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손을 녹여주세요 - 제1장, 청혼과 결혼(1)
제1장, 청혼과 결혼(1)
제 1장, 청혼과 결혼
지금으로부터 2달 전, 3월 19일. 저녁.
그날은 꽤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오랜만에 백작가에 ‘진짜 손님’이 방문한 날이기도 했고, 루체스티어 백작가의 장녀인 아멜리아나 린지아 루체스티어가 폭발 마법 같은 발언으로 우중충한 저녁 식사 시간을 뒤집어 놓은 날이기도 했다.
아멜리아나 린지아 루체스티어, 보통 애칭인 아멜로 불리는 장녀의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어머니, 저 청혼을 받았어요.”
지인에게 돈을 꾸는 것에 실패해서 우울한 낯으로 묽은 감자수프를 뒤적이던 루체스티어 백작은 장녀의 발언에 숟가락을 놓쳤다. 백작은 땡그랑 하고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 숟가락을 집어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장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쟤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른 가족들도 별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아멜의 아버지, 백작 부인은 입에 머금고 있던 수프를 주르르륵 흘려버렸고, 아멜의 여동생이자 둘째인 아디나는 빵을 먹다가 목에 걸렸는지 컥컥대며 기침을 했다.
“……아멜,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좀 말해주겠니?”
“꽤 괜찮은 제안이라, 다음날 내로 약혼을 발표하고 5월에는 결혼식을 올릴 거예요.”
아멜은 ‘제대로 말해보라’는 뜻이 분명할 백작의 말을 반쯤 무시하듯 제 할 말을 늘어놓았다. 백작은 아멜이 이 일을 부모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승낙하는 방향으로 진행할 것임을 눈치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설명은 해 주는 것이 도리일 텐데.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대뜸 터트리듯 얘기하는 건지. 늘 고분고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부모에게 상냥하던 장녀가 조금은 낯설었다. 아무래도 요새 빚쟁이에게 내내 시달리더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런 모양이라고 지레짐작하며,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멜……, 네 결혼을 반대할 생각은 없다만 누구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니.”
“언니, 만나는 사람 없잖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 대체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게야? 설명을 제대로 해보거라.”
물을 벌컥 들이켜 간신히 빵조각을 삼킨 아디나와 수프로 가슴을 적신 아버지가 연이어 말했다. 아멜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다음 발언을 터트렸다.
“상대는 틸라마르 대공이에요.”
그 발언을 들은 가족들은 다시 입을 벌리거나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틸라…… 뭐?”
“대공? ……대공이라고. ……진짜, 대공?”
“틸라마르 대공은 하나뿐이잖아, 언니.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데! 설마 틸라마르 대공이 언니한테 청혼서를 보냈는데 그쪽에서 제시한 조건이 괜찮은 것 같아서 결혼을 하기로 했다, 뭐 그런 말이야? 이게 말이 돼?”
아디나는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식탁을 내려쳤다. 옆에서 아버지가 진정하고 앉으라며 다독여도 소용이 없었다. “하여간에 힘이 넘치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고 중얼거린 아멜이 싱긋 웃어 보였다.
“정리해 줘서 고마워, 아디나. 근데 말이 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잖니. 그냥 그게 ‘사실’이야.”
아멜의 말에 아디나가 혈압이 치솟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아멜은 직감했다. 3초 후에 아디나가 소리를 지를 것이다.
3…… 2…… 1……, 지금.
“하지만 언니, 틸라마르 대공은…… 남자잖아!”
‘남자잖아!’하는 외침이 식당을 뒤흔들고도 한참이나 메아리쳤다. 아멜은 귀를 막았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렇지?”
“언니가 먼저 얘기했었잖아. 남자는 싫다고! 언니는 남자랑 결혼 안 하겠다고 했었던 거……, 그냥 결혼하기 싫어서 한 말일 뿐이었어? 아니잖아. 근데 왜 그걸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얘기해?”
