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추억의 단편선

[GL] [단편] 첫 눈

봄쌀 by 봄쌀

* 아주 예전에 썼던 글이라 맞춤법 오류와 큰 공백이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그 아일..."

 



  

움찔, 분명히 들리는 소리에 소영은 위를 올려다 보았다. 어떤 특정한 방향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제 머리 위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금 주차된 차로 향했다.

 

  



"...부탁해요."

 

  



어?

 



  

분명히 들었다.

 



 

섬짓하지도,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닿지도 않은 몽환적인 목소리. 분명 제 귀로 들었음에도 어디에서 들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톡, 눈가에 닿는 시린 감각에 소영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눈?

 

 



첫눈이었다. 그리고...

 

 

  

"그 아일 부탁해요."

 

 

 

눈이 내리는 소리처럼 들리는 아득한 음색. 그러나 분명히 제 귀에 대고 속삭이는 그 소리에 소영은 저도 모르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첫 눈

 

 

 

 

 

"심계항진이라는 병인데...."

 



  

고작 이 열아홉 살 짜리가? 하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최대한 놀란 얼굴을 감추기 위해 눈썹을 으쓱하고, 챠트를 자신의 시선 앞으로 올리는 소영이었다. 그리고 챠트의 너머에서 살짝, 제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제가 놀라면 혹여나 아이가 불안해할까 싶어서 최대한 침착한 척 미소를 잃지않고, 그냥 "그랬구나. 엄청 힘들었겠네..."하고 말을 내어놓을 뿐이었다. 제 담담한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아있던 아이가 슬쩍 고개를 든다.

 



 

그날 처음으로 봤다. 제대로 된 얼굴을. 언뜻 마주친 눈과 함께 소영은 저도 모르게 들어올렸던 챠트를 내리고 멍하니 그 앳된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얗고 뽀얀 얼굴이지만 생기는 없었다. 오히려 불안하고 아파보이는 특유의 얼굴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신소민. 열아홉 살의 높이뛰기 유망주라고 했다. 소영이 놀란 이유는 육상종목의 운동을 하는 아이치고는 너무나 여린 몸 때문이었다. 차라리 리듬체조나 무용을 한다고 하면 믿을 몸이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아이를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훑어보았다.







"하하하... 우리 소민이가 계속 살이 빠져서요."



"이 몸으로... 높이뛰기, 그거... 할 수 있나요?"







소민은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처럼 앉아있었다. 그 옆엔 코치로 불리는 남자가 연신 소민의 눈치를 보며 민망한 웃음을 내어놓는다. 그래서 김소영 선생님을 찾아온 거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대회도 있는데 몸이 이러니까 훈련도 못하고요. 코치가 사람좋은 미소와 난감한 미소를 동시에 띄우며 소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민의 첫인상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유기견'같았다. 한없이 모성을 불러 일으키는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 바닥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얼굴들 중에 하나였다. 다만 소민의 인상이 조금더 특별했던 이유는 타인에게 세우는 경계심이 불안해보였다는 데에 있었다. 말하자면 자존심이 찢길대로 찢겨져서 최후의 마지노선에 남겨진 자기방어, 타인의 호의에 대한 의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바라봐주었으면 하는...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눈동자였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







자신을 연신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시선을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민아. 어디가 힘드니?"



 



대개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고민한다. 대답의 패턴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말 그대로 '아이답게' 술술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거나, 그런 것들이 쑥쓰러우면 자신의 질문들에 대답하면서 서서히 마음을 연다. 







"언제부터 그런 증상이 있었니, 소민아?"



"......"



"혹시 수면제나 항생제를 장기간 먹은 적이 있니?"



"......"



"훈련할 때 말고 숨이 가빠진다거나, 오한이 들거나... 그런 적은 없어?"



"......"







소민의 경우는 아예 제 말을 무시했다. 대답은 커녕, 자신의 질문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명백한 '무시'였다.

 



 

소영은 그 무시에 조금도 언짢아 하지 않았다. 상대는 열아홉의 어린애였다. 그것도 '유기견'같은. 꼭 그 눈이 그랬다. 강아지의 눈. 굳이 소민의 눈동자가 강아지같다고 하는 이유는, 제법 어른스러운 척, 쿨한 척 하면서도 앳된 얼굴에 미처 수습하지 못한 불안함이 서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영으로선 다만 그게 불쌍했다. 열아홉살의 아이가 지금까지 겪어야 했던 수많은 압박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 얼굴. 아직도 첫인상을 잊을 수가 없는 이유였다. 소영은 그때 고개를 살짝 들며 저를 쳐다보는 소민의 표정에게서 무언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건 자신이 그렇고 보고싶은 대로 본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좀 위험한 상황이에요.





그치만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진 않아요.

 

   

그치만

 

   

.......누구라도 제발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아프다는 걸.

  

 

 

원래는 거부해야했다. 그리고 그럴 예정이었다. 완곡한 거절의 사유를 미리 준비해두기도 했다. 이미 해야할 게 태산이었다. 논문도 써야했고, 끝물이긴 하지만 맡고 있던 다른 아이도 있었다. 전국체전을 앞두고 찔러넣는 명단이 많았다. 소민도 그 중에 한명이었다. 하필 소민의 코치가 소영의 스승인 오 교수의 각별한 지인이라고 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지병이 있는 육상선수 여고생이라니. 이건 심리상담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일지도 모른다. 

 

 



"돈이야 원하시는대로 맞춰 드릴테니까..."

 





코치가 진심으로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돈, 때문이 아니라는 건 이 남자도 알텐데. 얼마나 심각했으면 저렇게 부탁해 오는 걸까 싶었다. 소영은 거절을 하기 위해 자세를 바로했다. 그러나 제가 말을 뱉기도 전에, 게다가 코치인 남자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코치의 옆에서 억지로 끌려 온 아이처럼 입을 앙 다물고 있던 소민이 드디어 입을 뗐다.

 

 



"나 이런거 싫어요."



"소민아."



"하다하다 별... 이런 미친 짓까지 하다니."







그리고 처음으로 뗀 입에서 독기가 바짝 서린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런 거 해봤자 하나도 도움이 안된다구요. 어차피 또! 떨어질건데!"

 



  

코치인 남자는 소민의 히스테리적인 말투가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대개 운동선수와 코칭스탭의 관계는 선수가 어릴수록 갑과 을의 관계인 경우가 많다. 부모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럼에도 제 옆의 남자를 무서워하기 보다는 저렇게 바락바락 대드는걸 보아하니 유망주는 유망주인가보다, 싶었다. 아니면 어떤 말 못할 개인적인 사정이라도 있던지.

