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어느 불멸자의 회고록 - 1부 14화

별들의 전쟁

*잠뜰 TV 스토리 콘텐츠들의 2차 창작물로, 공식과 무관합니다.

*이번 회차는 흰 화면으로 감상해주세요.

*겨울 신화 × 이방인 크로스오버


1부 14화

별들의 전쟁


하나. 종장을 알리는 신호탄이 울렸다.

둘. 천 년의 비밀이 밝혀질 때가 왔으니,

셋. 찬란했던 왕조의 몰락을 기록하자.

넷. 찬란했던 우리의 멸망을 기념하자.

태양선인은 바짝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신관을 말 없이 다독였다.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말한다면 거짓이겠지. 분명 일은 벌어질 것이다. 어쩌면 그대가 스스로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의 숨이 끊기는 일은 막을 것이라고, 선인은 생각했다.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늘 생각과 겁이 많았다.

생각이 많기에 겁도 많았다.

"궐 주변에 방어막이 생성되었으니 성주께서는 안전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태음신관 티티, 나와 함께해주겠습니까?"

신관은 무력하게 웃었다. 그 미소엔 즐거움이 어려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제 삶을 당신께 바쳤고, 앞으로도 그리하겠습니다, 선인."

xXx

선인과 신관은 궐의 안마당에서 초조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성주와 마주쳤다.

"태양선인! 이 위험한 때에, 도대체 어디 계셨던 겁니까!"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오는 길입니다. 옛 선조들께서 쓰시던 피난처이니 분명 안전하겠지요."

성주는 안심한 듯 뻣뻣한 어깨에 바짝 들어갔던 힘을 풀었다. 그는 평소보다 공기가 더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곳이 있었군요."

세 사람이 궁궐의 담벼락 너머, 흉흉한 기세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천건성의 비행선들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경계의 자세를 유지하는 그것들은 사냥감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천공의 맹수 같았다.

"결계가 얼마나 버틸까요?"

성주는 방벽이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듯 초연하게 물었다. 선인이 푸른 벽을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저것은 절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만든 팔성국 기술력의 집합체나 다름없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강화까지 하고 있으니 절대로 뚫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안에서 열어주는 한 열리지는 않겠지요. 다만…."

누군가 해제하지 않는 한. 달리 말하자면 궐 안에 있는 누구든 능력만 갖췄다면 방벽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곧 너무나도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방벽은 그 어떤 소리조차 내지 않고 순식간에 땅으로 꺼졌다. 유일하고도 견고했던 한 겹의 방패가 완벽하게 뚫리고, 비행선의 붉은 몸체가 살벌한 색감을 드러냈다. 그래, 그럼 그렇지.

"…어디에나 배신자는 있는 법이지요."

방벽이 사라지자마자 공격을 퍼부으리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비행정들은 몇 분이 지나도록 잠잠했다. 궐의 대문이 거칠게 열린 것은 침묵이 불안감으로 변모해 그들의 다리를 타고 올라올 무렵이었다.

쾅!

무성한 먼지 사이에서 붉은 혜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궁궐 대문의 경첩을 작살낸 그는 성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중앙의 문을 당당히 넘었다. 보란 듯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연합국의 제후(諸侯)가 아닌 전제 정치 국가의 군주라도 되는 양. 한 편의 연극을 꾸리듯, 천건성군은 반란의 막을 극적으로 올린 것이다.

그 공간의 모두가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압도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역적을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성주 폐하를 뵈옵니다."

역적의 붉은 눈이 느릿하게 굴러갔다. 이윽고 태양에게 꽂힌 눈동자는 한참이나 그 금정(金睛)을 바라보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태양의 눈에 들어온 그 비소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반드시 보여주겠다고.

"선인께서도 이리 나와 반겨주시니, 이것 참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성주가 거칠게 앞으로 나섰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명백하게 타오르는 분노를 감추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라더, 그대가 감히. 이 자리가 그토록 탐났던 것이냐!"

성군들의 앞에서는 꾸며낸 감정만을 드러내던 그 사람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차이였다. 선인은 언제나 우아하게 미소하는, 혹은 냉엄하고도 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봄이나 초조한 심경을 드러내더라도 금세 단단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던 강인한 성주로서의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차마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절 전대 성주들과 겹쳐 보지는 마시지요.“

그래, 이렇게나 다른 사람이었는데. 내 미련하게도 과거만을 붙잡고 있었구나.

하지만 성주가 유례없이 화를 내거나 말거나, 붉은 혜성은 아주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

"폐하의 오해이십니다. 전 폐하의 자리를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극적으로 양팔을 쫙 벌린 그가 과장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폐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그것의 실체를 보여드리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성주가 굳어있는 사이, 비행선의 조준점이 성주의 발 앞으로 향했다. 비성편이 묻혀 있는 지점이었다.

