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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해피 케이오스

Guilty Gear Strive - 해피 케이오스 드림 * 드림주 有

몽유기담 by 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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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화창하고, 발걸음은 가볍다.

보도블럭 위를 밟는 숏부츠의 굽 소리가 발랄하기 그지없었다. 어쩐지 모르게 귀에 들어오는 그 소리를 리듬 삼아 하나는 경쾌하게 걸었다. 좋은 날씨, 좋은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먼저 빵집에 가자 갓 구운 향기가 코 끝을 채웠다. 당일 구운 빵이 나오는 두 번째 시간에 맞추어 나온 것이었다. 디지가 원한 종류의 빵을 골라 키스크 가에서 평소 먹는 종류와 양의 빵을 주문하자 언제나처럼 빵집 주인은 오케이 사인을 해 보였다. 소매 구입보다는 납품이란 단어가 어울릴 만큼의 양이다. 일반 가정에서 사흘 먹을 만큼의 양을 매일 주문받고 있는 만큼 빵집 주인의 준비는 만반이었다.

“그럼 이번에도 주문하신 목록대로 댁에 보내드리면 되겠지요?”

“네. 아, 잠깐 기다려주세요.”

그대로 가기엔 맛있어 보이는 빵이 너무 많았다. 실제로 맛있다는 것도 최근 며칠 혀로 확인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콘과 레몬 마들렌 두어 개를 트레이에 넣어 별도로 구매하자 귀여운 종이봉투를 건네받았다. 갓 구워진 빵으로 따뜻한 봉투의 온기에 제 가슴도 포근한 기분에 둘러싸였다. 가게를 나오며 하나는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굳이 이렇게 주문할 필요는 없다. 매일 그렇게 납품하여 주세요, 라고 주문해놓으면 되는 일을 하나는 일부러 자신이 요청해서 심부름을 나오고 있었다.

기분 전환을 하려면 바깥나들이는 필수니까. 그 말에 디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있을 장소를 헤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땐 다른 풍경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요,” 라고 디지는 자신의 경험을 거울삼아 공감의 말을 건네주었다. 부드러운 홍차 빛 눈동자를 보면서 하나는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아도 돼. 난 그렇게 절실하지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기엔 걱정 어린 시선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게 맞긴 한 걸까? 기대 없이 질문을 던지는 하나를 보이지 않는 벽 너머 다른 자신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도 아니고 존재조차도 이루고 있지 않은 무언가다. 이 세계에조차 존재하지 않는 나에게 구경 당하면서, 또 부질없이 허우적대는 몸짓과 콧노래를 구경하면서 하나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가려는 곳은 카페였다. 카페라테를 마실지, 클래식 밀크티를 마실지는 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가서 메뉴판을 본 순간 다른 음료를 주문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는 길에 있는 액세서리 샵에서 하트 안경에 어울리는 귀여운 안경집이나 목걸이 끈이 있는지 윈도 쇼핑을 하기도 하고, 견주의 허락을 받아 산책하는 멍멍이를 쓰다듬기도 했다. 아아, 그 아이 정말 귀여웠지. 크고 털도 복슬복슬하고, 바로 선 귀도 쫑긋한 것이 아주 귀여웠다. 램이 귀여워하는 강아지하고는 또 다른 사랑스러움이다. 하나는 오늘 선택한 루트와 우연에 만족하면서 목적한 카페에 얼굴을 내비쳤다.

“안녕하세요, 메뉴판 좀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메뉴판 여기 있습니다, 손님.”

영업용 미소라 해도 메뉴판을 내미는 점원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원래 이렇게 밝은 성격인 걸까? 아니면 단순히 아직 영업을 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력이 가득한 것뿐인 걸까? 어쨌든 보기 좋은 미소였다. 하나는 마주 웃으면서 메뉴판을 받아들었다.

최근 이 동네에서 돌아본 카페 중에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가게였다. 맛도 그렇지만 도시 안을 구불구불 흐르는 작은 시내가 보이는 위치가 아주 훌륭하다. 걸어서는 반나절은 가야겠으나 다리를 따라 한참 나아가면 교외로 나갈 수도 있고, 시내를 따라 조성된 근린공원을 돌면 멋진 산책 루트가 된다. 가게 앞에 뻗은 도로에서 차를 타고 들어가면 도심지의 번화가로 갈 수도 있다. 하나는 어디로든 길이 이어지는 이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클래식 밀크티 하나 주세요.”

“감사합니다. 드시고 가시나요?”

“아, 아니요. 가져갈게요.”

즉흥적인 대답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만 해도 저 멋 부린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냇물 흐르는 풍경을 감상할 생각이었을 텐데, 입으로는 다른 말을 내뱉어버렸다.

뭐 좋아. 가져가지 뭐. 어디든 가자. 밀크티를 기다리면서 하나는 다른 생각을 했다. 이 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그의 기억과는 많이 다른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자동차들은 좀 더 다른 모양이었는데. 허나 모양과 작동 원리가 조금 달라졌다 해서 주행수단의 기능마저 다른 것은 아니다. 엄밀히는 구분되는 이름이 조금 달라지었을지언정 그것들은 여전히 자동차로 통했다. 지금 그가 그렇듯이.

