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8화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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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8화
예언
하나. 실마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둘. 성주와 성군들은 위태로이 흔들릴 것이며,
셋. 이방인의 흔적이 스치리라.
넷. 별은, 그 존재의 의의를 다하리.
빠르게 사라지는 신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그런 태도를 나무랄 정신이 있는 이는 없었다. 등을 돌려서 열린 창문을 통해 하늘을 물끄러미 관찰하다가 다시 창문을 닫았다.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조금 더 따스한 색감의 세상을 만드는 하늘이었다. 지금이 봄이었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것은 팔성국의 기술력이 아니었다. 방사능에 덮여 사라졌다고 생각한 고대 문명의 흔적. 하지만 아직 살아있는 인간이 또 있었단 말인가? 분명 시약은 천건성군이 복용한 것이 마지막일 텐데.
…연구소. 저렇게 거대한 비행 물체는 전부 연구소에서 만들어낸다. 아마 나와 다른 분야에서 일하던 사람의 것이리라. 크기를 봤을 때 지구를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둔 것 같은데, 그 정도 규모라면 문명이 몰락하기 전에도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사의 기록에 언급이라도 남아 있을 확률이 아예 없지는 않다. 하지만 박사의 기록을 찾기엔 시간이 없었다.
진즉에 수명이 다해 고철 덩어리가 되어버린 박사가 쓰던 노트북. 그것이 완전히 죽기 직전 기록을 종이로 옮겨 적어뒀었는데, 문제는 사본을 만든 지 수 세기가 지났다는 것. 그리고 그동안 쌓인 기록이 아주 많다는 것. 나는 여기저기 한가득 꽂힌 책들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1000년 동안 남긴, 심지어 시간순대로 정렬이 되지도 않은 수많은 기록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을 찾아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주가 오기 전에 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하루를 통으로 바쳐도 힘들다.
성주 또한 마찬가지로 반쯤 뛰다시피 찾아왔다. 조용히 뒷걸음질 치며 문을 닫는 신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어쩌지. 그대들이 모이니 또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결국 다시 고생을 하게 되는 그대들의 운명은 순전한 불운일까, 혹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것일까.
정답을 알면서도 부디 전자이길 바랐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고생하는 또 다른 미래는 없을 테니.
"선인. 저를 부르신 것을 보니, 뭔가 아는 것이 있으십니까?"
이걸, 알고 있다고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며 침묵하자 성주는 안절부절못하는 듯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존재가 뜸을 들이니 불안한 모양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것은 전설이고 신화일 뿐. 나도 결국은 한참 부족한 인간, 혹은 천상에서 추락한 신에 불과했다. 세상의 멸망을 막고 싶으면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무엇을, 아니. 어디부터 말하는 것이 적절할지조차 알지 못하는 자일 뿐이다.
"···성주, 얼마 전 말씀드렸던 비상 상황입니다. 우선 그 천문관을 불러들이시지요."
"선인, 아는 것이 있으시냔 말입니다!"
떨리는 목소리의 성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눈에 희미하게 서린 죄책감을 그가 알아봐 줬으면 하는 마음이 반, 그래선 안 된다는 이성이 또 반절을 차지했다. 난 여기서 개입해선 안 된다. 애초에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나의 의무는 이들이 자멸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도움을 주는 것 뿐,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말하면 팔성국이 뿌리째 흔들릴 겁니다."
"···뭐라고···?"
"미안합니다, 성주. 그대에겐 시급한 문제라는 걸 압니다만,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마냥 머나먼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직은 안 된다. 뒤에서 복잡한 공작이 오가고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진실을 말하면 팔성국이 무너질 것이고, 차후 문제를 일으킬 것임이 확실한 천건성군을 죽일 수도 없다.
내가 쥐고 있는 진실은 너무도 무력한 것이었다.
xXx
며칠이 지나지 않아 천문관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동안 팔성국 곳곳에서 이상 천문 현상이 발생했고, 난 확신을 얻었다.
저것은 화성 탐사를 나가 그대로 실종되었던 우주선이다. 그래, 그 책들을 샅샅이 뒤져 박사의 기록을 찾는 데 성공했다. 장장 사흘간의 여정이었다. 어디로든 새어선 안 될 정보라 신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어서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그간 문자 체계가 많이 바뀐 것 같긴 하지만 혹 타인이 절대로 알아선 안 될 정보를 신관이 알아차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알아낸 정보는 다섯 가지였다.
하나, 저 우주선은 나와 같이 연구소에서 일하던 공룡의 것이다. 또한 그는 비성편을 만든 자다.
둘, 저 우주선은 화성으로 갔었다. 그것은 6개월 이전에 연락이 끊긴 화성의 과학자들을 만날 수단으로 지구를 벗어났다. 천 년 전에.
셋, 천 년 전 화성으로 떠났다던 우주선은 아직도 가동 중이다. 그것도 지구에서.
넷, 화성에 있어야 할 우주선이 사람은 내리질 않고 지구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만을 반복하는 것을 보니, 우주선에 문제가 생겼을 확률이 크다.