  



  

벌떡 일어선 소민의 돌발적인 행동에 안그래도 어색하고 딱딱한 소영의 사무실은 냉동고가 되었다. 씩씩거리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 겨우겨우 눈물을 삼키며 한마디 한마디를 꾹꾹 눌러담은 목소리. 그러나 소영의 눈길을 끈건 빨갛게 충혈된 눈에 차오른 눈물이었다. 어디에도 원망을 돌릴 곳이 없어 애꿎은 테이블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소민은 제 코치라고 불리는 남자를 슬쩍 보더니 이내 몸을 홱 돌려 나가려고 했다. 과연 높이뛰기를 하는 아이답게 폴짝폴짝 몸도 가볍게 문으로 나간다.

  

 



짧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야."

 

 



나가려고 손잡이를 확 잡았던 소민이 움찔 거렸다. 그럴 법했다. 첫인상에서 보여지는 상냥함을 쏙 뺀 차갑고 나즈막한 말이었으니까. 그런 소민의 뒷모습을 소영은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대로 아이를 내보내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왜 두려웠는지는 모른다. 삶이란 가끔, 우연을 가장해서 용기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직감은 무섭다. 특히 30대의 직감은 때때로 많은 기회들을 얻게도 하지만 잃게도 한다는 걸 알려주곤 했다. 







그렇다면 저 아이는 내게 무엇이 될까.  

  

 



"너 지금 나가면..."

  

  



천천히, 꼭꼭 눌러담아 말했다. 소민이 아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속에 담았던 울분처럼. 그러나 낮게 천천히 잘 알아듣도록.

  

 



"넌 늘 똑같을거야."

 

  



빙그르르 돌아보며, 황당한 표정의 아이가 저를 "하!"하고 쳐다본다. 소영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꼬마야. 나 생각보다 꽤 잘해."

 

  



소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제 책상에서 검지와 중지로 집은 종이조각을 소민에게 내밀었다. 또각또각, 제가 다가가자 아이는 똑바로 시선을 치켜세우며 경계어린 눈빛을 보낸다. 눈을 감지도 않는다. 금방이라도 물어 버릴듯 저를 보는 눈빛은 차라리 경멸에 가까웠다. 어린 여고생이 어째서 이런 눈빛을 만들 수 있는걸까. 







대개 심리치료를 원하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관심을 갈구한다. 타인의 관심과 호의를 누구보다 원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이들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유치한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운동선수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소민은 진심으로 타인과의 벽을 견고히 세우고 있다. 그래서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오기가 났더랬다.

  



 

한참동안 침묵이었다. 이내 소민은 소영의 검지와 중지사이에 꽂히듯 잡혀있는 명함을 슬쩍 보더니 어쩔줄을 몰라하며 코치를 돌아보았다. 뭐 어떡하란 말이에요? 하는 눈빛. 그러나 그 눈빛도 오래가지 않았다. 소민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소영의 기에 조금 눌린 듯 흘깃거리며 소영의 눈치를 본다.  

 



 

"치료안되면 돈 안 받을게. 약속해."



"누가 돈 때문에...."

  

"밑져야 본전이야. 이대로 나가면 넌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해.

 

"무슨 소릴 하는거예요?"

 

"너 그거 아니?"



  



소영은 소민의 시선을 받아치다가 이내 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오직 소민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이듯, 나즈막하게.

 



  

"지금 네 얼굴. 꼭 강아지 같거든. 누구에게도 제대로 손길을 받아보지 못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손길이 필요한 상태의 유기견.







"......"



"난 굳이 내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그치만 넌 어디서든 도움을 받는 것부터 배워야 할 거야. 까놓고 말해서 지금의 넌 누굴 만나든 너보단 강한 사람을 만날테니까."



"......"



"내 말 틀려?"







경계어린 눈빛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날카롭던 눈썹이 어느새 팔자가 되고 이내 파르르 떨린다. 그리고는 눈을 때굴때굴 굴리던 소민가 마지못하는 척 소영의 명함을 빼앗기라도 하듯 홱 가져가버린다.







"당신이 뭔데..."



"나? 전문가."







심리치료 전문가야. 다 알고 왔으면서 왜 묻니, 하고 소영은 싱긋 웃었다. 사실 그 미소는 스스로에 대한 자조여야했다. 심리치료 전문가라니. 우스웠다. 전문가라는 말이 무색하게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건 고작 열아홉 살의 꼬마애 하나를 도발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강아지 같은 눈을 보니 이런 유치한 짓이 저절로 나온다. 







그리고 의외로 자신의 도발은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소민이 소영의 그 미소를 보고 눈을 내리 깔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 있어."







내리깔았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영을 올려다보는 소민이었다.







"나 강아지 애호가야. 강아지 엄청 좋아하거든."







그거랑 닮은 것들에 사족을 못 써, 하고 소영이 여유롭게 덧댄다. 소민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고는 붉어진 얼굴을 들킬새라 몸을 바로 빙그르 돌린다. 그리고는 "차에 가 있을게요."하고 제 코치에게 통보하듯 말하고는 문을 열고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아마 그 첫만남이 봄이었다. 모든 계절은 저마다의 힘이 있었지만 특히나 봄은,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에 용기를 준다. 돌이켜보면 방아쇠를 당긴 건 소영이었는지도 모른다.

 

 

 

 

  



 

* * *

 

 

 


 

 

 

심계항진이란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심장이 쿵쿵거리는 증상을 뜻한다. 이게 심해지면 발작에 가까운 증상이 나오는데 소민의 경우엔 스스로 그런 병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말하자면 후천적으로 생긴 증상인 모양이었다. 육상을 하는 아이에게 심박에 영향을 주는 지병은 치명적이었다. 그럼에도 운동하는 애치고 워낙 잔병치레가 많은 편이라 그냥 넘긴 모양이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소민은 고통을 참거나 버티는 것들이 익숙해보였고, 아무렇지도 않게 진통제를 찾곤 했다. 그냥 남들보다 맥박이 조금 더 빠르거니, 운동을 하니까 그럴 수 있겠거니 했단다. 







문제는 중요한 대회를 앞둘 때였다. 발작성 쇼크는 그냥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까무룩 쓰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처음엔 과민성 흉부통인 줄 알았는데 막상 진단은 심계항진. 하필 쓰러진 타이밍도 높이뛰기 바를 앞두고 한껏 몸을 붕 뛰우는 그 시점이었단다. 드라마틱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허공에 뛰어오른 상태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낙하할 때 팔이며 다리며 인대를 접질렀다고 했다. 치명적인 부상인 건 두 말 할 것도 없고, 선수생활 자체가 위험할 만한 지병이었다. 







