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생일 연성

낭만주의적 타임머신

루크 헌트 드림

* 23년도 루크 생일 연성

* 우정 출현 오르토. 그런데 오르토랑 대화가 더 긴 것 같기도...

“아이렌 씨, 뭐 하고 있어?”

 

사각사각.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부름을 듣고 멈추자, 텅 빈 동아리실에 울려 퍼지던 작은 소음도 사라진다.

색연필로 종이와 씨름 중이던 아이렌은 귀에 끼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가까이 다가온 이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부른 건 동급생이자 같은 동아리 부원인 오르토 슈라우드였다.

 

“오르토. 어쩐 일이야? 오늘은 동아리 활동 없는 날이잖아.”

“잠깐 확인해 둘 게 있어서 왔어! 아이렌 씨는?”

“그냥 할 일 중이었어. 혼자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없을까 해서 찾아보다가, 역시 여기가 제일 좋은 거 같아서. 기숙사로 가면 그림이랑 고스트들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거든.”

“아하.”

 

확실히, 이런 일이라면 도서관에서 할 수는 없을 터. 오르토는 아이렌이 열중하고 있던 할 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요 며칠, 갑자기 컬러링북을 사서 쉬는 시간마다 열심히 색칠하더니. 그건 다 지금을 위한 연습이었던 걸까?

아이렌은 직접 그린 걸로 추정되는 밑그림 위에 색연필로 색을 입히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숲의 풍경 속, 폼피오레 기숙사 옷을 입은 누군가의 뒷모습. 쓰고 있는 모자나 헤어 스타일을 보아하니, 상대는 분명 폼피오레의 부사감이 틀림없었다.

 

“이건?”

“루크 선배 생일 선물이야.”

“루크 헌트 씨의?”

“응. 한 일주일 남았나? 곧 생일이시니까.”

 

멋쩍게 웃으며 답한 아이렌은 손을 쉬게 할 수 없는지, 나무의 흰 부분을 녹색으로 채우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뭘 드릴까 고민을 좀 해봤는데, 그 선배라면 이런 것도 좋아할 것 같아서.”

“확실히, 루크 씨는 예술에 관심이 많으니까! 아이렌 씨의 대본에도 관심이 많아 보였고.”

“그렇지.”

 

책상 위에 참고자료를 두고 색칠하는 거라 그런 걸까. 아니면 컬러링북에 색칠하며 연습을 많이 해두어서 그런 걸까. 아이렌의 손놀림은 꽤 거침없었다.

빠르게 나무에 색을 입혀주는 아이렌과 그림 속 배경이 된 숲의 모습을 찍어 둔 사진을 번갈아 본 오르토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렌 씨, 이거 언제부터 그린 거야?”

“음. 틈틈이 작업하긴 했는데 이제 3일째인가.”

“3일? 손이 빠르구나!”

“그런가? 오히려 이것저것 고치느라 이제야 겨우 채색하고 있는 건데.”

 

누군가가 작업 중 관심을 보이는 건 부끄러운지, 아이렌은 평소보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제나 모든 일에 의연하게, 혹은 의연한 척이라도 하려 하는 아이렌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데이터에 없는 새로운 상황이란 얼마나 흥미로운가.

오르토는 더욱 호기심이 생겨, 이번엔 아예 작품에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저기. 하나 물어봐도 돼?”

“물론이지. 왜 그래?”

“루크 씨를 뒷모습으로 그린 이유가 있을까? 보통은 대상의 모습이 잘 보이게 그리는 게 정석이 아닐까 해서.”

 

충분히 궁금할 만한 점을 물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린 사람에겐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걸까.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춘 아이렌이 걱정스레 반문했다.

 

“혹시 이상해?”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래. 그림 자체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걸?”

“그래? 다행이네.”

 

평소라면 정말 그렇냐고 한 번쯤 더 물어봤을 아이렌이었지만, 이번엔 웬일로 순순히 안심하였다. 휴머노이드인 오르토라면 냉정한 판단을 해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용하던 녹색 색연필을 놓고 나무껍질과 같은 짙은 갈색 색연필을 새로 꺼내든 아이렌은 가지 부분을 칠하며 답했다.