여타 생각할 겨를 없이, 선인은 성주의 앞으로 뛰어갔다. 어디서 비성편이 묻힌 곳-소위 성역이라 불리는-의 정보를 얻어냈는지. 그리고 설마 그것의 본 용도를 알면서도 폭발을 일으키는 미친 짓을 하는 것인지 따위를 고려할 여유는 없었다.

"피하십시오, 성주!"

태양선인은 성주의 발 앞으로 몸을 던졌다. 어차피 가루가 되지 않는 한 끊길 수 없는 목숨이었다. 그러니 작은 폭발에도 쓰러져버릴 목숨을 살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성주를 끌고 나오는 선인의 시야의 구석에서, 한껏 원망하고 두려워하는 듯한 표정의 신관이 보였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 없는 걱정이거늘.

그대가 저 앞에 몸을 던진다면 그대의 숨은 끊어지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는걸.

이미 잘 알면서 그런 표정을 짓고 그럽니까.

콰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궁궐 중정(中庭)의 돌길이 무너지고, 자욱한 먼지구름이 그들을 감쌌다. 돌가루의 장벽 너머로 천건성군의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얼른 보시지요, 성주!"

그렇게 모두의 눈을 가리던 먼지구름이 걷혔을 때.

이 나라가, 태양선인지 천 년간 수호해왔던 아홉 번째 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비성편…?"

"대를 이어가며 수호해오던 비성편이, 사실 이 세상을 지워버릴 저주받은 무기라는 것을 믿으시겠습니까?"

잔혹한 진실을 말하는 성군의 눈에서는 그 무엇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인간의 감정이 여전히 낯선 태양선인이 읽을 수 있는 마음은 성취감이라 명명할 법한 것이었다. 그토록 벼르고 또 별렀던 진실을 드러내는 일을 끝내 해내고야 말았다는 성취에서 오는 고양감.

"그게, 그게 무슨 말이더냐! 비성편이…"

성주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지곤성의 성주 수현, 그는 한 나라의 주인으로서 지금껏 단단히 믿어왔던 진실이자 진리를 한순간에 부정당했다. 모든 일을 지켜보던 선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더, 이 일 만큼은 결국 그대가 앞서나갔군. 결국-, 결국 그대의 의지대로 모든 것이 흘러갔어.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제가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것을 반드시 보여드린다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다음까지도 그대가 주무르게 둘 수는 없다. 태양선인이 입을 열려는 순간, 성주가 먼저 다급하게 나섰다. 그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라더, 나는 그대를 믿어 불미스러운 소문을 덮고 천건성의 성주로 임명했다."

그래, 붉은 혜성을 천건성군의 자리에 임명할 때 많은 일이 있었지. 친아들이 아니라는 말이 있었고. 하지만 성주는 예의 고집과 부러지지 않는 마음을 발휘해 라더를 천건성군에 임명했다.

선인은 요동치는 성주의 주황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성주는 과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는가. 그대는 지금 반역자에게 권력을 주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자책하는 겁니까? 이미 지나간 일에 불과하거늘.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겨울이시여, 부디 자비를! 부디 평화를!“

“겨울, 그대의 행동은 잘못되었어요.”

내가 인류의 문명을 새하얀 눈으로 덮어버렸을 때, 인류는 나를 숭배했던 과거를 후회했을까?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붙잡고 묻고 싶었지만,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이는 모두 땅속에 묻혀 흙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그 자리는, 이런 짓을 벌이지 않아도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자리일 터. 대체, 왜 이렇게까지!"

성주가 반쯤은 비명을 지르자, 천건성군 라더는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마치 사람은 왜 땅에 붙어있냐고 묻는 어린아이에게 지구의 힘을 설명하듯, 나긋하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제가 원하는 것, 완전한 파멸을 얻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성주!"

소름 끼치는 정적이 마당을 휘감았다. 라더의 얼굴을 뒤덮은 것은 광기에 잡아먹힌 불멸자의 즐거운 미소였다. 이내 승리를 확신하였는지, 천건성군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풀어놓았다. 천건성군 라더가 아닌 저주받은 마을 폐성촌의 라더가 살아온 세상을, 그 모든 진실을.

"바다 밖의 멸망한 세상에는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학당조차 갖추지 못한 폐성촌에서 나고 자란 일자무식의 저는, 그곳에서 필사적으로 글을 익히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내가 왜 그 모든 억압과 핍박을 받아야만 했는지, 왜 내 두 눈앞에서 부모를 잃어야만 했는지, 어째서 남들은 손쉽게 누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만 했는지. 어쩌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하나, 알 수 없었지요.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허름한 마을에서 늘 벌어지는 일을, 과거 사람인들 알겠습니까?"