이미 학교에서는 기대를 접었다고 했다. 코치는 소영과 단 둘이 있을 때, 조심스럽게 그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소영은 그 자존심 높은 소민이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니 어쩌면 지금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대체로 부상에 대한 재활치료가 필요한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육체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근손상이나 골절 등의 신체적인 부상은 전문의의 클리닉으로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신체적부상에 따른 심리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어릴 때부터 운동을 했던 아이들은 몸보다 멘탈이 훨씬 더 약한 경우가 적지 않다. 정신적인 자립과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당한 부상은, 성격까지 바꾸어버린다.

 

  



그리고 소민이 바로 그런 케이스인 것 같았다. 다만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안 아프다니까!"

  

"나 환자취급 하지 마요!"

 

"나 가르치지 말라고!"

 

 



.....이렇게 스스로가 아프지 않다고 철썩같이 우겨대는 심보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공포와 불안, 주변에서 가지는 관심과 기대가 줄어드는 느낌을 알아채는 아이들 중에는 소민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애들이 더러있긴 했다. 그 애들은 처음엔 현실거부를 한다. 그 다음은 체념하거나 타협하고, 마지막으로는 포기와 현실을 수용한다. 다만 이 단계들 중 어디서든 잘 버텨내기만 하면 다시 재활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소민이 경우엔, 감히 감을 잡을 수도 없었다.

  



 

"운동하는 거 좋아?"

  

"몰라요."

  

"오늘은 무슨 훈련했니?"

  

"아, 몰라요."

 

"어제 몇 시에 잤어?"

 

"몰라."



"요즘 야간 훈련은 안 한다던데, 맞지?"



"모른다니까요."



"오늘 점심은 뭐 먹었어?"



"...몰라."

 

  

 

차라리 맡지 말걸. 아니, 차라리 제게 욕을 해주는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말만하면 씹거나 모른다고 일관하거나 제 질문이 유치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소민이었다. 그럴 때마다 소영은 수십 번씩 소민을 포기하고 싶었다. 

 

  



게다가 소민의 경우엔 부모의 진심어린 지지가 없는 케이스였다. 부잣집 딸내미라서 경제적인 지원은 걱정없지만 제일 중요한 걸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관심. 이 경우 사생활을 까발리게 되더라도 집안환경을 소상히 알면 도움이 될 터인데 도무지 알아낼 수 없었다. 하루는 소민에게 가정환경에 대한 질문을 했다가 소민의 코치에게서 경고를 들었다. 너무 자세히 파고들지 않는 선에서 부탁드립니다. 소영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그 선이 어디냐구요. 도대체 저 정도로 심각한 아이의 멘탈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갖지 못할 정도로 바쁜 부모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소민의 부모는 바쁜 축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아이의 생활에 관심을 가지기 힘들정도로 바쁜 것보다, 아예, 정말 아예 무관심했다. 소민의 나이의 아이들과 면담을 할 때는 때때로 부모를 동반하거나 부모와의 상담도 필수적인 요소였다. 소민에게서도, 코치에게서도, 부모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들도 소민의 부모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상했다. 







게다가 이 일을 하면서 뼈저리가 느낀 한가지는,

   



 

아이들은 애정을 받는 것보다, 애정을 받지 못하는 걸 더 섬뜩하게 잘 알아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은 십중팔구 티가 났다. 







왜 자꾸 소민에게서 버려진 강아지 같은 느낌을 받는지, 그렇게 카랑카랑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제게 반항하는 그 얼굴에서 일말의 측은함을 느끼는지- 소영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민의 무의식적인 행동에서 직감할 수 있는 것들이 제법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고작 열아홉 살 짜리가 타인의 걱정을 지나치게 낯설어 하고 견디기 어려워 한다는 것이었다.

 



   

"소화 안돼?"

  

"......"

  

"이리 와."

  

".....네?"

 

  

 

그날 따라 더 하얗게 질려있는 소민을 보다못해 나섰다. 이따금 먹은 걸 잘 소화시키지 못해 명치를 두드리며 팔자눈썹을 그리는 아이였다. 그런데 그날은 입술까지 색이 다 빠진 채로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소영은 슬쩍 소민의 손을 잡았다. 작고 얇은 손이었다. 운동하는 애의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손이었다. 도드라진 손목과 손가락의 뼈들이 자신의 손바닥을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았다. 한창 살이 빠져있을 때라 그런지 손만 잡았는데도 한숨이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버석거리는 소민의 손바닥을 그렇게 한참 만져보는 소영이었다. 







"...뭐하는 거예요?"







소민은 아프고, 놀라고, 당황스러운 감정을 표정으로 그대로 드러내며 제 옆에 바짝 붙은 소영을 올려다보았다. 소영에게 잡힌 손에 힘을 줘야 할지, 빼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영의 스킨십에 제대로 반항을 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었다. 평소라면 또 독기어린 말을 내어놓으며 몸을 내뺄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아프긴 아픈 모양이었다. 마치 안아주듯 찰싹 붙어있는데도 소영에게 볼멘소리를 더 내어놓지는 않는다.







"너 왜 말 안했니?"



"...뭘요?"



"아픈 거."







체한 것이 분명했다. 하얗다 못해 노란 손바닥에 온기가 하나도 없었다. 소영이 깍지라도 끼듯 손을 꽈악 잡아온 건 그때였다. 소민은 황급히 손을 빼내며 평소처럼 경계 어린 눈으로 소영을 쳐다본다. 저토록 지독하게 체했는데도 무릎에 손을 얹고 불편하기 짝이없는 정자세로 자신을 노려보듯하는 소민이 참 대단하게까지 느껴져서 소영은 혀를 찼다. 체하면, 지옥의 맛을 경험한다는 걸 잘 아는 소영이었다. 이따금 저도 잘 체해서 침이나 소화제를 늘 상비해두고 있을 정도니까. 







"......"

"......"







침묵이 이어질 찰나, 갑자기 소영이 소민이 앉은 회전의자를 휙 돌려버린다. 바퀴가 달린 의자는 갑자기 소영에게 가까이 당겨졌고, 동시에 빙그르- 소리라도 내듯 돌려진다. 소민이 허둥거리며 놀란 듯 소영을 쳐다본다. 뒤를 돌아봐야했다. 소영이 소민의 등을 두드리기 위해 의자를 돌린 까닭이었다.  

 

 



"...아."



"가만히 있어."

 



 

톡톡톡, 척추를 따라 올라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소영의 손길에 소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숙였다. 소영은 제 주먹이 닿는 면적마다 뾰족뾰족한 척추와 날개뼈의 느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속상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알싸한 감정이었다. 차라리 운동을 하는 애답게 근육이라도 붙어있던가. 이건 정말 뼈와 살가죽밖에 없는 것만 같아 괜스레 마음이 울컥하는 것이었다.







"아아아...! 아...!"



"여기 아프지?"







