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여, 부디 지지 마소서.

별이여, 부디 지지 마소서. 下

혁명 | 어쩌면 가능했을 지도 모르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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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나고, 다들 각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라더는 덕개의 호위를 받으며 이미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뒤였고, 각별은 최종 회의를 위해 서류를 정리해두겠다며 서재로 갔다. 레지스탕스의 대표 두 명과 혁명단원 잠뜰은 국왕이 마련해준 마차에 올라탔다. 준비할 것이 많았다. 앞으로 닥쳐올 변화의 파도에 상황이 바삐 돌아갈 것이리라.

공룡은 왕비의 방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혁명단의 세 명을 태운 마차가 성문을 지나고 있었다. 그들을 불렀을 땐 하늘 높이 떠올라 있던 태양이 어느새 붉은 빛으로 바뀌어 서편으로 저물고 있었다. 마당의 정원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혁명단이 타고 떠나는 마차가 노을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느리게 나는 새 서너 마리가 긴 울음을 내며 노을을 향해 날아갔다. 

"여기 계셨군요."

노을빛이 창을 통해 들어와 공룡 뒤편에 있는 자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라더를 관저에 데려다준 후 공룡을 찾아온 덕개였다. 그가 올 것을 알았다는 듯 공룡은 놀란 기색 하나 없었다.

"내가 여기 있을 걸 알지 않았나?"

"뭐, 그렇긴 하죠."

덕개가 라더를 방에 데려다주고 이곳에 올 시간을 가늠해보면, 국왕의 방을 들렀다 온 것이 아니라 왕비의 방으로 곧잘 왔을 것이다. 공룡이 이곳에 있으리란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왕비의 방에서 성문이 잘 보인다는 이유도 있었을 테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리라.

"그들이 떠나는 걸 보고 계셨습니까?"

"음, 그런 것도 있고."

공룡은 저의 몸을 돌려 시선을 방 안쪽으로 옮겼다. 푸른색 고급진 무늬가 있는 벽과 붉은 융단, 왕비가 좋아하던 색의 시트로 덮인 침대. 그의 왕비가 떠난 날로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내를 잊을 수 없었던 공룡이 하인들에게 지시하여 그녀가 생전에 사용하던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었다.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지. 이 방도 슬슬 정리해야 하니."

"…진심이십니까?"

"그 사람은 이제 여기 없는데, 정리할 때도 되었지. 내가 미련하여 나의 억지로 이 방의 시간을 너무 오랫동안 멈춰두었네. 이 성의 주인도 이제 바뀔 텐데, 라더에게까지 내 고집을 강요할 순 없잖느냐." 

움찔, 덕개의 손이 순간 떨렸다. 성의 주인이 바뀐다. 아까 회의에서 어차피 나라를 라더 왕자께 물려준다 하였으니, 그건 이상할 것이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덕개는 공룡의 말이 못내 불안했다. 왕비의 방을 정리하는 것이, 왕비뿐만이 아니라 공룡 그 자신의 생전의 흔적도 정리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불안하였다. 그 불안을 감추려는 듯 덕개는 손을 꾹 쥐었다.

"저 그림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가져가실 건가요?"

공룡은 덕개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푸른색의 벽에 그의 아내가 사다 걸어놓은 그림이 걸려있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국기를 손에 높이 들고 나아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저 앞에서 엘레나와 나눈 대화가 공룡의 기억을 스친다. 그러나 공룡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상징적인 그림이 될 테니, 새로운 정부에 기증하는 게 더 좋겠지."

"하지만, 폐하께 소중한 그림이지 않습니까."

"엘레나와 나눌 때의 생각과 기억은 모두, 여기."

공룡은 자신의 심장 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 그 작은 고동에 왕은 지그시 미소 짓는다.

"나한테 남아있으니, 괜찮네."

덕개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섰다. 공룡은 그런 덕개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자신에게 물어볼 말이 있지 않으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왕자 저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가깝지 않은데 굳이 여기까지 온 것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재촉하지도 않고 그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국왕의 눈빛에, 덕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부 다… 알고 계셨습니까?

덕개는 응접실에서의 공룡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잠뜰에게 라더가 좋은 친구를 뒀다느니, 각별의 비리를 알고 있다느니, 그 밖에도 혁명단이나 라더 왕자에게 하는 말들이 신경 쓰였다. 그건 현 나라 상황과 혁명단, 정계의 상황을 전부 다 알고 있는 자의 태도였다. 지금껏 궁 안에서만 웅크리며 버티기만 급급하던 왕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궁에서 눈칫밥 먹으며 지낸 세월이 몇인데, 설마 그걸 몰랐을까."

