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설온달]형체 없는 그리움이 닥치는 밤이면

제1회 드림 소설 합작 참여작

합작 링크 :: https://dreamnovel.creatorlink.net/


설유에게는 보름달이 뜨는 밤마다 코를 훌쩍이는 버릇이 있다. 온달이 그 사실을 알아챈 것은 아발론 상공에 그의 이름과 같은 형상의 달이 뜬 지 정확히 세 번째가 되던 밤이었다.

 

“이곳의 달도, 내가 아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군.”

 

둥글게 꽉 찬 달이라는 의미의 이름, 온달. 그는 자신의 이름에 깃든 의미를 퍽 마음에 들어 하여, 자신의 동료들에게 몇 번이고 그 유래를 설명하곤 했다.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보름달을 올려다볼 적마다, 꼭 그렇게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듯이. 그 성미는 모든 일과를 마치고 제게 배정된 방 하나에 들어앉아 홀로 창밖을 바라볼 때조차 꺾이지 않아서, 두 눈에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채로 자신에게 저 달과 같은 이름이 과연 어울리는가 어울리지 않는가 따위를 의미 없이 헤아리기도 했다. 무상한 의문은 언제나 같은 결론을 내고 사그라든다. 그저 제가 걸어온 모든 길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보름달 아래 밝은 빛에 내려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삶을 살아왔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아발론이라는 생소한 공간에서 죽음을 뛰어넘어 두 번째 삶이라는 비상식적인 시간을 누리게 된 남자의 본질은 그토록 단단했다.

 

온달이 그렇게 상념에 매듭을 짓고 침구를 정리하던 첫째 보름, 그는 옆방에서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방에서 바로 옆이라 함은 설유가 머무는 공간이었다. 온달이 알기로 두 사람의 방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침대가 맞붙은 구조였으므로, 그는 그 소리가 감기 기운에 앓는 소리라 여기고 이부자리에 누웠다. 그리고는 괜히 벽 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한참이나 이어지는 소리를 귀담아듣다 끝내 잠을 설치고 말았다. 감기에 효과가 좋다는 고향의 민간요법을 떠올리고 홀로 정리하다 퀭한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던가. 머릿속으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온달로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음날 맨손바닥을 얹어 살핀 설유의 이마는 여느 때처럼 미지근하기만 했다.

 

온달이 훈련에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고 무거운 눈꺼풀에 저항하지 않던 둘째 보름, 그는 제 눈에 들어차는 밝은 달빛에 낯익은 훌쩍임이 어김없이 섞여 들어온다는 걸 알았다. 작게 훌쩍이다가 길지도 짧지도 않은 간격을 두고 따라붙는 물기 어린 소리. 지난달과 같은 방향에서, 같은 박자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누가 뭐래도 설유의 것이 틀림없었다. 또 감기인가, 아니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벽을 두어 번 두드리자 그대로 소리는 끊기고 말았다. 온달은 다시금 찾아온 적막 아래 까마득하게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고향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열병을 앓는 것도 아닌데 괜히 코를 훌쩍이는 버릇을 지닌 아해들이 있었지. 설유는 아해가 아니었지만, 제가 한눈을 판 사이에 사고를 칠까 싶어 눈을 뗄 수 없다는 점만큼은 꼭 같았다. 내일 조식 때 그다지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말해두도록 할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끊긴 의식 끄트머리에는 이불을 한 꺼풀 덮은 듯 먹먹한 소리가 따라붙었더랬다. 다음 날 아침의 설유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아주 작은 훌쩍임이.

 

마침내 셋째 보름, 온달이 그 훌쩍임에 의문을 품은 것은 그 소리 뒤에 잇따르는 흐느낌 탓이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감기 기운에 앓는 것도, 아해 때 들인 나쁜 버릇도 아니라면 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설유가 울고 있다. 그것도 보름날마다 빠짐없이.

 

온달에게 보름날은 평소보다 각별한 날이었다. 보통의 날보다 조금 더 들뜨고, 조금 덜 예민하고, 또 유독 고향이 그리워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보편보다 야릇한 그런 날. 그렇기 때문에 온달은 설유가 그런 날마다 울곤 한다는 사실이 거북했다. 사무치게 갑갑했다. 이왕이면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매달의 만월을 올려다보았으면 했다. 마치 그 달에 자신을 투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름달을 맞는 설유의 태도가 곧 제게 허락하는 마음의 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온달은 그러한 종류의 잡념을 홀로 곱씹는 성정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몸을 일으키고 곧장 옆방으로 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설유, 거기 있겠지.”

