가, 직원 상태를 물어보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여 카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회색 머리카락의 그 직원은 아까 붙잡혔던 손목 부위를 내려다보는 건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말을 걸기 조심스러웠다.

"저기, 괜찮-"

"아, 손님! 괜찮으세요? 많이 놀라셨죠."

"...네?"

괜찮냐니, 나한테 하는 말인가? 덕개는 말을 잘못 들은 듯 제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듯 조잘조잘 말을 이어갔다. 

"세상에 저런 사람도 다 있네요, 그렇죠? 카페에 쉬러 오신 건데, 갑자기 누가 와서 소리 질러서 놀라셨겠어요. 죄송해요, 제가 더 잘 응대했으면 이런 일 안 일어났을 텐데. 사죄의 의미로, 앉아 계시면 제가 쿠키라도 더 가져다드릴-"

"지금 제 걱정할 때예요?"

말을 중간에서 끊어버렸다. 이 사람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영문도 알 수 없을 만큼 답답한 소리에 목소리가 조금 격양되었다. 

"이상한 사람한테 욕설 듣고 손목 붙잡힌 건 그쪽이지 제가 아니잖아요. 위험했던 건 그쪽인데 왜 제 걱정을 먼저 하세요?" 

"아이 뭐, 카페 일 하는데 이런 일은... 잘 없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목소리가 단호하게 나왔다. '난 괜찮아', 어젯밤 꿈에서 들은 그 괜찮다는 목소리가, 직원의 말에 겹쳐 떠올랐다. 갑자기 왜 그 꿈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아무 말도 못 하여 후회했다는 감정까지도 목 깊은 곳에서 울컥 솟아, 조금은 화가 난듯한 목소리와 함께 밖으로 흘러나왔다. 

"손목 부어올랐잖아요.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이상한 짓 해서 욕먹을 사람은 아까 저 사람인데, 왜 사과하세요. 본인 먼저 챙겨야죠, 왜 이런 상황에서까지 남을 먼저 챙겨요."

"이건, 그냥...."

"어제 지갑 찾아주신 것도 그래요. 그냥 가게에 맡겨두면 되는데 저 따라 나와주느라 버스도 놓치셨잖아요. 아까 들어보니까 알바도 자주 바꿔주신다면서요. 왜 그렇게 손해 볼 일만 많이 하시는 거예요?"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이 터져 나왔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아닌 것처럼,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덕개가 생각해도 자신은 지금 이상했다. 공룡이 오늘 유독 이상하게 굴더니 그게 옮은 건지, 아니면 간밤에 잠을 설친 여파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것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저, 또다시 말하지 못해 후회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지금은 탓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쪽이 사과하고 있고. 그렇게 괜찮다고만 하시고, 자기보다 남만 먼저 위하고. 참기만 하다가, 혹여라도-!"

'나 잊으면 안 돼, 알겠지?'

"-진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어떡해요."

무언가의 기시감이 느껴졌다. 간밤에 꾼 꿈인가? 어렴풋이 잔상만 남은 대사가 아프게 머리를 헤집었다. 

모르는 사람이다. 꿈속의 목소리도, 지금 저 앞에 있는 회색 머리카락의 사람도. 둘 다 모르는 사람이고, 둘은 같은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도 어째선지 그 목소리를 생각하며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저 앞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이 사람이 맞나? 

두통이 심해져 식은땀까지 났다. 덕개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자신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헛소리를 한 게 틀림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말이 많았네요."

"아니에요, 무슨 뜻인지 알겠는걸요. 제 친구도 답답하다 자주 그랬고요. 그렇지만,"

떨어뜨린 시야 안에 냅킨을 건네는 손이 보였다. 냅킨을 받아 식은땀을 닦으며 고개를 들어보니,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눈은 이내 안도하듯 둥글게 휘었고, 그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이러는 거 아니에요. 저도 나름 바라는 게 있는걸요?"

"...바라는 거요?"

"미안해, 나 너무 늦었지!" 

