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나를 압도하는.
세계여행부의 교내 부활동 대부분은 부실에서 쉬다 공룡이 내킬 때 시작되는 편이었다. 사실 교내의 부활동이라고 해 봐야 대부분은 ‘다음 여행의 목적지는 어디로 할 것인가’를 머리를 맞대 고민하는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그조차도 부원 중 잠뜰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지는 않았고, 라더는 나온 의견에 토를 달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타입이기에. 그 시간은 공룡과 그의 말이라면 세 번에 한번은 반대를 던지고 보는 덕개의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야, 이번 여행은 어디를 갈까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말이야.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공부 핑계를 대고 놀러 가야 하는 거 아니겠냐? 그러니까 이번엔 꼭 일본! 유니버설 스튜디오 가자!”
“뭐…? 지금 성수기일 텐데, 갔다간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다가 오기만 할 걸…. 시원한 데로 가는 게 낫지. 지금 호주가 겨울일 텐데, 거기로 가자.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구경이라도 하고 오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오늘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말을 마친 덕개가 하품을 내지르며 공룡의 의견은 흘려듣겠다는 듯 책상에 엎드렸다. “뭐어?” 공룡이 그에게 반문하는 모습에 잠뜰은 조용히 들고 온 참고서를 펼쳤다. 이러면 보통 어떻게 되는지를 알고 있었다. 수현 선생님이라도 계셨다면 중재역이 되어주셨겠지만, 하필 이번 시간에는 교무회의가 있어 오시지 못하셨으니.
그리고 역시나 잠뜰의 예상대로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은 그를 쳐다보았다. 선생님이 없을 땐 대개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고는 했다. 몇 가지의 선택지 중 도저히 어느 한쪽으로 의견이 기울지 않으면 결정권을 잠뜰에게 일임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니, 들어 봐. 우리가 이제껏 얼마나 충실히 세계 지리 공부를 위해 교육적인 곳만 돌아다녔냐 이거야. 한 번쯤은 신나게 노는 곳에 들러도 되는 일 아니야?”
“더운 데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는 것보다는…, 눈 구경 하러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
지금은 대충 얼버무리고 나중에 수현 선생님께 말씀드려 다시 조율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좋겠지만, 이상할 정도로 선생님은 세계여행 동아리 학생들에게 약했다. 이렇게 결정했다고 말씀을 드리면 ‘너희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하자’는 답만 하셔서.
누구 의견대로 하는 편이 좋을지, 어느 쪽이 조금 더 내키는지. 잠뜰은 참고서 낱장의 끝을 검지로 긁으며 고민에 잠겼다.
‘일전의 여행은 공룡 선배가 가자는 대로 갔으니까, 이번에는 덕개 선배 말대로 가는 게 좋으려나?’
유명한 테마파크를 가자는 말이 끌리긴 했지만, 막상 간다 치더라도 뭘 하며 노는 게 좋을지 모르겠기도 하고. 그리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과 별개로 덕개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을 내린 잠뜰이 대답을 위해 입을 열었지만, 대답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들려왔다.
“…바다로 가자.”
내내 입을 다문 채 창밖을 내다보던 라더의 목소리. 그 이상 말을 하진 않는 라더를 쳐다보던 공룡과 덕개가 조금 전까지 실랑이를 벌였던 것은 잊어버린 것처럼, 합을 맞춘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역시 여름은 바다지! 나는 라더 의견에 찬성~!” “나도 바다는 좋다고 생각해. 그렇게 하는 걸로 하자.”
태세를 저렇게 빠르게도 바꿀 수 있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잠뜰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두 선배도 조용해졌고, 어차피 어디든 상관이 없었으니 반대할 이유 같은 것도 없었다.
―본머스 비치에 도착해 올려다본 하늘은 이제 막 해가 뜨려고 하는 중이었다. 모래사장 한가운데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학생 무리는 꽤 튀긴 했지만, 시간이 시간이라 사람이 없어 문제가 생기진 않았다.
살다가 이렇게 ‘점심 먹고 산책하러 가자’라는 느낌으로 가볍게 영국에 올 일이 있기나 할까?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공룡의 순간이동에 대해 감상을 내놓으며 잠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솨 하는 소리를 내며 밀려들었다 뒤로 물러나는 파도 소리와 짠 내를 가득 머금고 부는 바람이 더위를 한풀 꺾어주는 것 같았다.
