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과 성자는 욕심 한 톨 차이

광인과 성자는 욕심 한 톨 차이 2화

나라를 구한 미치광이

기차를 처음 타보기는 로톨로도 마찬가지였으나, 로톨로는 어제저녁까지 기차 내부 그림을 보며 좌석을 찾는 일을 미리 상상했었기에 헤매지 않고 제법 능숙하게 자리를 찾아냈다. 나타와 로톨로의 자리는 미닫이문이 달린 4인석이었다.

초록색 천을 덮은 푹신한 좌석 두 개가 마주 보고 앉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벽에 붙은 큼직한 창문의 커튼은 위로 올라가 있어 새벽의 어스름한 하늘을 그대로 비춰주었다. 나타는 로톨로가 안내하기도 전에 냉큼 창문 옆에 앉았다. 로톨로는 그런 나타에 당황했다가 다음번엔 더 빨리 성녀님을 모셔야지, 결심하며 선반에 짐을 올리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나타는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 창밖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짐을 전혀 들고 오지 않았기에 선반에는 로톨로의 짐뿐이었다. 로톨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짧게 심호흡하고, 나타에게 말했다.

“앞으로 대략 두 시간 후면 저희가 내릴 커스터 역에 도착합니다.”

열차 안에 손님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듣는 귀가 있으니 두 사람의 이름은 언급해선 안 됐다. 나타는 들은 건지 만 건지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다.

“그리고 삼십 분쯤 뒤에 간단한 아침 식사가 제공될 겁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뭐가 나오죠?”

로톨로의 말을 끊고 나타가 물었다. 로톨로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차와 빵, 마말레이드와 소시지가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나타는 또 대답 없이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소 미묘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성녀님에게 광인이라는 폭언을 퍼부을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보면 바로 알 거라고 하더니… 로톨로는 사제가 미덥지 않았다. 지금껏 사교장이나 행사에서 투명 인간 취급받던 로톨로 입장에서 나타의 태도는 무례 축에도 들지 못했기에 더더욱.

조용한 객실에서 즐길 거리라곤 창밖 풍경뿐이었으나 로톨로에게는 충분했다.

영지 밖에 나갈 일이 손에 꼽는데다가 평소에 틀어박혀 공부에만 매진했으니, 어떤 책의 삽화보다도 재밌었다. 커다란 나무와 오두막, 평야들이 뒤로 밀려나는 것처럼 빠르게 사라지고, 옆 선로를 타고 다른 기차가 잔상을 남기며 사라진다. 계속 반복되는데도 자꾸만 가슴이 설렜다.

로톨로가 알기에 성 나타께서는 제국 곳곳을 순회하신 경험이 있으시기에 그다지 새로운 것이 없으시리라 생각했는데, 그래도 재미있는 것인지 나타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로톨로는 성 나타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침묵했다. 그러다 로톨로는 문득 나타가 자신과 대화하고 싶지 않아 그러는 건 아니겠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멋진 풍경이군요.”

로톨로는 용기를 짜내어 최대한 무난한 주제를 꺼냈다. 나타는 여전히 로톨로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냥 그런데요.”

로톨로는 말을 꺼낸 걸 몹시 후회하고 아침 식사가 나올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베일 때문에 식사가 불편하지 않을까 했는데 성 나타는 아무렇지 않게 잼 바른 빵을 먹고 차를 마셨다. 오히려 처음 보는 사람과 식사하는 게 어색한 로톨로가 자꾸 차를 쏟을 뻔했다. 로톨로는 이러다 체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어, 소리죽여 성 나타 앞에서 제발 추태 부리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기차는 열심히 선로를 달렸다.

로톨로는 기차에서 내리려는 나타에게 다시 손을 건넸지만 나타는 또 무시했다. 로톨로는 머쓱해서 허리를 펴는 체하고 나타와 함께 역 바깥으로 나갔다. 출발할 때와 달리 여러 손님이 역 정 가운데 세워진 시계를 분주하게 스쳐 지나갔다. 커다란 시침은 10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로 곧 마차가 도착할 겁니다.”

역 근처 길에 서서 로톨로가 말했다. 나타는 고개를 얕게 끄덕거렸다. 얼마 기다릴 필요도 없이 마부의 모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로톨로는 앞장서서 마차의 문을 열었고 나타는 마차에 오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로톨로는 혹시 그게 저 때문일까 봐 일순 굳어버리고 말았다. 마차에 자리를 잡은 로톨로는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마차에는 침묵 마법이 걸려있어 저희 대화를 마부나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니 편히 계세요.”

나타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짧은 한숨을 또 쉬고는 중얼거렸다.

“자동차를 타보고 싶었는데…. 쪼잔한 영감.”

로톨로는 성 나타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단어에 입술을 오므리고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얼른 표정을 바로 했다. 갑작스레 성 나타가 자신의 또래라는 사실이 와 닿았다. 너무나 앳된 목소리였고, 길가에서 흔히 들을 법한 말투였다. 나타는 광인이라기보단 그저 평범한 청년 같았다. 물론 ‘성녀’의 언행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지만.

“이제야 소개합니다. 제 이름은 로톨로 파르시 구르트 판 디메인입니다. 디메인 자작가의 삼남으로…”

“이름 한 번 기네.”

나타가 툭 던진 한마디에 로톨로는 얼굴이 새빨개질 뻔했으나 겨우 참고 다음 말을 이었다.

“성 나타님이 요양을 보필하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았습니다. 모자라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열심히 해.”