어깨뼈가 있는 쪽의 뭉툭한 등뼈를 살살 두드려주니 신음이 터져나온다. 소영은 여위어 보이는 그 등을 두드리다가 결국에는 제 손바닥으로 한번 쓸어 만져주었다. 작은 원을 그리면서 위에서 아래로, 또 아래에서 위로 쓸어만져주는 손길에 소민은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보려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아래로 향한다. 소민이 고개를 숙이자 더 도드라지는 뼈들이 안쓰러웠다.  

 



 

"넌 운동하는애가 왜 이렇게 약하니."

 

"......"

  

"아프긴 아픈가봐? 왜? 오늘도 몰라요, 해보지."

  

"......"

  

"많이 아파?"

 

 

 

대답이 없길래 반성이라도 하는 줄 알고 슬쩍 소민을 돌아보니 파랗게 질린 채 어찌할 줄을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꼭 무언가 터져버릴 듯 다급해진 얼굴의 아이가 이내 입을 틀어막더니 황급히 화장실로 뛰어간다.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뛰어가는 폼이 새삼 어린애 같아서 소영은 눈썹을 으쓱하고 여유롭게 소민을 따라갔다. 변기를 잡은 소민의 손등에 하얀 힘줄이 올라왔다. 도대체 얼마나 체한거야. 아니, 얼마나 참은거니, 너.

  



  

"...나...나가요..!"

  

"여기 내 화장실이거든?"

  

"나가라구요.... 하아...."

 

   



소영은 주저앉은 소민을 다부지게 잡아 일으키고는 거칠게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소민은 소리를 지를 힘도 없는지 목소리를 쥐어짜내기 시작했다. 신음을 흘리는 것도 힘든지 갑자기 주저 앉아 버린다.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었다. 소영은 소민을 뒤에서 안아오듯 단단히 잡아주었다. 제법 강단있는 힘이었다. 갑작스런 제 행동에 소민은 당황하면서도 마지못해 얌전하게 안겨있었다. 







"차라리 게워 내."







구토는 최후의 방법이긴 했지만, 이렇게 심각하게 체했을 때에는 게워내는게 오히려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소민을 보니 체기가 지독한 수준으로 보였다. 이렇게 조금만 등을 두드렸는데도 토기가 올라올 정도면 벌써 참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겠지. 그러나 소민은 구토를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연신 제게 가해지는 두드림이나 불쾌하게 올라오는 구역질에 정신을 못차리는 것 같았다. 







"토할 줄 몰라?"



"......"



"그냥 뱉어, 얘. 괜찮아."







소영은 혹시나싶어 소민의 긴 생머리를 가지런히 모아 잡아주었다. 



  



"자, 얼른."

  

"....나...가..요."

  

"어서, 시원하게."

 

".......으...우욱!"

  

"어, 잘하네. 옳지."

 

  



결국 제가 두드려준지 2분도 안되어 소민은 다 게워냈다. 알고보니 급체가 아니라 아주 만성적인 소화불량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이때 소민의 소화기관들은 대부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얹힌데에 또 얹히고, 소화불량 때문에 몸이 잘 움직여지지도 않고, 그러니 음식도 먹지 못하고, 그게 또 스트레스로 쌓이는 악순환을 겪은 것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소화도 시키지 못하는 애가 훈련은 커녕 스트레칭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아프다는 소리 한 번을 내어놓지 않았다고 하니, 정말이지 독한 애가 아닐 수 없었다. 무려 일주일이나. 엄청난 고통이었을텐데 싶어 소영은 새삼 소민의 고집스러움에 고개를 저었다.

 



  

열아홉... 도대체 이 아이가 세상을 살면서 배운건 무엇일까. 인내? 고통? 혹은 그 너머에 있는 또 다른 무엇일까.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러나 결코 칭찬이 아닌 감탄. 소영은 소민에게 조금 화가 났다. 넌 뭐가 그렇게 잘나서 그걸 참는거야, 하고 쏘아주자 소민은 말 없이 주르르 주저앉았다. 결국 제 부축을 받으며 소영의 사무실에서 쉬게 된 소민이었다. 온 몸의 힘이 빠져나간 사지를 잡아보니, 새삼 아이가 많이 말랐다는게 느껴졌다. 운동선수라면서 어떻게 이렇게 약한거니.

  

 



이날 소민은 정말 말끔히 게워내고 그 뒤에도 몇 시간을 헛구역질을 했다. 그리고 결국,

  



  

".....다 울었어?"

 



   

울었다.

 

 

 

소영이 구강청결제와 소화제를 쥐어주며, 그래도 한번 따는게 좋다며 손을 잡고 주물주물 만지는 순간, 훌쩍훌쩍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잡히지 않은 손으로 끈덕지게 눈을 가리고 피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제게 보여주긴 창피했는지 끝까지 소리를 내지 않고 울더랬다. 못말린다, 정말. 소영이 나즈막히 말하자 물기어린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소민이 말했다.

 



 

"....냄새 안나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소영은 소민의 엄지손가락을 꽉 잡고 소민을 바라보았다.

 

  

 

"따끔해."  



"....응?" 

 

"안아줘?"

 

 

  

순간 아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대답은 없고 살짝 벌린 입술이 약간 떨리는 것으로 봐서 당황했나보다. 너 따는거 처음이지? 하자 끄덕끄덕하던 아이는 눈을 피하며 남아있는 눈물을 닦는다. 슬쩍 침을 보더니 다시금 눈을 돌린다. "...마...많이 아파요? 피나?" 하고 그제서야 두려운듯 저를 올려다본다.

  

 

 

"1초만 아파." 

 

"......" 

 

"하나, 둘, 세..." 

 

"아, 안아줘!" 

 

"응?"

 

  

 

하얗게 질린 아이의 손톱을 보며 빨리 따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침을 잡은 펜대를 내리 꽂으려는데 그세 제 팔을 꽉 잡더니 반사적으로 소민이 소리쳤다. 안아줘. 끝말에 물기가 가득 떨림이 느껴진다. 소영은 슬쩍 놀란 눈으로 소민을 보았다. 소민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듯. 그제서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황급히 시선을 내리깐다.

 



   

"...아...이거 안할래요..."

  

"안아줄게."

 

 

  

소영이 웃으며 소민을 당겼다. 작은 체구가 쏙 제 가슴께로 들어온다. 한쪽 어깨에 얼굴을 묻고 제 등으로 한쪽 팔을 끼운 아이가 꽈아악 소영의 블라우스를 잡고 덜덜 떨었다. "너 주사 못맞지?" 하고 물으니까 한참 가만히 있더니 끄덕끄덕,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아!" 

 

"...엄청 체했네. 왜 아프다고 안했어." 

 

"....아파." 

 

"또 이렇게 참으면 혼날 줄 알어." 

 

"......"