공룡은 웃으며 답하고는, 등을 돌려 자신의 뒤편의 창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밤이 내려앉고 있는 하늘이 창문을 물들여 퍽 아름다운 배경을 만들어주었다. 공룡의 말에 덕개는 잠시 숨을 삼켰다. 말을 잇지 못하다가, 깊이 가라앉혀둔 숨을 꺼내듯 힘겹게 단어를 내뱉었다. 

"…그렇다면 왜 침묵하신 겁니까? 왜 모든 걸 알고도 눈을 감고 귀를 닫으셨습니까. 왜 진작 행동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오늘날까지 상황을 묵인하시고, 그리 오랫동안 살아오셔 놓고는 왜!"

첫 단어를 떼는 것은 힘들었으나 점차 빠르게 단어를 내던졌다. 감정이 몰아쳐 이성을 지배해버린다. 가빠오는 호흡에 숨을 크게 들이쉬어 감정을 진정시키고, 다시 말을 잇는다. 흥분하여 제멋대로 날뛰던 감정들이 정리되어, 차분한 슬픔만이 남았다.

"왜… 갑자기 혼자 모든 걸 떠안고 떠나려 하시는 겁니까? 침묵하여 사는 것을 택했다면, 그렇게라도 계속 살아주시면 될 것을, 왜 갑자기 포기하시는 겁니까…."

덕개는 자신이 궁에 처음 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공룡은 총명하고 심성 좋은 자로서, 사소한 것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강단 있는 결정을 내렸었다. 하여 궁 안의 사람들이 모두 그가 성군이 될 거라 기대하고 있었고, 덕개 역시 그들 중 한사람이었다. 그를 왕으로 모실 수 있다는 것도 그에겐 기쁨이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총기를 잃었다. 국정에 대한 결정들은 모두 대신들에게 맡기고 침묵했다. 아마 에투알의 왕비가 떠난 날부터 였을 것이다. 

"두려웠으니까."

국왕의 답이 이어졌다. 질문을 미리 예상한 것인지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여전히 시선은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왕으로 있을 때, 나는 내게 가장 소중한 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녀를 진료한 의원들, 그녀를 지키는 사람들, 모두 내가 정하여 준 이들이었어. 그런데도 나는 엘레나를 지키지 못했어. 내가 조금 더 면밀히 살폈다면 엘레나를 잃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

"그건, 폐하의 잘못이…."

"정말 내 잘못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왕성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작으나 크나 나에 의해 결정된다. 그녀가 죽은 이유에 나의 탓이 전혀 없었다고, 그리 단언할 수 있을까?"

아니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끝내 내뱉지는 못한다. 억지다. 전부 다 억지다. 죽인 사람의 잘못이지 그것이 어찌 막지 못한 사람의 잘못인가. 하지만 왕비가 죽은 원인은 분명 왕권 때문이었을 것이 맞고, 그 중심이 공룡인 것도 맞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을 저만이 모른다. 그런데 본인이 저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자신이 아니라고 말해봤자 들리지도 닿지도 않을 것이다. 

"그 말에 답을 내릴 수 없는 순간부터, 두려워졌어. 또다시 나의 잘못된 결정으로 이제는 엘레나가 남기고 떠난, 내게 가장 소중한 내 아들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침묵했네. 결정을 내리지 않았어. 더는 무언가를 나의 책임으로 잃지 않도록, 나의 결정으로 사라질 이는 없도록 말이야."

낮고 미련없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가족을 잃은 두려움이, 공룡의 손을 묶어버리고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이십여 년의 세월을 살았고, 지금 당장 떠나더라도 미련 하나 남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너무 다정한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지금의 정을 포기해버리려 했던 것일 거다. 

"그런데… 라더가 자라고 나니까, 그제야 나라의 상황이 눈에 보이더구나. 엘레나가 사랑했을 나라가, 그리고 사랑하는 내 아들이 물려받을 나라가 말이야. 엘레나는 나에게 라더에게 안전한 왕국을 만들어달라 부탁했는데도, 나는 그 말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어. 무려 20년 동안 말이야."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공룡은 분명 성군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에투알은 깊은 곳에서 썩어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왕비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흔들리는 망국에서 공룡은 스스로와 라더를 지키기에 최선을 다했겠으나 충분하지 못했다. 성인이 된 라더를 국민들 앞에서 소개하는 자리에서 혁명단이 난입했던 날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덕개는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그래, 분명 안전한 나라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함께 바꿔나갈 생각을 해야지, 왜 혼자 다 떠안고 가려고 생각하느냔 말이다. 

"라더도 이제 다 자랐으니, 이제 그에게 맞는 나라를 만들어주는 데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이제는 내가 없어져도 혼자 버틸 수 있을 만큼 자랐으니, 그럴 거면 내 목숨을 써서 가장 안전하고 멋진 나라를 만들어주는 것이, 엘레나의 뜻도 따르고 내 아들에게도 좋을 일이라고 생각했어. 목적을 다 이루면 엘레나를 보러 가도 괜찮겠구나, 그리 생각했지."

