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8
86 신레나 3천자
두 사람의 첫 ‘관계’는 엉망진창이었다. 낭만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키스는 다급했고 애무는 조잡하며, 뭐든 억지로 끼워 맞추는 느낌.
고된 전투 끝에 살아남았다, 또 당신을 볼 수 있다 – 드물게 흥분에 젖은 신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레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지금 거절하면 자길 걱정한답시고 몇 달, 어쩌면 몇 년 동안 거리를 둘지도 모르니까. 두 사람은 솔직하지 못했고 때로는 좋다는 마음이 걸림돌이 되고는 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 손톱자국을 남기면서도 받아들이려 애쓰는 가련한 모습…그날 밤은 언제 돌이켜 봐도 어제 일처럼 선하다.
그게 문제였다.
밝지 않는 새벽은 없다. 과연, 끝나지 않는 투쟁도 없다. 한없이 절망적이기만 했던 전황도 이제는 막바지였다. 각지의 노력과 꾸준한 승리 – 그중에서도 결정적이었던 것은 레기온 생산 라인에의 정밀 타격. 레나와 제86기동타격군이 분투한 이 작전은 레기온 대 인류의 대결 구도를 급격히 바꿔놓았다. 영원할 것만 같던 살육 기계들은 자신들을 수복하고 제작할 공장의 부재로 쇠락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전쟁이 끝났다며 벌써부터 축제 준비를 하기까지 한다니, 인류의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신은 – 신에이 노우젠만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전장을 떠난 후 받았던 기아데 사람들의 껄끄러운 환대. 소모되어 가는 하루하루에 결국 죽을 자리만을 쫓은 어리석음. 절망 끝에 다다른 유일한 희망. 그 모든 게 신의 뇌 내에 박혀있다. 이제는 죽을 장소만 떠도는 사신이 아님을 안다. 언젠가 찾아올 평화 속, 잔잔한 파도가 스치는 바다. 레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그러나 할 수 있을까. 지금껏 전장 속에서만 숨 붙였던 자신이, 레나에게 당연한 행복을 줄 수 있을까. 그래, 그게 문제였다. 첫 관계조차 그를 배려하지 못한, 일상에서 홀로 서지도 못한 자신은 그의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떻게 보면 레나를 아끼다 못해 얕보는 꼴이나, 신에게는 그런 자각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말주변이 특출난 것도 아니라고 레나 본인과 이야기를 나눌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도 할 일은 많겠지만, 정리가 되면 천천히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그 말에 표정 관리도 제대로 못 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꼴사나웠는지!
‘아.’
종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제86기동타격군이 나설 자리는 없어졌다.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 그동안 사지를 오가며 공을 세운 그들에게 포상으로 휴가가 주어지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이 세상에 남은 레기온은 이제 얼마 되지 않는다. 어제는 저 지역을, 오늘은 이 지역을 극적으로 수복했다더라. 호외를 하도 뿌려대는 바람에 거리는 종이 쓰레기투성이었다. 종전의 기쁨에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책을 읽건 잠을 자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쉬라고 재촉하는 부대원 탓에 혼자 있는 시간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육체적으로는 편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좋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울음을 참던 표정이, 잠을 자면 그날 일이 떠올라…
‘이상해.’
“신.”
‘어떡하지.’
“여기 있었나요?”
레나 생각만 하다 환청까지 들리는 건가. 그리 생각하던 신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뒤에 선 사람은 틀림없는 레나였다. 전후 처리로 다른 부대까지 돌아다닌다던 그가 이 시간에, 여기 있다고?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시다니.”
마치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는 듯한 말투로.
“저, 이건…”
“너무 격식 차리면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잠깐 비는 시간에 들른 것뿐이니까요. 오래 못 보기도 했고…”
“… … …”
“무슨 문제 있으신가요?”
그날 밤에는 미안했다고…이제 와서 괜한 말일까? 레기온 생산 라인을 무너뜨리기까지 격렬한 전투가 있었다. 전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 몸을 감돌던 흥분. 억누르기 위해 꽉 끌어안고 레나와 입을 맞추었다. 손을 대도 괜찮겠냐는 말에서 제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아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다급한 키스, 조잡한 애무, 뭐든 억지로…
“…대령님.”
‘전에 했던 말은,’
“대령님은, 이런 저와 정말 함께하고 싶습니까…?”
‘진심이었습니까?’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까. 신의 말에 레나는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짓는다. 신은 한 번 전장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런 만큼 다가올 종전에 대한 두려움은 크다. 죽여도, 죽지 않아도 되는 삶…
“당신과 바다에 함께 가 줄, 더 좋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 … …”
“그리고 그때 저지른 실수를, 저는 잊지 않고 있으니까요.”
“…실수라고 하지 마세요.”
이를 악무는 소리에 신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두려워 시선을 피하던 그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켠다. 마주한 레나의 볼 위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부디, 실수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아니라고도 맞다고도 답하지 못하고, 신은 그저,
“…대령님.”
“쫓아왔어요, 쭉…따라잡기 위해서, 함께 싸우기 위해서…그러니까, 내가 쫓아갈 수 있다면 어디든 쫓을 테니까, 도망치지만은 말아요.”
“… … …”
“행복할 권리를, 포기하지 마요.”
잘 모르겠으면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아, 정말 어리석었던 건 신 자신이었다. 레나를 위해서, 더 좋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핑계를 대며 겁쟁이처럼 제 치부를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신은 천천히, 이를 악문 채 눈물을 참는 레나의 손을 잡는다. 조금 전보다 편하게 숨을 내쉬는 그와 눈을 마주한 채 진심을 드러내려 한다.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령님에게.”
“남긴 적, 없어요.”
“제 추악한 욕망을 받아들이려 애쓰시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니 저 자신을…용납하기 힘들어서, 그때는…”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십니까.”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보다도 바라는 것은, 미안하지만…내가 당신과 행복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곁에 있어 주시겠어요?”
레나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신은 제 손으로 훔쳤다. 자신의 연인에게만 보여주는 미소를 띠며, 그는 최후의 진심을 입에 담는다.
“물론입니다, 대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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