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그 끝없는 밤으로부터
*[초능력 세계여행]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맞춤법 오류 지적 환영.
알파를 생포하라!
딱딱한 연구소의 음성 방송을 신호로 발치에 총탄이 빗발쳤다. 치유 능력까지 주입시켰으면서 꿋꿋이 다리만 노리는 것은 자비일까, 혹은 죽음마저도 선택할 수 없는 속박일까.
쉼 없이 달리는 와중, 등 뒤로 어린아이들의 맑은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어린 시절 기억이 그를 덮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너희가 또 다른 희생자라면, 언젠가 내가 무정한 주삿바늘로부터 어린 생명을 구할 수 있기를.
탈출을 결심한 순간 충동적으로, 그리고 순간적으로 두터운 강화유리와 단단한 철문을 박살내어 구석에 처박아 두었었다. 그것까지는 괜찮았으나 이 망할 제어 팔찌가 문제다. 팔찌만 풀린다면 손쉽게 나갈 수 있을 텐데, 나는 대체 어떻게 연구소장이 몇 번이고 최고의 보안이라며 자랑했던 두 가지를 한순간에 종잇장마냥 구겨 던졌을까.
다리를 스치는 총알의 수가 줄어든 것만 같아 뒤를 돌아보자, 빳빳한 정장과 묵직한 소총을 든 보안요원들은 생각보다 발이 느렸다.
그렇다면 기회는 지금이겠지.
길을 꺾자마자 바로 보이는 문으로 냅다 몸을 날렸다. 마침 복도와 연결되는 창문도 없는 곳이니 꽤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밀폐된 공간 속에서 토해지는 숨을 애써 주워담자 번쩍이는 금속이 눈에 들어왔다.
칼.
팔찌.
생각이 닿자마자 날카로운 날붙이를 집어들었다. 팔찌의 양 끝을 연결해주는 약한 부분을 노린다면 가능할 것이다. 가능해야만 한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칼질에 손의 힘이 풀려 손목을 베여도 따끔한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칼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구둣발의 탁탁거리는 소음에 점차 묻혀갔다.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발, 시간이 없어.
완전히 밀폐된 공간에서는 도망가 봤자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미래는 필히 참혹하리라. 더 삼엄해진 보안과, 더 잔혹해질 실험들.
딱.
팔찌가 끊어지는 순간,
쾅!
"여기다! 여기 있다!"
눈 앞에 셀 수 없이 많은 총부리가 들이밀어졌다. 재빠르게 피가 흐르는 손목을 새하얀 옷자락 뒤로 감췄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야.
"지금껏 얌전히만 있었어도 대우는 훨씬 나아졌었을 텐데 말이지."
하나가 말했다.
"굳이 성공하기도 그른 탈출이나 하겠답시고 시설을 부수는 꼴이란. 연구원이 지능도 높다고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더니, 생각보다 별론데?"
다른 하나가 잔뜩 빈정거리며 말을 받았다.
"됐고, 얼른 가둬두고 소장님께 보고하자. 이 야밤에 무슨 짓이람."
가장 뒷줄에 있던 누군가가 피곤이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만 포기하고 얌전히 따라오지? 알파."
알파.
알파.
알파는 누구지?
"…어차피 성공하기는 그른 탈출이라고?"
감춰두었던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저들은,
날 해치지 못한다.
모두의 자세가 경직되었다. 그제야 혈흔이 남은 옷자락과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이 보이는 모양이다. 이미 상처가 깨끗하게 아문 손목마저도.
그들의 생각과 감정이 뇌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경악, 당황, 공포…,
괴물이 따로 없군.
미친 건가?
조용히 죽기나 할 것이지.
듣고 싶지 않은 말마저도 적나라하게.
탕, 타당.
여러 번의 총성이 울렸고, 차가운 금속 탄환들은 일제히 허공에 멈춰섰다.
"아니, 죽이지 마!"
연구소장이 좁은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공중에 멈춘 열몇 개의 총알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는 역겹게도 환히 미소 지었다.
"오, 알파. 굉장히 감동적이던걸요? 강화 유리와 철문을 모두 부숴버리다니, 그것도 제어 팔찌를 찬 채로! 정말 대단한 발전이에요!"