이렇게 포기하게 내버려두어야 하나? 덕개의 머릿속이 자신에게 묻는 질문으로 가득 찼다. 정말 붙잡을 수 없는 건가? 이렇게, 이렇게 그가 떠나도록 만들어야 하는 건가? 엘레나 왕비님의 뜻은 분명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가족이 자신의 가족이 빨리 오길 바라겠는가. 그런데 왕비에 대한 국왕의 그리움은 너무나도 짙었다. 감히 그 세월만큼 쌓인 감정의 무게를 자신이 재단할 수 없었다. 지금 그를 붙잡을 자격이 자신에게 있었나? 저 긴 세월의 감정을 자신이 함부로 휘둘러버려도 되는 것인가? 옳지 않은 결정일 터지만, 왕의 뜻을 자신이 감히 배반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그랬는데."

멈칫. 복잡하게 엉큰 실타래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덕개의 물음이 멈췄다. 불안과 초조함에 떨리던 손이 공중에서 그대로 멈춘다. 국왕의 말투가 무언가가 변했다. 떠날 준비를 마치고 지난날을 회고하듯 읊조리던 목소리가 조금은 달라졌다. 

"엘레나가 떠난 이후로, 내게 새로운 목표 같은 건 생기지 않을 거라 여겼다. 아니, 감히 그런 것들을 가져선 안 된다 생각한 게 맞겠지. 그래서 내게 주어진 목표를 다 이루면, 조용히 떠나려 했으나…. 그 아이가 내게 새로운 목표를 가져다주었네."

공룡은 응접실에서 만났던 당돌한 젊은이를 생각했다. 갈색 머리카락에 회색 눈동자가, 분명 라더가 어릴 때 몰래 아들을 만나러 갔다가 봤던 라더의 친구였을 것이다. 혁명단 내에선 뛰어난 사격 실력으로 숨은 실력자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사람의 마음도 돌릴 수 있을 만큼 당찬 태도와 맑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잠뜰과, 그리고 곁에서 수십 년간 묵묵히 기다려준 덕개와 라더 덕분에, 공룡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자신만을 위한 목표를 세울 수 있는 용기를 말이다.

"덕개, 네가 그랬지. 이대로 사라지는 것이 라더를, 엘레나를 위한 일이냐고. 내가 어리석었어. 아니었네. 그렇지만 감히 욕심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어. 이미 가족을 잃은 내가 다시 가족을 보호하면서, 그저 평화롭게 웃으며 살아도 되는 자격이 있는 것인지, 자신이 나질 않았어. 그런데 라더도, 자네도, 괜찮다고 말해주니…. 나 혼자 끌어안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니, 이토록 흔들리지 않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처음엔 귀가 어떻게 되어버린 건 줄 알았고, 자신의 바람이 만들어낸 환청이라 생각했다. 떠나지 않고 남아주길 바라는 저의 생각이 만들어낸 망상인 줄 알았다. 하나 숨을 열 번 넘게 내뱉을 만큼의 시간이 흐르니, 그것이 환청이나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폐하, 그, 말씀은…."

"덕개."

국왕의 부름에 덕개는 놀란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국왕을 바라보았다. 국왕은 몸을 돌려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꾸며낸 미소나 가식으로 덮어버린 표정이 아니었다. 다짐을 마친 자의 결심이 담긴 부드러운 미소였다.

결정을 내린 것이다. 살아가기로. 

"걱정하게 하였구나."

아, 폐하다.

그 어린 날, 실수해도 괜찮다며 가끔씩 어린 궁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폐하의 눈이다. 옳은 판단을 내려주고 아랫사람들을 자애롭게 감싸던, 성군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눈이다. 내일을 살아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던 예전의 그 사람이다.

"폐, 하… 전…."

눈앞이 물로 흐릿해진다. 가둬두려 했던 감정들이 방울방울 흘러넘쳐 떨어진다. 긴장이 탁 풀리자 지금껏 팽팽히 잡고 있던 감정이 막히지 않고 터져 나온다. 어전에서 예의가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으나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수십 년 지킨 이가 떠나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안도감으로 바뀌어 후두둑 쏟아져 내린다.

"저는…저는, 폐하께서… 정말 다 놓아버리신 줄 알아서, 그래서…."

"원 녀석, 아직도 울보구나."

