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바람의 전설
폭풍을 경계하라 모래가 앗아가는 것은 비단 생명만이 아니다.
※ 포스타입 게시물을 옮겨와 리뉴얼한 글입니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작열하는 하늘 아래 열사 위에 선 나그네여
몸과 마음을 단단히 여밀지어다
폭풍을 조심하라 우레와 낙석이 죽음과 함께 몰아치리라
폭풍을 경계하라 모래가 앗아가는 것은 비단 생명만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여 그대의 운을 시험할 텐가
용기 있는 자여 그대의 운명을 바꾸어볼 텐가
폭풍의 정령에게 감겨 영원한 낭인이 될 텐가
그대의 보물을 열사의 도적에게 내어줄 텐가
무엇을 잃더라도 상관없다면 오라
땅에서부터 솟구치는 파도가 너를 삼킬지어다
매서운 바람 소리가 낡은 판자 건물을 뒤흔들었다. 엉성한 흙벽 사이로 모래 먼지가 새어 들어오고 탁한 공기가 실내에 가득 찼다. 그 흔한 촛불 하나, 창문 하나 없이 컴컴한 실내가 그것들과 더불어 목을 가득 메우는 것 같았다.
덜컹, 끼익-
으스스한 소리와 함께 육중한 나무문이 밀려 들어왔다. 모래가 우수수 떨어지는 틈으로 한 남자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천으로 둘둘 감은 몸에서도 수북이 쌓인 모래들이 떨어져 더러운 바닥에 하얀 흔적을 남겼다. 그 위로 흐릿한 먼지구름이 떠오르는 것을, 이 집의 안주인은 핀잔 한 마디 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남은 먼지를 떨어낸 남자가 우악스럽게 천을 풀어내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분명한 천이 얇게 쌓인 모래 위에 내려앉았다.
스멀스멀 공기를 타고 기어오르는 먼지구름을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가는 눈동자가 남자의 자색 눈과 마주쳤다. 낡고 허름한 바 안쪽의 어둠 중앙이 작게 갈라지며 하얀 반달이 떠올랐다.
“우리 단골 손님이 오셨군. 그래, 이게 대체 얼마 만이던가?”
어둠 안에서 온갖 팔찌와 반지가 치렁치렁 매달린 까무잡잡하고 삐쩍 마른 팔 두 개가 뻗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저 안에서부터 바람이 훅 끼쳐오더니 벽면에 걸려있던 먼지 쌓인 촛불들에 일제히 불이 붙었다.
양옆으로 쭉 찢어진 그로테스크한 시선이 남자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든 말든, 들어올 때부터 이 모든 현상에 놀란 기색 하나 보이지 않은 남자는 구석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나무통 하나를 끌어와 바 테이블 앞에 내려놓고 털썩 앉았다.
“행색이 영 이상하군 그래? 내가 아는 그 작자가 맞는 건가? 아니면 그새 사막의 일부가 될 시기가 찾아온 건가?”
사막 한 가운데에 위치한, 유일무이한 전당포의 안주인이 의아함과 즐거움이 혼재한 질문을 건네며 턱을 괴었다.
“초라한 객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 터인데. 설마, 허탕 쳐서 푸념 들어줄 사람이라도 찾아온 거요?”
“농담은 거기까지 해, 똑딱. 오늘은 어울려 줄 기분이 아니거든.”
키키킥-, 하는 쇳소리가 길게 흘러나오다 멈췄다. 그렇다고 똑딱이 다시 입을 열지는 않았다. 능력 있는 장사꾼은 본디 객의 기분을 맞춰 최대의 이익을 뜯어내는 법을 아는 법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남자는 안주인의 배려에 대한 보답을 건네듯, 자줏빛 조끼 안에서 작지만, 꽤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턱, 하고 꺼내 테이블 위에 던져놓았다.
“뭐야. 정말 이게 다였단 말이야? 이봐, 이봐. 설마 했는데 정말 곧 송장 치울 날이 다가오는 건가?”
똑딱이 과장되게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리더니 주머니 입구를 비집고 열었다. 밤톨만 한 보석들이 번쩍거리며 빛을 내어 음침한 실내가 순간 환해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똑딱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주머니를 잘 동여매어 제 옆으로 밀어놓고는 남자에게 물었다.
“어이, 벤시. 무슨 수작이야? 네 실력은 고작 이 정도가 아니잖아.”
아벤시스가 코웃음을 치더니 몸을 뒤로 젖히며 대답했다.
“수작은 무슨. 수고비야, 수고비. 지금까지 고생했고, 이제 볼 일 없을 테니 두목한테서 슬쩍 했다.”