"…난 알파가 아니야."
"아하하, 하지만 알파가 아니라면, 당신은 대체 누구죠?"
신경을 잔뜩 긁어대는 말에 할 수 있는 대꾸라고는 없었다.
"할 말이 없나 봐요? 그래요, 당신은 이 연구소가 아니라면 갈 곳이 없어요. 이곳이 당신의 집이라고요, 알파. 이만 받아들여요."
이를 바득 갈자, 손끝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젠, 집을 나가볼까 하는데."
"하지만 이대로 사라진다면, 당신이라는 완벽한 피조물의 가엾은 창조주는 어찌 해야 할까요?"
연구소장의 눈이 슬프다는 듯이 꼬리를 내렸지만, 입가는 한껏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비웃음을 막지 않았다. 행복이라는 감정 따위 없이 무감각함과 조롱만을 담은 웃음이 입 사이로 새어나왔다.
"당신이 막을 수는 있습니까? 기껏 해봤자 쓸모없는 총이나 쏴야 하니, 그나마 통해왔던 뱀 같은 혀에서 나오는 말로 살살 구슬릴 생각이었겠지."
연구소장이 만들어냈던 미소가 뒤틀렸다.
"알파, 어찌 그리 속상한 말을-"
"난, 알파가 아니야."
총알의 머리가 회전해 방향이 바뀌었다.
"이쯤 되면 당신도 알 텐데? 이미 늦었다는 것."
연구소장의 얼굴을 뒤덮던 가면이 모두 떨어져나가고, 욕망으로 가득찬 한 사람의 표정만 보였다.
"이젠 알아버렸으니, 더더욱 가만히 둘 수 없지."
연구소장이 손짓하자, 보안요원들이 한 번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능력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무능력자에 불과하다.
쾅. 벽에 처박고.
팍. 공중에 떠 있던 총알로 양 다리를 꿰뚫고.
훅. 능력으로 저 멀리 날려버리고.
하나씩, 빠르게.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되, 죽지는 않을 정도로.
마지막 하나까지 천장에 박아넣자, 좁은 방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허."
연구소장은 새하얀 문틀을 붙잡고 검은 광기로 가득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신같은 쓰레기를 위해서 열 명 넘는 사람들이 죽을 각오로 목숨을 걸고 덤볐는데, 뭐가 좋다고 실실 웃고 있지?"
연구소장의 웃음이 더욱 밝아졌다.
"완벽해."
연구소장이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문틀을 쿵 내리쳤다. 피가 튄 순백의 가운이 힘 없이 따라서 나풀거렸다. 그의 얼굴은 불가능을 목도한 과학자를 닮아 있었다.
"이렇게 깡마른 사람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총 든 남자 열 명을 집어 던지다니! 심지어 원하는 만큼만 다치게 할 수도 있잖아! 완벽해, 난 성공한 거야. 내 꿈이 이루어졌다고!"
완벽하게 미쳤군. 판단을 마치고 나서 곧바로 문가로 이동했다. 여전히 제 생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소장은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대충 밀어두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가 팔목을 덥썩 붙잡았다.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알파. 반드시."
완전히 맛이 간 눈으로 말하는 모습 탓인지, 미래를 예견한 예언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다만, 또 보게 된다면 그때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군."
연구소장은 뭐가 즐거운지 미친듯이 낄낄거리고 있었다. 흐리게 '다시' 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또 다른 보안 요원들이 올지도 모르니 탈출이 가장 시급했다. 소장의 손을 거칠게 털어내고 복도로 빠져나갔다. 하얀 침묵이 참으로 잔혹했다.
신입 연구원의 등 뒤로 몰래 훔쳐봤던 지도에 의하면, 이 철문 너머가 바깥 세상이었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경보음 사이로 다급한 구둣발 소리와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리자 고민하지 않고 문을 두 갈래로 찢었다. 저 너머로는 넓고 깊어 보이는 물이, 등 뒤로는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멀리, 최대한 빠르게.
알파는 그대로 사라졌다.
.
.
.
