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 바그너의 시간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필시 그릇이나 잔이겠지. 학습된 기억으로 움찔 떨리는 몸과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었다. 여루는 저도 모르게 방문을 벌컥 열었다.
밖은 엉망이었다. 소파 근처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남성. 어디 맞았는지 긁혔는지 잘생긴 얼굴에 생채기가 나 있다. 그의 눈에는 희미한 경멸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질린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는 곳은 깨진 유리잔이 날아온 곳.
남성, 류세운의 맞은편에는 화난 모습의 채주현이 서 있었다. 얼핏 보면 조용히 분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루는 알았다. 저건 완전히 맛이 간 상태일 때의 채주현이다. 평소에도 미친 놈이지만 저런 눈빛일 때는 더 거칠어지는 그였다.
“류세운, 이 **새끼야. 다시 한번 말해봐.”
“너 때문이라고.”
“뭐?”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행복했 텐데. 너만 아니었으면 우리 다 괜찮았어. 네가 놔주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하... 주현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다. 그 고요한 자태가 오히려 공포심을 자극했다. 폭풍이 오기 전의 고요함? 아니, 이미 폭풍의 눈 속에 들어와 있어서 고요한 것일까? 여루는 나서지 못하고 문가에 어정쩡하게 서서 저도 모르게 몸을 더욱 긴장시켰다. 문틀을 붙잡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지금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너 따위가?”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리고 너 눈 돌아가면 손부터 먼저 올리는 버릇 좀 고쳐. 그러니 애가 너를 피하지.”
“네 주제에 나를 가르친다고? 너도 공범이야, 이 등신아... 여루 데려왔을 때 순순히 협조했던 건 너였어.”
“알아. 그랬지. 나도 잘못한 거 알아. 그러니까 이제 바로잡자고.”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이제 그만하자.”
애들... 다른 애들은 어디에 있지? 여루는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방의 인기척을 살폈다. 지금 숙소에 있는 건 채주현과 류세운, 그리고 저뿐인 것 같았다. 개인 스케줄인가? 왜 이 둘만 남아있는 거야, 하필이면 제일 사이 안 좋은 둘이...
여루는 안절부절못하며 세운과 눈을 마주치려 애썼다. 주현은 분노로 인해 주변 인식이 조금 느린 듯 했다. 세운이 여루의 인기척을 먼저 감지하고 움찔하며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가던 주현도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여루야. 깼어?”
“......”
미안해, 시끄러웠어? 주현이 돌연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었다. 여루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지만 주현이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는 자연스럽게 여루를 꼭 끌어안으며 고개를 숙여 뺨에 입을 맞추었다. 뒤쪽에서 세운이 헛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주현은 전혀 신경 쓰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마치 이 공간에 저희 둘만 있는 것처럼.
“야, 채주현. 권여루 놓고 나랑 얘기해.”
“여루야. 배고프지? 깼으니까 밥 먹자. 뭐 해줄까?”
“...채주현!”
지겨웠다. 이 모든 상황이. 몇 번이나 마주했던 이러한 순간들이 너무 지겨워서 숨이 막힐 정도로. 순간의 연속은 경험이 되고, 어떤 순간들은 정신에까지 깊게 뿌리를 내려 사람을 괴롭힌다. 그 순간들은 여루의 과거이자 현재였다.
여루는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두어 번 심호흡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주현의 가슴을 밀어냈다. 의외로 그는 순순히 떨어져 주었다.
“너 류세운이랑 얘기 중이던 거 아니었어? 밥은 됐으니까 둘이 마저 얘기해.”
“...류세운? ...아.”
주현은 아주 느릿하게 그런 존재에 대해서 떠올리는 듯했다. 그 행동이 연기 따위가 아니란 걸 알아서 순간 소름이 끼쳤다. 정말로 그는 방금 전까지 욕설을 하며 싸웠던 상대에 대해 잊은 것이다. 아니, ‘지워버린’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 순식간에 주위의 모든 걸 지워버릴 수가 있지? 그는 과연 ‘정상적인’ 사람이 맞나?
“그래... 얘기 중이었지.”
“......”
“류세운. 방금 하던 얘긴 없던 걸로 하자.”
“...뭐?”
“여루야, 밥 안 먹을 거면 씻고 나와. 나 오늘 스케줄 없어서 온종일 너랑 있을 수 있어.”
그 말에 여루가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이내 꾹 닫고는 몸을 홱 돌려 욕실로 향했다. 그 모습에 기가 막혀 세운이 할 말을 잊고 주현을 노려보던 순간이었다.
툭.
투둑. 툭. 툭.
솨아아아───
갑작스레 비가 내렸다. 소나기였다. 거실 베란다의 유리문이 열려있던 탓에 빗소리가 빠른 속도로 공간을 채웠다. 그건 평범했을 하루의 종언을 고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제정신으로 미친 채주현의 인내심을 끊어놓는 소리이기도 했다.
빗소리를 들은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고 여루가 반사되는 기억으로 몸을 흠칫하던 때. 쐐기를 박듯 번개가 치더니 쿠르릉, 천둥소리가 셋이 서 있는 거실을 갈라놓았다. 여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는 항상 자신을…
───이 또한 미래에 벌어질 소년 소녀의 일. 바그너가 흐르는 시간 속, 여루가 주현에 의해 납치당한 이후의 일이다.
*참고 : Wagner: Tristan und Isolde, WWV 90 - Pre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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