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왕모님들의 뜻을 의심하지 말라

밤을 보는 눈

여우 카페. 구미호 필립이 삼왕모의 명으로 인간계에 와서 차린 카페의 이름이었다. 이른 오전이었기에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잠뜰 씨는 조금 전에 나갔으니, 혼자 가게 준비나 할까. 오늘은 어떤 케이크를 먼저 구울지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바깥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가게 문 도어벨의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의뢰물품을 사무실에 두고 오는 바보 같은 퇴마사는 오랜만에 보네요."

"내가 잘못한 건 맞는데 그렇게 내 속 긁어서 해결될 일 하나도 없으니 좀 닥쳐줄래요?"

잠뜰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필립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왜, 저자가 여기에.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도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때 잠뜰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필립은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아, 잠뜰 씨. 일찍 돌아오셨네요. 그리고, 옆에 분은…."

"제가 의뢰받은 물품을 깜빡 잊고 사무실에 두고 나왔지 뭐예요. 그거 가지러 왔어요. 옆에는 같이 의뢰를 맡은 퇴마사 공룡이에요. 공룡 씨, 이쪽은 제 사무소 아래 카페 운영하고 계시는 명수 사장님."

역시, 공룡이 맞았다. 필립은 보이지 않게 주먹에 힘을 쥐었다. 공룡은 흥미롭다는 듯 필립을 바라보다가, 얼굴 가득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공룡 퇴마삽니다. 처음 만난다는 듯한 뻔뻔한 태도에 기가 찼지만, 필립도 마지못해 그에게 건성으로 인사했다. 아, 예. 반가워요.

"그럼 이만 올라갈게요 명수 씨. 공룡 씨는 여기서 기다리실래요?"

"그러죠 뭐. 카페가 누구 씨의 칙칙한 사무소보다 훨씬 분위기가 좋네요."

"…명수 씨, 이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팔지 마세요."

잠뜰은 필립에게 신신당부하며 그녀의 사무실인 2층으로 올라갔다. 공룡은 잘 다녀오라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잠뜰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공룡은 필립에게 시선을 돌렸다. 방금까지 짓고 있던 웃음은 사라지고, 조소만 가득 담긴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삼왕모의 개가 되려면 빵도 잘 구워야 하나 봅니다?"

"…그 천박한 입에 감히 왕모님들을 올리지 마시죠."

"하하, 실례. 한복 입고 인간세계에서 케이크 굽는 구미호라니, 꼴이 꽤나 웃겨서요."

해광시의 경찰 공룡. 하층민 주제에 경찰이 되어서는, 해광시에서 최고로 존엄한 삼왕모들께 존경심이란 개미 눈물만큼도 보이지 않는 건방진 작자였다. 필립은 자신이 충성하고 있는 삼왕모를 거스르는 이 자가 싫었다. 그런데 왕모님들께서 지상의 이 자를 감시하라 명하셨으니, 어쩌겠는가. 그래도 멀리서나 동태를 살피며 직접 마주치는 건 피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다.

"그러는 당신은, 해광의 경찰이라는 자가 산 자들의 세상에서 뭘 하시는 겁니까."

"경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요. 야괴로부터 고통받는 무고한 시민들을 지키는 일. 아, 맞다. 해광의 경찰 역할은 높으신 분들 발닦개였던가?"

"보호는 무슨, 애초에 그 야괴를 만드는 건 당신이잖습니까."

호오? 공룡은 거기까지 알 줄은 몰랐다는 듯 가벼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나 전혀 당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알고 있었군요? 그 둔한 눈치로 알아차렸을 것 같진 않고…. 삼왕모가 일러주었나 보군요. 해광에서 일어나는 약자 차별은 다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자기들 심리 거스르는 이런 건 다 뻔히 알고 계신가 봐?"

"그 입에…."

명백한 모욕에 필립은 이를 악물었다. 푸른 영기가 필립을 감싸고, 필립의 구미호 모습이 드러났다. 아홉 개의 보랏빛 꼬리에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분노에 찬 표정으로, 필립이 공룡을 노려보며 낮게 외쳤다.

"함부로 올리지 말라 경고했을 텐데요."

영기가 요동친다.


쿵-

"뭐야, 뭔 소리야?"