다섯, 놀랍도록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우연일 뿐, 이상 천문 현상과 천건성군은 무관하다.
더 생각해보려고 마음을 먹으면 알아낼 정보야 더 많겠지만, 일단 급하게 얻어내야 할 정보는 대부분 얻어냈다. 우주선의 정체가 무엇인지, 목적은 무엇인지, 누가 타고 있었는지, 천건성군과 연관이 있는지.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공룡 박사의 생존 여부다. 그는 비성편의 제작자니까 살아만 있다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최대한 빠르고 비밀스럽게 공룡 박사를 만나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내 위치에선 반드시 신관을 통해야 하고, 신관이 다니는 길은 성주를 마주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공룡 박사를 만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어렵다. 내가 기록에서 발견한 정보를 다른 방식으로 흘려야 한다.
이 정보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비성편의 존재가 의심받고 있는 지금, 내가 가진 정보의 힘은 아주 약하다. 비성편의 수호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자가 이런 말을 해봤자 비성편 대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 위한 수작이라고 생각하겠지. 정보의 사실 여부와는 상관 없이.
방법이 필요하다. 내가 가진 정보를 더 강력하게 사용할 수 있는 위치의 누군가에게 진실을 줄 방법.
진실이 '내가' 가졌을 때 무력한 것이라면, 그 진실을 '타인'에게 나눈다면 상황을 바꿀 수 있다. 나보다 더 나은 조건에서 패를 던져 공격할 수 있는 이에게.
…일단 지금 찾아왔다는 성주를 먼저 만나봐야겠다. 신관의 어딘가 불편한 듯한 표정을 보아 꽤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으니.
"들어오십시오."
평소보다 조급한 발걸음으로 내 앞에 선 성주는 창백한 얼굴을 감추느라 애쓰는 듯한 기색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일주일 전, 그러니까 기이한 원반이 팔성국 곳곳에서 나타나기 전에. 북서쪽에서 붉은 혜성이 관측되었었다는 것을 선인께서도 전해 들으셨지요. 그리고, 이상 천문 현상은··· 당연히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돌아온 그 천문관이 말하기를, 붉은 혜성이 역모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 원반은 직접 봐야 그 의미를 알겠다더군요."
역모의 붉은 혜성. 천건성군을 말하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기이한 원반이라면 그 우주선이 아닌가.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그 생각을 내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 구절을 곱씹을 뿐이었다.
"붉은 혜성과 기이한 원반이라…."
"선인의 뜻은 어떻습니까?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까?"
내 뜻이라. 글쎄, 그 천문관의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으며 조만간 천건성군이 역모를 일으킬 것이고 그는 결코 죽지 않는 사람이니 그를 없앨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는 말은 절대로 내뱉을 수 없다. 국가 하나쯤은 가볍게 무너뜨릴 말을 늘어놓을 순 없으니.
우선 그를 진정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하늘의 움직임은 곧 땅의 그림자이지요. 그림자는 제 주인의 몸을 타고 기어 올라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주께서는 그림자 말고 그 실체에 집중하십시오. 별들의 주인께서, 별의 움직임을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선인, 역모의 징조라면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없습니다. 역모는 성주의 자리를 넘어 비성편까지 위협받는 일 아니겠습니까?"
저 걱정이 쓸모없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성주와는 다른 입장이긴 하지만, 비성편을 빼앗긴다면 그건 그것대로 비상이었다. 아무리 비성편과 비슷한 형태의 무기가 적다지만, 그 사용법을 깨닫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진 않을 테니.
"그래요, 성주의 마음 이해합니다. 저 또한 정말 긴 시간을 이 일에 써왔으니까요."
"역모를 일으킬 수 있는 자는 성군들뿐입니다!"
거기까지 알아냈다, 라. 역시 태평성대의 시기에 성주의 자리에 올랐으면 대대로 기억될 성군(聖君)이 되었을 텐데. 아까운 사람이다.
"당장 성군 회의를 소집할 생각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지혜를 주십시오, 선인."
"성주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지혜는 비성편의 수호에만 쓰여왔습니다. 세속의 정치에 제가 내어드릴 지혜는 없습니다. 성군들은 성주와 평생을 함께할 동료이지 않습니까."
성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허상의 두려움에 빠져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선 안 되겠지요. 만일 그들 중 정말 반역자가 있다면, 성주께서는 망설임 없이 그자를 처단하십시오. 그것이 이 나라와 온 인류를 수호하고 계신 성주께서 해야 할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성주는 이후 말이 없었다. 나는 침묵하는 그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성주, 그 원반 말입니다."
주황색 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어쩌면, 붉은 혜성을 막아줄 단단한 방패일지도 모릅니다."
"선인께서는, 그 원반을 좋은 징조로 보시는 겁니까?"
그의 표정은 투명했다. 의혹. 그리고 불확실. 그것은 내가 짓고 싶은 표정이기도 했다.
"···아직은, 확실친 않습니다. 그저 제 희망일 뿐."
그 말은 몇 안 되는 순수한 진심이었다.
정말, 긍정적인 징조라면 참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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