 



 

검은 피가 방울방울 맺혔다. 소독약을 묻힌 솜으로 닦아주고 소영은 소민을 간이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이불을 덮고 커튼을 쳐주었다. 소민은 반항없이 얌전하게 따랐다. 다만 소영을 신기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소민은 정말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소영이 퇴근을 위해 커튼을 열기까지 소민은 요람에라도 누워있는 아이처럼, 정말 깊은 수면에 들어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토록 깊은 잠을 취해본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고 했다. 소영은 커튼을 열고 한참 잠든 소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한참, 한참동안. 가만. 







거기엔 현실과는 무관한 시간과 공간에만 사는 아이가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저와 제 눈 아래에 잠든 아이밖에 없는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소영은 잠의 세계에 모든 것을 내맡긴 소민이 새삼 얼마나 어리고 여린 아이인지 실감했다. 기분이 묘했다. 편안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멈춘 것만 같다. 







"그 아일 부탁해요." 







그러다가 소영은 잠시 멈칫했다. 조용한 사무실. 가습기 소리만 가득했던 곳에서 문득 소리가 들렸다. 작고, 분명하고, 나즈막하게. 그러나 그 소리는 물리적인 음파가 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득하게 울리는 내면의 소리같은 것이었다. 분명 귀에는 들리는데, 섬짓하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그 아일 부탁해요."

 

  

 

또다. 소영은 뒤를 돌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누군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다시금 소민을 본다. 아이의 얼굴, 정말 평온한 소민의 얼굴. 제 마음까지 편안하게 하는 아이의 얼굴만 있을 뿐이다.

 

 

 

 

 

 

 

 

* * *

 

 

 

 

 

 

 

소민의 부모는 차라리 비현실적일 만큼 무관심한 사람들이었다. 다른 데도 아니고 자신들의 핏줄에 대해서. 자식에 대해 물론 소민의 부모가 소민에게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소민의 입을 통해 들은건 아니었다. 다만 코치인 남자가 알음알음 전해준 말들이 있었다. 완곡하게, 아주 완곡하게. 그리고 며칠 전엔 이렇게 말했다. "저 애가 무슨 운동을 하는지도 사실 잘 모르실겁니다."

 

  

 

호기심보다 치료에 대한 의무감에 어쩔 수 없이 소민에 대해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헷가닥 미친년이 되어버린다는 소민에게서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게 되었다. 일전의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사실 소민의 태도는 크게 변한 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잘해 줄수록 소민은 부러 더 경계심을 세워야한다는 강박감이라도 가진 것처럼 행동했다. 차라리 사춘기의 절정에 있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애들이 훨씬 낫다싶을 정도였다.

 

  

 

"나한테 잘해주지마요. 존나 위선이야... 역겨워요, 알아요?"

 

  

 

게다가 소민은 낯을 가린다기 보다는 철저히 타인과 제 사이의 벽을 마련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차라리 안심을 하는 것 같았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 손대지 말라구요... 억지로 끌려온 거 안보여요?" 

 

"뭘 털어놓으란 말이야!!!" 

 

"몰라요." 

 

"몰라."



 

 

깨진 컵, 집어 던진 종이들. 저만 보면 으르렁 거리며 이빨을 드러내는 한마리의 살쾡이새끼를 소영은 몇번이고 욱해서 소리라도 질러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참아야했다. 참지 않으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다. 제 커리어의 문제가 생기는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소민의 자아감이 분열되어 있는게 이미 너무 분명하게 보여서 소영은 어른으로서 참았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래서 소영은 본의아니게 재택근무자가 되었다. 재활센터에 안에 있는 제 사무실로는 죽어도 오기 싫다는 소민때문이었다. 사실 치료를 거부하려는 의사가 보여서 소영이 먼저 선수를 친것도 있었다. 여기서 그만두면 아무것도 안되니까.

 

  

 

"내가 정신병자야? 이런데 오기싫단 말이에요!"

 

 

 

불만은 제 코치에게 털어놓으면서 눈은 소영을 보며 말하는 소민이었다. 하긴 심리치료 재활클리닉, 이라는 센터명에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무슨 경기라도 일으키듯 갈수록 심해지는 거부감에 결국 특단의 조치에 들어간게 바로 이것이었다.

 

  

 

"그럼 너 이제부터 우리집으로 와." 

 

"뭐라구요?" 

 

"주소 보내드릴테니까 얘 시간맞춰서 우리집으로 데려와주세요." 

  



 

담당코치에게 부러 통보식으로 말했다. 갑자기 표정이 싹 바뀌어 제법 엄격하게 말하는 제 모습에 소민은 일순 기가 죽는듯 하더니 이내 그래봤자, 하는 표정이 되어 짝다리를 짚으며 씩씩거렸다. "가지가지 하네..."하는 말이 들렸지만 들리지 않은 척했다. 그리고 제 집에 와도 태도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묵비권 행사로 일관. 꼬맹이 주제에 얼마나 고집이 센지 처음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던 소민이었다.

 

 

  

치료자는 피치료자에게 화를 내선 안된다. 심리치료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영은 그 원칙을 하루에도 몇십 번씩 어기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 마음 같아선 저 도도하기 짝이 없는 표정에 대고 어디서 센 척, 강한 척 뻗대고 있느냐고 쏘아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참을 인, 참을 인, 또 참을 인 자를 새기며 필사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래도 오기싫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까 감사해야지. 다만 치료에 필요한 제 질문을 씹어넘길 뿐이었으니까.

 

  

  

소민은 다섯 시에 왔다. 오전에는 출석일수를 채우기 위한 수업을, 이른 오후에는 부상재활치료를, 그리고 다섯 시에 제 집에 왔다. 처음엔 코치인 남자와 함께 오더니 나중엔 혼자서 왔다. 학교에서 소영의 집까진 30분정도가 걸렸다. 택시를 타고 온다고 했다. 혼자오는 거 서글프지 않냐고 했더니 신경끄라는 소리만 날아왔다. 타인의 걱정에 경기를 일으키는 반응이, 소영은 이제 익숙하다고 생각하며 알았어, 알았어, 하고 무심하게 넘겼다.

 

  

 

하루는 비가 너무 많이 왔다. 장마기간이었다. 홍수니 어쩌니 하는 말들이 뉴스에서 들려 소영은 결국 차를 몰고 소민의 학교로 갔다. 처음으로 제 담당의 피치료자를 데리러 간 것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측은해서, 걱정이 되어서, 안쓰러워서, 와 같은 진부한 이유같은 것보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우산을 쥐고 학교 앞에 있다가 마주친 소민은 저를 보고 눈이 동그래져서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정말 놀란 모양이었다. 평소엔 그토록 눈을 매섭게 치켜뜨더니 그땐 동그래진 눈이 때구르르 때구르르 부산스럽게 옴직여대며 모른척 저를 비껴갔다. 웃기지도 않았다. 저를 뻔히 봤음에도, 게다가 놀라서 헉, 하고 숨까지 들이켰으면서. 