나타는 자기소개도 없이(물론 나타를 모를 리가 없었지만)심드렁하게 다시 창밖에 머리를 기댔다가 이내 몸을 꼿꼿이 세우고 소리쳤다.

“저기 봐!”

나타의 격의 없는 말투에 놀라고 혼라스럽고 한껏 시무룩하던 로톨로는 나타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나타가 쳐다보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도시 출구 근처에 세워진 커다란 유리정원이었다. 색색의 유리들이 정교하게 세공되어 건물 노릇을 하는 상징물과도 같은 장소였다. 로톨로도 이야기나 사진만 봐 왔을 뿐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마차 밖의 사람들도 감탄하는 표정으로 유리정원을 거닐었다. 특히 물처럼 푸른색 원뿔 모양 유리 지붕 날아오르는 새 장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품 같았다.

“정말 아름답네요.”

로톨로는 아까의 우울했던 기분도 잊고 중얼거렸다. 나타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 건물들 좀 봐. 사람들이 전부 나가주기만 한다면 죄다 불태우고 싶어.”

로톨로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유리정원을 보고 올라갔던 입 꼬리조차 내리지 못했다. 누군가가 머리를 세게 때려서 그대로 몸 전체에 마비가 온 느낌이었다.

“그럼 꼭 막 활동을 끝낸 화산 같을 거야. 저런 게 다른 도시 출구에도 몇 개 있잖아? 하나쯤은 개성을 추구해도 돼.”

로톨로는 무어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머리에 사제의 말만이 울렸다. 직접 뵈면 알 걸세, 직접 뵈면, 결단코 하지 않을 언행을, 완전히 광인이 되셨다네, 완전히 광인이…

이제야 제대로 사제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기왕이면 내가 직접 불을 놓고 싶어. 재밌을 거야!”

베일에 가려진 ‘성녀’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웃고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저 베일 안에, 제국민 모두를 살린 그 성 나타가 있단 말인가? 역에서 보여주셨던 모든 행동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단 말인가? 로톨로는 식은땀이 맺혔다.

공교롭게도 마차는 점차 더 속도를 냈다. 문제의 유리정원을 구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덜컹거리는 마차에 어깨를 부딪치면서도 로톨로는 아픈 줄도 몰랐다. 펄럭이는 베일 사이로 순간 형형한 두 눈을 본 것 같았다.

로톨로는 얼이 빠진 채 관성적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멍하니 나타에게 손을 내밀자, 이번엔 로톨로의 손을 잡았다. 하마터면 로톨로는 나타의 손을 놓칠 뻔했다. 상황을 모르는 마부는 모자를 벗어 짧게 인사하곤 말을 돌려 떠나버렸다. 로톨로는 사람도 동물도 없는, 길조차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풀투성이인 시골길에서 마차를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 정신을 바로 차린 로톨로가 나타를 돌아봤다가 기절할 뻔했다.

나타는 길가의 나무 옆에 서서 검은 원피스의 단추를 열고, 팔을 빼내고 있었다. 양팔의 벨벳 장갑은 이미 팔에서 빠져나와 나뭇가지에 열매처럼 걸려있었다. 나타의 어깨가 휑하니 공기 중에 드러났다. 로톨로는 황급히 눈을 가렸다가, 이내 퍼뜩 제 재킷을 벗어 나타의 어깨에 걸쳤다. 그러자 나타는 짜증스럽게 로톨로의 재킷을 손으로 쳐냈다.

“언제까지 상복 차림으로 있게? 갈아입을 옷도 안 가져왔어?”

“아니, 저, 그렇다고 이렇게 길, 길에서…!”

“보는 사람도 없잖아! 빨리 입을 만한 거나 내놔봐!”

나타는 막무가내로 검은 드레스를 반쯤 벗은 채로 로톨로의 가방을 가리켰다. 로톨로는 아연하여 자꾸만 엇나가는 손으로 자기 트렁크를 열어 자기가 입으려고 했던 셔츠와 바지를 꺼냈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고개를 튼 로톨로가 옷을 내밀자 나타는 기뻐하며 받아 들고는 상의 부분이 허리까지 내려간 드레스를 더 밑으로 내리고 셔츠에 팔을 꿰었다.

로톨로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재킷을 펼쳐 나타의 탈의를 가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나타는 옷을 다 갈아입고 나무에 걸린 장갑과 벗어 던진 드레스를 로톨로에게 던졌다. 로톨로는 머뭇거리다가 드레스를 정리해 제 트렁크에 넣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상아색 셔츠를 입은 나타에게 남은 제 옷은 머리의 베일뿐이었다.

“이딴 걸 입고는 못 걷지.”

로톨로는 아직도 나타를 바라보지 못하고 트렁크를 쳐다보고 있느라 나타의 신발밖에 보지 못했다. 그리고 로톨로가 말릴 새도 없이 나타는 제 베일을 아래로 끌어내려 벗어버렸다.

눈앞에, 떨어지는 베일을 겨우 받친 로톨로의 눈앞에, 나타가 있었다.

항상 웃는 것 같은 입매, 개구쟁이 같은 동그란 눈매. 건강하고 활기찬 인상을 주는 진하고 짤막한 눈썹과 갈색이 도는 피부. 드문드문 새치가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 나타는 로톨로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머리카락과 옷깃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베일 속에서 흐트러진 건지 하나로 말아 묶었던 머리에는 잔머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알고 있겠지. 나는 나타. 나타 운센.”

고고한 성 나타의 성화와 같고, 너무나 다른 나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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