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손을 녹여주세요 - 프롤로그
프롤로그
오전 내내 몰아치던 눈보라가 잠잠해졌다. 오후가 되니 거짓말처럼 날이 개었다. 막 출발했을 땐 코앞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둑했던 하늘이 신기할 정도로 맑아졌다. 군데군데 구름이 떠 있긴 했으나 해를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창을 살짝 열자, 햇빛과 함께 찬바람이 들이닥쳤다. 피부를 베어내는 듯한 한기에 다시 창을 닫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설원 저 멀리 우뚝 선 성채를 눈에 담으니 곧 마음이 고요해졌다.
검은 성채. 틸라마르 대공이 다스리는 성. 앞으로 아멜이 살아갈 곳. 앞으로 이틀 뒤면 틸라마르 대공의 부인이 되어 이곳에서 잠들고, 이곳에서 깨어나게 될 터였다. 평생. 시야에 담기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흰 눈뿐인 곳. 사시사철 눈이 내려 땅이 드러나는 일이 없다는 혹한의 대지. 눈보라의 땅, 겨울의 문지기. 왕국 최북단의 땅, 하르시움과 헤르카의 주인이자 대공인 에티엔 클로틸드 틸라마르가 다스리는 곳에서 여생을 마감하게 되리라. 맑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던 고향, 이스타나의 땅을 다시 밟는 일 없이. 떠나올 결심을 한 뒤로 내내 잊지 않았던 사실인데도 새삼스럽게 실감이 났다. 아마, 피부를 세차게 긁어내듯 아리게 스미는 바람 탓이리라.
아멜은 창문을 닫고 다시 담요를 여몄다. 미적지근한 온기가 남은 물주머니를 끌어안고 앞을 보자, 라샤 경이 아멜을 향해 살짝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헤르카 초입부터 사흘 내내 한 마차를 타고 왔는데도 아직은 좀 서먹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주군의 부인될 사람과 친근해지는 건 좀 어렵겠지. 그는 에티엔, 그러니까 틸라마르 대공의 수석 보좌관이니 앞으로도 계속 얼굴을 볼 사이니까 빨리 친해지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으로 오는 내내 이것저것 말을 붙였는데 대화가 적당히 통했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화할 땐 분명 제법 즐거웠는데.
라샤는 무뚝뚝하고 찬 바람이 쌩쌩 분다는 틸라마르 대공을 모시는 사람답지 않게, 혹은 그런 이를 모시는 사람답게, 말재주가 좋았다. 대공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곁에 두는 타입이라면 전자가 맞을 테고,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후자가 맞을 텐데. 아마 대공은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지 않을까? 아멜은 머릿속에서 구성한 대공의 이미지에 한 가지를 덧붙여 넣었다. 부족한 것을 채워줄 사람을 곁에 두는 타입. 청혼을 받은 이후 지금까지 얼기설기 짜맞춰 온 대공의 이미지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북부의 찬바람을 죄다 통과 시켜 얼굴로 맞을 수도 있을 만큼. 이 형편없는 직물은 대공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 얼마만큼 뒤틀어질까. 어차피 얼마 안 가 알게 되리라.
그보다 중요한 건 라샤와의 어색한 기류가 얼마간 괜찮아졌다가도 다시 심해진다는 것이었다. 아멜은 본래 사교성이 좋아 처음 만난 이와도 막역한 사이처럼 친근하게 구는 재주가 있었다. 사람과 빨리 친해지는 것은 아멜의 장점 중 하나였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더 친해졌어야 하는데…… 북부인에게는 통하지 않는 재주였을까?
하지만 그런 사실에 실망하지 않는 것 또한 아멜의 장점 중 하나였다.
“헤르카의 날씨가 변덕스럽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지내다 보면 더 놀라게 되실 겁니다. 고양이도 이 지역 날씨보다는 일관성이 있을 테니까요.”
“그 정도인가요?”
“말도 마십시오. 아침에 맑아서 바깥에 일하러 나갔다가 살아 움직이는 눈사람이 되어 돌아오는 일은 일상다반사입니다.”