어쩜 쑥쓰러움이 저렇게 많을까, 싶어 이제는 귀여워보이기까지 했다. 





아마 그렇게 미운 정이라는게 들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너 데리러 온거 안보여?" 

 

".....네?" 

 

"그리고 아는 어른이 있으면 먼저 인사 좀 해주면 안돼?" 

 

".....나 밥먹으러 갈건데요?" 

 

"어지간히도 먹겠다. 매일 굶고 오는 주제에. 어서 타." 

 

"코치쌤이..." 

 

"코치쌤은 무슨... 너 혼자 온지 꽤 됐잖아. 그리고 내가 말씀드렸어. 비오면 내가 데리러 올거야 앞으로." 

 

"......" 

 

"타."

 

  



마지못해 끌려가는 사람처럼 굴면서도 소민은 소영에게 하는 듯, 마는 듯 꾸벅 인사를 했더랬다. 그 동그란 뒤통수가 제법 귀여워보여서 픽 웃음이 나왔더랬다. 시간은 참 영악했다. 미운 짓만 골라하는 소민인데도 제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은 후회나 오기만은 아니었나보다. 

























-























 

 

 

 

높은 스트레스는 근긴장을 증가시킨다. 선수들의 개인적인 사정을 저 같은 직업군이 소상히 꿰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어떤 집안환경에 있는지, 부모와의 관계는 어떤지, 훈련코치들과의 관계는 어떤지, 제 또래의 같은 선수들끼리는 어떻게 지내는지. 그걸 안다는 전제하에서 치료는 시작된다.

 

  

 

소민의 훈련 중 유일한 문제는 근긴장이었다.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다는 그 말의 의미는 사실 근긴장에 있었다. 경직된 채 높이뛰기 바 앞에서 아이는 궁지에 몰린 표정을 짓는다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 괜찮냐고 물으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고. 그리고 비단 그 표정은 운동할 때 뿐만이 아니라 학교에서 내내 그렇다고 했다. 교복을 입고 나오는 소민은 소영에게 제법 걱정을 안겨주었다. 그나마 저를 만나러 왔을 때가 양호한 편이었음을 실감했다. 정말 한없이 불편하고 경직된 표정. 그러나 이따금 제가 학교 앞에서 소민을 기다리면 그 표정이 제법 누그러진다는 것도 깨달았다.

  

 

 

소영은 소민이 뛰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 없지만, 왠지 아이의 그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하얗게 질린 얼굴, 떠밀리듯 발을 구르며 눈을 사뿐히 감으며 뛰어오르는 모습. 온전한 날개를 갖지 못한 나비의 비행같은 것. 언젠가 팔랑팔랑 추락하는 곤충의 몸짓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가 있었다. 소민의 뛰는 모습이 왠지 그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높이뛰기라는 말을 입 안에 굴려보다가 소영은 씁쓸해졌다. 높이 오른 만큼 추락하는 운동. 추락하고 나서야 결과를 알 수 있는 얄궂은 종목이었다. 자신이 제대로 뛰어 넘었는지, 뛰어넘지 못했는지는 떨어지고 나서야,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늘 뛰어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할 때 마다 소민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했을까.

 

  

 

그러나 소영의 수고에도 소민은 당최 입을 떼지 않았다. 당연히 치료는 진전되지 않았다. 집에 데려와 치료라는 이름하에 시간죽이기만 계속되었다. 그래서 소영은, 결국 특단의 조취를 취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기 시작했다. 만성 소화불량을 달고 사는 건 문제 축에도 끼지 않았다. 이때쯤 소민은 부상재활운동과 전국체전이 겹치면서 거식증 기질까지 보이고 있었다. 이미 학교에선 포기한 것 같았다. 







될대로 되라지, 하는 마음으로 소영은 소민에게 밥을 차렸다. 안먹어도 그만, 먹어도 그만. 그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말자. 어차피 계약기간이 반이상 지나갔고, 제가 신경을 쏟을 수록 소민은 그만큼 멀어지려고 발버둥치는 아이니까. 이제 소민의 성향을 제법 파악하고 있던 소영이었다.

 

  

 

"손씻고 부엌으로 와." 

 

"왜요?" 

 

"밥 먹게." 

 

".....뭐라구요?"

 

  

 

소민을 데리고 제 집으로 오면, 소영은 제일먼저 부엌으로 갔다. 늘 어떻게든 저를 구슬려 말을 하게끔 시키던 소영이 말없이 부엌으로 가버리자 정작 소민은 조금 당황한 것 처럼 보였다. 그렇게 밥을 해서 앞에 두면 역시 처음엔 고분고분하게 먹지 않았다. "밥 먹을래?"하고 물었더니 역시나, "싫은데요."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거절의 대답을 마치 긍정의 대답을 들은 것처럼 소영은 소민의 말을 듣자마자 익숙하게 음식을 만들었다. 그런 저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소민은 소영이 돌아볼때마다 눈이 마주칠까봐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발을 꼼지락 거리며 애꿎게 집을 둘러보는 척했다.

 

 

  

"먹어." 

 

"나 아무거나 먹으면 안되거든요?" 

 

"알아, 네 식단 나한테 있어. 그대로 했으니까 이리 와." 

 

"......."

 

  

 

뭐, 이런 여자가 다있어, 하는 표정의 소민을 보며 소영은 새삼 성취감이 들었다. 소민은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코치인 남자에게 소민의 식단을 받아놓은 것이 승리의 포인트였다. 그러나 소영은 웃지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소민을 쳐다보았다.

 

  

 

처음 밥을 차려준 날엔 새모이 먹듯 한입한입 깨작거리며 먹던 소민은 이내 두어달이 지나자 반찬투정을 하기 시작했다.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눈에 뛰게 보였다. 소민은 눈치를 보거나, 센척했지만 대부분은 마지못하는 척 소영의 말대로 따라오기 시작했다. 제법 시간이 흐른 후엔, 집에 오자마자 바로 식탁앞에 턱 앉아 '밥 내놔'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맛이 하나도 안 나요. 이상해."

  

"그렇지만 너 저염식이어야 된다고 하던데..." 

 

"그래도 너무 맛이 없잖아요. 이게 뭐야." 

 

"너 지금 두 그릇째야." 

 

"...바, 밥만 맛있어서 그래요. 밥만."

 

  

 

치료고 자시고 꼬박꼬박 소영의 집에서 저녁을 챙겨먹은 소민은 이때 제법 살이 올랐는데 이 무렵 심계항진이라는 지병이 크게 나아진 것 뿐만 아니라 신체적 재활치료의 성과도 좋았다. 훈련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소식에 소영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고, 소민은 그런 소영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쌤은 좀..." 