그때 도어벨이 딸랑이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급하게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카페 직원인지 그 사람은 곧장 달려와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사람의 등장에 덕개는 조금 어색하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저와 이야기하던 그 사람은 몸을 돌려 새로운 사람을 맞았다.

"언니 벌써 왔어요? 어머니는요?"

"상태가 생각보다 빨리 안정돼서 괜찮을 거래. 다음 주부턴 동생이 병원에 있기로 해서, 앞으론 이렇게 바꿀 일 없을 거야. 그동안 시간 바꿔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이제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들어가. "

"괜찮아요. 언니 하루 종일 병간호하고 와서 피곤할 텐데, 마감도 저한테 맡기고 가서 쉬시는 게-"

"안 돼, 네가 여기까지 도와준 것만으로 얼마나 고마운데! 마감은 내가 할 테니까 얼른 들어가."

그러고는 환복하고 오라며 그 사람을 창고 쪽으로 꾹꾹 밀어 보냈다. 그 사람은 괜찮은데, 라고 말을 흐리다가 알겠다며 창고로 들어갔다. 

의도치 않게 사연을 전부 들은 채로 홀로 남겨진 덕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자리로 돌아와 정리하였다. 어차피 이만 가려던 차였다. 절반 넘게 남은 공룡의 아메리카노 잔과 자신이 깔끔히 비운 쿠키 접시를 트레이에 얹어 카운터에 가져다 놓곤, 괜히 안쪽 창고를 흘끗 한 번 쳐다보았다. 아직 그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뭔가 말하고 가야 하나 싶다가, 이내 조용히 가게를 나왔다.

"후..."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거리엔 노을이 깔리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최악의 하루였다. 간밤엔 악몽 때문에 잠을 설치고, 정신을 환기하러 간 카페에서 공룡은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서 신경 쓰이게 하지, 이상한 진상을 만났는데 직원은 제 걱정은 안 하고 남부터 챙기지, 그리고 거기에다 뭐에 홀린 듯이 말을 한가득 쏟고 오기까지. 게다가 두통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잠을 설쳐서 생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무언가, 다른 원인이 있는 것처럼-

"앗, 저기요!"

한적한 거리와,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 상황이다. 그 목소리가 묘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익숙하였고, 여전히 그 기분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도 똑같았다. 

천천히 뒤돌아본 시야에 담긴 것은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아까 가게 안에서 봤던 여자였다. 회색 머리카락에 동그란 회색 눈동자. 거리를 칠하던 노을의 빛이, 그 회색 머리카락에 내려앉아 부드러운 주홍색을 만들어냈다. 그 색을 눈에 다 담기도 전에,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 사람은 자신 앞에 멈추더니, 뛰어오느라 가빠진 숨을 몰아쉬곤, 씩 웃었다.

"이 상황 뭔가 익숙하네요, 그렇죠?"

"...."

"같이 좀 걸으실래요?"

생긋 웃는 그 표정을 어쩐지 거절하기 힘들었다. 덕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을이 걸린 한적한 거리를 두 사람의 발소리가 채웠다. 보폭은 덕개가 더 컸기에, 덕개는 그 사람에게 걸음을 맞추기 위해 속도를 조금 늦추어야 했다. 덕분에 천천히 걸으니 두통이 그나마 나아진 것 같아, 대화에 조금 더 멀쩡한 정신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아까 언니랑 대화한 거, 다 들으셨죠?"

"...네."

"병 원인을 정확히 모른다더라고요. 그래서 언제 쓰러질지 모르고, 그런 상황에 돈은 필요하고... 가족이 그래서 마음은 불안할 텐데. 저도 피곤하긴 하지만, 그런 상황의 사람에게 손 내밀어줄 정도는 되거든요."

덕개는 일전에 카페를 찾아온 이 사람의 친구가 따졌을 때를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가정 사정이니 함부로 설명해 줄 수 없어 그냥 사정이 있다고만 말한 거였고, 그것만으론 납득이 안 된 친구가 그렇게 핀잔을 준 거였구나. 그래도 그런 사정이 있긴 해도, 늘 웃으면서 시간을 바꿔주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지갑도 그래요. 그냥 사장님께 맡겨둘 수도 있지만, 제가 그때 뛰어가면 그쪽 따라잡을 수 있었거든요. 할 수 있으니까 그냥 한 거예요. 버스야 놓쳤지만, 다음 버스는 또 오잖아요? 그 정도 시간은 감수할 정도는 되었거든요."