 

문을 두어 번 두드리고 방의 주인을 불러낸다. 언제 흐느꼈냐는 듯 잠잠해진 안쪽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온달은 확신한다. 설유에 관해서라면 틀리는 법이 없는 그였기에, 벽 너머에서 들려왔던 소리는 허깨비에 홀린 환청 따위가 아님을 자신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법 긴 유예를 두고 답이 돌아온다. “……무슨 일이에요?” 조금은 잠긴 듯 고저 없이 낮은 목소리였다.

 

“들어가도 되겠나?”

“지금은 좀, ……곤란한데.”

 

웅얼거리는 음성은 멀고, 또 힘이 없었다. 신경을 끌래야 끌 수 없는 목소리. 그럼에도 명확한 거절의 답을 돌려받았으니 온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반겨주는 이 하나 없이 굳게 닫힌 문 앞에서 팔짱을 낀 채 고목처럼 버텨 섰다. 밤이 늦은 시각인 만큼 그 모습을 보며 수상쩍게 여길 사람이 없다는 것만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말인즉, 온달에게는 자신의 방으로 순순히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내가 검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고향에서 자주 쓰던 표현을 곱씹으며 복도의 벽에 기댄 지 몇 분이 지났을까, 온달의 귓가에 다시금 물기 어린 소리가 파고들었다. 뒤이어 급하게 숨을 들이켜듯 헐떡이는 소리 역시 선명하게 들려왔다. 혹여 제 소리를 듣고 또다시 누군가 찾아올까 의식하는 그 소리는, 역설적으로 온달이 문을 열어젖힐 충분한 명분이 되어주었다. 물러날 시늉조차 없이, 그는 통보하는 조로 입을 열며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들어가지.”

 

열린 문틈으로 공기가 말려들어 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 속에는 침대 위에 있을 것이 분명한 설유가 무어라고 불만을 토로하는 음성도 섞였으리라. 하지만 두 사람이 옆방을 나란히 배정받을 적, 설유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라면 얼마든지 출입해도 좋다는 허락을 맡아놓은 바 있었으므로. 온달은 그녀 특유의 은은한 향으로 가득 찬 방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걸음마다 가벼이 나부끼는 옷깃에 베여 쉬이 사그라드는 향은 설유를 퍽 닮아 있었다. 미세한 바람결에도 흔적 하나 없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점이 꼭 그랬다.

 

그러나 짙게 깔린 적막은 향과 어울리지 않게 무겁다. 분명 난방이 된 공간임에도 서늘하게만 느껴지는 그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온달이 하, 짧고 굵은 숨을 토해냈다. 희뿌연 입김이 눈앞에 서린 것만 같았다.

 

“설유.”

“……응.”

 

목소리는 여전히 멀다. 마치 입구가 막힌 굴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온달은 그것으로부터 고향의 아해들이 곧잘 하던 놀이를 떠올려내었다. 볕이 좋은 날 마당에 널찍한 간격으로 박아 넣은 몇 쌍의 바지랑대와, 그 사이의 줄에 널어놓아 바람에 나부끼는 이불. 하이얀 천을 망토처럼 감싸 두르며 히히덕거리던 작은 입매. 잘 마른 햇살 냄새를 깨끗한 탁자 위에 덮어 작은 은신처를 마련하던 웃음소리와 그 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공간에서 울리는 목소리 따위를.

 

“얼굴을 보이지 않아도 괜찮으니,”

“…….”

“곁에 있겠다.”

 

이마저도 싫다면 지금 확실하게 대답해. 나는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모르거든. 추위에 꺾이는 법 없는 곧은 목소리가 차디찬 적막을 일그러트린다. 그의 키만큼이나 큰 보폭의 파문이 하나, 둘, 셋. 멈춰 세운 걸음 끝에는 아무런 대꾸도 따라붙지 않았다. 그대로 이어진 발소리가 열을 채우기도 전, 작은 몸뚱이가 이불 속에 웅크린 침대까지 다다른다. 그 위로 드리운 제 그림자를 잠시 바라보던 온달은 이내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침대 모서리 한 켠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불 속 체온이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허락한 것으로 알지.”

“……처음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번에는 대꾸하지 않았잖나.”

 

처소에 들이기는 싫은데 곁에 있는 건 또 괜찮다니, 하여간 장단 맞춰주기도 까다로운 녀석 같으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의 허리는 올곧았다. 천 사이의 아주 작은 틈으로 익숙한 뒷모습을 엿보던 설유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그에게 등을 기대고 무릎을 세워 앉았다. 평소와 달리 조금은 높은 듯한 체온이 간지럽게 들러붙는다. 그 순간 온달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제게 닿아오는 면적이 좁아 아쉽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왜 온 거예요?”

