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13화
그 모든 무고한 목숨을 위하여
*잠뜰 TV 스토리 콘텐츠들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흰 화면으로 감상하시는 것을 권장드립니다.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13화
그 모든 무고한 목숨을 위하여
하나. 죄 없는 자들을 빼내고,
둘. 전쟁을 대비하라.
셋. 그 모든 무고한 목숨을 위하여.
넷. 그리고 우리의 장대한 최후를 위하여.
텅!
태양선인 처소의 나무 문이 전례 없이 거칠게 열렸다. 평소답지 않게 붉게 물든 얼굴에 숨이 턱까지 차오른 신관은 결례에 대한 자각조차 없는 듯했다.
"서, 선인! 궁궐 앞에 천건성의 비행선들이…!"
태양선인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대화가 고작 며칠 전이었다. 그들이 벌써 도착했다는 것은,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심지어 붉은 혜성과 대화를 나누던 그 순간마저도!
"어떻게, 그들이-"
"대피하셔야 합니다!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신관이 그의 팔을 붙잡고 문으로 잡아끌었다. 신관의 인도대로 순순히 끌려가던 그가 문득 든 생각에 다리를 멈췄다. 잠깐만. 신관이 내게 뛰어올 정도라면 그만큼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긴급한 상황이라는 뜻일 터였다. 그렇다면…, 잠깐만.
"신관, 백성들은?"
태양선인을 잡아당기던 태음신관의 손이 우뚝 멈췄다.
역시나, 결국 백성들이 그 피해를 감당하게 되었구나. 선인은 자리에 단단히 멈춰 섰다. 더 이상 방관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제까지고 안전한 공간 내에서 사태가 해결되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 모든 무고한 목숨들은? 난 그들을 두고 갈 수 없어요, 태음신관."
그대도 이미 알고 있잖아. 태양선인의 속삭임에 신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괴로움이 담긴 그 표정에 선인은 쓰게 웃었다. 날 원망해도 좋습니다. 그러니, 티티. 그간 잘못된 선택만 해왔던 내가 이번만큼은 옳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그는 차마 그 말을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대에겐 언제나 희생을 강요하는 것만 같았기에, 너무도 미안했다.
"선인, 제발."
신관이 간절히 애원했다. 하지만 소맷자락을 잡은 힘은 이미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끝내 신관은 패배하고 만 것이다.
"제발 내가 당신만은 지킬 수 있게 해주세요."
"신관, 난 목숨을 버리겠노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갈망하여도 얻을 수 없는 신세라면 모를까.
그는 지그시 미소 지었다. 언제나와 같은, 그림으로 보일 만큼 이질적이고 부드러운 미소.
"그대는 나를 구해요. 나는 무고한 이들을 살릴 테니."
xXx
"수가 있으신 겁니까?"
신관의 간절한 물음에 선인은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인류가 전쟁통에서 살아남았던 방법, 그 까마득한 과거의 방공호. 많이 낡았을지 몰라도,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안전 구역은 오로지 그곳 뿐이었다.
"있습니다. 다만 그대의 도움이 필요해요."
힘 빠진 경첩이 매달려 있는 문으로 다가가려던 태양선인이 손안에 들린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오랜 시간 그와 함께한 순백의 부채. 선인은 그것을 무수히 많은 회고록이 꽂힌 책장 위에 올려놓았다. 대피 작업에서 방해만 될 것이다. 당장 내일부터가 선인으로서 살아있는 것이 가능할지 미지수였다.
그러니 선인이 사라졌을 때, 이것은 훗날 그의 존재를 입증할 흔적이 되리라.
옛날 옛적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었던 방공호는 선택된 소수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가령 한 국가의 총리라거나, 부유한 재벌, 과학계의 권위자 같은 이들 말이다. 혹은, 운이 좋아 방공호의 문이 닫히기 직전 몸을 던져넣은 소수의 소시민들도 있었겠지. 뒤늦게 그 살아남은 인류의 문명 1세대에 편승한 그가 추론한 바는 그러했다.