"..."

"아, 사실 말은 거창하게 해도 별거 없어요. 다들 이럴걸요? 기회가 되면 남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살고 싶잖아요."

다들 그렇다고, 정말? 앞을 보고 걷던 덕개는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먼저 눈이 간 것은 그 사람의 손목, 가게 안쪽 창고에서 치료하고 온 것인지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다음으로 보인 것은, 그 사람의 회색 눈동자였다.

"저는요, 작은 선의가 또 작은 선의를 불러일으키는 세상을 믿어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으니까 그렇게 사는 거고요." 

앞을 바라보고 있는 그 눈동자는 무척 확고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과, 자신이 믿는 것에 확신을 가진 눈이었다. 덕개는 그 빛을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정면으로 눈을 돌렸다.

"진상은 아니었잖아요."

"에이, 랜덤 박스가 꽝일 때도 있는 거죠~"

"이해가 안 돼요."

가방끈을 쥔 덕개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남을 돕는 작은 여유를 가지고 싶은 삶, 그런 삶을 살며 눈을 빛내는 사람. 덕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삶은 자기 하나 신경 쓰기에도 벅찬 것 아니었나. 타인에게 손을 내밀기보다 자신의 가치를 더 올려서, 타인한테 피해 안 주며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의 상황과 감정을 신경 쓰다가 자신도 남도 전부 상처받기보단, 완전히 모르는 체하고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다른 사람 신경 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에요. 그쪽은 특히 그 정도가 심하고요."

"그쪽도 그렇잖아요?"

덕개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마지막 말에 놀란 듯 손이 움찔 떨렸다. 덕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앞으로 걸어가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까 가게 안에서 대신 상대해 준 것도 그렇고,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것도 그렇고. 다른 사람에게 신경 안 쓰는 사람이 할 일은 아니잖아요?"

"아니, 이건 진짜 별거 아니잖아요. 오히려 짜증 내는 거에 가깝고."

"그 별거 아닌 게 저한텐 정말 큰 위로가 되었거든요.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건 그런 별거 아닌 것들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래서,"

앞서 걸어가던 그 사람은 몸을 빙글 돌아, 덕개를 바라보았다. 밝게 미소 짓는 얼굴에 노을이 걸렸다.

"다음에도 그쪽을 만나면 도와줄 거예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는 그 사람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임이 햇살 따위 때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덕개는 아무 말 없이 그 미소를, 그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에도 마주친 것처럼 익숙하고, 편한 기분이 들었다. 

마주 바라보던 그 사람은 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왠지 그쪽이랑은 다른 데서 만났으면 이미 엄청 친한 친구가 되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

"그러고보니 저희 아직 서로 이름도 모르네요."

이름도 모르는 사이, 얼굴은 어제 처음 본 사이. 그와 그녀는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어쩌다 같은 장소에서 밥을 먹었고, 우연히 같은 카페에 있었을 뿐인 사이. 설령 우연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끝날 수 있었던 사이. 익숙한 듯 묘한 기시감이 들기만 하는, 그저 그것뿐인 사람. 

"제 이름은 베이디에요. 괜찮으면 당신 이름도 알려 줄래요?"

그렇지만, 모르는 사람이지만. 

우연이든 기시감이든, 그 외 알 수 없는 이유를 모두 없애버리거나 혹은 그 모두를 이유로 붙여서라도.

이 사람을 더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개, 입니다."

머리가 깨질 듯 괴롭던 두통이, 그 순간만큼은 말끔히 사라졌다.

 


덕개와 베이디가 대화하던 한적한 거리, 줄지어 세워진 건물 중 하나. 3층 건물 옥상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노을은 다 져가고 있었고, 길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공룡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으며 덕개와 베이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핸드폰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공룡은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여유롭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이사님~ 진행 상황 궁금해서 전화주셨구나? 마침 결과 딱 나왔어요."

