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그 신에게서 벗어나는 방법 1화

1. 시작

MUNIVERSE by Si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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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시작은 신전부터 확인하는 거지.’

자신의 신은 제 영역이 아닌 세계에 함부로 자신을 던져두는 일이 없었다. 그랬기에, 누구보다 그의 기운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괘씸하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해주겠어.’

 그를 모시는 신전이라면 자신이 풍기는 그의 기운을 못 알아챌 리 만무했다. 스스로를 신이 보낸 영웅으로 소개하고, 그 세상에서 발걸음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첫 번째 계획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 신이 날 보냈고, 영웅이 되어줄 테니.‘

그래도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라고, 나름 계획이 다 있었다. 늘 모든 게 계획대로 되진 않지만.

“아, 당신이시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뭐…야? 꼭 나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반응은. 왜 이렇게 찜찜할까.’

그레이스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알겠다는 한마디만 내뱉고서 그 신관을 따라 들어갔다.

“성하. 모셔왔습니다.”

“수고했네.”

“어서 오십시오, 사자(使者)께서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내가 오는 건 어떻게 알고 있었지?”

짧게 하, 하며 일순간 불편한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아, 몇 시간 전에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그래? 무슨 신탁이지?”

대신관이 신탁을 적어둔 두루마리를 펼치더니, 경외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읊기 시작했다.

“나의 기운을 가진, 은장발의 한 사자(使者)를 보내겠다. 자수정 같은 눈을 하고 있고, 기개가 남다르니 그대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겠지. 그곳이 최근 사특한 존재들로부터 위협당하고 있다는 기도는 숱하게 들었다. 내 친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노니, 그를 믿고 의지하도록 해. 그 아이는 분명 영웅이 될 거라 믿고 있어. 모쪼록 잘 부탁하네.“

하…. 결국 제 할 말만 잔뜩 늘어놓았군. 

‘아… 진짜 싫다.’

그레이스는 스타티스 같은 보랏빛 눈으로 잠시 그곳-신전 중앙-을 훑으며 비소를 띄었다.

‘내가 너무 비슷하게 행동했나보군….’

그에게 간파당한 것이 그를 따르는 세계의 신관들에게까지 알려졌다니,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 향하는 무한한 신뢰가 느껴지는 맑은 눈빛들을 차마 무시하긴 힘들었다.

“사자님 같은 거 말고, 그냥 편하게 그레이스 님이라고 부르도록 해. 존대는 쓰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그레이스 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몇몇 눈치가 빠른 이들은 그의 비소를 목격하고는 불쾌함을 눈치채고 불안해하였으나, 이내 그에게서 들려온 말에 깊은 안도를 느꼈다.

이내 그들의 안도감은 그를 향한 경외심으로 바뀌었다.

‘영웅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니…!’

그레이스는 그들이 보내는 그런 시선이 싫지 않았다. 아니, 더 많은 이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부족한 부분이 있겠지만, 부디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신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신전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추정되는 곳의 문을 열었다.

“좋아, 마침 자리가 있으니, 앉아보게.”

“예, 그럼.”

그레이스는 잠시 방을 쓱 보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옅은 미소를 띄었다. 테이블을 빙 둘러싼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입을 열었다.

“사특한 존재들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고?”

…!

대신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예, 예…! 최근에 신을 부정하며, 종교를 없애고 황권을 세우려는 세력들이 불어나고 있습니다.”

“아…,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레이스는 신을 부정한다는 그 “사특한 세력”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이해관계가 맞을 거라 생각한 걸까.

‘고작 황권이나 세우려고 사특하다는 말까지 들어가며 신성모독을 일삼는 건가.’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는 그 자체로 보통의 인간보다는 강했지만, 모든 세계에서 “강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다른 세계로 갈 때마다 파장이 달라. 여기서도 새로 힘을 키워야겠군….’

어차피 적응하면서 이곳의 파장에 맞춰 강해질 필요도 있었으니, 혼자 돌아다녀 볼 필요는 있었다.

“그들의 본거지나 주 활동지는 알고 있나?”

