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과, 바다와, 사랑하는 그대 上
엑스트라 합작 | 혁명
엘레나는 왕성의 테라스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카락처럼 칠흑인 밤하늘엔 조그만 빛을 내는 별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기를 느끼는 것도 잠시, 곧 두툼한 무언가가 그녀의 어깨를 덮었다.
"아직 밤에는 바람이 많이 차오, 왕비."
"폐하."
부드럽게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엘레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남편이자, 위대한 에투알의 국왕 공룡이 웃으며 서 있었다. 항상 그의 어깨에서부터 내려오던 붉은 망토가 지금은 그녀의 어깨를 덮고 있었다.
"별구경이라도 나온 것이오? 불렀으면 함께 봤을 텐데."
"국정 일로 바쁘신데 어찌 사사로이 부르겠습니까."
"왕비와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면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올 것이오."
엘레나는 그 말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출산 예정일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었다. 에투알의 온 백성이 곧 태어날 에투알 왕국의 후계자 소식에 들떠 있었다. 누구보다 들뜬 이는 공룡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왕비를 보러왔기에, 신하들이 엘레나에게 제발 폐하를 말려달라고 사정하는 소동도 있었다.
"그럼 폐하, 지금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가요?"
엘레나의 말에 공룡은 뒤쪽의 신하들에게 손짓했다. 왕의 뜻을 알아들은 신하들은 뒷걸음질로 물러나, 테라스에는 에투알의 왕과 왕비만이 남게 되었다. 신하들이 물러난 것을 확인한 공룡이, 엘레나 쪽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무슨 일 있었어, 엘레나?"
공룡은 그의 아내를 남들이 있을 땐 왕비라 불렀으나, 둘만 있을 땐 엘레나라고 불렀다. 엘레나는 공룡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그가 보여주는 미소를 사랑했다.
그렇기에 이 말을 꺼내기까지, 그녀는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의사에게서 저에 대한 말, 들으셨지요?"
공룡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사랑하던 그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엘레나는 그런 저의 남편을 보며 그저 힘없이 웃었다.
몇 달 전부터 엘레나는 저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 생각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는 나빠지기만 하였다. 공룡이 나라 안팎으로 내로라하는 의사들을 전부 불러들였으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말들뿐이었다.
결국 어제, 그녀를 몇 달 동안이나 봐왔던 주치의가 그녀가 출산 이후에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왕과 왕비의 죽음은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그 결론이 정말 많은 고민 끝에 나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만큼 정확한 결론이라는 엘레나는 알 수 있었다.
'하면, 아이는 무사히 태어날 수 있는 것인가.'
의사의 말을 듣고, 그녀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녀는 의사의 말을 담담히 받아들이려 하였다. 이제 와서 자신의 몸 상태가 변하진 않을 테니,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기만을 바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공룡은 그녀처럼 의사의 소견을 담담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의사가 공룡을 알현할 때 곁에 각별 대신이 없었다면, 아마 공룡의 검에 의해 의사는 그날로 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어디서 그런 망발을 내뱉느냐며 노하는 왕을 각별 대신이 겨우 말렸다고, 엘레나의 시녀가 전해주었다. 유한 성격의 남편이 그리 화를 낸 것은, 그가 이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안타까워만 하기에는, 그녀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엘레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그에게 전해야 하는 말이 있었다.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남편을 바라보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제가 잘못된다면, 폐하께서 저희 아이를…."
"엘레나."
줄곧 조용하던 공룡이, 엘레나의 말을 끊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아이가 자라면 함께 바닷가로 여행갈까? 책으로만 본 바다에 직접 가보고 싶다고 했잖아."
"폐하."
"내가 너와 우리 아이에게 바다를 보여줄게. 아이도 분명 널 닮아 바다를 좋아할 거야. "
"폐하."
"함께 봐주겠다고, 약속해줄 거지?"
"폐하, 제발."
엘레나는 공룡에게 한 발짝 다가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려던 공룡에게 눈을 맞추었다.
"그렇게 회피하기만 해서 될 문제가 아니란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녀를 바라보는 고동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애써 웃고 있던 그의 표정이 무너졌다. 공룡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차가운 밤바람이 붉은 망토를 흔들고 지나가기를 몇 번, 마침내 공룡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그리 잔인한 말을 해."
"…."
"왜 내 곁을 떠나겠다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야…."
"…저라고 이런 말 드리고 싶었겠습니까."
낮은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왕비로서 위엄을 갖추고 해야 할 말이 아닌, 사람 엘레나로서의 진심이었다. 의사의 말을 담담히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라고 갑자기 다가온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저도 폐하께 이런 말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도, 저도 살고 싶었단 말입니다."
"엘레나."
"폐하의 곁에서 함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는 말을 제 귀로 듣고 싶었고, 처음으로 내딛는 발걸음을 제 눈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지, 폐하 말씀대로 정말 바다를 좋아할지를, 전부 다 알고 싶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망토 자락을 쥔 엘레나의 손이 떨렸다. 목소리에 울음이 묻으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안 날부터, 그녀는 아이를 볼 날만을 꿈꾸었다. 자신의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리는 날까지 사랑하는 아이를 지켜보고 싶었다. 왕비가 되면서 포기한 수많은 것들 중 유일하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꿈이었는데, 그마저도 이젠 멀어져만 간다.
"그럴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폐하께서…."
"엘레나."
"저희 아이를, 제 몫까지 사랑해주세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될 수 있도록…."
공룡은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안아주기만 하였다. 떨리는 팔로 전해져 오는 남편의 불안감에, 엘레나의 눈시울이 순간적으로 붉어졌다.
왜 우리일까. 왜 하필 우리에게, 이런 이별이 찾아온 것일까. 한 나라의 왕과 왕비로서, 그저 평범한 남편과 아내가 되는 것은 바라지 못해도, 한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가 되는 것은 바라도 괜찮은 것 아니었는가. 그런데 죽음은 그런 그들을 비웃듯, 바로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젠 이 이별의 이유를 알아도, 그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밖에 남지 않았겠지.
심장 박동이 서로의 것에 맞춰질 만큼 시간이 흐르고, 공룡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엘레나, 나는… 너만큼 그 아이를 사랑해줄 자신이 없어. 그러니까 네가 말한 거, 전부 다 네가 직접 해. 처음으로 하는 말에 대답해 주는 것도, 첫걸음마 연습을 도와주는 것도. 다 나와 함께 해 줘."
"폐하, 지금 제 말을…."
"들었어. 전부 다 들었어. 하지만 아니야 엘레나. 너는 죽지 않아. 에투알 국왕의 이름으로 약속할게. 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엘레나는 무언가 말하려다, 그대로 입안으로 삼켰다. 그러고는 남편에게 기댔다. 지금은 그저 그의 말을, 이 따뜻한 품을 믿고 싶었다. 정말 자신이 살아서, 함께 아이가 자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비록 그 믿음이 거짓일지라도, 비록 둘 모두 거짓이란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오늘 이 밤만큼은 그리 믿고 싶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