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장대비
러기 붓치 드림
속담이라는 건 지역의 색이 강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나라마다 비슷한 의미의 속담은 있을지언정 완전히 똑같은 속담이 없는 것도, 분명 말이란 문화의 주축이자 지역을 묶는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이 세계에는 비에 쫄딱 젖은 사람을 뭐라고 부르려나.’
제 고향에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라고 말하는데, 여기도 아마 비슷한 말이 있지 않으려나. 어쩌면, 완전히 똑같은 말로 쓸지도 모르지. 쥐는 어지간히 오지가 아닌 이상 어디든 살지 않던가. 시골부터 도시, 더운 곳부터 추운 곳까지. 전부 말이다.
주르륵. 아이렌은 조금만 힘을 주어 비틀어도 물이 쏟아지는 치마를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어찌 되든 좋은 이야기들만을 떠올렸다.
“에취!”
그 와중, 몸이 식으니 바로 재채기가 나오는 게 황당하다. 시원하게 기침을 토해낸 그는 간질간질한 코를 손등으로 문질러 잠재웠다.
분명 기숙사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몇 방울만 떨어지던 비가,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지며 장대비로 변할 줄이야. 이럴 거였다면 우산을 챙겨 나왔을 텐데, 이놈의 날씨는 어쩜 이렇게 변덕스러울까.
‘이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는데.’
그래도 목적지가 샘의 가게인 건 다행이다. 돈이 좀 아깝긴 하지만, 살 걸 사고 우산까지 산 후 돌아가면 될 테니까. 물론 이렇게 젖어놓고 굳이 우산을 써야 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물건까지 젖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얼른 돌아가서 씻어야지.’
어차피 마법도 못 쓰는 제가 완전히 뽀송뽀송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가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 아이렌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최대한 물기를 제거한 후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서 오세……. 어라, 아이렌 군?”
가게 안에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과장된 말투로 자신을 반기는 샘이 아닌, 낡은 앞치마를 두른 채 물건을 정리하는 러기였다. 아이렌은 젖어서 자꾸 이마에 붙는 앞머리를 대충 치우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러기 선배. 아르바이트 중이세요?”
“그렇죠, 뭐. 그런데 꼴이 왜 그럼까? 우산은?”
“없어요. 제가 나올 때까지는 이런 장대비는 오지 않았거든요.”
“아하.”
확실히. 비가 심하게 내리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지. 창 너머로 날씨를 살피고 있었던 러기는 온몸이 쫄딱 젖은 아이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대로 밖에 보내면 안 될 거 같은데.’
물에 젖은 피부는 평소보다 더 창백해 보이고, 젖어서 보온 기능을 잃은 옷은 자꾸만 몸과 밀착해 실루엣을 뚜렷하게 만든다. 게다가 자꾸 코를 들썩이는 걸 봐선, 재채기나 기침이 나올 정도로 체온이 내려갔다는 뜻이겠지.
솔직히 다른 학생이라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든 말든 자신은 일만 하면 그만이고, 오히려 옷이든 우산이든 팔아보려고 했겠지만……. 상대는 아이렌이지 않나.
딱히 신사같이 굴 생각은 없어도 호감이 있는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 정도는 있는 러기는 제가 벗어둔 교복 재킷을 꺼내주었다.
“아이렌 군, 이거 입으세여.”
“예?”
“감기 걸리면 안 되잖슴까? 나중에 아르바이트 마칠 시간 즈음, 돌려주러 오세여.”
이러면 나중에 볼 구실도 생기고, 점수도 딸 수 있겠지. 러기는 자신의 완벽한 계획에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얼떨결에 재킷을 받아 든 아이렌은 잠깐 망설이더니,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이러면 선배 옷도 젖잖아요. 저 이미 와이셔츠도 젖어서, 입으면 축축해질 텐데.”
“괜찮슴다. 비를 직접 맞은 것만큼 젖진 않을 테고, 조금 젖은 건 말리면 되죠.”
“으음.”
체면도 추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어지는 걸까. 고민 끝 결국 재킷을 챙긴 아이렌은 젖은 제 재킷을 러기에게 내밀었다.
“그럼, 담보 개념으로 제 옷도 맡겨 놓을게요. 어때요?”
“예? 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좋을 대로 하세여.”
“네. 그럼, 이온 음료 두 병 주실래요? 아, 우산도요.”
“알겠슴다, 잠시만여!”
러기는 아이렌이 주문한 물건을 가져다주었고, 아이렌은 계산을 마친 후 물건을 챙겨 나가버린다. 물론, 밖으로 나서기 전 러기의 옷을 걸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 입을게요, 선배.”
예의 바르게 인사 후 떠나가는 발걸음은 다급했다. 아마 얼른 돌아가 따뜻한 물로 씻으려고 그러는 거겠지. 창 밖에 멀어져가는 새까만 실루엣을 바라보던 러기는 다시 가게를 정리하려다가, 아이렌이 두고 간 젖은 재킷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향수 냄새.’
비에 젖어서 그런가. 옅은 머스크향이 비의 냄새와 섞여 확 풍겨온다.
마치 상대가 옆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선명한 체취에 어쩐지 열이 오른 러기는 눈을 꾹 감았다.
쏟아지는 장대비 소리. 아이렌의 체취. 습하지만 덥지는 않은 공기. 모든 것이 꽤 근사하다.
‘오늘 여기서 아르바이트하길 잘했네.’
매일 이런 행운이 따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쫄딱 젖은 아이렌에겐 미안하지만, 러기는 오늘 이 사건이 마치 선물처럼 느껴져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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