잠뜰은 물건을 찾느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조금 전 건물 벽을 전부 흔들 정도로 큰 진동이 느껴졌었다. 설마 야괴의 짓인가? 잠뜰은 급히 눈을 감고 자신의 힘을 집중하였다. 야괴가 내뿜을 영기를 감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느껴지는 건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공룡의 영기 뿐이었다. 처음의 큰 소리 이후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자 잠뜰은 별거 아닐 거라는 판단을 내리며 눈을 떴다.

"주변에서 공사라도 하나 보지. 물건이나 빨리 찾아야겠다."


"꼬리까지 드러내시고, 들키고 싶어 작정한 모양이군요."

공룡이 손에 들고 있던 부적을 태우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건물 1층 전체를 뒤덮고 있던 녹색 결계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공룡은 손가락 끝으로 제 볼을 살짝 만져보았다. 불에 덴 것 같은 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빠르게 피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계까지 동시에 치면서 필립의 공격을 완전히 피하는 건 어려웠나 보다. 잠뜰이 보면 무슨 일이냐고 캐물을 테니 귀찮아지기 전에 수를 써둬야겠군, 그리 생각하며 공룡은 부적을 한 장 더 꺼냈다. 

"제가 결계 안쳤으면 꼼짝없이 들켰을 거예요. 위층 퇴마사가 성격은 꼬였어도 실력은 상당한데, 그쪽 영기쯤은 알아차렸을 겁니다. 적당히 하시죠."

"당신이야말로 선을 지키십시오. 다음번에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왕모님들께서도 당신을 예의주시하고 계시니, 허튼 짓은…!"

"하하, 하층민 따위였던 제가 해광의 최고 권력자분들께 관심을 받다니, 이거 영광인걸요? 그런데 왜 진작 안 막고 당신만 보내 감시하라 했대요?"

공룡은 가볍게 웃으며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을 흘려보냈다. 그러곤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읊조렸다. 영기가 응축된 녹색 글씨가 공중에 떠오르더니, 공룡이 들고 있던 부적에 새겨졌다. 그 부적을 왼쪽 뺨에 갖다 대자, 공룡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이 사라졌다. 상처를 치료한 것이 아니라 치료된 것처럼 보이는 환술 부적을 사용한 것이었다. 

필립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듯, 공룡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분들께서 자비로 당신을 감싸려…."

"아니, 그게 아니지."

공룡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상처를 거짓으로 치유한 것처럼, 웃던 표정이 거짓이었던 것 마냥. 

"자비가 아니라 야괴 없애는 거에 내가 쓸모 있으니 내버려두는 거겠지."

"…!"

"모를 줄 알았나 봐? 야괴를 내가 만들어내고 있는 건 맞지만, 해광에서 관리를 못 해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야괴가 더 많다는 걸."

당황해하는 필립이 즐겁다는 듯, 공룡은 밝게 웃었다.

"처음엔 신경도 안 썼겠지. 그런데 최근에 이곳의 거북 수호령이 그쪽 관생전에 가서 관리 똑바로 하라고 경고했다면서? 듣기론 물벼락을 내리고 갔다던데. 해광시가 수치를 당한 일이니 쉬쉬하기만 했겠지만."

"그걸, 어떻게…."

"그래서 더 이상 손 놓고만 있을 수 없었겠지. 그런데 해광 내부 야괴는 어떻게 해도, 이미 빠져나간 것들은 어떻게 잡아와? 지 손 더럽히기 싫은 왕모들이 해광 밖으로 나서겠어?"

왕모들을 모욕하는 발언이 필립의 심기를 건드렸지만, 이번엔 공룡 말마따나 위층에 있을 잠뜰이 신경 쓰여 필립은 화를 필사적으로 눌렀다. 왕모님들께서 직접 움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중한 위치에 있으신 분들이 어찌 함부로 움직이겠느냐는 게 파랑새 티티의 의견이었고 필립 역시 그에 동의했으나, 그저 내버려두었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힘들었었다. 그런데 공룡이 그걸 건드려 버린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나라는 써먹기 좋은 패가 나타난 거지."

공룡은 그런 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 지, 무대 위의 배우처럼 과장되게 두 팔을 흔들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이승으로 빠져나간 것들을 치워주고 있으니, 자기들도 편해서 내버려두는 거잖아? 안 그래?"

"...."

필립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이내 그는 자신의 영기를 거두며 그의 꼬리를 감추고, 다시 여우 카페 사장 명수의 모습으로 변했다. 왕모님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자를 처음 마주쳤을 때보단 조금은 진정이 된 듯싶었다.

