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솔

단편. 별을 보는 법

제이솔 페어 헌정글.

- 하얀 양의 주저리 라디오. 어느새 모두가 양을 세다 잠들 시간입니다

나긋한 목소리. 라디오는 쉴 틈 없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 연예인이 새로 공개한 노래가 좋았다는 둥, 어느 탐정의 정체가 사실은 괴도였다는 둥, 난데없이 타로의 점괘가 궁금하지 않냐는 둥.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늘어놓으며 그에 어울리는 전파에 흘려보냈다.

DJ는 자신의 노래 선곡실력에 대한 자화자찬을 한참 늘어놓고는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 여러분은 하늘을 올려다보시곤 하나요? 저는 종종 밤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합니다. 어릴 적 시골에서 봤던 은하수가 놓인 밤하늘을 아직도 잊지 못하거든요.

DJ가 자신의 고향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농사를 짓는 사람들 뿐이기에 새벽이 되면 한치의 빛도 없는 농촌. 그곳에서 가장 밝은건 언제나 달과 별이라고. 제이슨은 DJ의 말에 흥미가 동한 듯 입가에 미소를 올렸다.

“형씨. 별 보고 있어?”

“글쎄요, 잘 안 보이는군요.”

내 목소리에는 피로함이 담겼다. 운전대 넘어 유리창에 보이는 건 적막한 도시의 모습이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기 위해서는 위험한 동작으로 하늘을 올려다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운전자에게 허용된 건 불 꺼진 건물들 사이에 낀 구름에 먹힌 뿌연 하현달뿐이었다.

-  곧 있으면 칠월입니다. 칠월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으시는가요?

“오, 7월 하면 청포도지.”

제이슨이 자신만만하게 외쳤고.

“7월은 재산세 납부하는 달입니다. ”

내 대답은 무미건조했다. 재미없다는 시선의  '그게 최선이야, 형씨?'라는 물음엔 답하지 않았다.

- 칠월 이래 칠석. 1년에 단 하루만 온다는 견우와 직녀의 날입니다.

이번역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은 제이슨이 활기찬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둘 다 틀렸는데?”

“재산세는 내야 하니 틀린 게 아닙니다. 오히려 청포도 수확시기는 늦가을로 알고 있는데요.”

청포도는 대개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수확한다. 겨울이 될수록 당도가 높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곳에선 7월에 수확한다고 그랬는걸?"

"그렇습니까?"

물론 어딘가에서는 7월에 수확할지 모른다. 나는 경찰이지 포도 전문가가 아니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제이슨은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려서 하늘이 꿈꿔 알알이 들어와 박힌다.”

진중한 목소리의 음율은 책을 읽지 않는 나라도 어떠한 종류의 작품인지 알기 쉬웠다.

“무슨 시 같군요.”

제이슨은 내 말에 빙그레 미소만 지어 보이며 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문을 내려 밖을 바라보았다. 새벽의 잔잔한 도시 소음과 차의 부드러운 엔진소리가 차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제이슨은 그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밖 밤하늘도 앞 유리창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빛 공해와 우중충하게 안개 낀 밤하늘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제이슨은 뭐가 좋은지 밤하늘을 즐겁다는 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 삼백육십사 일 동안 만나지 못한 두 연인이 만날 날이 곧 다가오는 겁니다. 까마귀와 까치의 머리숱을 희생하는 날이기도 하죠. 여러분은 이 두 연인의 마음이 어떨 것 같나요?

“즐겁지 않을까?”

제이슨이 DJ의 질문에 답했다.

“364일 동안 설렐 수 있잖아.”

“마침내 만난 그날은 괴롭겠군요.”

차가 신호에 부드러이 멈춰 섰다. 아무도 없는 도로 위 홀로 빨간불 앞에 대기했다.

“다음 364일 동안의 기다림을 알고 있으니까요.”

- 누군가는 그날을 정말 행복하다고 할 테고, 누군가는 불행하다고 할지 모릅니다. 하루를 위한 나머지, 나머지를 위한 하루. 물론 로맨틱한 분들은 저처럼 365일 내내 행복하다고 말하리라 믿습니다.

DJ의 잔잔한 웃음은 나와 제이슨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이 순간은 서로에 관해 묻는 시간이었다. 신호등의 빨간불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형씨는 그렇게 생각하는 타입이야?”

“뭐가 말입니까.”

“기다림을 슬퍼하는 타입.”

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완된 몸이 등받이에 받쳐진 채 신호등의 불빛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지 신호가 빨간 별처럼 보였다.

“난, 있거든.”

“글쎄요, 없군요.”

절묘하게 답한 두 대답은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제이슨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형씨는 기다릴 때 슬픈 적 없어?”

“예.”

