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1화. 봄볕, 산들바람, 그리고 체육복 (3)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말만 섞지 않으면 엮일 일도 없을 거라니. 큰 착각이었다. 여루는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내려다봤다. 아니, 정확히는 그 손에 들린 청록색의 여름 체육복을.

“...”

뒤에서 같이 체육복 없으면 체육 선생이 죽일 거라며 같이 걱정해주던 소연이가 숨을 죽이고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서 받으라는 듯 체육복을 들은 손이 짧게 흔들렸다.

“...그, 네 건 나한테 너무 커.”

“고무줄로 되어있으니까 괜찮을걸.”

“...알겠어. 고마워.”

굳이 그럼 너는 어떻게 하는데? 따위의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냥 고맙다는 짧은 인사와 함께 체육복을 받았다.

그런 여루의 모습을 잠시 감상하듯 바라보던 채주현은 곧 어슬렁어슬렁 교실 밖으로 나갔다. 다른 반 애한테 빌리기라도 하려나? 괜한 생각이었다. 본인이 알아서 하겠지.

여루는 제 손에 들린 주현의 옷을 만지작거렸다. ...여름 체육복에서는 아까 저 애에게서 맡았던 청량한 향이 느껴졌다.

“얘들아! 체육이 빨리 나오래. 옷을 만들어서 입고 오냐는데?”

“헉, 쌤 빡쳤나 보다. 빨리 옷 갈아입어, 여루야.”

“그래, 알았어. 운동장 뛰게 시킬 수도 있으니까... 빨리 가자.”

복도에서 외치는 같은 반 아이의 목소리에 둘은 허둥지둥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화장을 고치고 머리를 매만지고. 거울을 보느라 남은 아이들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여루는 주현의 체육복을 들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

예상했던 것처럼 옷 품이 넉넉했다. 반팔임에도 불구하고 팔꿈치까지 덮는 소맷자락을 몇 번 접어 올리고, 괜히 길어 보이는 반바지도 무릎 위까지 접어 올려 다른 여자아이들과 길이를 대충 맞췄다. 옷 색이 짙은 색이라 접은 게 크게 눈에 띄지는 않을... 려나? 모르겠다.

남자애들은 축구를 하고 여자애들은 피구를 하고. 늘 똑같은 패턴의 수업 시간이었다. 여루는 날아오는 공을 대충 피하며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저를 쳐다보는 몇몇 여자아이들을 무시했다.

역시 딱 봐도 남자 옷인 게 티가 났나 보다. 왠지 저한테서 채주현이라는 애의 체향이 나는 것 같아 낯부끄럽기도 했다.

아니, 내가 왜 창피해야 하는데? 먼저 빌려준 건 걔였다고. 역시 그냥 체육한테 혼나고 말 걸 그랬나. 갑자기 보건실 침대가 그리워졌다. 그 선택지도 괜찮았을 텐데.

“...아!”

“권여루 아웃! 나가서 수비해.”

“으, 알았어...”

딴생각을 하다 공에 맞았다. 얼얼한 팔꿈치를 쓰다듬으며 아웃라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흘끗 운동장 쪽을 보니 남자애들이 신나게 축구를 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쟤네는 참 재밌게도 논다. 공에 맞아 흘러내린 소매를 재차 접어 올리고는 다시 한창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피구 경기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먼저 아웃되어서 수비를 하고 있었던 소연이 말을 걸어왔다.

“여루야. 쟤 아까부터 자꾸 너 쳐다본다.”

“...? 누가?”

“채주현.”

“?”

“너 피구 하면서 여자애들이 계속 쟤 쳐다보는 거 몰라? 근데 쟤가 자꾸 너 흘긋거리니까 애들이 샘나서 너 이상하게 보는 거잖아.”

“아...”

체격에 맞지 않는 체육복이 이상해서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던 게 아니었다. 채주현이 경기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을 자꾸 쳐다보니까 둘이 뭐 있었냐는 눈빛으로 자신을 봤던 거였다. 그런 거였나. 근데 쟤는 자신한테 체육복을 빌려줬던 게 그렇게 신경 쓰이면 왜 굳이 빌려줬던 걸까?

“채주현도 네가 예쁜 거 알긴 아네.”

“뭐래. 난 화장도 안 하는데.”

“너 정도면 예쁘지, 뭘. 화장해서 예쁜 건 진짜 예쁜 게 아니라고 우리 엄마가 그랬어. 그리고 넌 피부도 좋잖아.”

“알았어, 그 얘기는 됐고. 수비에나 신경 써.”

“어련하시겠어~. 부끄러워하기는!”

소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팔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탁 쳤다. 그러자 그 반동으로 접어 올렸던 소매가 다시 풀어져 팔꿈치까지 쑥 내려와 버렸다. 그냥 옷자락 나풀거리면서 경기에 임해야겠다. 어쩔 수 없지, 뭐.

*

“누나. 체육복 없었어요? 제가 빌려줄 수 있었는데. 저 체육복 두 벌 있잖아요.”

“야, 넌 얘한테 학교에서까지 누나라고 부르냐.”

“왜, 어때서. 근데 그건 누구 거예요?”

“...채주현.”

“? 주현이 형 거요?”

체육 시간이 끝난 쉬는 시간. 옷을 갈아입고 온 여루가 반듯하게 개어놓은 체육복을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자 하늘과 소연이 그녀 주변으로 다가왔다.

요즘은 이 셋이서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여루는 소연과 친했고 소연은 하늘과 소꿉친구 사이였다. 그래서인지 같이 다니는 일이 늘었고, 서로 금방 친해졌다.

하늘은 여루와 같은 학년이면서 빠른 연생이라는 이유로 여루에게 누나라 불렀고─주현에게는 연습생 때부터 그냥 형이라고 부른 것 같았다─ 소꿉친구인 소연에게는 말을 놨다.

소연과도 태어난 연도가 다르면서 참 이상한 일이었지만, 여루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어차피 주현한테도 형이라고 부르는 게 익숙한 듯 했고, 누나라고 불리는 게 딱히 나쁜 것도 아니고. 호칭 때문에 가끔씩 모이는 시선이 불편하긴 하지만.

그는 주현과 같은 소속사의 연습생이었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본인이 전혀 어필하지 않고 오히려 숨기는 탓이었다. 여루도 이번에 하늘이 말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어, 그럼 형은 체육 시간 어떻게 했대요? 다른 반 애 거 빌렸나?”

“그렇지 않을까? 아까 빌려주고 다른 반으로 나가는 것 같던데.”

“이거 돌려줘야 하는데. 주현이가 안 보이네.”

“아, 형은 방금 체육 끝나자마자 조퇴서 쓰고 연습실 갔는데.”

서하늘이 머쓱하게 옆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뭔가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캐묻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체육복이야 나중에 돌려주면 되겠지. 급한 것도 아니고. 괜히 팔을 들어 코끝에 갖다 대었다. 그 애의 옷을 입고 뛰었더니 역시나 자신한테서 그 무겁고 청량한 체향이 나는 것 같았다. 맡으면 곧바로 여름이 연상되는 더운 계절의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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