“달이 곱길래.”

“……달?”

 

온달의 여상스러운 목소리에 설유는 고개를 살짝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등을 맞댄 두 사람의 옆모습을, 달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둥근 형상을 따라 빼곡히 들어찬 색은 새하얀 상아색. 그토록 환한 달빛을 보고 있자니 괜히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어 설유가 입을 다물자, 온달이 한숨처럼 느지막이 입을 연다.

 

“그래. 뭐, 굳이 이유를 하나 더 붙이자면…… 달이 이렇게나 고운데 어디 사는 누가 우는 소리를 내기에 친히 와봤지.”

 

적막을 부수는 목소리는 단단하고 살가우면서도, 묘하게 장난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분명 입꼬리를 올렸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설유는 온달에게 기대어 앉은 등에 무게를 실었다. 허리를 곧추세우자 체온을 나누는 면적이 조금 더 넓어졌다. 그 변화에 온달의 입꼬리가 느슨해졌다는 사실은 설유에게 닿지 못했다.

 

“별건 아니고, 그냥…… 보름달만 뜨면 심란해져서 그래요.”

“청승맞게 혼자 울 정도로 말이냐?”

“……그게 뭐 어때서.”

“섭해서 하는 말이다. 날 불렀다면 하소연 정도는 얼마든지 들어줬을 텐데.”

 

말했잖나, 나는 네 사람이라고. 여전히 장난스러운 목소리다. 하지만 그 속의 단단한 다정과 일말의 서운함을, 설유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 언젠가 온달은 제게 그리 말했다. 나는 네 사람이라고, 언제까지고 네 편에 서겠다고. ‘나’를 이루고 감싸던 모든 것을 잃고 떨어진 세상에서,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기둥이 되어주겠다고. 지금 이 순간, 그의 등이 자신을 지탱해 주듯이.

 

설유의 입술이 작게 달싹인다. “그럼, 들어줄래요?”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말주변도 없고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을 정확히 설명할 자신도 없어서, 분명 횡설수설할 거고 듣는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들어줄 거야? 말을 마치고 두 눈을 꾹 감았다. 자신의 이런 요구가 꼭,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지 않은가.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항상 이랬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응석을 부리고 싶어서, 동시에 그런 자신을 받아줄 ‘누군가’가 그리워서. 설유에게는 보름달을 달갑게 맞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손이 닿는다.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선이 굵은 아귀, 추위에 떨 때면 어김없이 제 손을 감싸 쥐고 놓아주지 않던 너른 온기. 설유는 그 체온에 이끌려 고개를 내렸다. 여전히 등 돌린 온달의 손이 침대를 짚은 제 손등을 덮고 있었다. 뜨거워, 그렇게 생각하던 설유는 이내 그의 손이 더운 게 아닌 제 손이 얼음장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 추위를 인지하니 자연스레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게 다 온달 때문이야. 당신이 손을 잡아주지만 않았어도 춥다는 걸 의식하지는 않았을 텐데. 당신이 등을 내어주지만 않았어도, 당신이 내 사람을 자처하지만 않았어도. 나 자신이 처음부터 그걸 바라고 있었다는 걸 의식하지는 못했을 텐데…….

 

“들어주마, 기꺼이.”

 

단호하도록 강직한 목소리에 이끌리듯 설유가 몸을 움직였다. 여전히 온달에게 한쪽 손을 내어준 채로. 그대로 빙글 돌아간 작은 몸은 제 옆모습에 간신히 걸치던 달빛을 정면에서 받아냈다. 한쪽 옆구리에서부터 팔과 어깨, 그리고 뺨까지. 달빛에서 멀어진 살갗은 또 다른 달의 등에 기대었다. 그 등은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굽거나 휘청이는 법이 없었다.

 

“……보름달을 보다 보면, 문득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뭘 그리워하는지를 몰라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막연한 그리움에 목소리가 메인다. 온달은 얼마 가지 않아 끊긴 음성을 채근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손을 잠시 풀어주었다가, 다시금 꾹 감싸 쥐고 말없이 체온을 나누어줄 뿐이었다. 어느새 미지근해진 설유의 손은 미동조차 없이 가만히 침대의 요에 누웠다가, 이내 익숙한 잡음과 함께 작게 꼼질대었다. 킁, 코를 훌쩍이는 소리. 그리고 뒤이어 “온달은,” 하며 운을 떼는, 물기에 먹힌 듯 먹먹한 소리. 영락없이 울음을 참고 있는 그 음성에 온달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았다. 정확히는, 뒤를 돌고자 했다. 그러나 그리하면 제 등에 기댄 설유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릴까, 추락할까 싶은 걱정이 앞선 탓에 그러지 못했다. 얼굴 마주하는 것도 허락지 않고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가는 목소리가 얄궂을 지경이었다.