이삼십 분 전만 해도 계속 앉아있을 예정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지나가는 갖가지 주행수단들의 모양새를 가늠하는 동안 주어진 밀크티를 들고서 하나는 테라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자, 어디로 갈까. 문득 아침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평소처럼 같이 따라 나오려던 신을 두고 나온 일. “에, 어째서!? 나, 뭔가 잘못이라도 했어?”라고 묻는 순진하고 훤칠한 아이를 두고 하나는 자연스럽게 설명하려 애를 썼다.

신이랑 다니는 것도 재미있지만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혼자 돌아다녀 보고 싶네. 항상 신과 함께 다녔으니까 혼자 나가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어느 것 하나 진심이긴 했다. 그래도 혹여 만에 하나, 자신이 신에게 화가 났다거나 싫어져서 떼어놓으려는 게 아니라는 것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까봐 조금 걱정은 했다. 다행히 신은 아쉬운지 팔자 눈썹을 했다가도 “에엑…, 뭐, 하나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하고 금방 싱긋 웃어 보였다. 밝고 꾸밈없는 아이다. 바르고 힘이 넘치는 아이. 하나는 그런 신이 좋았다. 무심코 볼이라도 부벼주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기분대로 하기엔 신은 너무 키가 컸다.

“혼자 쇼핑하는 것보다는 모두와 함께 가는 게 더 즐겁지 않을까요?”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은 사랑스러웠다. 꼽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안다. 꼭 예전처럼, 자신은 엘이 꿈꾸는 ‘이상적인 결혼 생활’을 함께할 대상 목록에조차 오르지 못한다는 것을 먼저 아쉬워해야 할지, 아니면 지금은 낙담하고 있지 않은 것을 먼저 아쉬워해야 할지는 항상 반복되고 있는 고민이다. 마음이 움직일 기력을 잃은 걸까, 무뎌진 걸까, 아니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인 걸까. 유리되고 분리된 또 다른 자신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곱씹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애당초 답을 바라고 던지는 질문도 아니지만은.

어떤 고민이건 멀뚱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아침에 그 자리를 벗어나던 것처럼 하나는 아무 생각 없이 발을 움직였다. 수도답게 잘 깔린 보도블럭을 박차는 굽 소리는 경쾌하다. 아예 어딘가 멀리 나가볼까. 차를 타고 어디든. 여러 방향으로 빠질 수 있는 갈림길인 만큼 도로 위 차는 많았으나 평일 대낮인 덕에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바퀴가 있는 차, 없는 차, 등등 갖가지 차를 보면서 하나는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금방 그 손짓을 알아본 차량이 있었다. 차선을 따라 빠지는 차들 사이로 엔진 소리를 울리며 다가오는 차를 본 하나는 혹시라도 넘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음료의 뚜껑을 단단히 막았다. 차량은 눈에 띄는 만큼이나 순식간에 하나의 앞에 멈춰섰다.

“어디로 가십니까, 손님?”

희한하게 생긴 차량은 열 문짝도 따로 없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하나는 범퍼카에 올라탔던 때처럼 털썩 좌석에 안착했다.

“글쎄요, 어디로 갈까.”

“흐흥, 별난 손님이시네. 그런 식으로 주문해도 괜찮아?”

“당연히 안 괜찮지. 그리고 이 차랑 너만큼 별난 것도 없어.”

배기통인지 엔진인지를 네 개씩 달고 여섯 개 바퀴로 굴러가는 택시라는 건 좀처럼 없다. 아니, 아예 없을 것이다. 이 차도 택시가 아니니까. 그리고 머리에 헤일로를 단 택시 운전자도 아마 세상에 없을 것이다.

“에에, 그래도 멋지잖아?”하고 머리 위로 비죽한 헤일로를 단 운전자가 히죽 웃었다. 오픈카인 덕에 고개를 기우뚱거려도 헤일로가 걸리적거릴 일은 없었다. 하나는 샐쭉한 얼굴로 “퍽이나.”하고 받아쳤다.

“너무하네, 멋져서 탄 게 아니었어?”

“헌팅하러 온 것처럼 말하네.”

“아~ 그것도 그렇지. 뭐, 비슷하지 않아?”

뭐, 헌팅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건 또 그랬다. 어쨌든 요란하고 멋진 차를 타고서 일부러 데리러 와주는 남자친구. 지금도 친구라고 불러도 될지는 복잡한 문제이련만 정작 당사자는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부드럽게 액셀이 밟히자마자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차는 도심지를 벗어났다. 굳이 쥘 필요도 없는 운전대에 손을 올린 채 드라이브를 즐기면서 지금은 케이오스라 불리는 자가 말했다.

“밀크티? 향 좋네.”

“응, 맛도 괜찮아. 내 것밖에 없지만.”

