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봄볕, 산들바람, 그리고 체육복 (2)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동아리?”
“응. 하누고 신입생은 무조건 이달 말까지 한 개의 동아리에 가입해야 한대. 이번 달이 마감이라더라?”
조회 때 졸고 있어서 제대로 공지를 듣지 못했나 보다. 동아리라니. 아무래도 하누고가 자율 활동 시범 학교로 선정되는 바람에 동아리 활동을 반강제적으로 밀어주는 모양이라고 소연이가 덧붙였다.
“근데 여루야. 여기 교칙 프린트에 보면, ‘창의적 체험 활동 중에서도 동아리 활동에 배점을 크게 두어 60% 비율로 환산한다.’라고 되어 있어. 외부 활동이나 봉사 활동으로 점수 딸 거 아니면 그냥 동아리 들어가는 게 편할 듯. 솔직히 그런 거 다 귀찮잖아.”
“그런가... 무슨 동아리 들어가지? 소연이 넌 정했어?”
“난 당연히 미술부지.”
어느새 소연이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그 어머니가 사실 화가라는 것까지 의도치 않게 알게 된 여루였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소연이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본인 말로는 잘 그린다고도 했다. 당연히 미술 동아리에 들어가겠지.
그럼 난 어디에 들어가지.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적당히 독서 동아리 같은 게 있으면 그런 데나 들어갈까. 그러나 고민이 무색하게도 여루의 거취가 정해졌다. 본인의 의사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배정이었다.
“...고전문학부...?”
자칭 반장이 될 한 여학생이 칠판 앞으로 나오더니, 제일 먼저 들어가고 싶은 동아리를 선점하고는 인원수에 맞게 지원자를 받아 척척 배정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아이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먼저 손을 들었고, 목소리가 큰 순서대로 원하는 동아리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눈치만 보며 가만히 있던 여루는 자연스레 선택하고 남은 동아리 한 곳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전문학부였다. 그래, 여기까진 괜찮다. 고전문학부도 독서 관련된 동아리인 것 같으니까 성향에는 맞겠지.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 나머지 동아리가 폐부 직전 부원 1명의, 소위 말하는 폐망한 동아리였다는 점이다. 이건 자신이 원했던 평범한 일상과 조금 멀어지는 그림이었다. 이러다가 자발적 아싸가 되어 반에서 겉돌게 되면 곤란했다.
- 그럼 여루는 고전문학부 하는 걸로~ 오케이, 다 됐네!
자칭 반장이 분필로 고전문학부라 써진 글자 밑에 여루의 이름을 써넣는다. 여루의 눈에는 그게 마치 사형수의 이름을 적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칠판을 바라보는 여루의 옆얼굴을 힐끗거리던 소연이 옆 사람과 떠들던 것을 멈추고 갑자기 자칭 반장을 불러세웠다.
“혜영아! 나 지금 동아리 바꿔도 됨?”
“엥? 갑자기?”
“그냥. 마음이 바뀌었어. 고전문학부 할래~.”
그 말에 자칭 반장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적선하기는...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여루는 그 말을 흘려들으며 소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소연이 힘차게 손으로 브이 표시를 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조금 어이가 없었다. 도와달라고 한 적 없는데… 애초에 유리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에게 계속 친근하게 대하는 소연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또 같이 어울리지는 않고 매번 그룹을 바꿔가며 여러 아이와 어울려 다닌다. 대체 무슨 의도인지.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마음과는 달리 만면에 미소를 띤 여루가 살짝 고갯짓을 해주었다. 그것이 긍정적인 무언가라 생각했는지 소연의 표정이 더욱 밝아지며 씨익 웃는 것이 아닌가.
그래, 쟤가 좋으니 됐다. 적어도 저 미소에 악의는 없어 보이니. 그렇게 미래의 고전문학부 4인방 중 2명이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
권여루는 영원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영속 또한 믿지 않았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늦봄의 하늘이 찬란하게 무너졌다.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나가고 눈 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어느 늦은 봄날 아침이었다.
