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소설

240319 연성교환

원신 야란 드림

당신도 티바트 대륙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야기. 일곱 도시 국가가 각자의 개성을 갖춘 만큼 지역마다 다른 전승이 있지만, 기본적인 틀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천대받던 아가씨가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것을 되찾는다. 그리고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정말?

 

화려한 무도회는 ‘착한 아가씨’의 무대인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이래서야 ‘나쁜 계모와 언니들’에게 왕자님을 빼앗긴 꼴이 아닌가. 코르빈의 시선 끝에서 춤추는 둘은 질투가 날 정도로 잘 어울린다. 그렇다고 물러설 코르빈이 아니지. 이 무도회에서 당신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도와주는 요정 대모는 없지만, 질 좋은 비단으로 옷을 지었답니다. 잘 어울리는 새 신발은 또 어떤데요? ‘구두장이는 언제나 가장 안 좋은 신발을 신는다’는 속담은 편견이에요!

 

‘…그런데, 두 사람이 자꾸만 멀어지는 듯한 느낌은 뭘까요?’

 

아니, 착각이 아니다! 티바트 대륙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야기. 절대 변하지 않는 기본적인 설정 중 하나. 바로 12시가 되면 모든 ‘마법’이 풀린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11시 47분! 마음 착한 코르빈 아가씨는 수많은 인파를 뚫고 ‘계모’로부터 ‘왕자님’을 되찾을 수 있을까?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적은 아가씨의 순정도 몰라보고 춤을 청하는 멍청한 사람들. 저리 가! 무례하게 손목을 잡아끄는 녀석들 따위 상대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두 번째, 식탁 위에서 춤추는 일곱 나라의 만찬. 오매불망 코르빈의 선택만 기다리는 저것들을 보아라!

 

“코르빈 아가씨, 코르빈 아가씨! 우리 좀 보세요!”

“나는 폰타인에서 온 볼로네제 라자냐에요! 입에 넣어 주세요!”

“열두 시가 되면 사라질 ‘왕자님’보다, 달달한 파디사라 푸딩 한 입이 낫지 않을까요? 왕자님은 아가씨를 신경도 쓰지 않는 거 봐요!”

 

그리고 그것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어라! 솔직히 혹했다. 마카롱 하나쯤은 먹어도 되지 않을까? 손을 뻗는 순간 들려오는 구두 소리. 아까 뿌리쳤던 멍청한 구혼자들! 애원하는 음식들의 아우성을 뒤로 하고 다시 인파 속을 향하는 코르빈 아가씨.

 

“회장에서 춤추는 여러분, 밀쳐서 미안해요! 그래도 꼭 ‘왕자님’을 만나고 싶답니다!”

“감히 우리와 춤추지 않는다니, 아가씨 정말 보는 눈이 없군!”

 

감자만도 못한 구혼자들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기세로 으르렁대지만, 코르빈은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할 뿐. 직선으로 가면 금방일 것을 인파 때문에 미로를 헤매듯 이리로 저리로 몸을 꺾어야만 했다. 구두는 이쯤 되니 서서히 코르빈의 발목을 갉아먹고…지금 몇 시지? 무도회장 중앙을 장식한, 요란하고 거대한 괘종시계. 아직 울리지 않았으니 12시는 되지 않았겠지만 곧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시야 끄트머리에 발을 걸친 채 사라지려는 두 사람은…

 

“야란 님!”

“코르빈이 왔어요!”

“저를 봐주세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제한, 얼마 남지 않은 거리. 미로 속에 갇힌 구혼자들과 출구를 막 빠져나온 코르빈. 이제는 계단 중앙까지 일직선으로 뛰기만 하면 된다. 굽 높은 구두에 죄이던 발은 비명을 지르나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였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가? 두 사람의 춤이 막바지에 다다르려 하지 않던가! 온갖 목소리에 묻힐 것도 아랑곳않고 코르빈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왕자님 – 춤추는 야란이 돌아봐주길 바라며!

 

“아아, 왕자님! 나의 야란 님!”

부디 계모에게서 손을 떼세요. 그 남자는 안 돼요! 그럴듯한 얼굴과 세 치 혀로 당신을 속이려는 거예요…어라? 허겁지겁 계단을 오르던 코르빈의 눈이 크게 떠진다. 우지직,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아가씨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무리한 각도로 깎은 구두 굽. 위험할 줄 알면서도 무리한 결과 부러진 것이다! 이대로 바닥을 구르면 뼈 부러지는 걸로 끝나지 않겠지? 그래도 상관없지만 야란 님이 돌아봐 주셨으면 했어…주마등은 코르빈과 야란 두 사람의 첫 만남을 그린다. 주마등? 그야 요괴인 아가씨가 죽지는 않겠지만, 야란이 저 남자를 선택하는 꼴을 볼 바에야 죽는 게 나으니까.

 

이대로 머리라도 쿵 부딪치면 좋을걸.

그러나 부딪치지도 죽지도 않았다.

애초에 죽을 높이도 아니었지만.

 

“이런 구두를 신고 달리다니, 위험하잖아.”

 

꿈은 아니겠지? 차갑지만 익숙한 체온, 꿈에도 그리던 목소리. 코르빈은 감은 눈을 살며시 떴다. ‘계모’ 슈는 자신을 뒤로하고 뛰쳐나간 야란에게 아주 조금 놀란 것 같다. 그리고 코르빈을 품에 거둔 야란의 모습. 평소 알던 모습보다 화려하고, 더욱 아름다운 – 물론 야란이 코르빈의 눈에 아름답지 않은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야란 님…”

“발은 괜찮니?”

“야, 야란 님이 곁에 있어서 괜찮아요!”

 

코르빈의 기운찬 반응에 야란이 살풋 웃었다. 그러게 계단에서는 조심하셨어야죠 - 라는 슈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 지금 몇 시죠? 괘종시계가 울릴 때가 됐는데, 여길 떠나야 하지 않을까요? 야란이 흔한 이야기처럼 사라질 것 같아 불안했던 코르빈은 말한다.

“걱정할 필요 없어.”

“…네?”

“12시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으니까.”

 

과연 야란 님, 그런 것까지 꿰뚫어 보고 계시다니! 코르빈의 들뜬 반응에 야란은 우아하게 손을 내민다. 리월의 사교 예절을 통달한 듯한 우아한 인사를 우리의 ‘아가씨’께서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보고 계신다. 괜찮다면 저와 한 곡 춰주실까요, 공주님? 어쩜 이리 늠름하신지!

 

“참, 성격 급하다니까.”

 

여분의 구두를 신고 오겠다며 코르빈은 쏜살같이 달려 나간다 – 맨발로. 어느새 야란의 곁에 다가온 슈가 웃음을 터뜨린다. 좋아서 그러는 거겠죠. 이왕이면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계단을 내려가 무도회장 한복판으로 향하던 야란이 그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즐거운 무도회였어.”

“저도 즐거웠습니다.”

 

‘재투성이 공주님’과 즐거운 밤을 보내시길. 눈 깜짝할 사이 슈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희미한 옥빛만이 남아 있다. 구두를 바꿔 신고 온 코르빈이 제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고 있다. 그러다 그 구두도 상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상쾌한 바람에 발맞춰 야란은 손을 뻗는다.

 

“한 곡 추시겠어요?”

무도회장의 괘종시계가 고장이었다는 건 분명 그만이 알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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