“여기, 저희가 기록해둔 지표입니다.”

옆에 서 있던 고위 신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여러 표식이 그려진 지도들을 건냈다.

“지금부터는 내가 직접 알아보고 결정하겠다. 이의 있나?”

‘놈들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게 둘 순 없지. 벌써부터 내가 신전을 무너트려버릴 거라고 의심하게 둘 순 없으니.’

게다가, 어차피 이곳에서 [신력]이라던가 하는 특수한 힘들을 다룰 수 없는 상태였으니, 그걸 들키는 것도 곤란했다.

‘그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힘을 만들어야만 해.’

“그럼, ‘그들’에 대한 것은 전적으로 그레이스님께 맡겨도 되겠습니까?”

“잘 이해했군.”

“알겠습니다. 혹여나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래. 날 맞이하느라 수고했네. 이만 가보도록 해.”

‘빨리 가라, 빨리.’

“예, 그럼.”

신관들이 그레이스에게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올리곤, 즉시 문을 열고 방을 떠났다.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그를 몹시도 신뢰하는 태도였다.

‘너희가 무슨 생각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건 확실하군.’

‘일단 ‘그들’을 먼저 알아보면서 이곳에 대해 알아보는 수밖에 없겠어.’

그레이스는 방에 마련되어 있는 옷장을 열어보곤, 적당히 평범해보이는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여기나 지난 번의 5번째 세계에서나, 복식은 비슷한 것 같군.’

그레이스는 매번 저의 창조주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아무데나 자신을 던져 두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9번째에 다다르니 슬슬 익숙해지는 듯했다. 적응력이 길러졌다고나 해야 할까.

‘가장 가까운 곳…, 그래. 여기로군.’

그레이스는 한달음에 그들이 만든 조직 본거지를 찾아냈다.

레브시온.

‘이름은 거창하군. 어디, 녀석들은 어떤지 구경이나 할까.’

그레이스는 당장 그들과 마주하고 싸운다거나 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저 평범한 행인인 척 위장만 하려고 했다.

‘악의가 있는지 아닌지는 척 보면 알지. 그게 내 본질이니까.’

감정을 보는 것. 그것이 그레이스가 가진 진짜 “능력”이었다. 본래라면 그걸 뽑아내 어떤 것으로든 실체화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글쎄.

그레이스는 [그것]이 제게 없는 한, 반쪽짜리일 뿐이었다. 심장을 남의 손에 맡겨 두고 다니는 꼴이다.

‘하필 그게 [그]에게 있으니, 쯧. 하여간에 마음에 드는 점이 하나도 없어.’

‘아, 움직이는군.’

슬슬 ‘레브시온’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장. 오늘은 별 일 없어?”

“…아직은. 일각(一刻) 후에, 모두 모이면 그때 얘기하지.”

“대장”에게 말을 건 남자가 주변을 슥 둘러보곤, 고개를 끄덕이고 골목을 돌아 어디론가 들어갔다.

굉장히 낡은 창고처럼 보였지만, 안쪽은 그렇게 좁아보이지 않았다.

‘지하실로 이어지나보군.’

‘저기까지 따라 들어가기엔 위험요소가 너무 많아. 오늘은 주요 인원이 어느 정도인지까지만 확인하고 돌아가야겠군.’

아까 “대장”이 말한 일각(一刻)의 시간이 지나자, 다양한 사람들이 서서히 그 낡은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녀노소 직업을 불문하고 모이는, 별로 수상해보일 것은 없는 모임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모두들 긴장하고 있군.’

오 분 정도 지났을까. 수상해보이지 않기 위해서인지, 외부에서 보이는 보초는 없었다. 문을 열면 코앞에 장정 두 사람이 서 있었지만, 그레이스는 아직 그 문을 열 생각은 없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근처의 지붕 위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레이스가 소리 없이 사뿐하게 내려왔다. 아무리 세계마다 흐르는 기운과 파동이 다르다지만, 신체능력이 너프되는 건 아니었으니, 7번째 세계에서 익힌 것들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7번 세계에서까지는 무식하게 최강자 한 놈 잡아다가 스승 삼고서 무턱대고 최강자가 되기 위한 노력부터 했지만, 이번엔 그렇게 하기엔 너무 이목이 많이 집중돼.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분명 이쪽 세계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힘이 뭔지 알아내서, 그 파동을 따라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냐.