“아~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나 마실 건 따로 있으니까.”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남자가 “흐흥,”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하나는 조심스레 밀크티에 입을 데었다. 뚜껑을 단단히 틀어막는 바람에 온기를 잃는 일 없이 여전히 뜨거웠다. 데일 것 같은 혀로 입술을 핥으면서 하나가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려고?”

“글쎄, 어디로 갈까.”

즐거운 듯이 아까 하나가 했던 말을 똑같이 돌려주며 케이오스는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흔들어보였다. 바람을 가르는 것이 세상 즐겁다는 얼굴로 그가 리듬을 타듯이 말했다.

“목적지 없는 드라이브가 되겠네. 아주 마음에 들어. 일단은 이 도로 따라 쭉 가볼까?”

“따라가면 뭐가 나오는데?”

“바다가 아닐까? 뭐, 중간에 틀어도 되고. 얼마든지 샐 길은 많아.”

즐거운 듯이가 아니라 정말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바다, 바다. 물 냄새가 나고 물소리가 들리는 곳. 내가 한없이 좋아하는 곳. 동시에 수많은 추억이 어렸던 곳이다. 그 개인의 추억, 그와 세상 가장 똑똑한 남자와의 추억, 모두가 녹아 넘실대는 곳. 너무 녹은 나머지 존재조차 사라진 기억과 정보에 목이 메여와 급하게 밀크티를 한 모금 넘겼다. 당연하게 데인 혀 끝이 아려서 하나는 일부러 옆으로 눈을 흘겼다.

“멀리 갈 거라고는 이야기 안 해뒀는데.”

“설마 날 두고 돌아가 버릴 셈이야? 왜 그래, 더 놀자구. 꼬마 아가씨처럼 생겼다고 정말 꼬마인 것도 아니잖아?”

“나이가 아니라 친밀감 형성 및 유지와 걱정과 소통의 문제야. 지금의 네겐 너무 어려우려나?”

“흐흥, 소통 말이지. 언어적 의사소통이 반드시 효율적으로 인간관계와 불안을 조율하는 데 성공하는 것도 아닐 텐데? 상황이나 친밀한 단계에 따라 정직성이 얼마나 수반되어야 할 것인가도 그렇고―”

“아~ 심리 사회학에 대해 늘어놓을 셈이야? 됐어,”

학회와 연구만으로도 지긋지긋해, 하고 뒷말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려는 것을 내심 흠칫하여 끊었다. 케이오스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정말 눈치채지 못했을까? 알 수 없었다. 지금의 그는 인간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라 신경 쓰지 않을 뿐이니까. 그저 그는 바람과 리듬을 타던 그대로 장난스럽게 말을 이어받았다.

“에, 장광설은 싫어?”

“―말보다는 글로 정리된 쪽이 좋아.”

“흐응, 그럼 필담으로 할까? 운치는 있겠네.”

“…아니, 아무리 자동운전이 가능하다지만 그래도 운전대는 잡아줬으면 하니까 말이 좋아.”

“OK. 그럼, 전화기 필요해?”

“얼마든지.”하고 팔을 뻗어 찻잔 받침만 한 크기로 동그랗게 손가락을 젓자 원래 있었던 것처럼 통신마법 단말기가 완성된다. 남들은 관공서를 이용하거나 고액을 주고 통신술자를 부르지 않으면 이용 불가능한 통신마법이 그에게는 애들 장난보다 못하다는 것을 안다. 하나가 다시금 케이오스를 흘겨보자 “응? 안 쓸 거야?” 하고 그가 둥그런 눈으로 시선을 마주쳐왔다. 광기로 수축된 동공이 마안처럼 사람을 사로잡는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 패닉에 빠져버릴 테지. 그 역시 일순 혼돈 속에 팔을 낚아채인 것처럼, 전에 없던 광기 어린 눈으로 변해버린 시선에 그가 알던 시선이 겹쳐 보였다. 이 눈이야. 이 눈이 아니야. 동시에 벽 너머의 자신과 머릿속의 자신이 속삭인다. 엄습해오는 현기증에 몸이 중심을 잃었다. 신체의 균형감각과 시각정보의 불일치로 몰려오는 멀미처럼, 눈앞에서 일치하지 않는 사상에 정신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머리에 닿은 의자 시트의 감각으로 아득해지려는 의식을 애써 잡으며 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쓸래.”

손을 뻗자 통신마법을 유지하고 있는 진이 그의 손가락 끝으로 옮겨왔다. 일반적인 통신술자가 이 마법진의 구축 술식을 본다면 이해를 넘은 구성에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까. 통신을 받아줄 상대는… 뭐, 연왕에게 하면 되겠지. 전문 오퍼레이터가 없어도 본인이 즉각 마법 단말을 쓸 수 있는 천재 법력 술사니까. 드라이브 상대가 케이오스라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 오늘 돌아가지 않는다고 신이 뛰쳐나오는 일은 없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만 지금은 아까 산 스콘과 손에 든 밀크티를 들고서 드라이브를 즐기고 싶은 기분이었다. 당일치기가 될지, 며칠이 될지도 모르는 예상 못 한 일정에 하나는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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