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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티식스/신레나] 첫 데이트, 입니다!

2022년 1월 발간 소설책 웹재발행

“너 진짜 블라디레나 밀리제 맞아? 그? 『선혈의 여왕』? 어?”

“아, 아파, 아네트! 아직 아프단 말이야! 아야!”

살짝 불긋해진 이마를 손가락을 꾹꾹 찌르자 레나에게서 절로 우는 소리가 나왔다. 그 순진한 모습에 뭔가 또 열 받아서 두어번 꾹꾹(마지막에는 살짝 손톱을 세웠더니 더 높은 울음소리가 났다) 눌러준 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손을 거뒀다.

“데이트 고민 정도로 복도 기둥에 머리를 박을 지경이면 누구에게라도 상담이라도 하지 그랬냐고.”

레나의 방 앞에서 주저앉아 있던 웅크리고 있던 뒷모습을 떠올리고, 그 모습에 무슨 일이 생겼나 더럭 걱정했던 게 손해 본 것 같아 분통이 터졌다.

“그, 그치만 주변에 아무래도…이런 일로 상담할 경험자가…적으니까….”

“…하, 진짜….”

그야 기동타격군의 다수는 남성이고, 얼마 안 되는 여성들의 대다수는 다시 에이티식스다. 그들 중에서도 핑크빛 무드가 한참 솟아나고 있는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상담하긴 곤란했겠지. 그레테가 알았다면 기꺼이 도와주고 싶어했겠지만, 적극적일 것이 불 보듯 뻔하다고 생각해 레나도 지금까지 꺼려왔겠거니 싶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했겠지. 이 똑똑하고 착한 아가씨는. 각종 맞선상대들을 겪어오며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남녀가 시간을 보내는 법을 다양하게 체득해 온 딱 좋은 상담상대가 살짝 입을 삐죽였다.

“애초에 너희 사이에, 이제와서 데이트로 고민할 필요는 없잖아. 별의 별일이 다 있었으면서.”

“정, 정식으로 약속을 잡는 건 이야기가 다르잖아!”

우와, 이게 무슨 갓 사춘기 막 사귀는 애들 같은 이야기야. 얼굴을 부딪쳤던 이마만큼 발갛게 물들이며 항의하고 있는 레나를 보며 제 얼굴은 어떻게 수습도 할 수 없을 만큼 질린 듯 한 표정이 떠올라 있을 것이라 아네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나는 아랑곳 않고 한번 물꼬를 튼 말을 또박또박 이어나가고 있었다.

“신은… 연방에 와서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한 것 같아.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게 기뻐.”

도서관을 간다던가, 가족의 쇼핑을 도왔다던가, 거리에 나갔다던가 하는 그런.

“그렇지만 역시, 오랫동안 힘들었으니까…좀 더 그런 경험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 그게 신에게도 즐거운 일이 되었으면 좋겠어.”

전장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은 세상에 많고 그런 일들이 삶을 더 채워나갔으면 좋겠다고, 레나가 시선을 조금 멀고 따뜻하게 물들인 채 말했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남들에게는 무심해 보이는 표정을 더 많이 보이는 주제에 한 사람에게는 얼굴 표정이 풀어지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이 훤해보였다.

“그리고…그리고 기왕이면, 내가 신과 같이 그런 일들을 해보고 싶어….”

그렇게 정감이 가득하던 말이 점차 부끄러움에 녹듯이 조그맣게 기어들어갔다. 다시 발갛게 물든 레나의 얼굴을 보던 아네트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는, 기가 차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이참에 묻자. 그렇게 같이 뭘 해보고 싶다면서 너희, 대체 왜 같이 안 사니?”

관사든 후견인의 저택에 있는 방이든 사람들이 출입하고 여러 가지로 분방한 편이기는 하지만, 종일 붙어있어도 시간이 아까울 커플들에게 보통은 썩 만족스러운 선택지는 아닐 터였다. 그밖의 소속이라던지 이런…형식적인 문제는 이제와선 정말 형식에 불과한 사항들이고, 다른 사람들이 입 밖으로 꺼내게 되면 상당히 무례한 이야기가 될 사항인 보통의 젊은 연인들이 찰딱 달라붙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양친 문제도 두 사람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

“…그야, 아직 나도 그랑 뮬 쪽의 이런 저런 일이 정리되질 않았고… 아직은 조금 홀로서기가 필요하다고 할까, 둘이서 제대로 각각이 지내며 마주보고 싶다고 할까….”