도착한 곳은 어느 숲 속이었다. 잘 닦여진 길도, 꺾인 풀조차 보이지 않는 숲. 그제야 온 몸의 힘이 탁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가쁜 숨이 끝을 모르고 헐떡거렸다.
"만일 당신이 탈출한다고 해도 당신의 초능력 에너지를 감지해서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찾아낼 거예요. 그러니, 쓸데없이 허튼 짓 하지 말아요, 알파."
내보내달라고 되지도 않을 위협을 했을 때 연구소장이 자랑하듯 오만하게 떠벌렸던 말이었다. 그렇다면, 능력을 쓰지만 않으면 잡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힘조차 없었다. 폐가 아려오자 아예 흙 위에 드러누웠다. 나무의 위쪽을 뒤덮은 검은 천장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제 머리칼마냥 새카만 천장.
"오늘 하늘 예술이던데, 이것만 끝내고 옥상 가 봐라."
"궁상맞게 무슨 하늘이에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아이, 늦었으니까 말하는 거지. 여긴 외딴 섬이라 경치 하나는 죽여준다고."
연구원들의 잡담이 바람과 함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저것이 하늘이고, 저 반짝거리는 것들은 별이구나.
그렇다면, 밤하늘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내는 저 별들을 내게 담을 수 있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알파는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
.
.
"-님, 국장님?"
"…아, 무슨 일입니까?"
"요즘 저희가 정말 열심히 살았잖아요, 그죠? 훈련도 안 빼먹고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평소엔 서먹하면서 오늘따라 서론이 긴 것을 보니 바라는 것이 훤했다.
"다녀오십시오."
"예? 네? 이렇게 쉽게?"
라더와 덕개가 자신이 준비한 101가지의 핑곗거리와 탈주 방법을 써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절규하는 공룡을 끌고 갔다. 대충 라더가 프랑스에 다녀올 예정이라는 말을 흘린 것을 끝으로, 국장실에 고요가 찾아왔다.
과거의 기억에 빠진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는 긴 머리를 붙잡고 있던 끈을 풀어냈다. 작다 하면 작고, 크다면 크다 말할 수 있는 크기의 노란 별이 그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연구소장이 말했던 '다시'는 또 다른 희생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 일을 겪었으니 불행인지, 결과적으론 저리 밝게 자라주었으니 다행인지.
서류를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자니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인가? 들어오라는 말도 없었으나 언제나 그랬듯 문이 벌컥 열렸다. 오히려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 발을 들이는 사람이 더 적을 지경이었다.
"국장님, 이상 초능력 에너지가 감지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발생한 순간이동입니까?"
"네. 분명 누군가…"
"그건 놔두십시오. 학생들이 외출했습니다."
미리 직원들에게 말해두라고 언질하는 것을 잊었다.
"국장님, 이상 초능력 에너지가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프랑스는 놔두세요. 학생들이…"
"아뇨, 캐나다 북부였어요!"
그는 빠르게 외투를 집어들었다.
소장은 잡힌 지 오래였으나, 아직도 그 잔당이 남아 있었다. 죄다 뿔뿔이 흩어진 채 조용히 활동하는 바람에 초능력 에너지가 감지될 때마다 몇 명씩 잡아넣는 방식을 반복해야만 했다.
"규모는 어떤 것 같습니까?"
"평소보다 더 세력이 커요. 아마 간부들이 모여있는 조직 같습니다."
번거롭게 되었다.
"전투 요원들 준비하십시오. 이왕이면 다들 따듯하게 입으라고도 전해 주고요."
캐나다의 찬 기후에 대비하려면 쨍쨍한 햇빛에도 두터운 외투를 입어야만 했다. 두꺼운 옷은 움직임을 둔화시키지만, 차갑게 얼어붙어서 잔뜩 곱은 손을 애써 놀리는 것보단 나았다. 검은 장갑까지 착용한 뒤 문을 나서자 요원들이 대기 중이었다.
그날 밤 알파는 사라졌다.
오직 각별만이 남았다.
IPS의 국장도 함께.
"이번엔 좀 위험할 겁니다. 가시죠."
그는 자신이 눈앞의 이들과 이 건물 안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 감사했다.
그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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