 

"응?" 

 

"....이상한 사람 같아요."

 



   

언젠가 제 집을 나서기 전에 소민이 슬쩍 소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택시를 타는 모습을 보려고 함께 나가는 길이었다. 배웅같은 거 필요없다고 한사코 툴툴거리던 소민은 이제 배웅이 익숙한듯 제가 먼저 현관에서 소영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모습이 소영은 또 귀여워서 익숙해진다는 것, 길들여진다는 것, 그런 것들을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왜 이상한 사람같은데?" 

 

"어, 그냥..." 

 

"근데 너 보단 정상일듯?" 

 

"...뭐야."

 



 

제법 농이 섞인 짧은 대화도 가능해질 무렵, 다시 본 훈련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훈련이 고된만큼 식욕이 돌았고, 시에서 주최하는 체육대회를 준비하기 보름전부터는 매일매일 소영의 집에 들르기 시작한 소민이었다. "매일매일 들려." 하고 말한 건 소영이었다. 어쩐지 이 타이밍에 그렇게 말하면 소민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소민은 눈을 땡글땡글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 못하는 척, 못이기는 척. 그러나 그 척들이 소영의 눈에는 너무 빤히 보여서 항상 웃음이 났더랬다. 

 

  

 

결정적인 사건은 치료를 마치기로 약속한 기간을 사흘 앞두었을 때였다.

  



  

"최고 기록 나왔다며. 이제 경기까지..." 

 

"나 이제 여기 안올 거예요." 

 

"경기전까진 치료 받아야지. 한 번만 더 오면 이제 치료 끝이야. 너 수고한 거 알아. 그러니까 한 번만 더 참고...." 

 

 

 

시간이란 흐르기 마련이고, 지나고나면 제법 그 속도가 빠르다는 걸 실감해버리고 만다. 어느새 계약기간이 다 되었다. 소민을 맡은 시간은 영원히 흐르지 않을 것 같더니, 어느새 다이어리를 보고 소영은 소름이 돋았었다. 벌써 아이를 치료해주기로 한 계약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싫어."

 

  

 

그러나 갑작스런 소민의 변덕에 소영은 백방으로 머리를 굴려야했다. 마지막 치료를 앞두고 오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또 뭔가. 도대체 또 무슨 일 때문에 저렇게 베베꼬여버린걸까. 그날은 왠지 밥도 먹지 않고, 갑자기 또 처음 만난 날처럼 바뀌어 그렇게 말하고는 소영의 집을 나가버린 소민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한번의 치료가 남긴했지만 사실 부상을 거의 다 회복한 시기였기 때문에 소영은 굳이 치료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영은 소민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다만 코치에게 전화를 넣어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며, 그렇게 인사치레로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사흘 뒤, 논문을 위해 밤을 꼴딱 새우던 밤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겨우 한숨돌리는 찰나에 걸려 온 전화에 소영은 내리 이틀을 더 밤을 새워야했다. 소민의 간병인이 된 까닭이었다. 

 

 

 

저도 의식하지 못할정도로 급박한 마음이 되어 병원으로 향했다. 운전을 어떻게 했는지, 소민의 병실이 있는 곳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를 정도로 당황하고 서둘렀던 기억이 난다. 밤을 샌 까닭에 얻은 피곤함 따위는 온데간데 사라질 정도의 당황스러움이었다. 스스로도 놀라웠다. 수많은 환자들 중에 한 명일 뿐인 열아홉살 고등학생. 그런데 왜 제가 이토록 걱정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기록 좋았는데.....경기만 하면 쓰러지네요, 허참." 

 

"......" 

 

"간병인을 붙이면 되긴 하는데...혹시나해서 봤더니 선생님 명함만 딱 하나 가지고 있더라구요." 

 

"명함이요?" 

 

"네. 일전에 처음 상담하러 왔을 때 소민이한테 주셨던 선생님 명함 말입니다."

 

  

 

첫날 제가 건낸 그 명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제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나가려는 아이에게 건넸던 그 명함.

 

 

  

하얀 팔뚝에 꽂힌 링거주사. 천천히 떨어지는 주사액. 그리고 푸르스름하게 맺힌 멍 만큼이나 푸르스름한 입술. 아이는 쓰러지는 순간에도 안 아파요, 괜찮아요, 하고 꺼져가는 의식속에서 말했다고 한다.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기대치를 부응하지 못한 자괴감. 자아를 방어하던 모든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 그 오롯이 외톨이가 되는 지점에서 소민은 무엇을 보았을까. 몸을 날리며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 꺼진 의식에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소영은 슬쩍 핏기없는 소민의 건조한 손바닥을 만져보았다. 차갑다. 새삼 손이 너무 차갑고 작아서, 새삼 소민이 한낱 어린, 그리고 여린 소녀라는 걸 깨닫는다. 열아홉. 그때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었나 싶었다. 







문득 물어보고 싶다. 소민아, 넌 왜 높이뛰기를 하는 거니? 사실 누구보다 편하게 살 수 있을텐데 왜 굳이 뛰려고 하는거니. 소민보다 훨씬 긴 인생을 살았고 그 중에서 단 6개월을 본 아이인데, 그 간에 정이라도 싸인건지 소영은 코치의 말을 듣자 조금 울컥했다.

 

 

  

"비상연락망에... 말입니다."

  

"네?" 

 

"그.... 제 엄마, 아빠 전화번호가 아니라 선생님 번호를 저장해놨더라구요." 

 

"......" 

 

 

 

그렇게 새벽동안 소영은 소민의 옆에서 선잠을 자야만 했다. 학교 측에서 학교대표선발에서 최종탈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상 선수생활이 끝났다는 엄청난 소식이었다. 한 아이의 반짝거리는 길이 뚝 끊겨 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코치는 소민에게 있어 더이상의 기회는 없을거라고 냉정하게 말해주었다. 







소영은 소민에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사실 소민이 이것으로 조금 더 건강해질 수 있다면, 덜 힘들어질 수 있다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생각들이 고요히 피어나는 병실에서 소영은 소민의 침대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괸채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이튿날 얼굴이 간지러워 눈을 뜨니 진짜 토끼눈이 된 아이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부스스 눈을 뜨자마자 만화에서 튀어나온 캐릭터인양 놀라 깜짝 멀어져가는 하얀얼굴.

 

 

 

정작 놀란 것은 소영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저를 신기하게 굽어보고 있는 아이의 얼굴엔 평소의 독기는 하나도 없고, 그저 한없이 힘이 빠진 여린 아이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 

 

"......" 

 

"....야 배고파." 

 

"....네?" 

 

"밥 먹자, 소민아." 

 

"....예?" 

