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과 성자는 욕심 한 톨 차이

광인과 성자는 욕심 한 톨 차이 3화

나라를 구한 미치광이

감히 바라고, 꿈꾸고, 간청하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시여.

빛을 내려 어둠의 안식을 깨닫게 하시고,

어둠을 드리워 빛의 축복을 우러러보게 해주신

첫 번째 은총을 저희의 첫 자식으로부터 여전히 잊지 않았나이다.

오늘도 변함없는 태양을 내려주시어

하루를 당신의 보살핌으로 살았습니다.

부디 저희에게, 성 나타께, 연약하고 존귀하신 몸을 딛고 당신께 더욱 고개 숙인 위대하신 성 나타님께 안녕을 내려주소서.

비록 지금은 우리의 둥지를 떠나셨더라도, 속히 당신의 충성스러운 딸로서 일하게 하소서.

어린 저희에게 성자 나타와 같은 신실함과 지혜…

눈을 감고 모두와 입을 맞춰 기도하던 아이의 탁자가 성경으로 매섭게 내리쳐졌다. 두 손을 모으고 있던 아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사제가 엄격한 눈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또 틀렸구나. 몇 번을 말할까? 나타께선 ‘성자’가 아니라 ‘성녀’란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혼난 것이 창피해 입술을 깨물었다.

별장을 향해 걷던 나타는 돌담을 보자마자 냉큼 올라탔다. 로톨로는 그를 말려야 할지 그냥 뜻대로 하시게 두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 나타를 따라갔다.

“넌 곱슬머리구나.”

갑자기 나타가 우뚝 멈추어서 로톨로를 보며 말했다.

로톨로는 집에서 죽기 살기로 펴고 왔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나타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벌써 다시 구불거리기 시작했나? 한참을 가도록 특별히 신경을 썼는데!

“나는 재해를 앞서 내다보고 막은 성 나타님인데 네 원래 모질조차 꿰뚫어 보지 못하겠어?”

로톨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챈 건지, 나타가 짓궂게 웃음을 터트리며 힘차게 발을 뻗었다. 로톨로는 제 머리를 더듬으며 아직 얌전히 빳빳한 자세를 잡은 머리카락들을 확인했다. 얼굴이 또 빨개질 것 같아 얼른 안경을 고쳐 쓰고 어깨를 펴고 앞을 보았다.

아직 도착조차 안 했는데 벌써 지친 것 같았다. 이대로 십여 분은 더 걸어야 인가를 피해 별장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텐데. 갈 길이 너무나 멀었다. 긴장과 혼란으로 어지러운 가운데, 태평하게 돌담을 뛰어다니는 나타를 보며 아주 잠시간 그저 시골에 휴양을 왔다는 착각이 들었다.

더 어릴 적엔 가족들과 함께 하나뿐인 별장으로 놀러 가는 날을 언제나 손꼽아 기다렸었다. 형들은 신이 나서 활을 챙겨 사냥하러 나갔기에, 그때만은 형들의 빈정거림을 피해 한산하고 아담한 정원에서 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문득 그 평화로웠던 순간이 그리워 로톨로는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이 요양 동안 지내게 될 별장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들판에 홀로 우뚝 자리 잡은 삼 층짜리 주택이었다. 오래전에 마을 주민이 사용하다가 방치된 건물로, 뒤쪽에는 작은 농장이 딸려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로톨로에게 농장 일을 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돌려 하는 셈이었다.

로톨로에게 이 일을 맡긴 캄파사제는 최대한 눈에 띄지 말 것을 강조하면서 둘이 살 주택 또한 매우 수수고, 약간 낡았다 했다. 그러면서도 성녀님께서 불편이 없으시도록 철저하게 정비했다고 덧붙였다.

평민의 평균 주거 생활양식을 떠올리면 삼층집이란 것 자체가 그다지 수수하지 않지만, 아직 그런 세상을 모르는 로톨로는 딴죽 걸지 않았다. 농사나 가축도, 참아볼 만했다. 식물을 좋아하니까.

나타는 가는 길 내내 갑자기 말하고 또 갑자기 한참을 침묵했기 때문에 가는 길에 둘은 그다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사실 로톨로는 나타와 더 대화하기가 두려웠다. 나타가 지나가는 동물이나 덤불 속 꽃 같은 사사로운 것을 가리키고 짧은 감상을 말하고, 자신은 그에 반응하는 정도의 대화가 딱 좋았다.

그마저도 나타가 갑자기 들판을 불태우고 싶다거나 저 나무를 뽑고 싶다고 말할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몇 개의 큰 나무, 산책하는 동네 개, 쓰지 않은 지 오래된 것 같은 우물, 나무로 만든 튼튼한 울타리를 지나 둘은 드디어 별장 뒷문에 당도했다. 수수하단 말이 거짓말은 아니라, 대문은 앞의 담벼락도 없었고, 마당은 진흙과 마른 풀로 가득했다.

