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팁 전력

좁은 틈새 너머로

뜰팁 전력 120분 '틈새' | 수상한 이웃집+

레부 책갈피 by 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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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별의 집에는 오래된 장롱이 하나 있다. 그의 할아버지가 아끼던 장롱은 오래된 만큼 아귀가 다 맞지 않았고, 그랬기에 다 닫히지 않아 좁은 틈이 있었다. 언젠가 고쳐야지 생각은 했지만 크게 불편하지 않았기에 그 장롱은 오랫동안 그렇게 아귀가 맞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

그 장롱을 진작 고쳤어야 했는데.

'각별아, 여기 꼭 숨어 있거라. 할아버지가 나가보마.'

어떻게 안 것인지, 인간들이 마을을 습격했다. 그들이 든 붉은 횃불이 강을 이루어 마을을 덮쳤다. 마을의 우두머리였던 할아버지는 마을 뱀파이어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 앞에 나서야 했다. 장롱 안으로 각별을 밀어 넣으며, 할아버지는 미약하게 웃어 보이셨다.

'인간들에게 우리의 진심을 전한다면 그들도 이해해줄 거야.'

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손자를 장롱 사이에 숨겨두고 혼자 나가지 않으셨을 거다. 잠깐만 기다리라며 나가신 할아버지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들린 것은, 끔찍한 학살의 소리였다.

완벽히 닫히지 않는 틈 사이로, 그 밤의 끔찍한 모습이 그대로 각별의 붉은 눈에 비추어졌다. 틈새 사이로 비치는 바깥은, 어두운 한밤중인데도 인간들이 손에 들고 온 횃불 때문에 대낮처럼 밝았다.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으나 이어지는 차가운 날붙이 소리에 가려졌다.

도망가는 듯한 다급한 발걸음 소리, 날붙이가 무언가를 꿰뚫는 소리, 간혹 들려오는 쾌락에 젖은 기쁜 웃음소리. 여느 날과 같이 평온했을 마을의 밤이 인간들의 붉은 횃불에 잠식되어 버렸다. 틈 사이로 비치는 지독한 붉음에 각별은 울음소리가 들키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저 좁은 틈새 사이로 비친 그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동족들의 외마디 비명을 무력하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각별은 좁은 장롱 안에서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은 채 몇 날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좁은 틈 사이로 비치는 햇살의 변화만이 시간이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고요한 마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으나, 차마 그 진실을 눈으로 마주할 용기는 없어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적막을 깨고 작은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소리였다. 각별은 흠칫 놀라며 자신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당연하지만 할아버지의 발걸음 소리와는 달랐다.

설마, 인간인가?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었다. 틈으로는 계단이 보이지 않아 무엇이 다가오는지 알 수 없었다. 긴장 속에 그날 밤의 비명이 귓가에 이명처럼 맴돌았다.

마침내 발자국 소리가 장롱 앞에서 멈추었다.

"안에 있니?"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마을 사람들 누구와도 다르고, 소리의 울림이 다른 것이 인간도 뱀파이어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도 무척 따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틈 사이로는 그 존재가 전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바짝 마른 지푸라기 같은 것이 보일 뿐이었다. 장롱 밖의 존재가 그 자리에 웅크려 앉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무서우면 문 안 열게. 그대로 있어도 괜찮단다."

각별은 마른침을 삼키며 문밖의 존재를 응시했다. 인간이 아닌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좁은 틈새였지만 문밖 존재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넌 이 마을에 살던 뱀파이어니? 아, 아저씨는 허수아비 마법사란다. 이름은 덕개야. 세상을 여행하다 이 마을에 들렀는데, 마을이 텅 비어 있길래... 이 집에서만 생명체 기운이 느껴져서 왔단다. 괜찮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니?"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애써 확인받고 싶지 않은 사실이 마법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텅 비어있는 마을, 당연한 일이었다. 뱀파이어는 햇빛 아래에선 가루로 부서져 사라지니, 누군가 수습해주지 않은 이상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은 할아버지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들자, 며칠 동안 우느라 말라버렸다고 생각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랬구나."

덕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울음 소리만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 수 있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것인지 채 성숙하지 못한 목소리가 잔뜩 울음을 머금고 틈새로 새어 나왔다.

"마을 주민들이, 전부, 다... 살려달라고 말했는데, 그렇게 빌었는데... 우,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대체, 왜... 할아버지께서 기다리고 있으면 돌아오겠다고 하셨는데, 결국엔..."

가만히 말을 듣던 덕개가 손을 들어 작은 빛무리를 만들어 틈 사이로 흘려보냈다. 각별이 깜짝 놀라기도 전에 빛무리는 각별의 손에 닿았다. 그러자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며 조금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기운을 북돋아 주는 주문이란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을 것 아니니."

"..."

"아저씨가 지금은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이런 것밖에 없어서 미안하구나. 인간과 다른 종족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날이 올 수 있도록 이렇게 세상을 돌아다니며 공부하는 중이었는데, 아저씨가 너무 늦었구나."