"저는…당신이 선을 넘지 않도록 감시하란 명을 받고 왔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야괴를 만드는 것은 중범죄지만, 말씀하신 대로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야괴를 잡는 일도 하신다면, 이번 일은 자비를 베풀어 넘어가시겠다고 말씀하셨…."

"푸핫! 그놈의 자비, 자비. 그래, 아주 고마워서 눈물 나겠어? 그런데 선이라…. 그쪽에서 정한 선의 기준은 굉장히 널럴한가 봐? 내가 어떻게 인간계에서 이 상태를 유지하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야."

"…."

이미 죽은 공룡이 인간계에서 버젓이 활동할 수 있는 이유. 필립은 그걸 잘 알고 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왕모님들께 전해 들은 터였다. 살아있는 인간의 생기를 빼앗으며 인간과 거의 유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지. 어둠밖에 없는 해광시에서 있을 때 보다, 산 자를 내려다보는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는 낮의 인간계에서 활동하기 위해선 공룡은 더욱 많은 생기를 빨아들이고 있을 터였다.

"그래… 몇 명까지 죽는 걸 허락받고 왔나?"

공룡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차가운 그 목소리가 필립이 임무를 받은 후부터 계속 외면하고 있던 부분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이 일을 처리하느라 나에게 생기가 뺏겨 죽을 이들을, 몇 명까지 묵인해도 된다고 허락받았냔 말이다."

 "…그, 건…."

"정해주지도 않았지?"

필립은 대답하지 않았다. 공룡은 그럴 줄 알았다며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왕모님들께선 그 부분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고려할 영역의 일도 아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은 그저 왕모님들의 뜻을 따르는 존재이니, 필립은 그들의 명에 반문하지 않았다. 같은 위치의 티티에게 이대로라면 생자들만 다치는 것 아니냐며 작게 한탄하고 왔을 뿐이었다. 티티의 답은 일관되었었다, 왕모님들의 뜻을 의심하지 말라고. 그래서 필립 역시 의심을 죽이고 군말 없이 명에 따랐다.

"수호령 눈에 거슬리지만 않는다면, 서민 몇 명이 희생되든 상관 않겠지. 그런 자들이야, 당신이 목숨 걸고 충성하는 왕모들은. 이미 죽은 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꿎게 살아있는 이들 몇 명이 죽든, 자신들의 지위와 명성만 훼손하지 않는다면 신경 쓰지 않겠지."

"...."

"너는 그런 자들에게 진심으로 충심을 바칠 수 있나?"

옳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다. 그러나 한낱 미물인 자신이 어찌 수천의 세월을 살아온 왕모님들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있겠냐며, 자신이 부족한 것일 거라 생각하며 넘어갔었다. 그런데 공룡의 말에, 필립은 다시 그 의심들에 흔들렸다. 왕모님들께서 틀리셨을 리 없다. 그러나 수천 년의 세월동안 세상은 변해왔지만 왕모님들께서는 요동조차 하지 않으셨다. 변화에 휩쓸리는 내가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필립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공룡은 그런 필립을 무표정을 응시하다가, 싱긋 웃었다.

"그럼 명수 씨, 다음에도 재밌는 이야기 많이 해주세요."

"네? 갑자기 뭔…."

"공룡 씨! 많이 기다렸어요?"

계단을 밟는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났다. 어둠을 몰아낼 거라고 왕모님들께서 예언하신 퇴마사가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공룡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 그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네, 행동이 굉장히 굼뜨시네요~"

"저놈의 입… 아 미안해요! 어디 뒀는지 잊어버려서 한참 찾았단 말야."

"괜찮아요, 카페 사장님이랑 이야기하느라 심심하지 않았거든요. 그렇죠? 명수 씨."

움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공룡의 태도에 필립은 순간 몸을 떨었다. 그처럼 태연하게 맞받아칠 수 없었던 필립은 시선을 돌렸다. 잠뜰은 공룡의 말이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둘이 아는 사이에요?"

"같은 고향 사람이더라고요. 그럼 명수 씨, 이만 가볼게요."

간다는 공룡의 말에 필립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더 말할 것이 있었다. 그러나 잠뜰은 이미 문밖으로 나가 있었고, 공룡 역시 왼손으로 문 손잡이를 잡은 채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손 검지를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댄 채로, 보름 밤의 달처럼 눈을 빛내며. 

"다음에 또 만나요? 명수 씨."

딸랑, 도어벨 소리가 들리고, 그의 모습이 필립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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