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찰나의 여름 (1)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이거 놓고 얘기해!”
“너 왜 권지윤이랑 친하게 지내?”
고전문학부 동아리실. 석양이 허한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학생들은 이미 하교할 시간이었다. 문가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두 명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채주현! 너 이상해. 왜 그래 진짜? 난 친구도 사귀면 안 돼?”
“어. 안 돼. 이제 더 이상 다른 친구 만들지 마.”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하는데? 네가 내 엄마야?”
여루가 붙잡힌 손목을 비틀어대며 주현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강해지는 악력에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윽… 아파. 좀... 놓고 얘기하면 안 될까?”
“다시는 권지윤이랑 같이 안 다닌다고 나랑 약속해.”
벌써 한 시간째였다. 여루는 교실 벽에 걸린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숫자를 확인하고는 주현을 달래는 쪽으로 작전을 바꿨다.
“주현아... 알겠어. 일단 알겠으니까 이만 놔줘.”
“...”
무서운 기세로 자신을 쏘아보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손목을 천천히 놔준다. 잡혔던 손목은 빨갛다 못해 푸르게 멍이 들 것만 같은 상태였다. 여루는 흐르려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안심시켰다.
“걔랑 딱히 뭐가 있는 건 아니야. 그냥 전학생이래서 신기해서 그냥 몇 번 얘기해본 게 다야. 나한테 진짜 친구는 너밖에 없는 거... 너도 알잖아.”
“……”
“주현아. 우리 친구잖아. 그치…? 너 이렇게 집착하는 거… 나는 이상해. 우리 알고 지낸 시간이 그렇게 긴 것도 아니잖아.”
이상한 정적이 교실 내부를 감쌌다. 해가 곧 지는지 구름이 해를 가렸는지. 순식간에 안이 어두워졌다.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만이 오로지 자신을 똑바로 향해 있었다. 여루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부러 밝은 척 주현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었다. 절대 먼저 스킨십을 하는 일이 없는 여루였기에, 순간 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가자. 오늘은 같이 하교하자. 어차피 소연이랑... 애들도 다 먼저 갔을 거 같으니까.”
자신이 왜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화를 내는 그를 안심시키고 달래야 하는지. 왜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두운 감정이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있었으나,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
“─여루야. 여기 있었어?”
“...주현아.”
어느 점심시간, 텅 빈 교실.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운동장의 함성과 열기. 그것과 대비되게 적막이 가득 고여 있던 별관의 동아리 전용 교실이 누군가의 방문으로 소음을 흘려보냈다.
남학생은 더없이 익숙한 모습으로 교실 안에 들어와 미닫이문을 조용히 닫았다. 다시 뒤를 돌아 교실 안 여학생을 바라보는 주현의 낯은 그저 조용한 미소로 가득했다.
“한참을 찾았어. 동아리실에 있었어?”
“응. 여기는 조용하니까.”
“혼자 사색에 잠겨 있었던 거야? 너답네.”
“사색이라니... 그런 대단히 감상적인 기분은 아니었거든? 하아...”
여루가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 몸을 기대었다. 여름의 미풍이 들어와 교실 안을 휘젓기 시작한다. 처음은 커튼. 그다음은 창가에 걸터앉은 소녀의 머리카락. 입학식 때보다 많이 길었다. 중 단발이던 머리가 어느새 자라 부드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주현은 홀린 듯 그녀에게 다가가 슬쩍 옆에 걸터앉았다.
“......”
“......”
둘 다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 여루는 바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살짝 인상을 쓰고 있었고, 주현은 허공 어딘가를 적당히 응시하며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들은 어제 싸우고 처음으로 만난 참이니까.
어제 방과 후. 별관의 교실에서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였고 결국 여루가 억지로 화난 주현을 달래며 자리를 무마했었다. 그녀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결국 먼저 사과함으로써 그의 반응을 끌어내는 것을 택했다.
“어제는... 으음. 미안했어. 너무 화내서 미안해.”
“괜찮아.”
“정말? ...정말 괜찮아?”
“응.”
“...”
여루가 질린 표정으로 주현을 응시하며 고개를 모로 꺾었다. 기대했던 사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사과하는 대신 주현은 애매한 표정으로 저를 응시하는 소녀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여루는 다시 한숨 쉬고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채주현. 근데 너 진짜 자꾸 나한테 그렇게 간섭하는 거 정상은 아니야. 알지?”
“채주현이라고 하지 마. 정 없어 보여.”
“윽... 알았어. 근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우린 그냥 친구야. ...그치?”
“응. 친구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고 사랑하는 친구.”
“주현아, 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라고. 하아, 정말...”
여루가 버릇처럼 미간을 짚으며 연이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저를 쳐다보며 뭐가 그리 좋은지 방긋방긋 웃는 소년. 넌 진짜 왜 그 모양이냐...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여루는 참았다. 얘가 이상한 게 한두 번이던가? 여루는 한여름의 그 사건을 떠올렸다.
‘좋아해. 나랑 사귀자.’
‘...싫어.’
‘왜? 너도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주현아.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면 안 될까?’
‘난 너랑 친구 하기 싫은데.’
‘……’
‘그 많은 친구 중 한 명이 아니라, 너한테 하나뿐인 사람이 되고 싶은데…넌 아니야?’
거절한 뒤 그의 반응이 조금 무서웠지만, 그래도 잘 돌려 말하며 그의 고백을 거절했었다. 아이돌 한다는 애가 무슨 연애를 한다고… 게다가, 여루는 같은 반 일부 여학생들을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주현과 사귄다는 소문이 나는 건 더욱 싫었다. ...그냥, 거창한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왠지 두려웠다.
주현의 고백을 걷어차고 친구로 지내자고 한 후로 둘의 관계는 이전과 같았다. 같아 보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채주현은 권여루의 삶에 너무 직접적으로 관여하려 들었다. 여루는 그게 불편했다. 뭔가, 그와 저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그만하라고 했다. 하지만 채주현은 알겠다는 대답만 하고 여전히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입만 살았지 아주. 그래도 선을 넘지는 않았었다. 다른 이들이 본다면 이미 선을 넘은 것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아직 여루의 한계를 시험하는 선까지 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것이 못내 불안했다. 이대로라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그어 놓은 선을 넘어 채주현이 제게로 덮쳐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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