노을의 마지막 붉은빛마저 지평선 아래로 사라졌다. 오후의 열기가 다 식어버린 바람 한 줄기가, 공룡의 갈색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덕개랑 베이디 쪽 데이터는 제대로 추출되었다고 확정지어도 될 것 같아요. 만났을 때 시뮬레이션이랑 거의 동일한 반응을 보였어요. 진짜 '인간적인'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한 데이터 추출은 아무런 문제 없었다는 거죠."

미스틱에서 진행된 비밀 프로젝트, 미궁(Labyrinth).

이 프로젝트는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특수한 환경 아래서 실험을 진행하였으며, 보다 자세한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 소위 말하는 '인간적인' AI를 필요로 하였다. 이를 위해 미스틱은 총 아홉 명의 사람에게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원본이 될 두뇌 데이터를 제공받았다.

하지만 그 미궁 프로젝트는 '누군가'에 의해 괴멸되었다. 얌전히 실험을 반복하던 실험쥐가 우리를 부수고 나온 것이다. 

"네네, 자세한 사항은 서신으로 보내드릴게요. 네 들어가세요~"

공룡은 가볍게 웃으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미궁 프로젝트의 PD이자, 백신 프로그램 AI 코어의 정보를 제공한 사람.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아홉 개의 코어 중에서 두 코어의 원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실험쥐의 탈출에 예상치 못한 타격을 입은 미스틱의 다음 행보는 두 가지로 나뉘었다. 증거 인멸과, 실패 원인 파악. 전자는 데이터를 추출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데이터를 제공했다는 기억을 깔끔히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지웠다는 사실도 함께. 특히 핵심 코어의 데이터를 제공해 준 자들은 아예 관련 단어의 언급으로 인해 파생되는 기억조차 막기 위해 더욱 깊이 제거했다고 들었다. 덕개의 두통의 원인은 과한 제거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공룡은 생각하였다. 

실패의 원인을 찾는 것은 조금 더 다방면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하나가 바로 AI 코어를 만들기 위해 추출한 데이터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것이었다. 

"내가 자료 조사하러 왔다고 했잖아, 덕개야."

방화벽 프로그램 AI 코어의 원본을 제공해 준 덕개, 그리고 안내 프로그램 AI 코어의 원본을 제공해 준 베이디. 미궁 프로젝트 내에서 보인 덕개와 베이디의 행동 양상이, 현실 세계의 행동 양상과 일치하는지 확인하여 데이터가 정확히 추출되었는지 파악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랬기에 공룡은 덕개에게 접근하기 전에 그와 베이디 주변 상황을 전부 조사하였다. 덕개의 하루 일과, 베이디의 아르바이트 장소, 진상의 출몰 주기 등. 쇼에 필요한 모든 '소품'을 확인한 후, 공룡은 자신이 준비한 프로그램의 막을 열었다.

일부러 덕개 주위를 맴돌고, 덕개의 지갑을 훔쳐 떨어뜨려 베이디와 접점을 만들고, 베이디가 일하는 시간에 덕개를 데리고 그 카페에 간 것, 그 모든 것이 공룡이 꾸민 일이었다. 하나의 프로그램 연출을 결정할 수 있는 PD처럼, 그가 원하는 결과를 보기 위해 극장 소품 바꾸듯 손쉽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와 그의 연극이 만들어낸 두 사람 사이의 아주 작은 접점만으로도, 공룡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통화를 마친 공룡은 가벼운 어조로 말하며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러곤 겨우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건물 옥상의 문 쪽으로 빠르게 다가가, 문을 벌컥 열었다. 

"통화 내용 엿들으려면 이 정도 거리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좀 더 조심했어야 하지 않겠어요? 잠뜰 씨."

열린 문틈 사이로 도시의 가로등 불빛만이 옅게 새어 들어갔지만,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공룡과 닮았지만 다른 색깔의 갈색 머리카락.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그 아래로 난감한 눈빛을 띠고 있는 검은 눈동자. 