여전히 얼굴을 붉게 물들인 레나가 우물쭈물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우등생이 아니랄까봐 형식적인 것부터, 여러 가지 나름의 논리를 펼쳤지만 오랜 시간 옆에 있었던 사람으로서는 대강의 속내가 짐작이 갔다.

 

그러니까 즉,

아직까지 가사가 서투르다던지 하는, 생활력이 모자라 보이는 모습을 신에게는 보여주기 싫다 이거지.

 

좋은 집안의 딸로 태어난 레나지만 워낙에 몸가짐이 바르다 보니 함부로 어지르거나, 정돈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방만 해도 딱 레나답게 단정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나가서 살게 되면, 그래. 정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잔뜩 있다. 어쨌든 달콤한 꿈에 젖은 연인들이 동거를 시작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처참하게 깨지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는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들린다.

물론 이 둘의 경우에 그런 이유로 정이 떨어질 거라고는 1밀리퍼센트도 생각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하자면 신은 레나라면 정말 아무래도 좋을 테니 패스하고, 문제는 전적으로 레나쪽에 있다. 콕 집어 가사가 아니라도 이 선혈의 여왕님은 신에이에게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어 애쓰는 경향이 심하니까. 그건 사랑에 빠진 사람의 특성이라고 나름 귀엽게 볼 수도 있지만…아니, 잠깐. 혹시 신은 더 이런 걸 보고 싶어서 아무 말 안하고 있다거나 그런 거 아냐?

라고, 아네트는 근거와 어느 정도 정답에 가까운 추론을 했다. 실제 이 별거 아닌 별거 체제의 가장 큰 사유에는 각자의 영역에, 특히나 레나의 방에 방문했을 때 그 방에 들어차 있는 레나의 흔적과 향취에 푹 감싸이는 느낌을 기꺼워하는 신의 취향이 강력하고 은밀하게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이 영영 알리는 없었지만.

“하, 진짜.”

아무튼, 직면한 문제 사항은 데이트다. 생각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게 눈동자에 그대로 드러나는 레나를 보며 한숨을 푹푹 쉬던 아네트가 문득 아, 하고 소리를 내더니 책상에 다가가 다이어리를 뒤적이고는 길다란 종이 두 장을 레나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라도 쓰던가?”

“교환…권? 영화관?”

수도사령부와 멀지 않은 중앙의 영화관이다. 번화가에 위치하여 주변의 여러 가게나 시설들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곳이었다.

“전에 쇼핑하다가 받은 건데. 쓸 일이 없을 거라 적당히 주변 사람에게 넘겨야지 했던 건데. 레나 줄게. 영화가 지정된 거 아니라니까 써.”

“…아네트…!”

“식사에 영화, 그리고 카페. 전형적인 데이트 코스지?”

아. 난 진짜 착한 거 같아. 순식간에 얼굴이 환해지는 친구의 얼굴에 흐뭇해지는 것과 별개로 아네트는 살짝 우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 나한테 빚 여러 개 지는 거 알지, 신?

 


 

“밀리제 대령님. 이쪽의 검토도 부탁합니다.”

파일박스의 탑을 예쁘게 각을 맞추어 쌓아 놓은 연방의 군인들의 절도 있는 인사와 퇴실 뒤에, 애써 표정을 숨기고 있던 레나의 입에서는 망연한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어마어마한 기세였지만 책상 위에 쌓이다 못해 바닥에도 한가득 쌓인 서류의 산에는 산들바람도 되지 못했다.

그래. 무슨 일이든 행정이라는 건, 뒤처리도 큰일인 법이다.

기동타격군이 치러왔던 작전들 대개는 열세에 몰려있던 인류를 레기온들로부터 구제한 작전들이었다. 상대가 기계라고는 해도 인공지능으로서, 종전에는 실제 인간의 중추를 이용한 사고를 통해 나온 움직임이었으니 차후를 위해서는 더더욱 연구되고 정리되어 분석해야 하는 것은 틀림이 없었으며, 그것을 위한 자료 만들기에 작전 지휘관의 검토는 빠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이 양은 대체…어째서 일까. 레나는 검토하고 있던 파일케이스를 내려다보았다. 정리된 갱신 기록에는 단계별로 빠지는 것 하나 없었다.