로톨로는 처음에 이게 어딜 봐서 철저히 정비한 거지? 대문은 어디 있고? 란 다분히 도련님 같은 생각으로 인상을 썼다. 엄밀히 따지면 한참 걸어가면 울타리가 빙 둘러쳐져 있느니 대문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까 두 사람이 넘어온 울타리와 이어지는 울타리였다.

나타는 별장의 모습에도 별 감상이 없었는지 뒷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려 했다. 로톨로는 문의 걸쇠가 부딪치는 묵직한 금속 소리에 재빨리 뛰어가 뒷문을 받은 열쇠로 열었다. 나타는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부츠를 벗어 던져버렸다. 로톨로는 나타가 던진 신발을 주워들고 눈치를 살피며 문간 옆에 두었다.

“온갖 나무 냄새가 나.”

나타가 별장의 거실을 빙 둘러 걸으며 말했다.

“꼭 숲인 것 같아요.”

“넌 진짜 숲에 가본 적도 없어?”

나타가 우습다는 목소리로 말하며 거실의 유일한 가구인 새 소파를 손으로 쓸고, 마루의 둥근 카펫을 발로 밟았다. 벽은 아무 장식 없이 깨끗했다. 벽난로에는 쓰지 않은 나무토막 몇 개가 채워져 있었다. 나타가 벽난로 옆의 부지깽이를 들어보았다.

“나타님이 갖고 계실 열쇠는 여기에 있어요.”

로톨로가 나타에게 다가가 황동색 열쇠를 건넸다. 이 열쇠 또한 신전에서 새로 주조한 물건이라 들었다. 나타는 로톨로가 건넨 열쇠를 받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한참 말없이 부지깽이를 들고 거실에 서 있었다.

“저, 혹시 집이 너무 초라해서 기분이 상하신 건…”

조심스레 로톨로가 말을 꺼내자 나타가 아주 재미난 이야기라도 들은 사람처럼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그 웃음이 로톨로의 예상보다도 길어 로톨로는 겁까지 먹었다.

“아니. 마음에 들어. 특히 저 주방 좀 봐. 작업대 색이 푸른 벽돌이랑 마호가니 목재야. 흰 목재도 있어! 근사하잖아?”

나타는 손에 들린 부지깽이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기대가 담긴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작업대를 들여다봤다. 주방은 거실과 마찬가지로 휑했다. 요리도구 몇 가지도 선반이 아니라 나무 식탁에 정렬되어 있었고 식탁보는 없었다.

로톨로는 나타가 던진 부지깽이를 제대로 세워두며 나타가 보는 주방을 곁눈질로 살폈다. 좋게 말해주려 해도 로톨로의 눈엔 영웅이 살기엔 너무나 초라했다. 그래도 성녀님은 아까부터 마치 친구를 만난 어느 집의 아가씨처럼 매우 즐거워 보이셨다. 아무리 그래도 식자재는 채워 넣었겠지. 아, 가스등 연료는? 그건 있겠지?

나타가 실망했는지 작업대를 발로 가볍게 걷어찼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마도구가 아니잖아. 그냥 가스 오븐이야.”

“신전에서 마련해준 별장이니까요.”

“누가 모른대? 자동차도 안 되고 주방엔 마도구하나 없어. 시시하기 짝이 없네. 근처 시내에서 마구점이 있으면 좋겠는데.”

로톨로는 조만간 찾아보자고 말하며 찬장 안을 살폈다. 밀가루, 바구니에 담긴 큼직한 식사용 빵 두덩이, 치즈, 소시지. 그 옆에는 소금과 기본 조미료 몇 가지. 수납장을 열자 서늘한 곳에 보관된 채소 몇 가지가 보였다. 당근, 감자, 셀러리. 그리고 구석진 곳에 종이에 싸인 약간의 고기. 이것도 너무 소박했다.

짐을 부쳐 주기 전에, 눈에 띄지 않도록 조촐하게 해 둔 걸까? 잘난 게 없는 자작가에도 있는 냉장 보관용 마도구도 없으니, 앞으로 고생길이 열릴 듯했다. 암만 푸대접이 익숙해도 그렇지, 사용인이 할 일을 다 떠맡게 생긴 로톨로는 언짢았다.

내가 아니라 성녀님을 위해서라도 이런 대우는… 부조리하다고 느꼈다. 성년님께서 이젠 계단을 올라 복도를 뛰어다니는지 쿵쿵 소리가 울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나타님께선 정말 아무렇지 않으시다고? 혹은 숭고한 청빈함을 내가 모욕하고 있는 걸까? 로톨로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죄책감을 느꼈다. 차마 그 뒤의 생각은 이어갈 수 없었다.

나타께서 이젠 정말 광인이라, 이런 식의 대접에 불쾌해하실 마음이 없는 분이 되셨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머리를 눌러가며 쫓아내려고 애썼다. 겨우 잊었던 마차에서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나타께서는 분명 쾌차하실 거다. 그때까지 의심 없이 성 나타를 보좌하는 것이 내가 맡은 일이다…

로톨로의 속도 모르고 위층에서는 나타의 힘찬 발걸음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캄파사제는 나타를 보필하기 전 몇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는, 나타께서 요구하는 사항을 최대한 들어드릴 것, 둘째는, 나타께서 혹시라도 기도를 잊으신다면 최소한 식전 기도와 아침기도만은 올리시도록 할 것, 셋째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실 일을 배제하고, 넷째는 웬만하면 음식을 사 오지 말고 직접 요리하란 것이었다.