창이 열려있음에도 바깥은 고요했고, DJ는 여전히 칠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날 기다릴 때는?”

제이슨이 물었다. 그 질문에 난 고개를 돌렸고, 신호등의 불빛이 바뀌었다. 짧은 사이 마주친 은하수보다 빛나는 파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엑셀은 밟자 부드러이 나아가는 차에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마치 언젠가 올라가봤던 높은 건물 꼭대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 이런 생각도 듭니다. 견우와 직녀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헤어질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

밤하늘이 점차 개어 갔다. 구름 사이에 숨은 하현달 사이에 보이는 건 별들이었다.

“전 당신을 기다린 적 없습니다.”

그날의 밤하늘만큼 밝은 별들이었다. 수놓듯 이뤄진 별들이 포도알처럼 박혀있었다.

“그 말은 좀 속상할 거 같은데?”

“사실인걸요.”

언뜻 별자리 비슷한 게 보인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난 별자리를 몰랐다.

“혹시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없다고는 안 하겠습니다.”

“무슨 잘못?!”

“너무 많아서 따지기도 힘들군요.”

피식 웃어 말하자 제이슨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난 슬며시 미소 지을 뿐이었다.

- 기다림이 힘든 건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전 가만히 있었고.”

- 그러니 기다림이 힘들다고 한 분들은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테고.

“멋대로 찾아온 건 당신이었습니다.”

- 기다림이 힘들지 않은 건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란 사랑이 있기 때문이니.

“그러니 전 기다리지 않습니다.”

- 둘의 사랑이 그 누구보다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찾아갈 뿐이죠.”

“형씨…!”

똘망거리는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파트의 가로등이 차 안을 밝게 비췄다. 주차장의 가로등 빛 아래에 두 남자가 차 안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 오늘의 노래 유우리의 베텔기우스 틀어드리며 하얀 양의 주저리 라디오. 새벽 네 시를 알려드립니다.

난 천천히 입을 떼며 말했다.

“제, 실적이니까요.”

“엑.”

아파트는 고요했고, 깊은 새벽의 밤은 청명했다. 라디오에선 노래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끝나가는 여름의 밤은 제법 쌀쌀하게 느껴졌다.

“전 괴도가 얌전히 오길 기다리는 경찰이 아니어서.”

“어쨌든 날 찾으러 온다는 거잖아?”

“기다리는 건 제 체질이 아니거든요.”

문을 열고 말을 담담히 이어갔다. 주차장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높은 아파트는 올려다보기 힘들었다.

“경찰은 괴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친구의 뜻대로는?”

어느새 옆에 다가와 어깨동무한 제이슨의 무게감에 순간 몸이 반쯤 무너져 넘어질 뻔했다. 단단한 근육의 애정 표현은 쉽게 받기에 쉬운일이 아니다. 허물어지듯 쓰러진 몸을 일으키며 질문에 답했다.

“그 경찰이 친구를 잘 가려 사귀어야겠죠.”

“이미 사귀었다면?”

“그렇다면 잘 선택해야겠죠.”

8층에 멈춰 서있는 엘리베이터가 어느새 앞에 내려왔다.

“이직인지 퇴직인지.”

“하지만 형씨는 아무것도 안 했잖아?”

“요즘 취업시장이 불황이라.”

재미없는 농담에도 싱긋 웃어 보인 제이슨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만.”

“무슨 소리입니까?”

“칠월에는 청포도가 피거든.”

"아까 그 말입니까? 조금 익숙하긴 합니다만..."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얀 모시 수건을 올려 두자."

시의 마지막을 끝맺은 그가 11층의 버튼을 대신 누르며 말했다.

"그럼 나는 얌전히 기다릴게."

내 시선을 맞이한 제이슨이 입가를 올리며 유쾌하게 말했다.

"형씨가 알아서 찾아온단 거잖아?"

엘리베이터가 느긋이 지상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입을 열기 전 그가 덧붙였다.

"공주를 구하는 왕자님처럼!"

"대한민국은 민주제입니다."

"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의 당황한 표정에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며 말했다.

"그럼 제 성으로 들어오시죠. 왕도 용은 없지만, 간단한 야식거리는 있을겁니다."

새벽이 깊어져갔다. 남들이 잠들 시간임에도 탁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들의 일을 이야기하고, 서로에게 일어날 일을 이야기한다. 창밖은 여전히 구름에 먹혀 어스름한 하현달만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별은 잘 보였다. 어느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지 않아도 고개만 돌리면 그 별은 떠 있었다. 

내가 길을 잃으면 스스로 빛을 내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길 잃은 아이에게 빛은 기다리는게 아니라 찾아가야하는 것이다.

"형씨, 잘자!"

"안녕히 주무시죠."

밤이 끝나갔다. 별도 잠에 들 시간이었다.


-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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