혼란스러운 궁궐 속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두 인형(人形)에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새하얀 옷자락은 빠르게 지하도를 통해 궐 밖으로 빠져나갔다.
훗날 백성들의 증언에 따르면, 순백의 옷차림과 화려한 장신구를 한 귀공자와 그의 가신으로 추정되는 백과 청의 옷을 입은 여인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한다. 그들은 백성들을 산속의 외딴 지하 창고에 데려다 놓았다. 산에서 약초를 캐 생계를 유지하던 이들도 그 장소는 처음 보았노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백성의 눈에 비친 그곳은 부드러운 목조 건물이 아닌 딱딱한 금속 상자였다. 연마질이 잘 된 동물 가죽으로 만든 듯한 매끄럽고 푹신한 의자와 궐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귀한 것들과 정체 모를 가방 같은 것들도 보였다. 공자에게 그것에 관해 물어도 그는 답을 해주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 공자께서는 분명 높으신 분의 자제일 것이라고, 가엾은 민초들의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가문의 비밀 별장으로 그들을 이끈 것이라고. 백성들은 밝혔다.
아직은 그 사실을 모르는 태양선인과 태음신관은 그저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겠다'는 말에 순순히 따라주는 백성들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마 선인의 화려한 옷차림 때문이 아닐까. 흰 옷이야 백성들 사이에서 흔하다만, 하얀 비단옷을 입고 머리에 은빛 장신구를 얹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리라.
"선인인가?"
선인은 그 질문을 듣자 딱딱하게 굳으려는 얼굴을 억지로 풀었다. 지금 티를 내서는 안 된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이들이 빠르게 잘못된 반박을 내놓았다.
"에이, 설마 그러겠는가. 궐 밖으로는 그림자도 내놓지 않는 분이신걸!"
"태양께서는 성주님과 고귀한 비성편을 지키고 계실 게야."
그들의 어조가 어쩐지 선인을 비꼬는 듯하였기에 선인은 차마 그것들이 무슨 의미인지 물을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낯설고 드넓은 강철 상자 안에서 머뭇거리는 백성들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신관이 물었다.
"선인, 대관절 이런 곳은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옛 선조들이 쓰시던 곳이라기엔 팔성국의 기술과는 차이가 있어 보이는데요."
선조들이 쓰던 대피소는 맞지만, 신관의 말대로 팔성국의 것은 아니었다. 팔성국 이전의 때를 연구하는 역사학자가 없기에 공식적인 이름조차 갖지 못하고, 어느 타락한 신의 기억 속에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옛 인류 문명의 흔적. 하지만 지금의 신(新) 문명도 구(舊) 문명과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구전 설화 속 이야기로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 현인들이 숨어있던 땅속의 그 장소라고 말한다면, 믿어주실 겁니까?"
신관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신관의 의무는 곧 무조건적인 신뢰라고."
설령 제가 어떤 마음을 가졌다 한들 변하지 않지요. 신관은 예사롭게 덧붙였다.
xXx
웅성대는 소음이 낮게 깔린 방공호 속, 여인의 새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도와주셔요! 우리, 저희 애가! 저희 애가!"
"진정하고 말씀하시지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저희 애가 사라졌어요!"
여인은 비명처럼 마지막 문장을 끝맺고는 털썩 무릎을 꿇어 신관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신관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여인의 어깨를 지그시 잡았다. 선인은 착잡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디에나 어린 낙오자는 있는 법이지. 선인이 여인의 곁으로 다가가 벌겋게 물든 눈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하십니까? 아이를 놓친 곳은 어디입니까?"