그렇게 말해놓고 식재료가 너무 초라한 거 아니야? 로톨로는 툴툴거리면서도 챙겨온 요리책을 꺼내 평생 첫 요리에 도전했다. 주방에 들어갈 일이라고는 어릴 적 악몽을 꾸고 나와 주방 하인들이 쿠키를 드리겠다고 부를 때뿐이었으니, 주방 도구들은 전부 생소했다.

요리를 해야 한단 사제의 말에 요리책을 미리 읽어보고 도구들을 살피긴 했지만, 준비할 시간이 너무 짧아 그런 곳에 할애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보단 나타님의 정신이 돌아오도록 할 방법을 고민해야 했지. 로톨로는 가장 쉬워 보이는 스튜를 요리하기로 했다.

호기롭게 냄비를 식탁에서 가져온 것 치고 로톨로는 오랫동안 도마에서 고전했다. 식칼은 검술 수업 시간에 잡아보던 칼과 너무나 달랐고, 감자는 깎을수록 작아졌다. 당근은 얼마나 씻어야 다 씻은 건지 알기가 어려웠다. 고기는 미끄덩거려 잘 썰리지 않아 하마터면 손을 벨 뻔했다.

시간은 훌쩍 흘러 벌써 점심때가 지나버렸다. 성녀님을 굶기다니... 로톨로는 이제 손까지 떨었다. 로톨로는 심호흡했다. 나는 지금 막중한 일을 하고 있어. 평생 맡아본 적도 없는 엄청난 일.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라고. 로톨로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여전히 채소들은 협조하지 않았다.

반면 나타는 로톨로가 뭘 하든 간에 상관이 없는지 로톨로에게서 빼앗은 옷을 그대로 입고 농장을 둘러본다며 나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로톨로의 요리가 더딘 이유 중 하나는 채소를 다 썰고 나타가 어디론가 가버렸을까 봐 생각날 때마다 뒷문을 열고 농장에서 나타의 그림자를 확인하는 과정을 요리 과정에 포함했기 때문이었다.

로톨로는 서서히 노을이 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재료를 끓는 물이 담긴 냄비에 쏟아 넣었다. 나타도 드디어 농장 구경을 마쳤는지 뒷문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로톨로는 땀을 닦고 손을 한 번 씻으며, 익어가며 점점 물색을 뿌옇게 만드는 재료들을 바라보며, 발소리가 더욱 가까워지길 기다렸다. 이게 바로 누군가를 돌보는 기쁨인가? 하고 감동했다.

발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이내 뒷문 밑에 달린 나무판자가 구두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로톨로는 자세를 바로 하고 나타가 들어오길 기다리다가, 나타가 아닌 무언가의 소리를 들었다. 꼭 작고 단단한 조각이 나무를 긁는 것 같고, 끙, 하는 소리가 섞인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래, 짐승이 헉헉거리는 것 같은… 로톨로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나, 나타님...?”

로톨로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주방 도구를 들고 경계했다.(그러나 그건 안타깝게도 스튜가 묻은 국자였다) 쿵, 육중한 무언가가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의 웃음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로톨로는 떨어지려 하지 않는 걸음을 겨우 떼어 뒷문 앞에 섰다.

“나타님, 괜찮으신 건가요?”

여전히 밖에선 나타의 웃음소리만 더욱 커졌다. 로톨로는 문고리를 손으로 잡았다. 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잡기 위해서. 로톨로가 뒷문 창으로 밖을 보려 할 때, 드디어 로톨로가 기다리던 목소리가터져나왔다.

“로톨로! 거기서 비켜! 내 강아지가 들어가야 하니까!”

“네? 강아지라니, 그게 무슨―”

로톨로가 되묻기도 전에 문이 큼직한 무언가에 의해 확 밀쳐졌다. 가느다란 로톨로는 그 힘에 상대가 되질 않아 그대로 뒤로 튕겨 나갔다. 부서질 듯 큰 소리를 내며 열린 문으로, 사람보다도 큰 털 덩어리가 뛰어들어 주방을 가로질렀다. 정체 모를 짐승이 지나간 자리에 진흙투성이 발자국이 마구잡이로 새겨졌다. 새 카펫에까지.

로톨로가 입을 헤 벌리고 그 동물을 바라보고 있자 나타가 짐승의 발 못지않게 진흙투성이가 되어선 외쳤다.

“사제한테 늑대를 타고 다니고 싶다고 졸랐더니 정말 줬어! 기회가 되면 이걸로 그 늙은이를 놀라게 해야지!”

오늘 하루 중 가장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건 거실에서 마구 냄새를 맡는 늑대 비슷한 것도 마찬가지인지, 사양 않고 소파를 밀고, 벽난로를 파내고 있었다. 초라하던 별장은 이제 초라하고 더럽기까지 했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H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