"...아저씨는 왜 인간을 믿어요?"

각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덕개의 주문 덕분이었을까, 며칠을 굶은 자 같지 않게 각별은 큰 소리로 틈 너머로 외쳤다.

"할아버지께서도 인간을 믿었어요. 언젠가 다 함께 살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언젠가 종족에 상관없이 다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길 날이 올 거라고! 그런데 결국 봐요. 결국 할아버지만 이렇게 떠나셨잖아요."

"..."

"할아버지께서 믿으셔서, 그래서 나도 인간을 믿었는데, 믿고 싶었는데... 그런데...결국 할아버지께서 틀렸어요. 저런 이기적이고, 아무렇지 않게 다른 종족이란 이유만으로 칼을 들이미는 저들을, 어떻게 믿어요! 나는, 절대 그렇게는..."

언젠가 우리가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날이 올 거란다, 할아버지는 종종 웃으시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블러드 주시 연구에 매진한 것도 그날을 위해서였다. 각별은 그런 할아버지가 멋지다고 생각하였었다. 그랬었는데, 대체 왜. 왜 할아버지께서 그토록 믿던 인간들에게 배신당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 지금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너를 더 아프게 할 뿐이겠지."

덕개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그 목소리에는 상대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네가 쭉 이 좁은 세상에만 남아있길 바라지 않거든. 이렇게 마음을 꽁꽁 닫아 버린 채, 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이 작은 틈새인 채로만, 그리고 네가 마음을 내줄 수 있는 공간이 평생 이 작은 장롱 안이기만을 바라지 않아. 그리고 너와 같은 일을 미래의 그 누구도 겪게 하고 싶지도 않아.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알아가고 싶은 거고, 인간들과 공생할 방법을 찾고 싶은 거란다. 네 할아버지도 그런 생각이셨을 지도 몰라. 그러니 할아버지의 일이 헛되었단 것처럼 말하지 말아 주렴. 그렇게 말해서 네가 더 상처받고 있잖니."

울컥,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지는 것 같다. 할아버지께선 틀리지 않으셨던 걸까. 할아버지께서 평생을 걸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노력하셨던 일이, 모두 헛된 일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문 너머의 마법사는 그것이 헛된 일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정말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할아버지의 삶은 헛되지 않았던 걸까.

"살아가다 보면 말이지, 내가 세상이라고 믿었던 것이 이 좁은 틈새에 비친 일부분에 불과할 때가 있더라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은 훨씬 더 넓더라고. 인간들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도 많지. 지금 이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 인간처럼 말이야."

마법사의 마지막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문밖의 존재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바람에 장롱문이 조금 더 열렸다. 넓어진 틈새 사이로, 허수아비 마법사의 얼굴이 조금 더 뚜렷하게 보였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땐 이런 좁은 틈 사이로 말고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자. 아저씨도 열심히 할 테니까, 너도 이 틈을 넓히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삼촌 축하해요! 이야, 블러드 팩토리 광하시 지점이라니. 인간 하나 공장에 들어왔다고 길길이 날뛰던 삼촌 맞나 몰라?"

"하하, 언제적 이야기를..."

각별은 삼촌은 멋쩍다는 듯이 웃었다. 그 밤으로부터 정말 오랜 시간이 흘렀다. 각별이 살던 마을에 광하시가 세워졌고, 수많은 인간이 그곳에 몰려들었다. 처음에 각별은 그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인간인 척 정체를 숨기며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제 이 도시는 더 이상 인간들만의 도시가 아니잖니?"

하지만, 이젠 아니다. 각별은 공장이 세워진 것을 축하하는 자리에 모여있는 인파들을 돌아보다, 덕개 시장과 눈이 마주쳤다. 이 도시를 계획하고, 긴 시간 동안 정성들여 이 도시를 지켜온 자. 그리고 마침내, 그날의 약속을 지켜 인간과 이종족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낸 자. 덕개는 각별이 자신을 보고 있단 것을 눈치채고선 마주 웃어주었다.

각별의 삼촌은 커다란 가위로 붉은 리본을 잘랐다.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인간이든 뱀파이어든 그리고 또 다른 이종족이든, 박수소리가 하나가 되어 드넓은 광하시를 울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맞았어요."

환호와 웃음소리로 가득한 그 정경에서, 각별은 작게 혼잣말을 하였다. 인간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은 마음으로 할아버지께서 평생을 걸쳐 연구하신 블러드 주시가, 이제는 인간들과 함께 사는 도시에 높은 건물로 당당히 자리하였다. 이제는 억지로 피부색을 바꿀 필요도 없고, 인간들의 손짓에 흠칫 놀랄 필요도 없다. 정말 오래 걸렸지만 마침내, 그날의 악몽을 이제 완전히 잊을 수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어느 마법사가 꿈꾸었던 그 세상이 이제 눈 앞에 있다.

좁은 그 틈 사이로 바라보던 세상에 비해서, 이 하늘과 도시는 얼마나 드넓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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