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12화
순교자의 선전포고
*잠뜰 TV 스토리 콘텐츠들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흰 화면으로 감상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12화
순교자의 선전포고
하나. 인간의 본능은 변하지 않는다.
둘. 그들의 욕망은 변하지 않는다.
셋. 신중하게 선택하라.
넷.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오셨습니까, 선인."
느긋하고 품위 있지만 어딘가 불량한 분위기를 풍기는 자세로 태양선인의 자리에 앉은 천건성군이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감히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또 오셨군요. 이 궁을 자유롭게 드나드시나 봅니다."
분노한 태음신관을 막아서며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선인이 말했다. 이젠 목소리는커녕 얼굴조차 선명하지 않은 총리도 젊었을 적에는 제법 성격이 있는 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적(政敵)들을 어떻게 상대했을까. 오랜만에 그가 보고 싶었다.
"난 선인과 다르게 자신을 궁에 가두고 두문불출하지 않으니까요.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고 말죠."
"…태음신관. 잠시 나가계시지요."
성군이 눈썹을 까딱이며 여유롭게 대꾸했다. 등 뒤가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낀 선인은 신관을 내보냈다. 성군의 말을 들은 신관이 화를 억누르려는 듯 숨을 두어 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물러났다. 이윽고 주인의 지위에 비해 수수한 공간에는 죽지 않는 두 존재만이 남았다.
붉은 혜성이 태양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태양은 끝까지 올라온 경계망을 최대한 감추며 여덟 행성의 중심인 제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의 낡은 나무 책상이 그들의 차이를 좁히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선인을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제 처소 안까지 마음대로 들어오시다니. 다음에는 비성편을 모시고 있는 성역에까지 침범하시겠군요."
"그 대단한 성주께서도 본 적도 실체조차 알지 못하는 비성편을 제가 먼저 본다면, 그만한 영광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천건성군이 싱글생글 웃으며 말을 마치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마치 치열한 수 싸움과 계산이 오가는 바둑판 위처럼 팽팽한 긴장감과 지독한 기 싸움이 감도는 허공으로, 태양선인의 경고의 말이 올라갔다. 이미 그들의 바둑은 수십 번의 착수가 진행되었다. 이젠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야 할 때였다.
"성주들은 대대로 비성편을 수호하는 신성한 임무를 저와 함께 수행해왔습니다. 당신이 함부로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태양선인은 감정을 감추고 상대방의 수를 읽기만 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전부 부질없는 짓이다. 중요한 것을 얻어내려면 약간의 손실은 각오해야 하는 법이다.
점차 메말라가던 감정 속에서 새로이 피어오른 것은 분노나 슬픔 따위의 격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찾아낸 감정은 허망이었다.
결국 인간은 이렇게 될 텐데. 그동안의 나는 무엇을 기대했나. 결국 인간은, 인류는 제 욕심을 이기지 못해 다시 추락의 포문을 열 텐데.
"그리 귀한 비성편을 위협하는 자가 눈앞에 있거늘, 어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당장에라도 절 없애면 될 것을."
"그대를 없앤들!"
태양선인이 역정을 내어도 천건성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치 그를 분노케 하는 것이 목적인 양. 혹은, 어떠한 기색을 두 눈으로 보고 싶은 것처럼.
애초에 없앨 수도 없겠지. 그래, 그것쯤은 알고 있단 말이다. 박사의 시약, 또 다시 반복된 인류의 만행, 그리고 지속된 약자의 고통, 그렇게 탄생한 그대. 박사의, 나의 빌어먹을 과오.
"…그대의 뜻은 멈추지 않고 누군가 이어갈 테니까. 그리고 그대를 성군들 사이의 순교자로 만들 순 없지."
"실체도 모르는 비성편을 열 세기가 넘도록 지키는 일에 많은 성군들이 불만을 가진 것은 잘 알고 계시는군요.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신 것 치고는 대단하십니다, 선인."
등받이조차 없는 방석 위에서 오만하게 허리를 쭉 편 천건성군이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아, 혹 성주께서 회의 내용을 모조리 전달하십니까? 그는 국가 권력의 정점에 오른 두 존재에게도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 붉은 눈에 감도는 것은 씁쓸함이었다.
"일생을 바쳐 모은 동반자들의 마음이 떠나가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증오스러운 비성편을 수호하시는 폐하가, 참으로 불쌍할 따름입니다."
태양선인은 조금 서글퍼진 마음에 슬프게 신소(哂笑)하였다. 내가 처음 본 그대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생을 위해 발버둥 치는, 약간의 가능성을 위해 몸을 내바친, 나와 같은 시약을 복용한 불멸자.
"그대를 이곳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나와 비슷한 그대와 친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 목표와 뜻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쉽게 변하는 법."
하지만 그대를 만났을 때, 우리의 길은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내가 그대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우리는 결국 서로에게 칼을 겨눌 수 밖에 없겠군요, 성군."
우리 사이에 벽을 세우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그들만의 우아하고도 추한 작별 인사였다.
세상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자의 욕심과 자신을 밑바닥으로 몰아넣었던 세상에 복수하고자 하는 욕심. 그것들이 충돌한 자리에서 비산한 흙탕물이 두 사람의 옷자락과 손을 더럽혔다.
"하오나, 선인. 저는 여전히 그대를 제 하나뿐인 벗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꼭 돌아와 제가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것을 선인께 보여드리지요."
역모와 전쟁의 발발을 선언한 붉은 혜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는 부디, 반갑게 맞이해주시길."
혜성이 등을 돌려 문 앞으로 향했다. 그럼 이만. 잠시 어깨 너머로 낮은 책상의 어딘가를 바라보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그 말을 흘리고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그는 준비를 위해 곧장 천건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겠지. 여태껏 단 한 번도 치러진 적 없는, 팔성국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이.
선인은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성군이 지금껏 어떤 마음으로 그를 만나러 왔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가장 큰 걸림돌을 왜 가만 두는 건가 싶었지."
이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건성군은 동등한 위치에서 그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을 원했던 것이다. 그는 100년도 채우지 못하고 금세 스러져버리는 인간들 말고, 목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영원히 살아 있을 선인이 필요했었다.
지금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과거를 되돌아보자면, 지금껏 성군이 취해온 자세들은 선인에게 자신의 행동을 납득시키거나 그가 눈을 감게끔 만들기 위한 것들이었다. 비록 동맹은 아닐지라도 서로의 행동은 묵인하는 정도의 얇고 투명한 연결고리를 걸어두는 것 말이다.
그리고 성군은 오늘 선인을 완전히 포기했다.
태양선인이 그들의 작별을 선언함과 동시에.
아니, 어쩌면 오늘의 대화는 성군의 마지막 남은 미련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점에서 출발했어도 끝없이 다른 곳으로 향하던 그들의 선은 이제 서로를 알아보기도 힘든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 완전히 돌아서기 전 마지막 대화라 생각하고 왔으리라. 실제로도 그리 되었고.
“꼭 돌아와 제가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것을 선인께 보여드리지요.“
그것은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태양선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손에 꼽았다.
하지만 수의 방향은 보다 명확한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래, 그야말로 완벽한 국면 전환이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