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자의 꿈
쟈밀 바이퍼 드림
아이렌은 본질이 이방인이자 손님이었다. 다른 세계에서 찾아온 손님. 머무는 곳은 있지만 뿌리내리는 곳은 없는 나그네.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든 제 집으로 삼을 수 있으며,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그런 존재.
그래서였을까. 아이렌은 특유의 낯가림에도 불구하고 자주 다른 기숙사에 발을 들이곤 했다. 제게 호의적인 이의 손을 잡고 일곱 개의 기숙사를 드나드는 아이렌은 그야말로 바람과도 같아, 몇 달이 지나자 학생 대부분은 그가 언제 제 기숙사 담화실에서 나타난다 해도 놀라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에는, 당연하게도 쟈밀 또한 포함되어 있었으니.
잠깐의 낮잠 후. 아직 완전히 잠이 깨지 않은 건지 평소보다 느릿한 걸음으로 담화실로 온 그는 카림과 대화하고 있는 아이렌을 발견하고 짧게 탄식했다.
‘언제 왔지?’
아이렌의 방문이 반갑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이제야 알게 된 게 아쉬울 정도지. 다만, 지금은 썩 좋은 때가 아니다.
묘한 표정으로 출입문 앞에 서서 내부를 지그시 보던 쟈밀은 얌전히 카림의 수다를 들어주던 제비꽃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걸 발견했다. ‘아.’ 짧은 한탄을 내뱉은 아이렌은,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쟈밀에게 인사했다.
“쟈밀 선배, 안녕하세요.”
“응? 아, 쟈밀! 일어났구나!”
카림은 아이렌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가, 한발 늦게 쟈밀을 발견하고 그를 반긴다. ‘하아.’ 짧게 한숨 쉰 쟈밀은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홍차는 미지근하고, 과자가 담겨있었던 걸로 추정되는 접시는 부스러기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보아하니, 홍차의 짙지도 옅지도 않은 절묘한 수색(水色)을 보아하니, 이 다과를 준비한 건 카림 본인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 둘 중 한 명이 대령한 거겠지.’ 쟈밀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짐가에서 일하고 있는 1학년 후배들을 떠올렸다. 안 그래도 그 둘은 아이렌과 같은 1학년 A반이니, 먹을 걸 가져다주는 김에 같이 놀기도 했겠지.
제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나를 꽤 정확하게 추리해 낸 쟈밀은 자리 잡고 앉는 대신, 서서 대화를 이어갔다.
“무슨 일로 온 거야, 아이렌?”
“카림 선배가 고향에서 과자를 많이 받았다고, 나눠주겠다고 해서 왔어요.”
“그래?”
확실히. 오늘 아침 엄청난 양의 과자가 도착하긴 했지. 아짐가에서 보낸 짐을 정리한 당사자인 쟈밀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카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카림. 정작 넌 과자가 어디 있나 모르잖아?”
“응! 그래서 쟈밀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 거였다면 그냥 깨워 주지 그랬나. 제가 언제 일어날 줄 알고 저러고 있었던 건지.
일찍 깨어나길 다행이라 생각하는 쟈밀은 가볍게 이마를 짚었다.
“얼마나 줄 건데? 가져올게.”
“아냐! 어디 뒀는지만 알려줘! 내가 가져올게!”
“네가?”
“응! 쟈밀은 그동안 아이렌이랑 놀아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림은 제가 앉았던 자리를 가리키며 물러난다.
‘이거, 설마. 제가 아이렌과 있을 시간을 만들어 주려는 배려인가.’ 속이 훤이 보이는 행동에 눈썹을 까딱인 쟈밀은 잠깐 고민하다가, 이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과자 정도면 그리 무거운 물건도 아니니 카림이 스스로 가져오게 한다고 문제 될 것도 없었고, 자신도 아이렌과 있고 싶긴 했으니까.
“부엌 뒤 창고에 있어. 왼쪽 벽 구석에 쌓아뒀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응! 그럼 다녀올게!”
쟈밀과 아이렌에게 한 번씩 눈짓을 보낸 카림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나간다. 경쾌한 발소리를 따라 눈동자를 굴리던 두 사람은, 더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야 서로를 바라보았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선배.”
“그 정도는 아냐. 잠깐 머리를 비울 겸 잤을 뿐이지.”
쟈밀은 걱정 어린 물음에 대꾸하며, 카림이 앉았던 맞은편 자리가 아닌 상대의 옆자리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팔이 붙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까이 앉은 쟈밀은 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피곤해 보이시는데.”