그레이스가 현재 그가 몸담고 있는 세게에 대해 파악하려 외출해 있는 동안, 신전은 다른 일로 바빴다.

다음 대신관을 맞이할 날이 3년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후계자를 선출해야만 했으니, 신전 내부에서는 이미 그레이스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도 바빴을 것이었다.

“자네, 후계자 후보들 중에 누가 가장 유력해 보이는가?”

“아, 당연히 미하일 님 아니겠는가!”

“흠. 그런가? 하지만 지난 분기 성적은 하인델 님이 더 뛰어나지 않았나.”

“그건 그렇군. 루스님이 아끼신다고 해도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난 신곤이 대신관이 될 테니까 말일세.”

“그럼 자네, 만일… 그레이스님이 신관이 되신다면 어떨 것 같나?”

“아니! 자네, 말조심하게! 어찌 사자께서 신관이 된단 말인가!”

“크, 크흠. 내 실언했네. 못 들은 척 해주시게.”

미하일은 잘 익은 석류같은 붉은 머리를 가진 신관이었다. 그의 눈은 깊고 푸른 바다를 담고 있는 듯했고, 부드럽고 호감이 가는 인상의 미남자였다. 새벽빛을 받는 듯한 신비롭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풍기고, 인사성이 좋아 지나가며 마주치는 이들 중 그를 미워하는 이는 매우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현 대신관인 루스도 그를 매우 아꼈다. 신전 내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대놓고 편애했음에도 누구도 그에 반발심을 표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다.

‘미하일 님이라면 믿을 만 하지!’

그를 아는 이들은 거의 모두가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선망받고 있었다.

그는 또한 단정함을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에, 길고 윤기 나는 머리칼을 잘 정돈해서 한 갈래로 묶어 깔끔하게 아래로 늘어뜨렸다.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맵시로 먼지 한 톨 없어보이는 차림새에 누구보다 바른 정복 차림이었다. 그에게선 새벽 숲과 같은 향이 났다.

“아,오랜만입니다, 신관님.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미하일 님! 오랜만이군요!”

“다른 일 때문에 이제 복귀했는데,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셨다 들었습니다.”

“아! 그렇지요. 신탁의 ‘그 분’께서 정말 오늘 찾아오셨습니다!”

“이런, 조금만 더 일찍 복귀할 걸 그랬군요. 지금은 어디에 계시던가요?”

“그게… 레브시온을 염탐해보시겠다고, 아까 외출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그분께서 돌아오시는대로 인사드려야겠군요.”

“예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지금은 대신관님께 가시는 길이십니까?”

“복귀했으니, 가장 먼저 인사드려야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만. 시리우스님의 빛이 함께하길.”

“시리우스님의 빛이 함께하길!”

미하일은 상아탑에 볼 일이 있어, 그곳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본래라면 대신관의 곁에서 신탁의 주인공을 맞이했겠지만, 시기가 좋지 않아 아쉽게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인델 녀석, 그분을 먼저 뵙지는 않았겠지.’

그는 안 그래 보여도 경쟁심이 투철하고 승부욕이 있는 사내였기에, 지난 분기 자신보다 높은 성적을 거둔 하인델을 꽤나 의식하고 있었다.

‘그 녀석에게만큼은 밀리고 싶지 않았는데. 확인해봐야겠군.’

미하일은 걸음을 빨리 해, 곧장 대신관에게로 향했다.

낯빛은 변함 없이 차분했지만, 그가 대신관에게 갔을 때 어떤 답변을 듣게 될지에 따라 그의 감정 상태가 결정될 것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짜증나고 불안했으니, 오죽하겠는가.

똑똑.

“미하일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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