아멜이 친근하게 말을 붙이자, 라샤가 조금은 농을 섞어 답했다. 그래, 이런 것을 보면 말은 적당히 잘 통하는 것도 같은데. 라샤의 태도는 어딘가 조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팔려 오다시피 결혼하러 오게 된 이에 대한 동정심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야 아무도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 ‘저주받은 괴물 대공’이 막대한 지참금을 지불하고 데려온 부인이니까. 라샤는 이 결혼이 절대 '보통'의 결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가 아멜을 볼 때마다 영 찜찜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어떤 직감이 쉼 없이 정신을 두드렸다. 네가 모르는 것이 있어. 그걸 알아내야 해. 하고 말이었다. 학자적 직감일까, 아니면 그저 예민함일까. 이것 또한 시간이 지나 보면 알게 될 테지만……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기려 드는 것이 분명했으니.
“어머……. 경험담인가요?”
지금은 시답잖은 잡담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는 게 아멜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야, 달리는 마차 안이니까. 아멜은 궁금하다는 듯 라샤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라샤가 씩 웃었다.
“물론입니다. 경험담이죠. 아차, 도착하기도 전에 너무 나쁜 선입견을 심어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라샤는 은근히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일부러 난처한 표정과 익살스러운 표정을 섞어 내비쳤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오히려 흥미로운걸요. 그토록 날씨가 변덕스러운데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궁금하고, 혹시나 잘 맞추는 사람은 없는지도 궁금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변덕을 부리는 대로 휘둘리는 수밖에는 없긴 합니다만, 이 지역에 오래 살았던 노인 중에는 눈보라 치는 날을 기가 막히게 맞추시는 분이 꽤 많지요.”
“어떻게 맞추시는 건가요? 감?”
“아뇨, 저희 할머니 얘기입니다만, 눈보라가 치기 한 시간 전부터는 왼쪽 무릎이 유독 아프시답니다. 그것도 쿡쿡 쑤신다는군요.”
비밀 얘기라도 하듯이 소곤대는 말에 아멜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안타까움을 반쯤 섞은 웃음이었다.
“저런…… 젊은 사람은 가질 수 없는 예지였네요.”
“가끔은 젊은 녀석도 가질 수 있습니다. 마물에게 다친 상처가 유독 쑤시는 날엔 항상 눈보라가 친다고 보면 됩니다.”
라샤가 부러 과장하듯 옆구리를 쥐어가며 말했다. 아멜은 그에 맞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아. 요새도 마물이 많이 나타나나요?”
“아시겠지만 전진 기지 쪽의 결계가 워낙에 튼튼해서요. 초대 대공께서 결계를 세우신 이후로는 기지 안쪽으로, 그러니까 저희 땅으로 마물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지요. 하지만 기사들은 결계 외부 순찰을 하는 데다가 주기적으로 토벌 작업도 하니까요.”
“그렇겠네요. 새삼스럽지만 그분들의 노고 덕분에 이 땅이 안전하고, 또 이 나라가 안전한 거겠죠.”
“하하, 그렇게 얘기해주시는 걸 들으니 좀 기운이 나네요. 하여간 그게 아니더라도 훈련 중에 다치는 일도 잦고요. 병장기를 다룬다는 건 위험한 일이잖습니까. 그리고 때로는…….”
“때로는?”
“사람 사이의 싸움에 끼게 되는 경우도 있지요. 저번엔 용병단끼리 싸움이 붙어서 그걸 제지한다고 끼었다가 큰일 난 경우도 있었지요. 아, 요건 제 얘기는 아닙니다만.”
덧붙인 말에 잔웃음을 삼키는 사이 라샤의 말이 이어졌다.