“그 해적 나리한테서? 어이구, 목 날아가려고 작정했군. 눈썰미로는 이 동부에서 당해낼 자가 없는 양반이거늘.”
“이런 걸로 유능한 부하 목을 내리칠 멍청이는 아니야. 기껏 해봐야 손모가지 하나쯤 따 가겠지.”
아벤시스의 비틀린 미소를 본 똑딱이 힉-, 힉-, 힉-, 하는 녹슨 쇳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막 제일의 마법사가 이젠 외팔이 중에서도 최고가 되기로 하셨구만. 좋아, 좋아. 아주 재밌어.”
팔찌들을 쩔그렁거리며 반지가 가득 끼워진 손을 짝짝 맞부딪히며 똑딱이 그의 농담을 받아쳤다. 사막의 해적, 코라이. 그 용의주도한 자가 아벤시스의 도둑질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분명 알고도 눈감아준 것이었을 테니, 그의 손이 날아갈 일도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올 일이 없다.’,라…. 이제 사막은 씨가 마르긴 했지. 어디, 무슨 쏠쏠한 건수를 잡으셨나 들어보기라도 할까?”
“쏠쏠하달까, 큰 건수 하나를 잡긴 했지.”
“호오, 그게 대체 뭐지? 이참에 나도 따라가서 한몫 챙길까 싶어지니 좀 알려주시게나.”
“인류의 구제라는 아주 큰 건수이올시다.”
뚝.
똑딱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태엽을 닮은 황금색 눈동자가 아벤시스의 외눈을 노려보았지만, 거짓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자 똑딱은 한숨을 푹 내쉬며 테이블을 손으로 밀어내어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앞에 앉은 이가 다른 풋내기 도적이었다면 자지러지게 웃으면서 놋쇠 대야로 머리를 깨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남자는 다르다. 가장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동안 봐 온 시간 동안만큼은 아벤시스를 잘 아는 그녀였다. 똑딱이 아는 아벤시스는 이런 식으로 불쑥 찾아와 수고비라며 값진 물건을 무심히 건네고 다신 찾아올 일 없을 거라는 말과 함께 영웅 나부랭이가 되겠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허접쓰레기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수긍했고, 캐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벤시스의 말은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두 번 다시 이곳에 얼굴을 비추지 않을 것이다. 당연한 사실을 계속 의심하며 캐묻는 멍청이가 아니었기에 똑딱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내가 아는 벤시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면 사라졌지 이런 되도 않는 ‘수고비’까지 챙겨서 작별 인사를 하러 오는 정 많은 놈은 아니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일은 무슨 일. 나도 정이라는 게 있는 놈이야.”
“호오, 그러신가.”
똑딱이 눈동자를 굴리자, 시계태엽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렇다면 왜 그리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계시는지?”
이번엔 아벤시스의 입이 다물렸다.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똑딱은 입을 쭉 찢어 미소 짓고는 턱을 괴지 않은 손을 뻗어 주머니를 쥐락펴락하며 소리를 냈다. 규칙적인 소리가 꼭 시계추가 흔들릴 때 나는 소리처럼 짤, 깍, 짤, 깍, 하고 정적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의 쉬지 않는 입 역시 한몫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로군? 그렇지? 천하의 아벤시스 도령께 사달이 난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날씨에 모래바람을 헤치고 이 보잘것없는 전당포 주인을 찾아올 일이 없지 않나.”
시선은 여전히 주머니 위 손에 놓은 똑딱이 눈가를 살짝 휘었다. 그녀는 어느새 능력 있는 장사꾼의 탈을 벗고서 싸구려 가십거리를 찾아다니는 질 나쁜 수다쟁이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아벤시스의 입은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똑딱은 자기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의심되는 강수를 뒀다.
“아니면, 작별 인사는 구실이고, 사막의 전설이라도 시험하러 온 거야?”
키키킥-, 쇳소리 섞인 웃음을 흘린 똑딱이 제 발치에 놓인 상자에 주머니를 던져넣었다. 짤그락, 소리에 딱딱하게 굳은 아벤시스의 눈동자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런 그를 응시하며 입술을 삐뚜름하게 문 똑딱이 이윽고 아벤시스 쪽으로 몸을 확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물러나려는 그의 턱에 검지를 가져다 대 멈춰 세운 똑딱은 기분 나쁜 눈을 반짝였다.
흐릿한 자색에 황금색 톱니가 번졌다.
“이런 날 사막 한 가운데를 헤집고 다니면 기억이 지워진다는 전설, 모른다고는 하지 말게나. 모래바람이 홀라당 기억을 훔쳐 달아나 버려서 자기가 왜 사막 안에 들어왔는지도 잊어버린다는 전설 말이야.”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재미없어, 똑딱.”
