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여, 부디 지지 마소서.

별이여, 부디 지지 마소서. 후일담

혁명 | 어쩌면 가능했을 지도 모르는 이야기

사람들이 오가는 모퉁이에 햇빛이 잘 드는 작은 찻집이 있다. 이 찻집은 입구에 커튼을 친 작은 여러 개의 방이 있었는데, 한 남자가 그중 한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이 남자의 푸른색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혼자 앉아 있는데도 차를 두 잔 주문하여 자신의 맞은편에 한 잔을 둔 것을 보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법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이 평범한 사람은 아닌 듯하였다. 아마 방이 있는 찻집으로 온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차를 두 모금 마시며 기다리고 있을 때, 입구를 가린 커튼이 들춰지며 누군가 들어왔다.

"미안하구나 라더야, 내가 좀 늦었구나."

"괜찮습니다, 아바마마. 차를 미리 주문해두었습니다."

"원, 이젠 그렇게 부르지 말래도."

"하하, 알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라 불리자 그제야 만족한 갈색 머리카락의 남성은 저의 아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종이를 만지다 온 것인지 그에게서 양피지 냄새와 잉크 냄새가 났다. 그가 좋아하는 차였는지 한 모금 마시고는 그의 표정이 밝게 폈다. 그 모습에 라더는 피식 웃었다. 그의 아버지 공룡이 궁에 있을 때 즐겨 마시던 차였기 때문이다. 아마 어마마마께서도 즐긴 차라고 하셨던가. 꽤 고급 차이기에, 지금의 아버지께선 흔히 마실 순 없는 차라 이렇게 종종 만날 때마다 라더는 이 차를 주문하곤 했다.

"안경을 쓰시네요?"

"종일 종이만 봐서 그런지 눈이 영 침침해지더구나. 젊은이들은 멀쩡하던데, 나이가 많다 보니 힘들어서 하나 샀지."

"말씀해주셨다면 제가 사드렸을 텐데요, 안경이 싼 가격도 아닌데…."

"어허, 이제 왕실과 관련도 없는데 왕실 앞으로 내려오는 돈을 날 위해 쓰면 안 되지. 비싼 건 맞지만 못살 정도는 아니다."

공룡이 아버지를 무시하지 말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고는 선물로 받은 안경줄이나 봐달라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라더는 못 말린다며 다시 웃고는 저의 찻잔을 다시 집어 들었다.

국민 재판이 있었던 그 날로부터 삼 년이 지났다. 재판이 있기 전, 공룡은 라더를 찾아와 덕개에게 말했던 자신의 결심을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직까지도 그날의 감격스러움이 잊히지 않는다.

재판은 상당히 길게 진행되었다. 뤼미에르와 카타콤, 그리고 국민들 모두 치열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무려 한 달이 걸렸다. 재판장에 섰을 때, 공룡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국민들을 향해 깊이 고개 숙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그동안 무지하여 침묵하여 미안하다고, 이제 와 바로잡을 순 없겠으나, 그대들의 뜻이 어떻든 따르겠다며 말이다. 왕의 사과를 들은 국민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가장 신분 높은 자에게 사과를 받았다며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이제 와 가식 떨지 말라며 돌을 던지는 이도 있었다. 공룡은 그 모든 말들을 겸허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성실히 참여하였고, 스스로를 변호하기도 하여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재판은 무려 삼 주간 진행되었고 결과가 나오기까진 거기서 일주일을 더 더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판결문이 내려졌다. 지금까지 행한 죄가 깊으나,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기여한 바가 있으니 이를 참작하여 사형이나 징역형은 내리지 않겠다고 하였다. 다만 왕족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하고 그 신분을 평민으로 강등하겠다는 것이 최종 판결문이었다. 평생을 궁에서만 살던 자에게 가혹한 형벌일 수 있겠으나, 공룡은 오히려 관대한 처분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의 에투알에 신분제가 큰 의미가 없어질 것을 생각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의 눈이 어디까지의 미래를 예측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판결이 내려진 바로 다음 날 공룡은 궁에서 나왔다. 재판이 이어질 동안 왕비의 방은 이미 정리해뒀으니, 자신의 방은 알아서 정리해두라고 아들에게 말하며 말이다. 조금만 더 있다 가라고 라더가 말하였으나, 이미 왕실의 자격을 잃었으니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며 공룡은 고개를 저었다. 왕성의 별장이나 가신들이라도 주겠다는 것도 전부 거절하였다. 왕실 앞으로 내려질 금액에서 자신에겐 한 푼도 쓰지 말라는 완고한 뜻이었다. 그래도 당장 갈 곳도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인 라더가 옥신각신 한 끝에, 결국 수도 외각에 거의 버려지듯 비어 있는 작은 집을 사주는 것으로 겨우 협의해 줄 수 있었다. 라더는 그것도 성에 차진 않았으나 아버지의 고집을 상대론 거기까지였다.