자유시간을 좀 갖자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공룡은 24시간 편의점을 찾아서 간식을 사겠다고 덕개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라더는 별다른 이야기 없이 해안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혼자 남겨진 잠뜰은 선배들을 기다릴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멍하니 있으며 시간을 보내기엔 간만에 선생님의 설명 없는 여행이 아닌가?
아깝게 흘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라는 마음이 들어 잠뜰은 걸음을 옮겼다. 모래사장이 있는 해변으로 간다기에, 늘 신던 운동화 대신 신발장 구석에 박혀 있던 샌들을 신길 잘한 것 같았다. 사이로 스며드는 모래알이 발을 간지럽혔다.
바다를 도대체 얼마 만에 와보는 거더라? 공부에 매진하게 된 이래 여행의 여 자도 집 안에서 나오는 일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린 잠뜰이 미묘한 낯으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발가락 끝을 살짝 적시고 사라지는 파도가 시원하기도 하고 동시에 낯설기도 했다.
희뿌연 포말이 이는 바다는 불투명한 파란빛이었다. 이제 뜨려 하는 해 덕분에 약간 구름이 낀 하늘은 여러 가지 색을 띠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고요한 주변과 더해져 꼭 어디 그림 속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러고 보니, 라더, 바다를 좋아하나? 아니면 조용한 게 좋은 건가.”
굳이 여기 시간까지 덕개 선배가 생각해서 온 걸 보면 역시 후자인가? 잠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평소에 여행지를 정할 때는 별다른 말도 없다가 갑자기 바다에 가고 싶다고 한 걸 보면 바다를 좋아하는 걸지도. 생각만 해서는 답을 찾을 순 없지만, 당사자가 여기 없는 마당에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던 건 지 한참 먼 앞, 파도가 닿을 듯 말 듯 한 자리에 앉은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바다나 하늘과는 또 다른 푸른빛 머리카락에 늘 쓰고 다니는 푸른 상어 모자. 라더였다. 잠뜰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자연히 라더에게로 향했다.
“여기 있었네.”
“…응.”
약간의 간격을 두고 잠뜰은 라더의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다리를 뻗으니 역시나, 들어오는 파도가 발을 쓸고 지나가는 자리였다. 라더 또한 무릎을 끌어안으려다 만 듯한 어중간하게 움츠린 자세로 앉아있어서인가, 운동화가 젖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하니까 꼭 우리가 전세 낸 것 같다.”
“그러게. 새벽이라 사람이 없으니까.”
“들어보니까 여기도 유명한 관광지라고 하더라. 한낮에 왔어도 예뻤을 것 같은데.”
“응.”
바다에 시선이 고정된 라더의 대답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짧았다. 그렇지만 동아리에서 보낸 시간이 있어 잠뜰은 이것이 무시나 외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잠뜰은 대화를 더 이어갈 수 있었다. 말 없는 사이의 간극을 부서지는 잔잔한 파도 소리가 메운다.
“근데 라더야. 바다에는 네가 오고 싶다고 한 거였잖아. 그러면 바다 좋아해?”
이번에는 파도 소리가 길게 들렸다. 그리고 나온 대답은 꽤 의외의 것이었다.
“딱히 그렇진 않아.”
“그렇구나……, 어?”
무심코 얼빠진 듯한 소리를 내자 라더가 고개를 돌려 잠뜰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닿자 그제야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깨닫고는 헛기침을 부러 내며 진정한 잠뜰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면, 그냥 오고 싶은 거였구나…. 나는 네가 바다를 좋아하는 줄 알았지.”
“바다에는 몇 번 가 본 적 없어. 여행을 가는 것 자체도 최근에야 시작한 일이니까.”
“……그렇구나.”
잠뜰은 작게 중얼거렸다.
세계여행 동아리의 세 사람의 정확한 관계에 대해서나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가끔 동아리 사람들이 보여주는 표정이 소위 말하는 사연 있는 사람의 것이라서. 집에서 봐 왔던 눈치 덕분에 적어도 이들의 과거사나 엮인 일이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뭐, 나도 정말 오랜만에 오는 것 같아. 그리고 나는 아마도, 바다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와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네. 편안해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넌 이렇게 오니까 무슨 기분이 들어?”
