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다음 생에는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를

혁명

엘레나, 나의 기억은 여전히 그 계절 속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당신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오전 회의를 마치고 그대를 만나고 싶었는데, 방에 없기에 궁인들에게 물었었어요. 그대가 몇 시간 전부터 도서관에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그대에게 책갈피로 선물해주기 위해 만들어두었던 압화를 종이에 감싸 그대를 만나러 갔지요. 그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레었고, 압화해 놓은 꽃에서 아직 떨어지지 않은 향이 봄바람을 타고 날아와 내 코끝을 간질였습니다. 정원에 햇빛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고 봄 벚꽃이 만개하여 하늘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어서, 그대를 만나면 함께 정원 산책을 제안하고 싶은 날이었지요. 그대 방에서 나와 스무 걸음, 모퉁이를 돌고 나서 다시 오십 걸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대에게 가까워질 때마다 행복으로 가득 찬 바다에 발을 담그는 것 같았던 그 느낌을, 그대는 알까요.

경비병에게 내가 온 것을 그대에게 알리지 말라고 지시한 다음에, 난 그대가 있는 도서관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어요. 몰래 가서 그대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살금살금, 발걸음 소리를 봄볕이 창틀을 통과하며 만든 그림자 아래 숨기고, 그대를 찾았습니다. 그대는 언제나 그대가 책을 읽을 때 앉던 자리, 왼쪽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책장 사이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었습니다. 얼마나 집중해서 보고 있었으면 내가 바로 코앞까지 왔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나요? 그대의 검은색 눈이 흥미진진한 것을 보고 있다는 듯 밤하늘처럼 빛나고 있었던 것이 기억난답니다. 먼저 눈치채기를 바랐지만 빨리 말을 걸고 싶었던 마음에 결국 내가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그대는 깜짝 놀란 눈을 하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지요.

'폐하!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오셨으면 말씀이라도 해주셨어야지요.'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나보다 책이 훨씬 좋은가 봐요? 조금 질투가 나는데요.'

짓궂게 그대를 놀리면 그대가 그런 거 아니라며 허둥지둥 말하던 모습이, 내 눈엔 그리도 귀여워 보였답니다. 농담이라며 웃자 그대는 조금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었지요. 내가 그대에게 선물이라며 압화를 내밀자 그제야 다시 내 쪽을 바라봐 주었는데, 향이 남아 있는 게 기분 좋다며 웃는 그대의 모습은 여전히 책의 한 페이지처럼 또렷하게 기억난답니다. 그대 미소에 상기된 내 얼굴이 들키는 것이 부끄러워, 난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대가 무슨 책을 읽고 있었냐고 물었지요.

'이국의 사상 중 '윤회'라는 것에 대해 보고 있었습니다. 혹 들어보셨습니까?'

'윤회? 아뇨, 처음 들어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 다음 생이 있다고 합니다. 특히 부부였던 자는… 다음 생에도 부부가 된다는 설이 있더라고요.'

그 말을 하며 그대는 민망했는지 책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대의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뺨이 나와 마찬가지로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게 보였습니다. 어쩜 우리는 서로를 이토록 닮았을까요. 나는 압화를 들고오느라 꽃향기가 묻은 나의 오른손으로 그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대를 저번 생에서부터 사랑한 것이겠네요.'

그 말에 그대는 조금 전 보다 붉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내가 사랑하는 예의 그 미소를 날 향해 지어주었지요. 봄꽃이 피어있는 건 바깥의 정원인데, 어째선지 그 순간엔 도서관에 봄 향기가 가득 나는 것 같았답니다. 그대는, 그대의 귓가에 가 있던 나의 오른손을 그대의 왼손으로 감싸주며, 나에게 물었었죠.

'다음 생에도 다시 만나러 와 주실 거죠?'

봄 벚꽃보다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었지요.


"폐하, 준비 다 되었습니다."