이렇게 모든 것은 성실하게 제때 제때 보고 해왔다고 생각해왔는데. 분석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째서?

“왜 하필이면….”

막중한 양과 기가 막힌 타이밍에 하소연을 하고 싶어지다가도 평소보다 화장의 색조에 더 신경을 써서 안색을 꾸며내는 그레테를 포함한 레나의 옆과 위에 계신 분들은 이보다 더한 서류지옥에서 시커먼 그림자를 띄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것을 잘 알았기에 함부로 내뱉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어째서 지금인거냐고요…!

 

- 삑.

- 밀리제 대령님.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 아, 네! 들어오세요?!!”

방금 전까지 떠올리던 누군가의 얼굴 위에 매칭되는 목소리가 집무실의 인터컴에서 들려오자 저도 모르게 뒤집어진 목소리를 내었음에도 제대로 음성은 인식되었는지 문이 열렸다.

“실례하겠……이건, 좀 굉장하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눈으로 본 광경에 기가 막혀 잠시 멈추었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른 이들 눈에 보일 때에는 제대로 두르고 있기로 한 격식을 누그러뜨린 것은 덤이었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았어?”

“어서 오세요, 신…어쩔 수 없어요. 이전에 보낸 피드백에 대한 확인요청도 들어왔고, 이전 보냈던 분량의 타 과의 보충내역 검토도 시작되었거든요.”

“이걸 보니 내 걸 줘야 하는지 망설여지는데.”

신이 품에 안고 있던 서류 한 뭉치를 툭툭 흔들어보였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이미 쌓여있는 박스보다는 적은 양이었지만 이미 전대장으로서 참전대원들의 검수를 취합한 분량은 레나의 책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레나는 쓰게 웃었다.

“줘야죠. 그리고 신이 가져온 것들은 신이 한번 다 제대로 검토 해준 거라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어요.”

“다른 사람 것 중에서는 마음 편하지 않은 게 있단 이야기야? 누군데. 대신 봐줄 테니까.”

“신도 참. 서류를 대신 봐준다는 게 아니라 손봐주겠다는 것처럼 들려요.”

아니. 그거 맞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신이 농을 한다며 얼굴을 좀 펴고 웃는 레나를 보며 신은 제 속내를 잠시 눌러두기로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서두를 떼었다.

“레나. 이렇게 바쁘다면 약속은 다음으로 미뤄도 괜찮아.”

 

- 신. 조만간에 일 끝난 뒤 저녁에 제대로 된 데, 데이트 하지 않을래요?

 

불과 며칠 전의 이야기였다. 어쩐지 중대 작전을 앞두었을 때 만큼의 비장함마저 느껴진 눈동자면서도 뺨은 수줍음과 긴장에 뜨끈하게 데워진 붉은 색을 한 채 레나가 꺼낸 말이었다. 집무실이든 사실이든, 공적인 동행이든 사적인 외출이든 신으로서는 레나가 있고, 그 곁에 공공연히 서 있을 수 있고 그 시간만 많다면 어떤 시간이든 만족스러웠지만, 그래도 보통의 연인들처럼 데이트 같이 두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단지 그것 뿐을 위한 시간을 제대로 가져보지 못했던 게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렇기에 레나 역시도 자신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저보다 더 섬세하게 헤아려 부딪혀 온 것을 생각하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함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당연하게 승낙을 하고, 그날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할지를 즐겁게 고민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요새 퇴근이 늦어지고 있다고 다들 그러던데.”

그들에게 갑작스러운 서류군단의 습격이 도래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그랬을 터였다.

몰려오는 적성 업무들의 나날에는 전장에서 무서움을 몰랐던 에이티식스들조차도 고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레나에게도 부담이 큰 작업이라는 사실은 물리적으로 분명했다. 실제로 해당 작업이 시작된 이후로 레나의 표정에서는 만날 때마다 점차 생기가 빠져나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과의 약속을 미루자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게 내심 기쁘지만…무리를 했으면 하는 건 결코 아니었으니까.