아벤시스가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똑딱은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벤시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신이 난 목소리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생명을 잃는 것과 상응한 보물. 그건 기억이지. 생명이 사라지면 말 그대로 인생의 종말이 찾아오지만, 기억을 잃는다면 그동안의 인생이 사라지는 것이니 이것 또한 종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
“재미없다니까. 이제 그만….”
“그러니까 내 말은.”
똑딱이 아예 일어나 두 팔로 세게 테이블 위를 내려치더니 눈을 크게 뜬 채로 아벤시스에게 몸을 기울였다. 얼굴이 맞닿기 직전에 멈춘 그녀의 크게 뜬 눈에 아벤시스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의 상이 비쳤다.
“친애하는 아벤시스 부두목에게 “잊고 싶은 추억”이라도 생겼나 싶은 거지. 오해는 말고. 순수하게 걱정이 되어서 묻는 거니까.”
희번덕거리는 황금색 톱니에서 벗어나야 함을 직감했지만, 아벤시스의 몸은 마비된 것처럼 뻣뻣하게 덜그럭거리기만 했다. 형편없는 발버둥에 낡은 나무통이 견디지 못하고 들썩이다 넘어가려던 찰나, 아벤시스는 겨우 팔을 뻗어 바 테이블의 모서리를 잡고 바로 앉을 수 있었다. 똑딱이 재빨리 몸을 빼냈기 때문에 둘의 이마가 부딪히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두어 번 끊어 뱉은 아벤시스가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걸며 대꾸했다.
“허, 허…. 참 나, 난 또 뭐라고. 똑딱 선생, 못 본 사이 많이 늙었네. 그런 바보 같은 전설 나부랭이를 믿는 것도 모자라 케찰코아틀이 풀 뜯어 먹는 소리나 하고 있고. 예전엔 참 빠릿빠릿하고 똘똘했는데.”
머리에 두른 천의 너덜거리는 끝단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아벤시스는 능청을 떨었다. 똑딱은 여전히 귀에 입꼬리를 걸고서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그의 속에 초조함이 잠자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물고 늘어지기로 했다.
궁금했으니까.
그가 평소와는 달랐으니까.
“바보 같다니. 진짜라니까? 경험담도 꽤 많은데. 진짜인지 아닌지 벤시 도령이 어떻게 아나? 경험하지도 않았으면서.”
그 말에 아벤시스가 코웃음을 치고는 테이블에 팔을 걸치고 똑딱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내가 사막을 몇 년 헤집고 돌아다녔다고 생각해? 그리고 우리는 모래폭풍도 자주 뚫고 다니지. 그 전설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난 골이 텅텅 빈 병신이게?”
“흐음…, 그것도 그런가?”
“그렇다니까.”
아벤시스의 주장에도 아직 미심쩍은 것이 남았는지 똑딱은 턱을 매만지며 골똘히 머리를 굴렸다.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아벤시스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통이 넘어져 구르는 소리에 똑딱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가 이미 바닥에 내팽개쳐둔 천을 어깨에 걸친 후였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똑딱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등이 말해주고 있다. 태연한척 하지만, 생각보다 사막의 도적 부두목은 이런 류의 거짓말에 서툴렀다.
그러나, 똑딱은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저 걸어나가는 녹색 머리 사내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무운을 빌어주었을 뿐.
“잘 가시게나, 전우여. 나중에 다시 만난다면 서로 큰 건 하나씩 잡은 상태로 보자고. 기대하고 있도록 하지.”
아벤시스는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려 어둠 속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웃는 똑딱을 보았다.
“만나는 게 이승일지 저승일지는 보장 못 해.”
“우리는 그편이 더 좋지 않나? 남의 뒤통수 치면서 먹고 사는 쥐새끼들 인생이 다 그런 법 아니겠어.”
하긴, 그것도 그렇지. 대답을 입속으로 굴리며 그가 핏, 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객이 떠나 문이 닫히자 오직 바람 소리만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한동안 문을 바라보던 똑딱이 손짓하자 촛불이 모두 사라지고 공간은 다시 어둠의 종이 되었다.
사막의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다. 돌아가는 길 내내 함께 걸을 시끄러운 동료를 맞이한 아벤시스의 입가가 비틀렸다. 어깨에 감고 있던 천을 잡아당겨 몸을 감고, 목 부근의 헐렁한 부분을 끌어올려 입과 코를 가렸다.
“사막의 전설이라….”
‘만약 그 전설이 사실이라서 모래바람이 단단하게 빗장을 건 내 속에 비집고 들어와 이 달콤하다 못해 아린 기억을 훔쳐 가 준다면 좋으련만….’
사막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발자국이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새 발자국이 생기기 무섭게 모래바람은 그것들을 잡아먹으며 여행자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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