 

“이름은커녕 사람인지 장소인지조차 모르는 무언가가 그리운 기분을, 온달은 알아요? 사람이라면 눈동자는 어떤 색이고 머리 모양은 어떻고 눈동자는 어떤 색인지, 어떤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는지,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어땠는지. 장소라면 분위기는 어떻고 창밖의 풍경은 어땠는지, 어떤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서 뭘 했는지, 그 사람들과 나는 어떤 관계였는지. 내가 사랑했을 게 분명한데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그리워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면 가르쳐 줘, ……응?”

 

꾸욱 억눌렀던 눈물이 마지막 음절과 함께 흘러내리는 소리가 났다. 제 속내를 공유하며 상대에게 매달리는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설유가 자신의 무게를 오롯이 사내의 등에 내맡긴 바로 그 순간, 온달은 더 견디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아, 자그마한 입술에서 터져 나온 외마디를 제 옆구리께에 끌어다 고정하는 일련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정면에서 마주한 달빛이 밝다. 제 방에서 올려다본 것보다도 환한 은색 빛줄기를 잠시 바라보던 온달은 찬찬히 고개를 내렸다. 달이 밝아 그 말간 낯이 한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당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일그러진 눈썹이나 눈매, 시큰하니 붉게 오른 눈가, 앙다문 입술이며 뺨을 미끄러진 눈물 자욱 따위를 앞에 두고, 온달은 달빛에 눈이 시리다는 변명을 들어 차마 보지 못한 셈 쳤다. 가히 그만한 보름달이었으므로.

 

“그래……, 조금 막무가내긴 했지만 오길 잘했군.”

“…….”

“이곳에서 네가 이런 말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는 나뿐일 테니.”

“…….”

“그렇지 않나?”

 

물음의 형식으로 돌아오되 답을 강요하지 않는 목소리에 작은 고개가 턱을 끌어올렸다. 온달의 말대로, 설유는 제 속을 털어놓은 것이 퍽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작게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마치 물속에서야 비로소 숨 쉴 수 있는 인어라도 된 것처럼, 속눈썹을 온통 적시고서야 제대로 호흡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설유는 편안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발 디딜 곳은 자신이 뿌리 내린 뭍이어야만 했다. 그의 뿌리는 끊임없이 흙이 쓸리고 자갈이 헤엄하길 반복하는 물기슼과는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온달은 설유를 뭍으로 당겨오듯 제게 기댄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소리 없는 비명처럼 떠오르는 숨 방울을 터트리듯 보드라운 뺨을 쿡 찔러댔다. 눈물에 식었던 피부는 사내의 열에 금방 미지근한 체온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뭐예요?”

“딱히 해줄 말이 생각나질 않아서 볼이라도 찔러봤다.”

 

그렇게 당당하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설유가 볼멘소리로 대꾸하자 온달은 마냥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네 그리움은 나와는 또 궤를 달리하지 않나. 이방인이라는 처지를 공유한다 해도 네 심정을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려우니, 섣불리 말을 얹지는 않으마. 온달은 본디 누군가를 달래는 데에 요령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설유가 제게 바라는 것은 유용한 조언이나 거창한 도움 따위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거짓 하나 없는 곧은 속내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것. 그녀는 제게 그것만을 바라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 정도야 온달에게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이렇게 서러운 걸 평소에는 어떻게 감추고 다녔는지, 원.”

“평소에는 완전 멀쩡하거든요. 말했잖아요, 보름달 뜨는 밤이면 괜히 심란해진다고.”

 

그래서 이래. 조금은 민망한 듯한 목소리가 변명처럼 돌아왔다. 그러나 그 대꾸에 온달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짓궂은 웃음기도 장난기도 모두 털어낸 입술은 무겁게 가라앉은 듯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 입꼬리를 닫은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환희였으므로.

