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테르페의 소설

[GL]나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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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GL 자캐 페어 - 『나의 아이』

Keywords : 현대 / 안드로이드 / AU

에우테르페의 소설 中 가을 타입 글 커미션

4**님 연성 교환 ⓒ리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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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6


나의 아이

1980년, 일본.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유난히 냉해 피해가 심각하던 해였다. 여름임에도 온도가 많이 올라가지 않아 농작물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 해의 의학적인 면을 살펴보자면, 천연두가 종말을 고한 기념비적인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후 이상으로 인해 새천년의 시대인 21세기를 맞이하기 전에 지구가 멸망할 거라며 수군대곤 했다.

후지와라 아키라는 기후 변화, 지구온난화에 대해 논문을 쓰기도 했던 대학 시절을 잠시 회상하고는 곧 고개를 저었다.

자연에 대해 연구하고 인간의 신체에 대해 논하던 그런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 제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녀는 약 봉투를 든 손에 힘을 준다.

바스락. 봉투가 건조한 소리를 내며 손안에서 일그러졌다. 안에는 진통제가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토코샤 아이. 메마른 삶에 단비가 되어주었던 한 소녀의 이름이었다. 아키라는 고등학교 후배인 그녀를 특히나 아꼈다. 아이 또한 아키라를 특별히 생각하는, 서로가 각별한 사이였다.

둘의 사이를 가로막는 문제점 하나만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것은 병이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아이는 병을 달고 살았고, 눈 밑에 진 그늘이 옅어지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아키라는 그런 그녀를 보며 다짐했다. 소중한 아이를 위해 의사가 되어 그녀를 병마에서 구해내겠다고.

그 결심은 그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결국 아키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의과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이의 병세에 관한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병원에 입사하지 않고 연구원이 되는 길을 택했다. 단지 좀 더 빨리 비밀을 밝혀내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후지와라 아키라는 국립 연구소에 스카우트되어 병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눈앞이 고지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시간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토코샤 아이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절망할 틈새도 없었다. 아이가 자신의 신체 조직을 아키라가 소속된 연구소에 기증했기에, 수습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 생각했다.

아키라는 심장을 토해내는 기분으로 i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탄생한 i-309, 아니. 아이는 여전히 자신의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였다. 그것은 과거에도 지금도 변함이 없으리라.

후지와라 아키라는 아이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그 과거의 여름, 고등학생이었던 때 처음으로. 그리고, 아이와 함께 연구소에서 탈출해 도망친 이후. 두 번 한 결심은 모두 한 소녀를 지키겠다는 같은 열망에서 비롯된 아키라의 진심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렀다. 정말 많이 흐른 것 같기도 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발이 달린 것마냥 뛰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현실과의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이것이 괴리로 변이하기 전에 정신을 붙잡아야 했다. 아키라는 약 봉투를 고쳐 쥐고 걸음을 빨리했다. 아이가 기다리는 임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는 버블경제의 화려한 색채가 가져온 불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태평성대라 하였으나 자신의 삶은 그저 멈춰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못내 버거웠다.

탈출해 도망 나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연구원과 실험체가 신분을 숨기고 떠돌아다니며 생활할 만한 곳은 흔하지 않았다.

...그런 곳이 세상에 널려 있다면, 이 세계가 이미 아포칼립스에 들어섰다는 증거이겠지만. 아직은 아닌가 보다. 아키라는 눈앞에 보이는 낡은 컨테이너로 시선을 고정했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분명 문을 닫고 나왔을 텐데. 아이가 열었나? 그래, 안에만 있으니 갑갑하기도 할 테지.

그녀는 뛰듯이 걸어 그 앞으로 다가갔다. 손에 들린 봉투가 움직임에 따라 사방팔방 공중으로 소리를 내며 튀었다. 아이를 두고 홀로 외출한 까닭은 이렇다. 아이가 아프다. 연구소 내 멸균된 환경에서만 지내오던 작은 소녀에게는 면역 체계란 것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갑작스레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당연히 외부로부터 들어온 온갖 자극과 바이러스에 무방비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탈출 시 이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당시에는 당장 목숨을 구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엔 지금 아이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것조차 죄가 되는 상황이었다. 백방으로 약을 구하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바쁘게 하루하루를 지나 보냈다. 하나 지금 있는 곳은 연구소가 아니므로 맞는 약을 찾기가 무척 힘들었다. 심지어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지금 그녀가 가진 것은 연구소에 있던 모든 도구들을 제외한 제 몸뚱아리 하나뿐이었기에. 그저 눈으로 증상을 유추하고 진통제를 구해다 먹이는 것밖에 당장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나면서 슬펐고, 종래엔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세상은 점점 화려하게 색을 입어가는데 아이의 세계는 끊임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연구소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알을 깨고 나왔는데 확장되기는커녕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아이! 나 왔어.”