미스틱이 만든 우리를 부수고 나온 실험쥐, 잠뜰이었다. 

당황한 잠뜰은 재빨리 몸을 돌려 도망치려 하였지만, 공룡이 조금 더 빨랐다. 그는 순식간에 한 팔로 잠뜰을 붙잡아 벽 쪽으로 밀어붙여 잠뜰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다른 손으로 그녀의 모자를 벗기자, 낭패라는 듯한 잠뜰의 표정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공룡은 그 표정이 재밌는지 키득거렸다.

"당신이라면 올 줄 알았죠. 평생 도망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미스틱 쪽 정보를 모아서 다시 한번 싸우러 올 거고, 그걸 위해 정보를 모으러 올 줄 알았죠. 그러니 AI 코어의 원본이 세 명이나 한자리에 모인 지금, 반드시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

"그렇다고 이렇게 대담한 짓을 할 줄은 몰랐는데."

공룡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다 부서져 망가진 도청 장치였다. 공룡이 일전에 벌레라며 덕개한테서 떼어낸 것이었고, 그보다 이전에 잠뜰이 실수를 가장하며 덕개와 부딪혀 붙인 것이었다.

"도망 다니는 신세면서 도청 장치는 어떻게 구했어요? 재주도 좋아."

"..."

"그래도 도청 장치 나한테 들켰을 땐 오늘은 돌아갈 줄 알았는데, 계속 미행한 건 대담한 건지 멍청한 건지. 카페에서도 그쪽 다 보였다고요."

"...이거 놔."

"싫은데요? 미스틱이 그렇게 찾고 싶어 미쳤던 완벽한 VIP가 이렇게 스스로 와줬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할까?"

잠뜰은 공룡을 죽일듯한 눈빛으로 쏘아봤다. 그러나 공룡은 자신이 상황의 우위에 있다는 것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잠뜰의 시선을 흘려 넘겼다. 

잠뜰은 공룡의 주머니 안에 있는 핸드폰을 흘끗 바라보았다. 공룡이 자신과 대화를 그만두고 그의 '상사'에게 다시 연락하기라도 하면 정말 곤란해진다. 우선 시간이라도 끌기 위해, 잠뜰은 공룡을 노려보며 물었다.

"아까 그 통화 상대, 미스틱이지? 네가 그 망할 실험의 배후였던 거야?"

"배후라... 글쎄요? 전 그냥 PD일 뿐인걸요. 시청자에게 어떻게 하면 가장 자극적인 쇼를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최고의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를 배치하는 PD. 전 이미 만들어진 세기의 실험을, 조금 더 멋있게 보여주려고 조력한 것뿐이거든요."

"허! 뻔뻔한 자식."

"네 칭찬 고마워요~"

능글거리며 웃어넘기는 그 꼴이 잠뜰 눈엔 굉장히 아니꼬웠다. 이제 보니 제 의도를 알면서도 맞춰주려는 것 같아 무척 탐탁지 않았다.

잠뜰 입장에선 지금 상황이 굉장히 낭패였다. 위험한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도청 장치로 엿들으려는 시도가 공룡한테 저지된 건, 어찌 보면 공룡이 도망칠 기회를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잠뜰을 붙잡으려 했다면 도청 장치로 잘못된 정보를 흘려 유인하는 방법을 썼을 테니. 그러니 공룡이 도청 장치를 부순 것은 네 존재를 이미 눈치챘으니 이쯤에서 그만하고 돌아가라며 잠뜰에게 직접 경고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잠뜰은 돌아갈 수 없었다. 아직 도청기가 덕개 몸에 붙어있을 때 덕개와 공룡이 나눈 짧은 대화. 두통을 호소하는 덕개를 향해 공룡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뚜렷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제거는 제대로 됐을 텐데.'

제거, 적어도 데이터 복제와 실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말할법한 단어였다. 잠뜰이 지금까지 정보를 모으기 위해 몰래 접근했던 다른 AI 코어의 원본이 되는 사람들에게선 그런 태도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직 공룡만이 실험에 대해 아는 것처럼 말하였다. 