잠뜰은 대화의 주제를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라더나 다른 사람들에게 과거에 대한 것을 물을 것이냐 묻는다면, 딱히 그러고픈 생각이 없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들이 먼저 말해주는 것이라면 모를까.
왜, 그렇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고, 비밀이 있는 것처럼. 자신 또한 집안일일 뿐이라며 숨긴 고민이 있고,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 잠뜰은 그들도 당연히 그러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아주 작아지는 기분.”
라더의 시선이 다시 자연스럽게 바다를 향했다. 해가 뜨는 것인지 바다에 다시 비추는 색이 극명했다. 오는 빛에 쫓겨 사라지는 그림자가 짙었다. 발치에 바닷물이 다시 밀려왔다. 여전히 물은 차가웠다.
“끝없는 물을 보고 있으면, 평소와는 다른 기분으로 답답해져. 금방이라도 거대한 파도가 일어서서 나를 덮쳐올 것만 같다는 생각이 나. 그렇지만, 그게 나쁜 기분은 아니야. 오히려…… 기껍게 받아들이고 싶어져. 안도감이 드는 것 같아.”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이 파도를 타고 바다 어딘가로 흩어지는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라더가 옆에 늘어트리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뻗고는, 손끝에 아주 작은 불꽃을 일으켰다. 가시는 어스름 그림자 사이로 울렁거리는 불이 기묘한 빛을 냈다.
“…내가 무엇이더라도 괜찮을 것 같더라. 정말로 내가 어떤 방법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불길이라 하더라도…. 바다는 항상 나보다 클 테니까. 그래서, 내가 여기 서 있을 때만큼은 괜찮을 것 같아.”
평소에는 나조차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정말로 무서운데. 정말로 많이, 싫은데.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은 잔불처럼 사그라들었다. 말을 이어가는 대신, 그가 불꽃이 인 손가락을 바닷물에 가져다 대자 불꽃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꺼져버렸다.
손가락이 아니라 손 전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넘어 온몸이 불이 되어 타오르고 있다 하더라도. 파도가 밀려들어 몸을 덮친다면 꺼져 사라지겠지. 라더는 그 사실을 새삼스레 확인받았다.
형언하기 어려운, 압도된다는 감각으로부터 안도감을 느낀다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 수단이 압도됨이라는 것도 어이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안에 심어진 의문은 불안을 먹고 끊임없이 자라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어떤 큰 구멍이 생기더라도, 이것을 뽑아 없애고 싶었지만 뽑아내기에는 인제 와서는 너무나 늦어버린 것만 같았다. 라더는 도로 손을 거둬들였다. 손에 묻었던 바닷물은 남아있는 손의 열기에 전부 말라버린 채다.
“…그 사실이 위안이 돼?”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잠뜰이 느리게 물었다.
“그것보다는, 자기 위로라고 하는 게 어울릴 것 같아.”
바다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작게 보는 행위가 자기 위로가 아니면 무엇일까. 라더는 잠뜰이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네가 좋다면 그걸로 된 거지. 위안이 됐든, 위로가 됐든…. 그런 걸 세상으로부터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은걸. 위안을 얻고 싶다는 게 나쁜 건 전혀 아니잖아?”
그 자기 주장을 굽히기 싫어하는 두 선배도 이걸 알고 있어서 순순히 바다에 가자고 한 것이었을까. 그 생각이 지금에서야 잠뜰의 머릿속에 문득 들었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난다. 그 웃음을 놓아주며 잠뜰은 바다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라더야. 다음번에는 여기 말고, 세븐 시스터스에 가자고 하자. 거기도 영국인데, 내가 알기로는 절벽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 있대. 그러니 여기서 눈에 담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바다를 볼 수 있을 거야. 선생님께 말해서 날씨도 미리 보고, 완전히 화창한 날에 가는 거야. 한낮에 와서 바다 구경도 실컷 하고, 선생님 수업도 듣고. 피쉬 앤 칩스도 먹고.”
괜찮지 않을까? 잠뜰이 물었다.
“……나쁘지 않겠네.”
라더가 대답했다. 파도가 밀려들고, 발치보다 조금 더 올라와서는 다리를 적셨다. 그와 동시에 파도가 자신 안에 자라난 불안의 가지 하나를 꺾어 가져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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