국왕은 현명한 왕이고 정치를 파악하는 눈은 뛰어났을진 모르겠으나 돈에 관해선 문외한이었다. 물건을 사는 법 세금을 내는 법 등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배워가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전직 왕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이웃 주민으로부터의 도움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주민들은 공룡을 지나친 경외를 담아서, 혹은 불쾌함을 담아서 바라보았다. 일부 식당에선 아예 밥을 먹다가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라더가 알았으면 분명 그 일대를 뒤엎었을 것이다. 물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느라 벅찼는데, 다행히도 잠뜰이 많이 도와주었다. 지금 공룡이 일하고 있는 곳도 잠뜰이 알선해준 곳이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평민들을 상대로 편지를 대필해주거나 글을 읽어주는 곳이었다. 잠뜰이 과거에 라더의 편지를 읽지 못했던 것에서 착안하여 시작한 사업이었다. 이후 왕실의 후원을 받아서 전국적으로 확대된 복지기구가 되는데, 이것은 조금 더 훗날의 이야기이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평민은 귀했기에 적어도 공룡이 그곳에서 물세례를 맞으며 쫓겨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어려운 단어도 구사 가능하고, 고급 귀족들이나 쓰는 특이한 필체로도 글을 쓸 수도 있었기에 꽤 인기 있는 일꾼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좋다며 그에게 편지를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손님들도 종종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의회 회의를 방청하였습니다."

아버지와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라더가 문득 생각났다며 말을 꺼냈다. 그의 말에 공룡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예상이 간다며 웃었다.

"그 둘은 여전히 싸우더냐?"

"말도 마십시오, 오히려 점점 열을 내며 싸우는 것 같습니다."

"젊어서 그런가, 기력도 좋아."

"아버지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녀석, 입담이 늘었구나."

에투알 의회의 상원의원엔 전 카타콤의 단장 수현과 전 대신인 각별이 있었다. 왕위가 라더에게 넘어감과 동시에 결성된 의회였다. 공룡이 제안한 대로 각별을 포함한 대신들이 일부 자리를 차지하였고, 일부는 혁명단 내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자들을 위주로 채워졌다. 몇 년 후면 투표로 그 자리를 다시 선출하겠다는 법령은 이미 의회를 통과한 지 오래였다. 그들은 새로운 에투알을 위한 법령과 정책들을 여러 가지 만들었는데, 그 회의 과정에서 늘 부닥치는 게 각별과 수현이었다. 공룡이 말한 대로 각별은 의회에서 새롭게 그의 정치 행보를 시작하였고, 수현은 루시엔이 내각을 담당하고 있으니 자신은 그와 달리 의회에서 활동하겠다며 상원 의원의 길을 택하였다. 의회가 결성될 때부터 이 둘이 싸우지 않은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처음에 라더가 회의에 방청하여 그 모습을 보았을 땐 과연 괜찮을지 걱정하였으나, 총리대신 루시엔이 저 둘이 싸운 다음 날이면 각자 훨씬 좋은 정책을 가져오니 오히려 좋다며 걱정 말라고 웃어 보였다. 아직 새로운 제도가 초기인지라 내각과 의회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아 루시엔도 종종 의회 회의에 참여하곤 했는데, 슬슬 명확하게 분리하려고 준비 중이라 하였다. 그의 내각에서 일하는 자들은 밤샘이 당연시 될 정도로 혹독하게 일하고 있다고 하였다. 순한 인상과 달리 가혹한 면이 있다며 라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국민들은 새로운 제도에 놀랍도록 잘 적응하였다. 왕이 존재하나 통치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결정이 내려진다는 것이 초기의 그들에겐 익숙하지 않았으나, 한 달에 가까운 국민재판을 직접 눈으로 보며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인정하지 못한다며 목소리 높이는 국민들로 인해 약간의 혼란이 일긴 했으나 그 파력은 미미했다. 오히려 새로운 국왕인 라더에게 열광하는 국민들이 많아졌다. 라더가 한 번 연설하러 올 때마다 광장은 그를 보겠다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일었다. 갓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국민들 앞에 나섰을 때 저격을 당할 뻔했던 기억이 있어 조금은 두려웠던 라더는, 이제는 수십 번의 연설을 하며 국민들 앞에 기쁘게 나가는 왕이 되었다. 라더가 가는 길에는 언제나 한 발자국 뒤에서 그를 보호하는 근위대장 덕개가 있었고, 그의 일정을 담당하며 내각의 의견을 전달해주는 그의 절친한 친우 잠뜰이 있었다. 공룡이 예견한 대로 잠뜰의 언변과 당찬 태도는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고, 일 처리 능력 또한 뛰어나 국왕의 비서 격이나 다름없는 중책을 잘해낼 수 있었다.

"아버지, 내일은 뭘 하시나요?"

"아, 내일은 방앗간 댁 둘째 따님이 편지 쓰러 오는 날이란다. 타지에 있는 연인에게 편지를 쓰러 2주에 한 번씩은 오는데, 문장을 매우 아름답게 구사하는 자라서 기대가 된단다."