"그것이, 분명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는데…, 시장 부근에서 놓쳐버린 것 같어요! 제발, 제발 찾아주셔요, 나리! 다섯 살 난 남자애여요! 키는 요만하구요, 눈이 커다랗고 똘망해요. 고작 다섯 살짜리 애여요, 그러니 제발-"
"데려오겠습니다. 그러니 숨을 크게 쉬고 진정하시지요. 어미가 진정하지 못하면 아이도 두려워하기 마련입니다."
여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그녀를 진정시킨 선인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인은 금방이라도 따라 나올 듯한 기세로 마주 몸을 세웠다. 더 단단한 확신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하늘에 맹세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부디 아이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안정을 되찾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신관과 선인은 다시 한번 전쟁통 속으로 몸을 던졌다. 최대한 천건성의 군인들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은밀하게 움직인 그들은 여러 무고한 사람들을 찾았다.
"어? 태음, 신관…?"
"따라오십시오. 안전한 곳으로 모셔드리겠습니다."
"어,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그건 말씀드릴 수 없겠습니다."
태양선인이 나서서 백성의 말을 자르자, 그는 오히려 더 의심하는 눈길을 보냈다. 아니, 이젠 의심이 아니라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나리들께서도 위험한 곳으로는 가지 마시고요."
"걱정 마시지요."
그래도 시끄럽게 떠벌리지는 않는 남자와 몇몇 백성들을 방공호로 데려간 뒤, 두 사람은 시장으로 진입했다. 시장에 천건성의 전투용 인형들과 도사들이 많아 진입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전히 붉은 옷을 입은 자들이 한둘씩 보였지만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기회였기에 놓칠 수 없었다.
여인이 애타게 찾던 꼬마를 발견한 곳은 어느 다 무너져가는 매대 아래였다. 아이는 나무 조각의 파편들 사이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먼지 속에서 더러워진 옷을 입은 자그마한 아이를 보고 있자니 측은하고, 죄책감이 들었다. 어쩌면 제게 빵을 건네주었던 어느 다정한 노인의 따스한 손주가 떠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도 운명의 눈에 들어 다시 태어났으려나. …옛 벗, 덕개가 보고 싶었다. 궐 내 최고의 도사가 되어버린 그 이는 여전히 겨울의 벗을 닮아 있을까.
선인이 자그마한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미의 말대로 커다란 눈이 인상적인 아이였다.
"얘야, 네 어머니께서 널 찾고 계신단다.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갈 것인데, 나와 함께 가지 않으련?"
아이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구석진 곳으로 몸을 물렸다. 아, 이거 안 좋은데. 선인과 눈을 마주친 신관이 자세를 낮추고 꼬마에게 다가갔다.
"아픈 데는 없니? 우리는 사실 궁궐에서 왔단다."
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싶었는데,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아이가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신관, 어떻게 한 겁니까? 선인의 속삭임에 신관이 작게 답했다. 비밀입니다.
"정말요?"
"그래, 궁궐에서 가장 높으신 분께서 너희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너를 지키러 우리를 보내셨단다."
거짓을 단 한 방울도 섞지 않고도 완전히 다르게 들리는 말을 술술 흘리는 신관을 보며 태양선인은 어떠한 두려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내 사람이라서 다행이었다.
"너희 어머니께서 너를 정말 걱정하고 계시니,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니? 무서운 사람들은 갈 수 없는 곳이란다."
잠시 눈을 도르륵, 굴리던 꼬마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이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아 올렸다. 마른 체형의 아이는 달랑 들어 올려지며 신관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xXx
구조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방공호는 어느새 와글거리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느라 공간이 비좁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모두가 앉거나 눕는 것이 가능할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기둥에 기대 숨을 고르는 신관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만연했다.
"최선을 다했군요. 이젠 어떡할까요?"
뭐든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어린 그 말에 태양선인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좋다, 지금의 내겐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천장을 올려다보자 단단한 강철 하늘이 보였다.
"이 기나긴 전쟁을 끝내러 가야겠지요."
부디, 내게 무고한 목숨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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