아디나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주먹을 꽉 쥐고 아멜을 쳐다보았다. 자매가 서로 노려보고 있는 사이에 낀 꼴이 된 아버지는 조금 쪼그라든 듯한 표정으로 “싸우는 건 아니지, 얘들아?” 하고 속삭였다. 백작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어서 이마를 가린 채 신음했다.
“게다가 그냥 대공도 아니고 틸라마르 대공이야, 언니. 아무리 언니가 세상사에 그리 관심이 없는 연구직 마법사라고 해도 ‘괴물 대공’에 대한 소문도 들어보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겠지. 모를 수가 있나! 그 사람이 왜 지금까지 약혼자 하나 없이 지내온 건지 모르는 왕국 사람도 있어?”
“쉿! 아디나, 함부로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면 안 된다.”
“길거리 코흘리개까지 전부 아는 걸 쉬쉬한다고 해서 없는 얘기가 되나요?”
아디나는 다소 분개한 얼굴로 아예 포크를 꽉 움켜쥐기까지 했다. 포크를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쟤 진짜 열받았네…….’
아디나가 성질머리를 이기지 못해서 포크를 구부려버리기 전에, 아멜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빚을 탕감해 주겠대. 생활비도 지원해 주겠다고 했고, 셋째랑 넷째 학비는 물론이고 용돈까지 주겠다더라. 내 연구도 지원해 주고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나한테 재산 일부도 증여해 주기로 했어. 그 외에도 수많은 혜택에 대해서 약속했고.”
“돈이 중요해?”
아디나가 버럭 소리를 쳤다. ‘그럼 안 중요해?’하고 맞받아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낸 아멜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할 말을 떠올렸다.
‘아디나를 진정시킬 만한 말이 뭐가 있을까. ……그래. 그 얘기를 해야지.’
아디나가 화를 내는 이유는 결국 가족을 위해서 아멜이 너무 희생하는 꼴이 될까 봐서일 테니 걱정을 덜어줄 만한 말이 나을 터였다. 좀 터무니없는 것이더라도.
“중요하지, 아디나. 지금 우리 집이 빚더미에 깔려서 수렁으로 가라앉고 있는데. 내 걱정을 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 조건에 그런 것도 있기는 했어.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손끝 하나 대지 않겠다더라. 맹세의 키스랑 남들 앞에서 과시해야 할 때만 빼고.”
이 정도면 되겠지.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는 아멜을 향해, 아디나가 다소 힘 빠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먹혀든 모양이었다.
“……왜?”
“이유가 없는 건 아닌데, 나도 아직은 몰라. 물어볼게.”
“하아…….”
아디나가 포크를 쩔그렁 소리가 나게 식탁에 내던지고 자리에 다시 털썩 앉았다. 한고비는 넘은 셈이었다. 아디나와 아멜이 언쟁하는 동안 눈치를 보던 아버지도 안도한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아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멜은 그 얼굴에 담긴 감정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미안함과 혼란스러움, 약간의 안도감과 자책, 미약한 분노, 또 희미한 기쁨과 슬픔, 후회. 이윽고 체념. 복잡하디 복잡하면서도 단순하게 귀결되는 어머니의 감정을 읽어내는 동안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가고 싶어졌니?”
“네.”
“우리가 어떻게든…… 할 수도 있어, 아멜.”
“안 될 거 아시잖아요.”
아멜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자를 갚기 위해서 새로운 빚을 지는 생활을 얼마나 더 할 수 있겠는가? 왕국에는 ‘정당한 빚’을 구제해 주는 제도가 없다. 백작가의 빚은 ‘당연히 갚아야 할 돈’이었다. 가령 가족 중 누구를 투기장에 팔든, 옆 나라에 노예로 팔든, 어디 암흑가에 팔든, 저택을 팔아치우든, 작위를 팔든, 아니면 결국은 이자도 못 갚게 되어서 100년짜리 노역 계약서를 쓰고 복역하든……. 무슨 짓을 하든, 어떻게 하든, 하여간에 갚아야 하는 돈이라는 뜻이었다. 백작 부부가 당장에 목숨을 잃어도 빚은 그 핏줄에게 대물림 될 것이므로 살아 있는 한은 내내 빚에 시달려야 했다.