“잠이 덜 깨서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그래요? 더 잘래요? 무릎 빌려줄게요.”
그건 사양이다. 정신이 약간 몽롱하긴 하지만 몸 상태를 보면 다시 눕는다고 잠이 올 것 같진 않고, 자신도 할 일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언제 누가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공용 공간에서 아이렌의 무릎에 눕고 싶진 않다. 남들 시선은 부끄럽지 않지만, 짓궂게 뒤에서 쑥덕거리는 놈들을 보는 건 싫었으니까.
마른세수로 남아있는 졸음을 떨쳐낸 그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렌과 눈을 마주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만 깜빡이고 있지만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담백한 면상. 고향의 날씨처럼 뜨겁지도 않지만, 깊은 심해처럼 냉랭하지도 않은 미지근한 낯을 가만 들여다보던 쟈밀은 무언가에 홀린 듯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꿈에 네가 나왔어.”
“예?”
“아까. 낮잠 잘 때 말이야.”
아. 딱히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역시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걸 아는 쟈밀은 본인의 돌발행동에 인상을 찌푸렸다가, 곧 미간을 펴고 말을 이어갔다.
“어쩌면 네가 와서 네 꿈을 꾼 걸지도 모르지.”
“하하. 그러면 예지몽 같은 건가요?”
“글쎄다. 현실이랑은 동떨어진 꿈이었으니, 예지는 아니겠지.”
“그래요? 어떤 꿈이었어요?”
안타깝지만, 그것만큼은 말해주기 싫다. 상대의 꿈을 꿨다는 사실을 통보한 것만으로도 민망해졌는데, 제 무의식이 만들어 낸 결과물까지 말하라고? 누군가는 이런 걸 쉽게 토해낼지 몰라도, 자신은 그렇게 개방적인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쉽게 말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아이렌 또한 알고 있었던 걸까.
금방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닫아버린 쟈밀을 본 아이렌은, 팔만 닿아있던 몸을 기울여 은근슬쩍 상대의 품에 기대었다.
“저 정말로 듣고 싶은데. 말해주면 안 돼요?”
안겨있는 몸이 참으로 따뜻하다. 품에서부터 올라오는 희미한 시트러스 향이, 제 코를 간지럽힌다.
은근한 유혹에 소리 없는 한숨을 푹 내쉰 쟈밀은 상대를 밀쳐내지 않고, 목소리를 최대한 줄인 채 입을 열었다. 다른 이들은 들을 수 없겠지만, 품에 안긴 이는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귓속말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음량으로 말이다.
“상당히 황당무계한 설정인데.”
“지금 글 쓰는 사람 앞에서 그런 걱정을 하세요? 제가 외계인이 되어서 아이스크림 괴물이랑 싸우는 내용이라도 전 웃으면서 들을걸요.”
그것참 위로가 되는 말이다. 제 꿈은, 적어도 저 이야기보다는 현실적이었으니까.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소리죽여 키득거리는 아이렌의 몸을 한쪽 팔로 가볍게 안은 쟈밀은, 고해하듯 꿈의 내용을 읊었다.
“……네가 어느 나라의 왕비였는데, 네 남편인 국왕은 너보다 족히 40살쯤 많아 보이는 늙은이였어.”
“제가 왕비였다고요?”
“그래. 내 고향처럼 사방이 모래밭인 나라였는데. 너 말고도 왕비가 열 몇 명쯤 더 있었던가.”
“흐음, 그래서요?”
지극히 현실적인 이라면 여기까지만 들어도 황당하다고 할 텐데, 아무래도 현실보다는 허상에 사는 이 여자는 꿈 이야기가 퍽 재미있는 모양이다.
상대가 순순히 들어주자 더 망설임이 없어진 쟈밀을 조곤조곤 꿈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먼 나라에서 온 약탈자였지. 아마 도적이었던가.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아.”
“꿈은 원래 모호한 거죠. 깨어나면 금방 잊어버리게 되니까요.”
“그런가. 어쨌든, 네가 있는 나라랑 몇 년 정도 전쟁을 했는데…… 결국은 내가 국왕의 목을 베었어.”
그때는 정말 속이 시원했지. 신기루처럼 모호한 꿈이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기억난다. 무엇이 그리 속 시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뭐, 정복자가 제 할 일을 했으니 그런 거 아니었겠나.
꿈속의 피비린내를 곱씹듯 잠깐 말을 멈춘 그는, 어느새 꿈속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 술술 줄거리를 불어버렸다.