국왕이 과거가 생각났는지 쿡쿡 웃었다. 굵은 눈물방울이 덕개의 볼을 타고 방울방울 떨어졌다. 정말 무서웠다. 덕개는 어린 시절 궁에 들어와, 비록 공룡을 최측근에서 모시진 못했어도, 하나의 신하로서 그의 곁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지켰다. 왕자가 태어난 이후에는 영광스럽게도 왕의 신임을 받아 왕자의 호위라는 중책까지 맡게 되었다. 그만큼 긴 시간을 섬겼고 긴 충심과 신뢰가 쌓였다. 그런데도 자신의 주군이 모든 걸 내려놓으려고 할 때조차,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왕비가 죽은 날, 그에게 가장 힘든 날이었음이 분명한 날에도 신분 차 때문에 함부로 위로도 건네지 못했고, 그날의 아픔이 오늘까지 이어져 그를 포기의 문턱 끝까지 밀어붙일 때까지 아무것도 못 했다는 것이 후회스러웠다. 긴 세월을 곁을 지켰는데도 무력하다는 것이 사무치게 서글펐다. 이대로 변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이 끊이질 않았었는데, 정말 다행히도 그가 다시 일어섰다. 젊은 날 보이던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겠다 답하였다.

"재판에 따르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야. 단두대에 오르라 하면 군말 없이 오를 것이고, 징역형을 당해도 기꺼이 갈 것이네. 그것이 국민의 뜻이고, 난 그들의 왕이니까. 사실상 지금껏 왕실의 행실을 보면 그럴 확률이 더 높겠지. 그런데 만약, 정말 만약에 말일세, 용서받는다면…."

공룡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음 회의 때 보자는 뤼미에르 단장 루시엔이 생각난다.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진 않겠다던 카타콤의 단장 수현이 생각난다. 이다음 회의를 위해 준비할 것이 있다며 서재로 가던 각별이 생각난다. 재판 이후에도 볼 날을 고대하겠다는 잠뜰이 생각난다. 그리고, 다급하게 자신을 불러세우던,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 라더가 생각난다. 모두 내일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며, 힘껏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특정 한 사람이 아닌, 에투알을 위해 주어진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던 자들. 훨씬 어린 이들도 그런데, 자신이 포기해선 안 되겠지.

"그때는 새로운 왕국에서, 아주 열심히 살아볼걸세. 숨이 멎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하고 싶었던 것들, 그리고 여태껏 내 소중한 이들에게 해주지 못한 것들, 모두 다 할 것이네. 엘레나가 가보고 싶다고 했던 곳이나, 라더가 즐거웠다고 했던 것이나…. 천천히 하나하나 다 둘러본 다음에 엘레나를 보러 가도, 늦지 않겠지."

공룡은 마지막으로 방 안의 물건들에게 시선을 준 뒤,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을은 완전히 물러갔고, 어두운 밤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그 아름다운 어둠 사이로, 점점이 무언가가 보인다. 

"늘 똑같은 일상의 반복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앞으로 어떨지 조금은 기대가 되는구나. 나의 내일에 누가, 무엇이 자리해 있을지. 라더와 백성들이 만들어나갈 에투알은 얼마나 밝게 빛날지…. 그리고 그 나라 속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지. 그래, 하루하루 변할 그 모습을 볼 내일이 기대되는구나."

창밖으로 이른 새벽별들이 하나둘 밤하늘에 얼굴을 내밀었다. 공룡은 그 작은 불빛들을 눈에 담았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창밖의 길거리를 따라 백성들이 집안에 하나둘 등불을 켜기 시작한다. 그 불빛들이 모여 지상에도 밤하늘과 같은 수많은 별들을 만들어 낸다. 에투알 국민들이 만든 밤하늘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공룡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더없이 밝은 미소다.

"별이 이제야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벌써 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국왕의 눈에 밤하늘이 스며들었다. 작지만 밝게 빛나는 점점의 별들이 그의 눈에서 반짝인다. 이제 시작이다. 이제 한 걸음 내디뎠다. 그와, 별의 나라 에투알 모두. 이제야 막 떠오르기 시작한 새벽별들이다. 

덕개는 소매로 눈가를 닦고 덩달아 웃었다. 걱정 따위 없이 안도감으로 크게 웃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들린다. 안정된 과거를 버리고 흔들리는 미래로 걸어간다. 사무치게 그리운 과거를 가슴속에 묻고 그리운 이가 없는 미래로 한 발자국씩, 느리게 나아간다. 많은 것이 그리워질 것이다.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이 우리를 흔들 것이고, 두려움에 잠식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별이다. 작은 불빛으로도 밤하늘을 밝히는 아름다운 별의 나라다. 별빛은 흔들리기 때문에 빛이 난다 하였다. 그러니 지금의 이 흔들림도, 분명 괜찮을 것이다.

에투알은 잘해낼 것이다.

우리는 잘해낼 것이다.

우리는, 에투알. 영원토록 지지 않을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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