아니, 교복 또한 하복으로 바뀌는 중이니 이제는 초여름이라고 해야 할까. 교실 창가 자리에 위치한 자신의 책상 위에서 책을 읽던 여루는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설 속 내밀한 속삭임이 멀어져가고 운동장의 고함과 비명이 훅 끼쳐왔다. 점심시간을 맞아 아이들로 가득한 운동장은 이미 그들에게 놀이터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정자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여학생들, 밥 먹고 운동장을 빙빙 돌며 수다를 떠는 무리들. 한쪽에서는 남학생들이 축구나 농구를 하고 있다.
저기에 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무리에 섞이지 못해 떨어져 나가는 것은 사양이었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찰나였다.
“여루야!”
“...소연아.”
“남은 시간 동안 운동장 돌러 나갈래?”
“그럴까.”
타이밍이 좋았다. 책을 덮고 교복 치마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연을 따라 교실을 가로질러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혔다.
“...!”
“...아, 미안. 괜찮아?”
부딪힌 상대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청량하고 무거운 향. 그렇지만 부담스럽지 않았고, 반대로 기분이 좋아지는 상쾌한 향이었다. 여루는 살짝 고개를 올려 사과 인사를 꺼낸 상대를 보았다.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저 잘생긴 얼굴을 보니 분명 아이돌 연습생을 한다고 애들이 떠들어대던 남자애 같은데. 아무리 반 친구들에게 관심이 없는 여루라도 같은 반에 연습생이 있다는 소문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으응, 괜찮아.”
“...”
바로 앞에서 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여루는 갑작스러운 상대의 등장에 멍해진 소연의 팔을 붙잡고 서둘러 복도로 나갔다. 순식간에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몰린 탓이었다.
“진짜 잘생겼다. 연습생 한다더니 진짜인가 봐.”
“누구?”
“너랑 방금 부딪힌 애. 채주현 몰라?”
“아, 채주현.”
그런 이름이었구나. 입속으로 이름을 굴려보았다. 중성적인 이름. 어차피 저와는 상관없을 그런 이름이었다. 삶이란 자고로 주목받지 않고 적당히 인파에 섞여 이리저리 흘러 다니다 마치면 그만인 것을.
실패한 인생을 살지 않을 거라는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주제에 그런 생각을 했다. 남모를 시선들을 받는 인생은 피곤하다. 그러므로 저 애는 감내하는 삶을 살게 되겠지.
여루는 연예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감히 동정하는 편이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타인의 시선을 견디며 자신을 빛내는 존재들.
그건 분명 성공한 인생 중 하나임에 틀림없어 보였지만, 그런 삶이라면 차라리 다른 성공을 택하는 게 낫지 싶었다. 권여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쟤 집안 빽이 대단하다고 하더라.”
“그래?”
“소속사도 대형 기획사였으니까 인생 필 날만 남은 거지. 부럽다~.”
“난 잘 모르겠네... 연예계는 관심 없어서. 그보다 5교시 뭐였더라?”
“체육. 너 체육복은 가지고 있어?”
“아... 그게. 저번에 9반 애한테 빌려줬던 거 아직 돌려 못 받았는데.”
“너도 참...”
걔 체육복 빌려 갔던 게 저번 주 아니었어? 빨리 다른 데서 구해오는 게 낫지 않아?
소연의 말을 흘려들으며 운동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러게... 어떡하지. 적당히 대꾸해주었다. 체육 선생한테 혼날 걸 걱정하지는 않았다.
나름 모범생으로 지내왔고 그동안 보인 게 있어서 말만 잘하면 넘어 가줄 것이다. 뭣하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보건실에 가도 되고.
그런데 아까 그 눈빛이 계속 머릿속에 잔상처럼 어른거렸다. 괜찮다고 말하는 자기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던 시선. 무슨 의미였을까, 그건. 딱히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으니 부딪혔다고 기분 나쁜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뜻 모를 시선을 되새기다 보니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털어버리고 잊어버리자. 같은 반이라 계속 볼 얼굴이긴 하지만 말만 섞지 않으면 엮일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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