 

“사람은 나이가 많이 들면 체형도 조금 변하기 마련이지만, 웬만하면 기본 골격은 형태가 오래 가잖아? 오히려 얼굴이 몸보다 더 빨리 변하니까. 주름이 생기거나 젖살이 빠지거나 하는 식으로.”

“음, 그렇지.”

“그래서 뒷모습으로 그렸어. 그림 속 루크 선배가 몇 살인지 느껴지지 않게.”

 

아직 색칠되지 않아 흑백의 선으로만 존재하는 그림 속 루크를 힐끔 쳐다본 아이렌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건 초상화가 아니니까 굳이 얼굴을 그릴 필욘 없다고 생각했어. 보실 때마다 이 시절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언제든 학교 뒤 숲에 서 있는 기분을 느끼실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무엇보다 이렇게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면 볼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것도 있고.”

 

과연. 사실을 묘사할 거라면 사진을 찍는 게 더 효율적일 테지만, 그 이상의 것을 담으려면 펜을 드는 게 낫다는 것인가. 실로 낭만주의적인 그림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표정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종이 속 뒷모습을 보던 오르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활을 들고 돌아서 있는 그림 속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저 멀리 사냥감을 바라보고 있을까. 아니면 눈동자만 아래로 내리깔아 활의 상태를 살피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의 자신처럼 눈을 감고 새벽의 숲을 전신으로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상상을 한 오르토는 어쩐지 아이렌이 심어둔 모호함의 의도를 알 것 같아,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럼 이 그림은 종이로 된 타임머신인 거네.”

“그 표현 멋있네. 작품명으로 삼을까?”

“정말? 마음에 들면 사용해도 좋아!”

“고마워, 나중에 취소하기 없기야?”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보며 소리죽여 웃었다.


 

‘괜히 까불었나.’

 

12월 2일. 루크의 생일 당일.

아침 일찍 폼피오레 기숙사로 온 아이렌은 품에 안은 짐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제 손바닥의 네 배 정도 되는 크기의 그림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막상 액자에 끼워서 포장해 놓으니 영 작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프로 화가도 아닌 제가 어쩌자고 이 정도 크기의 그림을 그린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아이렌은 생일파티장으로 가지도 못하고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망설이다가. 극도의 스트레스에 벽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냥 냄비 받침대로 써달라고 할까.”

“그건 냄비 받침으로 쓰기엔 좀 큰 것 같구나, 몽 르나르.”

“으아아악!”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꾸밈없는 비명을 지른 아이렌이 급히 뒤를 돌아본다.

발소리도 없이 다가온 사람은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얄궂은 얼굴로 웃고 있는 루크는 식겁한 상대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아이렌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단다.”

“그럼 기척 좀 내주시지 그랬어요.”

“이런, 미안하구나. 후후.”

 

간 떨어지게 놀란 사람의 푸념치고는 꽤 얌전하다. 루크는 은근슬쩍 뒤로 물러서려는 아이렌에 맞춰 한 발짝 더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네가 기숙사에 들어오는 걸 아까 보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아 직접 찾으러 왔단다.”

“절 봤었다고요?”

“응. 사실 네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거든.”

 

제 마음을 숨기지 않는 루크는 아이렌의 품속에 있는 크고 납작한 직사각형의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건 내 생일 선물이니?”

 

아이렌은 소리 내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이 와중에도 선물 받은 이의 반응이 걱정되는지, 아이렌은 곧바로 선물을 건네지는 않았다.

내용물이 궁금한 루크는 괜히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언제 줄 거니?”

“그, 지금 가져가세요.”

“후후. 그래. 아이렌 군은 뭘 준비해 준 걸까? 기대 되구나!”

 

사실 루크 정도 되는 사람이면 이미 선물의 대략적인 정체는 파악했을 터였다. 예술에 관심이 많은 그니까, 포장된 액자 같은 건 심심치 않게 봤지 않았겠나. 다만 그 안에 든 내용물이 사진인지 그림인지, 무엇을 담은 작품인지 알 수 없을 뿐이었지.

아이렌은 눈을 가늘게 뜨고 히죽 웃는 루크가 포장 끈을 푸는 걸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여기서 풀어보실 거예요?”

“이런, 안 되는 거니?”

“아뇨.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흐음.”