“……다른 왕비들과 왕의 자식들은 궁을 버리고 도망쳤지. 내가 자신들을 죽일 거라 확신한 건지, 짐도 다 버려두고 몸만 챙겨 달아났어.”
“그럼 저는요?”
“너는, 죽은 왕의 얼굴을 보러 왔었지. 호위병 한 명만 달랑 데리고 말이야.”
“흐음. 저는 자식도 없었나 보네요.”
“그런 거 같았어.”
꿈속의 아이렌은 현실의 아이렌과 그리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아 보였으니, 자식을 보기엔 어려서 그랬던 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면, 당장 후손을 낳지도 못할 어릴 여자를 왕비로 들인 꿈속 왕이 대단히 쓰레기같이 느껴진다. 쟈밀은 현실엔 있지도 않은 존재에게 강한 경멸을 품은 채, 상황 설명을 계속했다.
“넌……, 네 남편이자 국왕이 목이 날아갔는데도 무덤덤한 표정으로 시체를 보고 있었어. 마치 지금 죽은 사람은 자신이랑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라는 듯 말이야. 오히려 왕의 목을 들고 있는 나를 흥미롭다는 듯 살폈지. 무서워하지도 않고 말이야…….”
“아마 잘생겨서 그랬겠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꿈속의 저도 저잖아요? 그럼 그쪽의 저도 선배 얼굴을 좋아하겠죠.”
아무리 그래도 피를 뒤집어쓰고 칼을 든 침략자를 그렇게 대할 수 있나 싶지만, 아이렌이라면 가능할 거 같기도 하다. 심심하면 제게 잘생겼다는 말을 툭툭 던지지 않나.
대답을 듣고 생각해보자니, 확실히 꿈속의 아이렌도 자신을 평소처럼 바라봤던 거 같다. 제 고향의 복식과 비슷한 옷을 입은 채, 넋이 나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후배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온 쟈밀은 품 안의 몸을 더 꽉 껴안았다.
“나는 비어있는 왕좌를 차지했고……. 너에게 청혼했지. 너는 금방 답을 하진 않았지만, 자결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굳이 궁에 남아서 내 옆에 머물렀어.”
“과연, 현명하게 굴었네요.”
“그렇지. 죽은 왕을 애도하는 기간에는 계속 침묵한 너는 결국 내 청혼을 받았고, 난 혼례복을 입은 너를…….”
막힘없이 술술 말하던 쟈밀은 이내 입을 닫아버렸다.
부자연스럽게 끊긴 대화에 아이렌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옷깃을 잡아당겼다.
“선배? 그다음은요?”
“없어.”
“예?”
“꿈에서 깼거든. 아쉽게도 말이지.”
아무리 꿈이라지만 첫날밤이 흐지부지되다니.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리고 그걸 꿈속 상대였던 이에게 말하는 건 더욱 민망한 일이고.
막상 모든 걸 말하고 나자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든 쟈밀은 비어있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역시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색한 침묵 속. 먼저 입을 연 건 아이렌이었다.
“왕비가 아닌 저는 싫어요?”
“뭐?”
“비록 신분은 다르지만, 저는 여기 있잖아요?”
그거야, 그렇긴 하지. 하지만 제가 입을 다문 건 아쉬워서라기보단, 그냥 민망해서 그런 거다.
쟈밀은 뭐라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아이렌의 몸을 감은 팔을 거두었다. 그러나, 아이렌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의 전 별로예요? 예?”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럼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당연한 걸 굳이 말해야 하나? 네가 좋으니까, 그런 꿈도 꾼 거겠지. 좋아하지도 않았으면 꿈에서도 청혼하겠어?”
‘덜그럭.’ 두 사람의 대화를 끊은 건 출입문 쪽에서 들린 소음이었다.
낯선 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건 담화실에서 노닥거리기 위해 온 기숙사생들이었다.
“아, 음. 저희는 나가 있겠습니다. 네.”
다른 건 몰라도 쟈밀이 무어라 했는지는 들은 걸까. 안 그래도 딱 붙어있는 두 사람을 보고 멈칫거리던 기숙사생들은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두고 보자.’ 방금 나간 이들의 얼굴을 똑똑히 머릿속에 새겨 둔 쟈밀은 한숨을 푹 내쉰 후 품 안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너, 과자 받고 바로 돌아갈 거냐.”
“예? 음, 아마도요.”
“……바쁜가?”
“아뇨. 왜요?”
“그럼 내 방으로 올래?”
‘흐음.’ 구체적인 계획 없는 권유임에도 꽤 진지하게 고민하던 아이렌은 쟈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예.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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