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옷을 의뢰하시겠습니까?

prologue. 어떤 옷을 의뢰하시겠습니까?

드레스의 주인 | 잠뜰

눈이 닿는 곳이 전부 무한히 펼쳐진 초원인 곳, 그 위 어느 작은 부분 위에 작은 건물이 하나 있다. 붉은 지붕을 가지고 한 쪽 벽이 뚫려 개방감 있는 그 건물은 과거에 이 나라의 역참으로 쓰였던 곳이다. 회색 돌로 만든 평평한 앞마당 위에 의자 서너 개가 있고, 마구간으로 보이는 낡은 별관도 있지만, 이제는 쓰지 않은 지 오래된 곳이다. 지나가던 여행자들이 잠시 앉아있다 가는 것 말고는 찾는 이도 없는 낡은 건물이다. 

오래된 건물 옆에 누군가가 부드러운 오후 볕을 받으며 서 있다. 그녀는 질 좋은 원단으로 만든 고동색 자켓을 입고, 하얀 크라바트를 단정히 메고 있었다. 검은색 가죽 장갑은 손등을 반만 덮었는데, 마감이 좋은 것이 수준 높은 디자이너를 고용할 수 있는 상류층 사람이거나 아주 솜씨 좋은 디자이너 본인인 것 같다. 회색 레이스로 장식된 검은색 모자 아래로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허리께로 떨어진다. 그녀의 왼손에 들린 수트 케이스는 사용한 지 오래된 듯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인다. 기다리기가 무료한 것인지 아니면 무엇을 확인하려는 것인지, 그녀는 자신의 겉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든다. 금박으로 글씨가 찍혀 있는 검은색 종이들이었다.


"으악!!"


사람도 잘 안 오는 버려진 역참에 그날따라 두 명이나 들렀다. 한 남성이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빠르게 달리다가 그만 그녀와 부딪히고 말았다. 소리를 지르며 넘어진 남성 덕분에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가 전부 바닥으로 팔랑이며 떨어졌다. 


얼핏 보면 그것은 기차표 같았다. 표를 끊는 부분에 정직하게 '기차표'라고 적혀 있는 점이 특히 그랬다. 하지만 평범한 기차표에 적혀 있어야 하는 출발지와 출발시간, 좌석 칸이 전부 적혀 있지 않은 점이 달랐다. 도착지는 적혀 있었지만, 그마저도 공란으로 되어있는 표도 있었다. 적혀 있는 숫자는 표를 끊는 부분에 있는 일련의 번호뿐이었다. 그리고 기차표치곤 이상하게도, '의뢰자'라는 글자가 기차의 도착지 아래 뚜렷이 적혀 있었다.

"으아, 죄송해요! 제가 앞을 못 봤어요."

"괜찮습니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남성이 황급히 사과하며 표를 주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여성은 흐트러진 자신의 모자를 고쳐 쓰곤 표를 건네받았다.


"기차표인가요? 굉장히 많네요."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직업이어서 그렇습니다."

"오, 저도 그런데! 전 마을 돌아다니면서 편지를 배달하고 있거든요. 어떤 일을 하시나요? 혹시 제가 아는 곳 소속일까요?"

"의뢰자분께서 요청하신 곳으로 출장을 가 옷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골든 살롱 소속 디자이너 잠뜰이라고 합니다만, 먼 곳에 있는 가게라 아마 모르실 겁니다."


잠뜰은 표를 갈무리하여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남성은 출장 디자이너라니 멋있다며 박수를 쳤다.


"그럼 기차를 타러 가는 건가요? 그런데 여기서 가장 가까운 역도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

"네, 알고 있습니다."

"으음…. 괜찮다면 제 짐마차로 태워드릴까요? 부딪힌 걸 사과할 겸 싸게 해드릴게요."