그래, 이 모든 것은 인류의 잘못이 맞다. 하지만 그 잘못을 깨달은 자들에 내가 속한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이젠 어찌할 수 없는 과거를 잊지 않은 채 현실을 살아내는 것이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든 고쳐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품고서.

그렇기에 그대의 방식은 잘못되었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라더. 그대는 세상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세상의 멸망을 앞당기고 있다. 어째서 그 모순을 알려주어도 나와 같은 실수를 하려고 발악하는가.

"하지만, 다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나라가 그토록 집착하며 지키는 비성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 세상이 어떻게 멸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세상이 멸망하기까지-, 인간들이 쌓아온 역사가 얼마나 추악한지를."

붉은 성군이 역겹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를 보았던 짧은 시간 동안, 그 얼굴은 그가 보여줬던 감정의 표현들 중 제일 큰 것이었다. 그대가 느낀 가장 강력한 감정은 분노와 거북함이었나.

"인간들은 천 년 전이나, 이천 년 전에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세상은 늘 가난한 자들의 지옥과 권력자들의 천국이 이어졌지요."

라더는 마지막 말을 짓씹듯 덧붙였다.

"마치 거대한 수레바퀴처럼 말입니다."

“선한 자들의 고통과 악한 자들의 행복으로 가득한 이 순환의 수레바퀴를—“

아. 그대는, 과거의 나는… 우리는 너무도 닮았구나. 괴로울 정도로 똑같아.

"결국 결말은 모두의 파멸. 그 끝에 다시 세워진 팔성국. 이곳의 폐성촌을 보며,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이 세상엔 더 넓고, 더 많은 폐성촌들이 필요에 의해 생겨나야만 할 것이고, 그 끝에 우리는 멸망하게 되겠지요."

…빌어먹을.

그대의 어리석음과 나의 어리석음은 일치했다. 세상을 더 나은 형태로 바꿀 수 있다는 거만함. 그것이 우리를 타락시키고, 우리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부디 까마득한 전설 속의 겨울보다는 이른 때에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기를 바라며, 태양선인이 말했다.

"그럴 바엔 그대의 손으로 끝내겠다는 것이군요. 그 오만이 결국 하늘을 찌르겠습니다. 그대에게, 인간에게 이 세상을 끝낼 권리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인간에게, 그 어떠한 존재에게도 이 세상을 끝낼 권리는 없다. 설령 신이라 한들 그리 해선 안 된다는 것을, 태양선인은 직접 깨달았었다. 그리고 아직 늦지 않은 존재에게 그 통찰을 전했다.

"그대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힘과 자리를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닌, 이 세상을 끝내버리는 것을 택했군요."

선인은 애원하듯 말했다. 부디, 그 길의 주변을 바라봐주기를.

"그대의 손에 사라질 수 있는 수많은 생명들의 가치를, 그대는 진정 느끼지 못하는 겁니까."

우리는 너무도 닮아있었다. 우리가 끝을 맞이할 때까지 결코 깨닫지 못했던 것마저도. 그렇기에 태양은 붉은 혜성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음과 동시에 유일하게 그를 막아설 수 있는 존재였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선인께서 생명의 가치를 논하실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죽음만도 못한 삶이 있다는 것을, 선인께서는 평생 알지 못하실 겁니다."

하지만 나는 오랜 과거부터 지금까지 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고, 그대는 온갖 고통을 겪어본 자. 그것이 우리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죽음만도 못한 삶을 알고 있는가.

그대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변치 않을 현실을 겪어본 것은 그대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다만 나는 그러한 순간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추운 겨울날 만난, 봄날의 햇살보다도 따듯한 인간에게 날아온 질투의 화살과 죽음의 손길. 그것을 알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그대가 겪은 고통을, 모두가 겪게 하겠다는 것이냐. 그대가 바다 밖에서 본 방식대로."

수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라더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폐하, 죽음은 모든 고통을 덮습니다. 고통은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지요."

아.

이것이 곧 그대의 구원이었구나.

"그러니 이제, 세상의 모든 고통을 제 손으로 끝내고자 합니다."

선한 자의 고통도, 악한 자의 이득도. 모두 하얀 눈 속에 덮이리라.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리고-

그대가 바꿔나갈-

찬란-

…아아.

이것이 곧 그대의 설원(雪原)이었구나.

죽지 못하는 우리의 이야기는 결국, 둘 중 한 사람이 죽어야만 끝을 맞이하리라.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