“예!? 아니에요! 이 정도 업무의 범위 내의 일, 약속한 날까지 제대로 다 끝내놓을 수 있어요! 조금도 문제없어요! 제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레나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언제나처럼 아름답고 열의에 넘치는 눈동자였지만 근심과 피로로 시커메진 눈에 열정이 번득거리는 것은 좀… 다른 의미에서 압도적이었다. 작은 체구 전신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기백도 그렇고.

 

그래도. 마지막 말은 역시 기쁘네.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 짓던 신은 바로 그 직후 기세를 팍 죽이고 ‘신은 혹시 기대가 되지 않았던 건가요….’ 라며 수그러들려는 레나를 진정시킬 겸 팔을 뻗어 서류의 산에서 레나를 끌어냈다.

 


 

“아니 뭐, 미남의 돌격 미인계가 실패할 정도면 그만큼 여왕님이 엄청나게 기합이 들어가 있단 이야기잖아? 잘 됐네.”

“…조용히 해.”

시비나 다름없는 어조의 말을 들으면서도 부루퉁한 얼굴의 신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시덴은 꼴좋다는 듯 낄낄대며 웃었다. 굳이 고개를 쳐들지 않았지만 신의 미간에 골이 깊어졌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프레데리카 역시 재미있다는 듯이 코를 울리며 웃었다.

“허영과 허세는 남자의 것만이 아니라는 거다. 그대도 이제 이해했겠지?”

“코코아 금지해달라고 할 거야, 프레데리카.”

“그대, 너무 보복이 쪼잔하지 않나!?!?”

치명타를 입은 듯한 어린아가씨의 비명에 결국 얼굴에 빙글빙글 웃음을 걸고 있던 근처 대원들에게서 산발적으로 웃음이 터졌다. 신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자신과 레나의 일에 대해 모두가 흥미진진하게 집중하는 것이 좀 짜증스러워지는 순간은 이런 때였다.

날짜가 다가오면서 레나는 이제 출근 뿐만 아니라 퇴근 시간도 늦어지고 있었다. 분명히 같은 일을 진행하는 데도 신으로서는 제대로 나누어 줄 수 없는 영역의 일인터라 더 몸이 달았다. 돕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제 손을 거치거나 간접적으로 닿는 부분까지의 검토를 철저히 하는게 전부였다.

“자자, 신. 아까 체크한 거 다 했다.”

“…알았어. 그리고 이거. 재검토. 체크한 부분들 다시 보라고 해.”

라이덴에게 바로 건네지는 종이뭉치에 근처에 있던 대원들에게서 앓는 소리가 터졌다. 보충교육의 교사들의 지도내용보다도 신이 붉은색 펜으로 죽 적어내린 체크내용이-철자부터 내용까지 모조리 다 지적하고 있는-더 뇌리에 박히기 시작할 지경이었다. 그 집념이 시작된 이유가 너무도 명백하여 라이덴이 쓰게 웃었다.

“이 냉혈한 사신대장!”

“지휘관님에게만 다정하면 다냐!”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게 나았을텐데. 얘들아. 같이 놀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어도 전황을 정확히 분석해 효과적인 전략을 취하고 있는-그 영향도 있는지, 신의 지적을 덜 받아 문서의 통과율이 높은- 라이덴이었다.

 


 

“이걸로 끝!!”

레나가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평소보다 좀더 빠르게 휘갈기고 파일을 덮었다. 그러자 곁에서 실시간으로 전자데이터화 하던 보조원들이 일제히 짝짝 박수를 쳐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밀리제 대령님!”

“감사합니다! 이 이후의 작업은 이대로 진행해주세요, 저는 잠깐 한숨 돌리고 오겠습니다!”

보조원들의 대답을 미처 듣기도 전에 레나가 집무실 밖을 나섰다. 눈이 아까 마셨던 커피로 더 환해져 있는 느낌이었다.

이대로라면 오늘 중에 제출이 가능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일이 터져 기한이 꽤나 아슬아슬했지만, 당일까지 끝내지 못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

오늘의 데이트가 취소되지 않게 되었다는 소식을, 예정대로 퇴근 후 약속장소에서 만나자는 이야기를 직접 하기 위해 달려가는 레나의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신, 금방 왔네요!”