컨테이너의 문을 열고 외침과는 다르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들어갔다. 불은 켜져 있었고, 한 소녀가 임시로 만든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아키라.”

“응. 몸은 좀 어때?”

“...그럭저럭이요.”

이제는 괜찮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순식간에 아키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말보다는 행동을 먼저 했다. 서둘러 진통제를 봉투에서 꺼내 협탁 위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어 아이에게 내민다. 그러자 아이가 익숙하게 그것을 받아 들고 알약을 넘겼다. 이제,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다.

...이렇게 또 하루를 버텨냈다. 아키라는 아이의 시간을 연장했다. 마치 시한부의 삶을 사는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이 들어서는 안 되었다...

“...아이.”

“네.”

“오늘, 시노하라와 연락이 닿았어.”

“...”

“어쩌면 네 증세에 대한 차도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몰라.”

“...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은...”

아키라가 어렵게 말을 꺼내며 아이의 옆에 앉았다. 침대가 조금 아래로 푹 꺼졌다. 아이의 몸이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아이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며 시선을 제게로 향하게 했다. 투명한 시선이 올곧게 자신을 향하자 가슴 어딘가가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 딱 하루만 시간을 줘.”

“......”

“금방 다녀올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너를 같이 데려갈 수가 없어.”

“...이해했어요. 알겠어요. 저는, 여기서 아키라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이의 눈은 투명할 정도로 맑았다. 갑자기 그녀는 두려워졌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너무나 순수한 감정이 담긴 소녀의 그것이라, 걱정이 앞선 것이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이 아이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함께 하겠다고 했으면서 자꾸 틈을 주는 것은 아닐까. 우려 섞인 감정은 곧 죄책감으로 이어졌고, 아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변했다.

아이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는데. 심정이 너무 복잡했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쥐어짜는 듯한 느낌이었다. 답답했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만든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아키라.”

“...아. 응? 무슨 일이니.”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

자신의 작은 어깨를 감싸 쥔 손 위에 고운 손을 올리는 소녀가 있었다. i-309. 토코샤 아이의 모습을 한 소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저를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앞으로 영원히 같이 있기 위해 잠시 떠나는 거잖아요.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아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에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저도 알고 있어요.”

아이가 아키라의 손을 잡아 내렸다. 이제는 양손으로 그녀의 오른손을 감싸 쥔 상태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겪는 증상, 감각... 저는 두려워요. 잠깐이기는 해도 혼자 있는 것도 역시 무서워요.”

“...아이, 내가─”

“하지만. 아키라와 연구소 밖으로 나와 지내는 동안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

“...”

“더 많은 걸 알고 싶어요. 아키라와 같이. 그러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건 감수하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소녀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연구소 안에서의 짧은 삶만이 전부였을 그녀에게서 의젓함과 배려심이 느껴졌다. 짧은 기간 사회화 교육을 담당하면서 그저 지식으로만 습득했을 감정과 생각을, 지금 아이는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너는 벌써 이렇게 자랐구나. 그녀가 모르는 사이, 아이는 성장하고 있었다.

“아키라와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지금이 너무 좋아요. 앞으로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기뻐요. ...아키가 데려다준 이 세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다녀오세요.”

광활한 세계 속에서 하얀 소녀가 미소지었다. 아키라는 깨달았다. 책임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가져다준 삶이 아니었다. 이건 아이 자신이 선택한 삶이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이 선택한 경이였다.

평범한 미래를 꿈꾸는 사이 세계가 다시 넓어진다. 이제, 현실은 드넓은 우주가 되었다. 온갖 꿈과 별이 흐르는 곳에서 아이는 세상을 알아가는 기쁨을 느낄 수 있겠지. 그리고 그 옆엔... 언제나 자신이 있을 것이다.

“...다녀올게.”

“기다릴게요.”

변함없는 모습으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약속해요. 그러니까 아키라도 조심하세요.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제가 배운 세상은 도망자에게 친절한 곳은 아닌 것 같아서. 아키라는 조심스레 아이의 머리 위로 입을 맞추었다.

잠시 아이를 꼭 안은 채로 가만히 있던 그녀가 아쉬운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금방 올게.

다시 한번 소리 내어 다짐하듯 말한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철로 된 녹슨 문을 열자 눈앞으로 한밤중의 암흑이 들이닥쳤다. 뒤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등 뒤로 들어왔을 때처럼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열린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빛이 훅, 꺼졌다. 곧 사방이 어둠이었다. 칠흑 같은 밤사이로 아키라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빛났다. 이제 약속을 지킬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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