"괜찮습니다. 따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정중히 거절하는 잠뜰의 태도에 남성은 아쉽다고 말하더니, 이내 가봐야겠다며 자신의 짐마차를 끌고 온다. 부딪힌 일에 대해 미안하다며 사과하여 잠뜰은 다시 한번 괜찮다며 답해주었다. 마차를 이끄는 말들의 말굽이 다그닥거리는 소리가 멀어지더니, 이내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바탕 시끄러웠던 버려진 역참에 다시 고요함이 찾아온다. 바람이 풀잎을 흔드는 소리만이 몇 번 더 이어진다. 잠뜰은 눈을 지그시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잠시 느꼈다. 


"출발할 시간이군."


잠뜰의 말과 동시에, 공기를 가르는 증기기관차의 소리가 났다. 선로 위를 굴러가는 듯한 덜컹거리는 열차 바퀴 소리와, 증기를 내뿜는 열차의 칙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곳은 눈이 닿는 모든 곳에 끝없는 초원밖에 없는 곳이어서, 당연히 주변에 기차역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열차 소리가 나는 것이 이상할 법도 한데, 잠뜰은 그저 가만히 서 공중을 응시했다. 아주 익숙하다는 듯,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열차를 타는 것이 약속되었다는 듯 말이다.

그곳에 펼쳐진 장면은,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지 않을 것이다. 푸른 하늘 한 편이 금빛으로 반짝이는가 싶더니, 이내 구름과도 같은 연기를 뿜으며 무언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검은색 증기기관 열차가 금빛 가루로 사르륵 녹아내리는 선로를 따라 바퀴를 굴리며 잠뜰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부드러운 모래 같은 금빛 가루들이 하늘과 열차의 경계선을 따라 사르륵 흘러내려 하늘로 날아가 빛무리가 되어 사라지길 반복했다. 열차의 뒷부분은 흐릿하여 보이지 않아 끝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푸른 하늘과 초원 위로 부드럽게 퍼지는 빛무리는 꽤 아름다운 장면을 자아냈다.

이내 열차가 땅에 내려앉고, 증기를 내뿜으며 문이 열렸다. 열차의 수많은 칸 중 문이 열린 칸은 단 한 곳뿐, 잠뜰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의 열차 칸이었다.

잠뜰은 한 손으로 수트 케이스를 들고 열차에 올라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긴 촛대 위에 놓인 초였다. 촛불은 따뜻한 붉은 색으로 잔잔히 타오르고 있었다. 잠뜰은 안주머니에서 표를 한 장 골라 꺼내, 표의 금빛 부분을 초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촛불의 불꽃이 금빛으로 변하며 표를 태웠다. 표에 붙은 불꽃은 표가 끊어져야 할 곳을 따라서 반듯하게 표를 태우고는 사그라졌다. 촛대 위에 놓인 초는 다시 붉은 불꽃으로 돌아오더니, 촛불에 금빛 가루가 작은 불꽃놀이처럼 세 번 반짝였다. 마치 표를 확인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잠뜰은 표의 남은 부분을 가지고 객실로 향했다. 구두가 기차 바닥을 밟는 소리가 객실을 따라 울렸다. 사람이 한 명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그 객실에 잠뜰은 자신이 늘 앉던 자리로 향했다. 익숙한 몸짓으로 수트 케이스를 옆에 두고, 창밖으로 시선을 향한다. 

단 한 명의 손님을 태우자, 열차는 증기를 내뿜으며 다시 움직인다. 그녀가 있던 푸른 초원이 빛무리에 흐려지더니, 이내 화사하고 밝은 색이 시야를 채운다. 부드러운 분홍빛과 하늘빛으로 어우러지는 창밖 풍경은 하늘도 땅도 비추지 않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따금 들리는 칙칙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잠뜰은 눈을 감았다. 그녀가 탄 열차는 빛무리 속으로 달리며 의뢰자의 나라로 이동하였다. 몇 번째인지 모르는 의뢰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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