미스틱에게 붙잡힐까 봐 전전긍긍하는 생활은 이제 사양이다. 잠뜰은 사람이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다음 행동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 사람. 그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미스틱과 아주 가까워 보이는 공룡에게서 정보를 얻어내야 했다. 그래서 위험한 걸 알면서도 주변을 맴돌았던 것인데, 결국 붙잡혀버렸다. 

"그러게 내가 기회 줬을 때 도망갔으면 좋았잖아요. 그때라면 나도 깔끔히 보내줄 수 있었을 텐데. 기회를 걷어차고 돌아오겠다고 결정한 건 그쪽이니까, 이젠 저 좋을 대로 그쪽 이용하려고요."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다시 그곳으로 끌려갈 순 없는데. 잠뜰은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생각을 이어갔다. 그런 잠뜰을 바라보던 공룡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YJ가 왜 당신을 선택한 건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네요."

"..! 너, YJ를 알아?!"

"글쎄요? 그건 지금부터 당신이 말해줘야 할 것 같은데?"

"말장난 하지 마!"

"하하, 너무 그렇게 뭐라 하지 말아요. 내가 미스틱에 당신을 바로 가져다 바칠 거면 통화를 끊었을 리가 없잖아요?"

"...뭐?"

"나도 고민 많이 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이쪽이 더 재밌을 것 같아서요."

공룡은 잠뜰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잠뜰은 공룡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지으며 공룡을 바라보았다. 저를 이용하겠다는 게, 자신을 붙잡아서 미스틱에 넘기겠다는 뜻 아니었나? 하지만 공룡은, 핸드폰은 여전히 주머니에 꽂아놓은 채, 양손을 허공으로 들며 어떠한 행동을 취할 의사도 없다는 뜻을 보여주었다. 

열린 문틈으로 도시의 불빛뿐만 아니라 하늘의 은백색 달빛도 새어 들어왔다. 그 빛 아래, 공룡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 달밤의 산책이라도 하며 정보교환 하는 거 어때요? 당신과, 그 YJ란 사람에 대해서."


안녕하세요, 다시 저예요, 덕개.

그날 카페에서 급하게 가버린 공룡 형은 그 뒤로 다시는 안 왔어요. 한다던 자료조사는 다 끝낸 걸까요? 덕분에 드디어 조용히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음... 뭐, 매일 오던 사람이 갑자기 안 오니까 조금 허전한 기분도 들어요. 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공룡 형이 준 번호로 전화해 봤는데, 없는 번호로 뜨더라고요. 베이디가 그날 공룡 형이랑 제가 같이 있는 걸 봤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무슨 귀신에 홀린 게 아닐지 의심할 뻔했어요.

...결국 진짜 뭐하던 사람이었을까요? 내 이름을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는데...

혹시라도 다음에서 또다시 만나면,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해주려고요. 베이디와는 종종 같이 밥을 먹는 친구가 됐거든요. 좀 답답한 면이 있긴 하지만, 밝은 모습이 어울리는 좋은 친구 같아요. 공룡 형이 절친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냐고 했을 때, 도 믿냐고 뭐라 한 것도 취소해야겠어요. 절친까진 아직 잘 모르겠지만, 함께 있는 게 편한 친구가 생긴 건, 생각보다... 무척, 좋은 일이더라고요. 아직 그 친구가 말하는 작은 선의로 이루어진 세상은 잘 모르겠지만, 왠지 이대로 가다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변화가 싫지 않고요.

공룡 형의 감은 참 신기하네요. 여러 프로그램을 만드는 PD라서 그런 걸까요? 이렇게 감이 좋은 거 보면 TV 잘 안 보는 저도 아는 아주 유명한 것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다음에 만나면 무슨 프로그램 만들었냐고 물어봐야겠습니다. 

분명, 아주 멋진 프로그램이겠죠?


To. 기다리고 있을 Business_Director 

(.....)

위의 이유로 인해

방화벽 AI Core 데이터, 제공자 덕개

안내 AI Core 데이터, 제공자 베이디

이상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From. 진실을 알아가는 D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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