엘레나, 지금은 비가 내린답니다. 벚꽃이 다 빗물에 떨어질 텐데, 이젠 같이 볼 이도 없으니 아무래도 상관없겠지요.

아까 하던 말 있죠, 다음 생에도 다시 만나러 와 주겠냐는 물음이요. 그때 난 대답을 못 했잖아요? 차가 준비되었다고 알리러 온 궁인 때문에 말이에요. 그래서 그때 물음을 지금 답하려고 했는데… 미안해요, 그대를 만나러 가겠다고는 못하겠네요.

"관을 내리겠습니다."

내가 그대를 만난 것이, 그대를 이리 벚꽃처럼 지게 만들어 버렸으니까요.

그대의 마지막을 정리해주던 사람이 말해주더군요. 그대의 마지막 모습은, 독을 마시고 떠난 자와 같았다고. 누군가가 그대를, 에투알의 왕비를 독살했다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의사들이 알았을 텐데도 내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죽였거나 혹은 이미 누군가에게 매수당했다는 것이겠지요. 나는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 곁에 그런 자들을 붙여주었던 겁니다. 그것이 너무 후회스럽고 내 자신이 혐오스럽습니다. 그대를 살리지 못한 죄로 그들을 모두 참수시켰는데, 그래 봤자 이미 늦은 것이겠지요. 저 관 안에 담긴 그대는 다신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의심 가는 이들의 목을 모두 벤 뒤에, 불현듯 그대가 왜 죽임을 당했는지 깨달았어요. 전부 나 때문입니다. 전부 다 이 못난 내 탓입니다. 그대는 에투알의 왕비가 되어서, 힘없고 약한 나의 비로 들어와서 그리 허망하게 간 것입니다. 내가 감히 다른 이들이 넘볼 수 없을 만큼 강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면, 내가 그대를 지킬 강한 힘을 가졌더라면 그대를 이리 권력다툼 사이에서 잃지 않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내가 그대를 내 아내로 들이지 않았더라면, 그대는 살았을 텐데. 내가 그대에게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는 왕실과는 관계없는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 아주 오랫동안 살다가 갔겠지요.

그걸 알고 있는 내가, 어떻게 감히 그대를 다음 생에 다시 만나러 가겠어요.

"위대한 에투알의 왕비의 마지막 가는 길에, 묵념을."

엘레나, 만약 그대가 말한 것처럼 다음 생이란 것이 있다면, 그 생에선 그대와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번 생에서는 나를 만나 고생만 하다 떠났으니, 다음 생에는 나 같은 놈보다 훨씬 좋은 사람을 만나길. 나보다 그대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고, 나보다 훨씬 더 많이 그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그대의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이 첫눈처럼 하얗게 변할 때까지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살다 가기를, 바랍니다.

…다만, 이기적인 건 알지만, 감히 바라건데… 만약 정말로 다음 생이 있다면, 그대와 옷자락 하나 스칠 수 있는 인연으로 묶이기를. 고개를 잘못 들면 눈길 한 번 스칠 수 있고, 이내 그 얼굴을 잊어버리는 짧은 만남으로 그대를 다시 만나길 바랍니다. 나는 한낱 미물로 태어나 그대를 보더라도 결국 그대를 사랑하게 될 테니,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말아 주세요. 우리, 그렇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남읍시다. 그대가 이번 생과는 다르게,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먼발치서나 알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내가 태어나길 바랍니다.

"…잘 가시오."

사랑합니다. 정말, 아주 많이 사랑했습니다. 감히 이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그대를 사랑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당장 그대가 없는 날들을 어떻게 버텨나가야 할지도 모를 만큼, 그대를 내 인생의 전부라 할 수 있을 만큼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이리 이별하게 하여 미안합니다. 부부는 다음 생에도 부부라는데, 우리는 다음 생에 부부가 되지 맙시다. 부디 다음 생에는, 그대가 원하는 만큼 살다가 원하는 만큼 사랑하기를, 이번 생보다 아주 많이 더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안녕, 나의 사랑. 나의, 엘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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