약속장소로 정한 건물 앞에 도착한 신을 화사한 웃음의 레나가 맞이했다. 여느 때에 보던 단정한 군복도, 언젠가에 봤던 화사한 드레스도 아닌 깔끔한 느낌의 코트 위에 올이 굵은 목도리를 두르고 시린 공기에 코끝과 뺨을 조금 불그스레 물든 레나의 모습에 신선함이 느껴졌고, 그 신선함이 자신과의 시간을 위해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더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제 차림을, 라이덴을 비롯한 에이티식스들과 온갖 녀석들의 참견을 뿌리쳐가며 며칠간의 고민 끝에 결정한 제 차림을 떠올렸다. 몇 번이고 매칭을 바꿔가며 선택한 캐주얼한 옷은 그렇다 치더라도, 걸친 코트가 군에서 지급되는 예장 코트와 비슷해 보이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지금의 레나의 곁에서 딱히 어색해보일 것 같지는 않아 조금 만족스러웠다. 레나도 비슷한 감상이라는 것은, 서로 알지 못하겠지만.

“저녁을 먼저 먹으러 간다고 했나? 어디로 가야해?”

“아. 이쪽이에요. 여유롭게 가도 문제 없을…에취!”

손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먼저 걸어 나가던 레나의 코트 사이로 바람 한줄기가 급 들어왔다. 연합왕국의 설산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쌀쌀한 공기에 코가 간지러워진 레나가 재채기를 하자, 야무제가 둘러놓았던 목도리가 살짝 흘러내렸다.

“괜찮아?”

“아, 네. 잠깐 코가 간지러워져서.”

“진짜 그것뿐이야? 피곤해서 몸이 안 좋은 건 아니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웃은 레나의 얼굴을 쳐다보며 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로요.”

“어제는 꽤 늦게까지 일했다고 들었는데. 관사에서 안 보였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무슨 소리에요. 늦게는 들어갔지만 제대로 들어갔었는걸요.”

그리고 그대로 틀어박혀 한숨도 자지 않고 사무실로부터 가져왔던 일들을 줄곧 해치우고 있었기는 하지만. 진실의 농도는 상당히 높았으므로 레나는 태연하게 정말이라니까요, 라고 말하며 부러 쓰게 웃어줄 수 있었다.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며칠 동안 피곤했던 건 맞으니까 무리하지 마.”

의심쩍은 듯 뚫어지게 쳐다보던 신이 겨우 의심의 눈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흐트러진 목도리를 잘 매만져 준 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한 레나의 옆에 붙어 섰다.

“걱정이 많네요. 신.”

“그야, 옆에 본인이 무리하는 건 생각도 안하면서 남들 챙기기를 열심인 사람이 있어서.”

“아니라니까요, 정말.”

신이 살짝 놀리는 태세에 들어간 걸 보니 정말 포위망에선 벗어난 것 같았다. 마음을 놓고 살짝 입을 삐죽이던 레나가 아, 하고 생각났다는 듯 신을 쳐다보았다.

“영화 말이에요. 제가 골라도 괜찮을까요? 지금 하고 있는 영화 중에….”

그리고 뒤이어 말한 영화의 제목에 신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신은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봤죠? 괜찮겠어요?”

“…그걸 기억했어?”

분명 손에 잡혀서 읽었고, 최근의 일이라 현재 방에도 책이 꽂혀 있기는 하지만 레나에게 내보인다거나 권했던 일은 없는데. 놀라워하는 신의 얼굴을 보며 레나는 조금 의기양양해진 기분이 되었다.

“신의 방에 있었잖아요? 아무래도 영화화 소식이 되면서 다시 발매된 책이었던 거 같…더라고요. 그렇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자신의 상상과 많이 다른 모습을 보게 되서 영화화나 다른 매체화된 것은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요.”

“나는 별로 상관없긴 한데.…”

“그래요? 다행이다.”

신과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더 늘었으면 했거든요. 레나의 얼굴에 자연스레 피어오른 순수하게 기쁜 표정이 서서히 신의 얼굴 위로도 점차 번져나갔다.

 


 

“맛있네. 확실히.”

“그렇죠!?”

반가움에 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제 반응이 필요 이상으로 격했다는 것을 깨달은 레나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레나의 표정변화를 바라보던 신이 입에 있던 음식을 삼키고 피식하고 조그맣게 웃었다.

“내가 미각치도 아닌데 그 정도로 반응할 일은 아니잖아.”

“그, 그런 게 아니라.”