기대가 된단다, 라더는 그 말에 자신의 아버지의 표정을 쳐다보았다. 궁에 있던 그 시절보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표정,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과 같이 후련하고 생기있는 표정이었다. 그의 눈이 이렇게 반짝이는 빛을 띨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과거의 시간이 순간 스쳐 지나간다. 더는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거라고 자포자기하던 그때가 생각난다. 이렇게, 서로의 일상에 대해 한가로이 이야기하며, 차를 함께 들며, 내일 있을 일에 대해 기대한다고 말할 날이 올 것이라고, 누가 알 수 있었을까.

공룡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었어도 이미 한 번 포기했던 백성들을 보는 것도 영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고, 그들의 편지를 대신 읽어주며, 공룡은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 수 있었다. 타지에서 공부하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들. 간혹 빌려 간 돈을 당장 갚지 않으면 네가 아끼는 책을 전부 불살라버릴 것이라는 협박성 편지를 부탁받을 때도 있었다. 공룡이 부탁받아 써내려가는 편지엔 그의 백성들의 인간적인 감정들이 묻어있었고, 그가 읽어주는 편지엔 반짝이는 별과 같은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하루하루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적으며, 그는 그들에게 조금씩 물들어갔다. 그에게서 나는 양피지 냄새와 소매에 묻은 잉크 자국들이 이제는 그의 일상이었고, 그의 편안한 행복이었으며,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그의 소중한 시간이었다.

"라더야, 이제 슬슬 출발해야… 어, 선왕 폐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년째 말하고 있거늘."

"하하, 입에 영 붙지를 않아서요."

잠뜰은 가볍게 웃으며 커튼을 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공룡이 평민들 마을에 자리 잡은 이후로는 잠뜰도 바빠져서 자주 만나러 오지 못했기에, 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회포라도 풀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라더는 이 근처에서 일이 있었기에 그만 일어나봐야 했다.

"그럼 아버지, 2주 후 휴가 날에 바다 여행 갈 때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거 진짜 가냐? 왕실 돈을 나한테 쓰면 안 된다고 내 말하지 않…"

"계속 그러시면 왕의 권한으로 제 말을 대필할 인력이 필요하니 데려가겠다고 해버릴 수 있으니 그냥 오세요. 저희에겐 첫 여행이지 않습니까."

"월권이구먼. 이거 제재 들어가지 않나?"

이 정도로는 안 걸린다며 시침을 뚝 떼는 라더 말에 공룡은 내 아들이 언제 이리 뻔뻔해졌느냐며 웃었다. 공룡이 못해봤던 것 중에 가족 여행이 있었다. 라더가 태어나기 전에는 너무 바빴고, 라더가 태어난 이후에는 한가로이 휴가나 가기엔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많았다. 제법 자리가 잡히고 여유로워지니 조용히 여행을 가보고 싶다고 라더에게 말을 꺼냈는데, 라더가 한 달 전에 아주 화려한 여름 휴가 계획을 세워온 것이었다. 과하다고 했으나 이번에는 라더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첫 가족여행이라며 덩달아 들뜬 라더를 보니, 말리고 싶은 마음도 줄어들기도 했고 말이다.

다음에 보자며 라더가 일어났다. 방 입구를 가려둔 커튼이 들춰지며,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덕개의 모습이 보였다. 라더와 잠뜰이 먼저 가게 밖으로 나갔는데, 덕개는 잠시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왜 안 따라가느냐며 공룡이 말을 걸었다.

"폐하, 행복하신 거죠?"

공룡이 눈을 깜빡였다. 거 폐하라 부르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너도 그러냐고 한마디 하려다가, 그만뒀다. 저 물음은 그 날, 왕비의 방에 서 있던 자신을 떠올리며 묻는 말이었다. 그 뜻을 알아챈 공룡은, 싱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 눈엔 어떻게 보이느냐?"

그 말에 덕개도 웃었다. 그러곤 에투알 전통 예를 그에게 올렸다. 마지막으로 올리는 예일 것이다. 이제 그의 온전한 주군은 라더였고, 공룡은 완벽히 에투알의 하나의 평민으로서 살 것이다. 더는 불안에 웅크리던 에투알의 국왕은 없다. 더는 주군이 떠날까 봐 두려워하던 호위기사 역시 없다. 이 인사 하나로 그 과거들은 모두 떠나보내고, 그 둘 모두 그들이 기대하는 내일로 걸어갈 것이다.

덕개마저 가게를 나가고, 공룡은 창가의 자리에 홀로 남았다. 가게 안에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오늘 그들의 하루는 어땠다느니, 내일은 어떻게 할 것이라느니. 평범한 사람들의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들이 두런두런 오간다. 공룡은 그 소리들에 귀 기울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리를 오가는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 위로 보이는 드넓은 푸른 하늘이 눈에 담긴다. 맑은 날씨가 자랑할 만한 것이 되는, 지극히 평범한, 그리고 평범하게 행복한 하루다. 내일을, 그 다음 날을 평범하게 기대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에투알의 오후다.

 

어쩌면 가능했을 지도 모르는 이야기

「별이여, 부디 지지 마소서.」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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