 

아, 그래. 보름날은 네게도 각별하구나. 보통의 날보다 조금 덜 들뜨고, 조금 더 예민하고, 또 유독 무언가가 그리워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네게도 보편보다 야릇한 그런 날이었구나. 얄궂게도, 온달에게는 그 사실이 퍽 기꺼웠다. 설유의 마음은 둥글게 찬 달, 만월 앞에 허물어진다. 설유의 마음은, ‘온달’ 앞에 허물어진다. 그녀의 응석이 제게 쏟아지는 것이야말로 그 증거였다. 하여 온달은 하릴없이 허물어진 벽 너머의 여린 속내를 끌어안았다. 혹여 힘을 주면 그대로 바스러질까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껴안은 팔은 조심스러웠고 그의 품속은 설유가 들어차고도 공간이 남았다. 작은 숨소리만이 오가던 그 공간에는 온달의 목소리가 들어찬다. “내 언변이 없어 겉만 번지르르한 말은 못 해주겠다만, 이것만큼은 약속하마.” 비바람에 허리 꺾이지 않는 나무처럼 올곧은 음성이 나직이, 또 천천히 이어졌다.

 

“형체 없는 그리움이 닥치는 밤마다, 내가 네 곁에 있겠다고.”

 

네가 내게 그러하듯, 너 역시 내 곁에서 그리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도록. 대답 대신 응석이 너른 품에 쏟아졌다. 설유가 제 속에 고개를 깊이 파묻은 것과 동시에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이 들려왔으나, 온달은 그것이 필시 긍정이나 감사의 말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과 거리를 좁힐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는 그래, 하는 무의미한 대꾸와 함께 달빛에 환히 드러난 등을 조심스레 도닥였다. 설유의 몸집이 작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으나, 오늘따라 유난히 여리게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설유의 ‘그거야 온달 손이 커서 더 그렇게 보이는 거겠죠.’ 하는 또랑또랑한 말대답이 들려오는 것만 같아 온달은 피식 웃고 말았다. 품에 파묻혔던 동백꽃 색 눈동자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밤이 늦었군.”

 

그래서 묻고 있잖아요. 뚱한 눈빛이었다. 어서 본인 방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잔소리를 입 대신 두 눈에 가득 담아낸 얼굴을 보면서도 온달의 미소는 더 짙어지기만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정말이지 능글맞은 색의 웃음이었다.

 

“이렇게 된 김에 내 친히 재워주마.”

“……내가 몇 살인지는 알아요?”

“거참 궁금한데. 네 나이가 몇인지 너는 알고 있나?”

“…………모르지만.”

 

이번에는 조금 시무룩한 얼굴. 나이가 몇인지 따위가 대수인가, 꼬리가 통통한 고룡의 후예나 애늙은이 같은 망령의 왕도 본인 나이는 다 잊었을 텐데. 장수종과 불멸자를 감히 자신들과 동일 선상에 올리고 생각해 낸 시답잖은 위로 대신 온달은 또다시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하하, 그럼 내 나이가 몇인지는 아시나?”

“그것도 모르죠. 온달이 말해준 적 없잖아.”

“뭐, 모르긴 몰라도 너보다는 많겠지.”

 

그러니 얌전히 눕기나 해라. 그가 말을 맺은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의 몸이 부드러운 소음과 함께 푹신한 침대 위로 널브러진다. 설유가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가 내린 이불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그것의 끄트머리를 집어 들더니 이내 널찍하게 펴고 둘을 넉넉하게 덮기까지 하는 일련의 행동에는 노련함마저 엿보였다. 온달과 설유의 동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일 테다.

 

“이러고 있으니 예전 생각 나지 않나?”

“여기서는 이렇게 붙을 필요 없잖아요. 어디 멀리 굴러가는 것도 아니고,”

“여관에서 묵었을 때, 어김없이 굴러다니다가 침대 아래로 떨어질 뻔했던 건 기억도 못하나 보군.”

“……그랬나?”

“그랬지.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푹 주무시느라 나만 기억하는 게 좀 억울한데.”

 

어디, 이번에야말로 굴러떨어질 때까지 한번 지켜나 볼까, 응? 기어코 터져 나온 호쾌한 웃음소리가 설유의 둥근 귓불 근처를 맴돌았다. 잊을 만하면 미운 소리를 한다고 눈을 흘기는 와중에도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서는 힘이 빠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놓아줄 생각도 없었으면서. 다만 그 모든 불만을 토로하는 대신 설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온달의 말마따나 예전 생각이 나는 품이었다. 넉넉하고, 따듯하고, 또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되는. 지금 이 순간, 제가 아는 한 가장 안전하고 포근한 ‘제 사람’의 체온 속에서, 설유의 숨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그녀가 아발론에 도달한 이래 처음으로 편히 잠든 보름날이었다.

 

 

* * *

 

 

“……온달 경, 아침부터 외람된 말씀이지만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음? 아, 현무인가. 무슨 일이지?”

“그…… 왜 경께서 설유 경의 방에서 나오시는지…… 아니, 역시 아무것도 아닙니다.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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