또 기회를 잡고 놀리려 드는 말에 반박도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데이트를 위해 고민 고민 끝에 고른 레스토랑이었다. 그 반응이 좋았던 게, 데이트의 시작이 순조로운 것 같아서 기뻤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레나는 참 먹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반응이 좋아.”

“그, 그렇게 이야기 하면 제가 엄청 먹보 같잖아요? 합성음식을 계속 먹다가 천연식재의 음식을 만나게 되면 자연히 더 감동해서 찾게 되지 않아요? 신도 그 비상식은 플라스틱 같은 맛이라는 거 잘 알면서.”

나름 잘 받아쳤다고 생각했는데 신에게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정도는…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86구 쪽이 안쪽 보다는 천연 식재로 만든 음식을 더 많이 먹었으니까 그런가. 이 송어도 그렇고.”

“그곳에서 송어도 잡혔었나요?”

되레 눈을 동그랗게 뜨게 된 것은 레나였다. 이전 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몇 번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듣는 것은 새로웠다. 신은 나이프의 움직임이 멎은 레나를 대신하듯 제 송어 뫼니에르를 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잡혔어. 맛이 있으니까 꽤 인기가 좋은 물고기였지. 부대 내에 있던 책에 도감 종류는 없었어서 정확히 그게 송어라는 걸 알게 된 건 연방에 와서지만.”

그런 것을 구분해 먹어가며 기억하고 있을 법한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제대로 감추었다. 털끝만한 단서라도 남기면 레나는 무서울 정도로 잘 캐치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상기하며 상심해할 것이 뻔했다.

 자신과의 데이트에서, 다른 사람 때문에 울적해 질 필요 같은 건 전혀 없으니까.

 “…그럼 확실히, 신이 저보다는 더 천연식재의 미식 체험을 많이 했겠네요.…트, 트러플 이라던가.”

그것이 통했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눈을 굴리며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나를 보며 신은 안심하며 웃었다.

“그건 확실히 무리잖아. 파이드에게 색적 기능은 있지만 그렇게 숲 깊숙이는 들어가게 할 수 없고 채집도 어렵고…애초에 버섯종류는 거의 안 땄던 것 같아. 풋내기가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는 건 잘 알았으니까. 다른 부대에서의 일이지만, 버섯을 먹었다가 며칠을 죽을 듯 앓다가 살아난 녀석도 봤어.”

“그런 일도 있었군요….”

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신은 자른 뫼니에르를 입에 넣었다. 버터향이 듬뿍 배인 살코기가 부드럽게 녹았다. 달게까지 느껴지는 게 원래 요리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체험을 많이 했겠네요… 정말, 요리는 체험하는 것만으로는 숙련이 안 된다는 걸 다시 알게 된 기분이에요.”

응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레나의 표정이 미묘해서, 신은 잠깐 멈추었다가 입에 있는 것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레나, 본인 이야기지?”

“뭐에요. 신도 다를 거 없잖아요. 저, 저번에 프레데리카에게서 들었어요. 신이 글쎄….”

신이 당분간 프레데리카의 코코아 뿐만 아니라 쿠키 간식마저 금지시킬 효율적인 방식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모른 채로,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신의 반박에 레나가 조금도 뒤지지 않은 채 쾌활하게 이야기를 하는 사이 접시와 잔이 점점 비어갔다. 코스로 나오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향기와 맛이 풍부했고, 조명과 난방은 따뜻했으며, 들려오는 음악과 주변의 도란도란한 소리는 부드러웠다.

 어쩌지. 큰일이야. 

식사는 몇 번이고 같이 했었다. 거리를 같이 걸은 일도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즐겁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데이트라고, 오직 눈앞의 단 한사람과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한다는 명목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전에 했던 그 어떤 일들보다 더 즐겁고 새로워진 느낌이란.

 

힘내길 잘 했어.

 

쉬운 일은 아니었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에도 조금 눈이 뻐근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렵고 걱정될만한 일을 두지 않은 채, 이런 기분을 온전히 누리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즐거운데, 앞으로 더 욕심내게 될 것 같아서…큰일이야.

 

신의 쓰게 웃는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며, 레나는 생각했다.

 


 

큰일이야.

졸려.