 

이렇게나 긴장하다니. 대체 내용물이 뭐길래.

궁금증도 흥미로움도 배로 커진 루크는 얼른 포장을 풀어보았다.

얇은 한 겹짜리 포장을 벗기자 드러난 것은, 무늬가 없는 깔끔한 검은색 액자 속에 담긴 아이렌의 그림이었다.

선물을 확인한 루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바닥만 보고 있는 아이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생일 축하드려요. 루크 선배.”

 

차마 반응을 마주하기 두려운 걸까. 축하의 말을 건네는 순간조차도 아이렌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몇 초 정도의 침묵 후. 액자 가장자리만 만지작거리던 루크가 첫 마디를 떼었다.

 

“직접 그린 거니?”

 

‘아, 이거 망했나?’ 뭐든 즉각적으로 극찬하는 루크가 대뜸 이런 것부터 물어보다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솟구친다.

순식간에 등골이 서늘해진 아이렌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예.”

“얼마나 걸렸니?”

“구상부터 마무리까지 다 합하면 일주일 정도? 그림 크기가 작아서 그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예의상 칭찬 몇 마디 해주고 끝낼 사람이지, 이렇게 자세하게 묻진 않는데. 어쩌면 생각보단 나쁘지 않은 건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어 상대 표정을 볼 수 없는 아이렌은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고 알아서 상상의 지옥으로 굴러떨어지고 있는 그를 멈춰준 것은, 갑작스럽게 온몸으로 아이렌을 끌어안아 주는 루크였지.

 

“선배?”

 

얼떨결에 상대 품에 갇힌 아이렌은 그제야 루크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꼭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루크는 두 팔에 힘을 꽉 주며 속삭였다.

 

“고마워, 아이렌 군. 네 덕분에 또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됐구나.”

“예?”

“너무 기쁘면 말이 안 나온다고 하던데, 그게 뭔지 비로소 제대로 알겠어.”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상대의 극찬에 긴장이 풀린 아이렌은 허탈하게 웃었다. 사서 걱정하는 성격이라 몇 초 동안 의도치 않게 고생하긴 했지만, 이렇게 상대가 기뻐하는 걸 보니 그 짧고 강렬한 고통도 금방 잊게 되었다.

 

“마음에 드신다면 다행이에요.”

“마음에 든다? 오, 지금 내 기분은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없단다!”

 

아이렌과 함께 끌어안은 그림을 제대로 고쳐 든 루카는 마치 전문 전시해설자처럼 유려한 말솜씨로 그림을 칭찬했다.

 

“눈부시다기엔 여리고, 어렴풋하다기엔 반짝이는 새벽의 숲 특유의 밝기. 배경을 지나치게 죽이지 않으면서도 내 모습에 시선이 가게 만드는 구도. 산들바람이 느껴지는 초목과 머리카락, 옷자락의 움직임까지! 분명 이건 상상화인데도, 나는 이곳에 존재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란다.”

 

누군가가 들으면 무슨 세계 거장의 미술 작품이라도 본 줄 알 듯한 감상이다. 이 와중 무서운 점은, 루크의 언행을 보면 이건 띄워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상인 걸 모를 수 없다는 거였지.

어느새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빨개진 아이렌은 열이 오른 얼굴에 마른세수했다.

 

“아마추어의 작품에 이렇게까지 극찬을 해주니 부끄럽네요.”

“전문성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단다. 네가 나에게 그려준 그림이라는 게 중요하지.”

 

싱글벙글 웃으며 그림을 매만지고 응시하는 루크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그렇구나, 아이렌 군에게 나는 이런 이미지인가. 후후.”

 

들릴 듯 말 듯 그런 말을 덧붙인 루크는 소중하게 액자를 끌어안았다.

 

“이건 가보로 삼도록 하겠어. 내 무덤까지 가지고 가도록 할까.”

“정말, 칭찬 솜씨 하나는 세계 제일이시라니까요.”

“이런! 나는 진심이란다, 아이렌 군.”

 

그게 문제인 건데. 루크 헌트라는 남자는 정말로 제 소장품이랑 같이 묻히려고 할 거 같아서 문제인 건데.

아이렌은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인형 껴안듯 제 그림을 품에 가두고 웃는 루크를 향해 마주 웃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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