당장 월 이자만 해도 아멜과 아디나의 급여를 상회했다. 급한 이자는 아디나의 저축을 깨서 충당했지만, 이것도 길어봐야 반년이면 다 떨어질 터였고 그 안에 새롭게 돈을 융통해서 틀어막지 않으면 당장에 루체스티어 백작가의 유서 깊은 저택부터 날아가게 되리라. 어떻게든 그것만큼은 막아보고자 발버둥 치고 있지만 머지않아 한계가 올 것임을 모두가 잘 알았다. 잘 알면서도 당장은 귀족의 자존심 따위로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뭐라고 내다 버리지도 못하고.
“이게 제일 덜 다치는 방식이에요. 하여간에 저는 그러기로 했으니까 알았다고만 하시면 돼요. 나흘 뒤에 사람이 다시 오기로 했어요. 받은 서류랑 청혼서는 집무실에 두었으니 확인해 보세요.”
“……알았다.”
백작이 완전히 기세가 꺾인 목소리로 답했다. 아멜은 제 뜻을 관철하는 것에 성공했음에도 찜찜하고 기분이 나빠서 입맛이 뚝 떨어졌다. 예법 따윈 지키지도 않고 남은 수프를 쭉 들이켜 마신 뒤 빵을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디나가 아멜을 따라 일어나서는 아멜 옆으로 왔다. 아디나는 애원하듯 아멜의 팔을 붙잡았다.
“언니, 정말 괜찮겠어? ‘괴물 대공’이라는 말이 괜히 도는 거 아닌 거 알잖아…….”
어느샌가 저보다 커진 듬직한 동생을 올려다보며, 아멜이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아멜도 아디나의 말이 어떤 뜻인지는 잘 알았다.
괴물 대공. 그건 그의 외형뿐만 아니라 성격과 그가 벌인 일까지 아울러 하는 말이었다.
먼저 외형에 관해 얘기하자면, 당대의 틸라마르 대공, 에티엔 클로틸드 틸라마르는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늘 가면을 쓰고 다녔다. 어릴 적 화재로 인해 입었던 끔찍한 화상 흉터 탓이라고는 하는데 상대방을 겁주기 위한 목적이라는 설도 꽤 유력해 보였다. 그가 쓰고 다니는 가면이 다름 아닌, 초대 대공과 그 배우자가 함께 무찔렀던 ‘악마’의 형상을 본뜬 가면이기 때문이었다.
그 가면은 대공가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가문의 보물이었다. 초대 대공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했기에 보통은 틸라마르 대공령의 축제나 공식 석상에서만 쓰고 나오는 용도로 사용했다. 승리의 상징이자 아직도 저기 마물의 땅에서 호시탐탐 인간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악마들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쓰는 가면이었는데 당연히 그걸 맨날 쓰고 다니는 대공은 없었다. 전대 대공이 대공직을 수행할 때까지만 해도 말이었다.
그러나 현 대공은 화상 흉터를 들먹이며 그 가면을 항상 쓰고 다녔다. 그것이 일종의 공포를 유도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지 않으냐는 것이 귀족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머리에 뿔이 셋 달린 끔찍하고 험한 형상을 보게 되면 아무래도 움츠러드는 것이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예외 없이 험악한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대공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던 어린 귀족 자제가 한 둘이 아니었다든가 하는 소문도 있었다. 안 그래도 북부 사람은 장신인 편이라 위협적인데 거기에 그런 가면을 쓰고 나타났으니 겁먹지 않는 아이가 있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터였다. 그걸 알고서도 꿋꿋이 쓰고 다니는 것을 보면 상대를 겁주려는 것이 분명하다고들 입을 모아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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