 

앉자마자 띵하게 골을 울리는 통증을 느끼며 레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무릎 위에 올려둔 부드럽고 가벼운 코트는 바깥의 찬 공기에서는 든든한 아군이었지만 이제와서는 이만한 난적이 없었다.

기껏 신이 고르게 해준, 인공감미료가 아니라 진짜 사탕수수 설탕으로 만들어진 캐러멜 소스로 버무린 팝콘용기가 팔걸이 사이에 꽂혔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여긴 제법 시설이 좋네. 의자도 앉은 느낌이 괜찮고.”

“그렇네요.”

원래부터 좋은 재질의 의자가 철야 뒤 잠도 자지 않은 채 식사까지 끝낸 레나의 몸을 푹푹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눈을 필사적으로 깜빡이고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너무 크게 움직여도 신이 눈치 챌 것 같았다. 너무 무리했던 것이라며 다정하게 걱정해주겠지만 결코 바라는 일은 아니었다.

 

첫 데이트에, 제 쪽에서 같이 나누고 싶다고 해놓고선 쿨쿨 자서 신을 내버려두면 제대로 데이트이긴커녕 너무한 일이 되잖아.

 

그러니까 절대로 자서는 안 될 노릇이었다. 조금이라도 깨기 위해 팝콘을 한주먹 물고 우물 거렸다. 입을 움직이면 좀 잠이 깨지 않을까.

그러는 사이 영화관의 불이 완전히 꺼지고 화면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들어오기 전 들춰본 영화 팜플렛의 구석에 박혀있던 제작사의 마크가 비추어지며 커다란 소리가 났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 정도 밝기와 소리라면, 분명 잠들지 않겠지…?

 


 

피곤했구나. 역시.

신은 제 어깨에 툭 기대어진 레나의 머리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영화의 소리에 가려져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잠든 레나의 숨소리가 조그맣게 울려왔다.

안색도 그렇고, 가끔 눈을 깜빡이는 걸 보면서 상당히 무리했다는 건 알 수 있어서 이렇게 되지 않을까 했지만 자신이 이야기 하면 더 그렇지 않은 척 할 것이라 생각해서 더 말할 수도 없었으니까.

일어나면 속상해 하려나. 안 그래도 괜찮은데.

정면의 화면에서는 그들을 두고 계속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의 기억에 있는, 레나가 함께 보자고 말해준 이야기였다. 원작을 읽을 때도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았고, 화면으로 투사된 것을 보아도 그 감흥은 비슷했다.

 

그렇게 함께하자고 말하는 것이, 그를 위해 곁에 있어주는 것이,

그렇게 하기 위해 아주 많이 노력하고 신경을 써주었다는 게 기뻤다.

 

기대어온 레나의 정수리 부분에 살짝 뺨을 대고 부볐다. 깨어 있을 땐 도무지 하기 힘든 일이었으므로, 뺨에 느껴지는 머리카락의 감촉과 은은한 샴푸의 냄새를 기꺼워하며 좀 더 욕심을 내어 팔걸이 위에 늘어진 레나의 맨손을 깍지 껴서 꼭 움켜쥐었다.

 

- 신과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더 늘었으면 했거든요.

 

그러게. 이렇게 시간과 온기를 공유할 수 있는 건,

그런 걸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행복한 거구나.

 

깍지 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지만 레나는 잠깐 뒤척일 뿐 여전히 깨지 않았다. 그 잠든 하얀 얼굴에 얼룩지는 영화의 희미한 그림자를, 신은 조금도 질리는 일 없이 줄곧 바라보았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

 

분명 자신 때문에 데이트가 완벽하지 못했다고 반쯤 울상이 될 레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곧이어 다음엔 더 잘 해보자고 열을 올리겠지.

 

벌써 그것만으로도 즐겁다고 하면 어떤 반응일까.

 

그런 기대감이, 가슴께에서 따뜻하게 찰랑였다.

 


2022년 1월 디페스타에서 발간했던 에이티식스 첫 책입니다.

당시에는 정발이 끊기다 보니 애들이 들척지근한 사이가 되는 게 오피셜이다!!!<<<

이게 스포일러라서 기뻐하고 슬퍼하며 쓰고 있던 기억이 나네요. 그치만 지금은 한국에서도 미정발분 스포가 아니죠! 꺄륵! 얏따!

벌써 2년이 지났다니…엄청 빠르네요.

그 동안 신레나 책이라고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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