“리캄이라고 덩치가 유독 큰 친구가 있는데 아시겠지만, 그런 친구가 사이에 끼면 보통 싸움이 진정되기 마련이잖습니까? 근데 그날은 또 유독 용병들이 흥분했는지 그 녀석이 사이에 껴서 그만하라고 했는데도 도리어 그 녀석이 입은 갑옷을 막 두들겨 가면서 자기들끼리 싸웠지 뭡니까? 덕분에 갑옷이 형편없이 우그러져서는 벗느라 고생했다지요. 크게 다친 건 아닙니다만 온몸에 멍이 들어서는 꼭 눈 태풍이 오기 직전 같다며 죽는 소릴 하더군요.”
아멜도 라샤를 따라서 잘게 웃었다. 남의 고생담에 웃는 것이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없는 자리이니 이 정도는 봐줄 터였다. 예비 대공비의 심심함을 달래주기 위한 이야기거리로 사용되었다는 것에 불만을 표시할 기사는 아마 드물 테니까.
“저런……. 정말 고생이 많았겠어요. 보통 용병들은 어떤 이유로 많이들 오나요? 마물 구경? 혹은 채집?”
“예, 마물 대상으로 경험을 쌓는다고 오는 녀석들도 있고, 또 볼 게 없는 땅을 굳이 구경하러 오는 할 일 없는 사람들 호위 역으로도 종종 오죠. 보통은 상단 호위 역으로 많이 옵니다만, 말씀하신 대로 이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몇몇 식물이나 동물, 돌 따위를 채집한다고 오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라샤가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채집 쪽은 아멜리아나 님께서 더 잘 아시겠군요. 연구 때문에 자주 접하셨을 테니까요.”
“네, 기억해 주시니까 기쁘네요. 마력 감응도가 높은 식물에 대해 연구하고 있죠.”
아멜이 눈을 접어 웃었다. 연구. 아멜리아나 린지아 루체스티어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틸라마르 대공은 루체스티어의 빚을 탕감해 줄 뿐만 아니라 연구에 대한 지원까지 약속했다. 아멜리아나 린지아 루체스티어가 에티엔 클로틸드 틸라마르와 혼인하는 것을 조건으로.
아멜은 지금으로부터 약 두 달 전에 도착했던 청혼서를 떠올렸다. 청혼서에는 아멜이 틸라마르 대공과 혼인하게 될 경우 얻을 수 있을 수많은 혜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그것들을 얻는 대가로 아멜이 제공해야 할 아주 빈약한 의무 몇 가지만이 적혀 있었고.
아무리 봐도 틸라마르가 손해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던 제안이었다. 오로지 상대가 틸라마르 대공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런 제안을 해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물론 정략혼, 그것도 팔려 가다시피 결혼하는 경우 자체가 비참한 건 알고 있다. 그것도 백작 위의 계승권을 가진 여성이 이런 식으로 ‘팔려 나가는’ 일은 없다시피 한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아멜의 손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야, 정략혼이니까. 인생을 파는 일이지 않나.
그런데도 틸라마르 대공의 청혼서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평생 사내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던 아멜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만큼. 아니. 애초에 아멜에게 틸라마르 대공 외의 선택지가 주어진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누구도 그와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아서 또래 여성 중에서는 아무도 그에게 청혼서를 넣지 않는 탓에 스물둘이 되도록 약혼자조차 없었던 ‘저주 받은 괴물 대공’. 그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루체스티어 백작가의 빚을 탕감해 주고자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이전에 아멜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빚더미, 그리고 가족과 의무, 기존의 인생으로부터 달아나게 해줄 사람은, 괴물 대공뿐이었다. 그래서 아멜은 자신을 팔아치웠다. 자신을 원한다고 말해준 사람에게.
이게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루체스티어 백작 영애와 틸라마르 대공의 약혼이 성사될 수 있었던 까닭이었고, 지금 아멜이 틸라마르 대공의 보좌관과 시답잖은 이야기나 나누며 북부의 검은 성채로 가는 마차에 실려 있는 이유였다.
3화까지 무료 공개,
이후 유료 공개됩니다.
자유 연재를 지향하나 주 1회 이상은 찾아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세이브 분량이 완결 분량까지 쌓인 후에는 연재 주기가 빨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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