 

 

 

아직도 어떻게 된건지 몰라 저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소민은 평소에 보이던 그 센 척하는 아이가 아닌 한낱 어린 여고생이었다. 그것도 말을 아주 잘 듣는. 묻고 싶은 건 저도 많았지만 소영은 그 순간에 푹 꺼진 소민의 볼이 안쓰러워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밥을 먹자고. 







의사에게 소민이 깨어났다는 걸 알리고 퇴원수속을 밟았다. 평소였으면, "당신이 왜 나한테..."어쩌구저쩌구 했을지도 모르는 소민은 웬일인지 소영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한 듯 화장실까지 졸졸 따라왔다. 

  

 

 

"왜?" 

 

"아... 그냥." 

 

"너도 화장실?" 

 

"....어...그게...."

 

  

 

"그냥...손을...씻으려고..."어색하게 대꾸하며 행여나 제가 사라질까봐 슬쩍슬쩍 곁눈질 하는 아이. 소영은 어떻게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바뀔수가 있는지 신기하다못해 믿지 못할 지경이었다. 혹시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나. 제가 가진 의학적 상식에선 소민의 행동은 단기 기억상실이나 지나친 충격으로 인한 자아붕괴의 결과일텐데 그 정도는 아닌것 같고,

 

 

 

 

뭐 굳이 말하자면,

 

 

 

늘 꽁꽁 감춰두었던 불안감을 여과없이 드러내보이는 아이같을 뿐이었다. 마치 깨지기 쉬웠던 무언가가 드디어 그 균열을 버티지 못하고 편린이 되어 흩어진 것처럼. 더이상 억지로 괜찮은 척 하지 못해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이었다. 겨우겨우 버텨왔던 최후의 버팀목을 잃은 것 같은 얼굴. 그 뿐이었다.

  

 

 

그랬다. 마치 생존본능에 가까운 감정으로, 마치 막연한 자립을 발 끝에 앞둔 아기새가 어미를 쫓는 격이었다.

  

 

 

"부모님께 전화..." 

 

"......" 

 

"하는 건 쌤이 할테니까 좀 더 누워있어." 

 

"......" 

 

 

 

부모님께 전화, 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불안하게 저를 쳐다보던 소민을 보고 소영은 안심하라는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싫다고 할 줄 알았다. 뭔데 당신이 우리 엄마 아빠에게 연락을 하냐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소영의 말에 소민은 숨을 겨우 몰아쉬며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부러 소민의 병실을 나와서 통화를 했다. 정확히 1분 8초. 제 딸이 입원해 있다는데 형식적인 걱정의 말도 없다. 이미 알고 있었다며 계좌번호를 알려주면 그 쪽으로 수고비와 입원비를 넣어주겠으며, 간병인이 필요하면 바로 붙여주겠단다. 소영은 전화를 끊기 전에 정중하게 수고비를 사양했다.

 

  

 

"당분간 제가 데리고 있는게 나을 것 같아서요."

 

  

 

처음이었다. 제 직업이 진심으로 뿌듯했던 것이. 심리재활치료를 맡고 있습니다. 오 교수님의 연구소에서요. 지난 반 년간 제가 소민이를 치료했는데 알고 계셨나요? 네, 김소영이라고 합니다. 아이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직업을 떠나서 지금 아이에겐-







바로 옆에서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한데요.







자택보다는 제가 데리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아버님만 허락하시면... 

 

 

  

"제가 데리고 있는게 나을 것 같아서요."라는 말에서는 부러 더 힘을 주었다. 제 말에 잠시 고민하던 소민의 아버지는 이내 예의상으로 인사를 건넸을 뿐, 일절 다른 말은 없었다. 마지막까지 사무적이고 차가운 목소리에 소영은 그제서야 전화를 끊고 저도 모르게 멍하니 한참 생각에 잠겼다.

 

 

 

사실 원인이라는 게 특별히 없는 결과도 많다. 세상의 이치가 언제나 명확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니까. 당신은 왜 그리 딸에게 무심한가요? 하고 물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민에게서 캐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캐내고 알아봤자 힘든 사람이 줄어들진 않는다. 







그냥 소영은, 문득 소민이 발작을 일으키고, 아픔을 참았던 그 일련의 행동을 너무 당연하고 익숙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게 가슴 아플 뿐이었다. 심지어 지금 병원에 있는 상황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히려 누군가가 옆에서 간호를 해주는 상황이 더 어색하고 신기해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왔었구나. 본래 운동을 하는 아이를 둔 부모는 크게 두 가지 경우다. 과잉보호하거나 지나치게 냉정하거나. 그래도 그 근간에는 관심과 사랑이 있었다. 모성의 다른 말은 과잉보호가 되기도 하고 냉정함이 되기도 한다. 제 자식이 힘들어 하는걸 좋아하는 부모가 어딨을까. 그래서 부모들은 희생하거나 강한척 하는 것이었다. 소민의 부모는 안타깝게도 이런 부류가 아닌듯했다.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집이나 가족이야기를 끔찍히도 하기 싫어했었구나, 싶어 소영은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 아일..."

 

  

 

어?

 

  

 

그때였다. 생각에 잠겨 한숨을 내어놓는 찰나-







톡톡, 하고 저를 두드리는 느낌. 일전에 느꼈던 그 느낌. 문득 제게 톡톡, 어깨를 두드리며 조곤조곤 말해오는 소리에 소영은 제가 등지고 있던 병동의 반대쪽 복도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다. 분명, 제게 속삭이는 나즈막한 소리를 들었는데...

 

 

  

최근에 계속 피곤해서일까. 예민해지면 소리에 민감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러나 전혀 섬뜩하지도 사실 놀랄 정도로 위화감이 드는 소리가 아니어서 소영은 그저 갸웃했다. 그저 바람이 불듯, 꽃이피듯, 그냥 그렇듯 자연스러운 느낌이어서 그저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부탁해요. 제발..."

 

  

 

"네?"

 

  

 

어?

 

 

  

제법 또렷하게 들린 소리. 소영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러나 정적. 아무도 없었다. 괜히 머쓱해져서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다른 인기척에 본래 바라봤던 복도의 풍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민이 저를 보고 있다.

 

  

 

".....저기..."

 

  

 

링거의 주사액과 제 피가 반반 섞인 튜브를 끌고나온 소민이 제 눈치를 보며 저를 보고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다. 희미한 복도의 백색등 아래에서 보는 소민의 얼굴은 병실 안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아파보였다.

 

  

 

그제야 새삼 소영은 지금까지 소민이 얼마나 회복이 빨랐었는지 깨달았고, 다시금 저를 만나기 전의 몸상태로 돌아간 것 같은 소민을 보니 속상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걸까. 소영은 반 년 동안 소민에게 조금씩 느끼던 안타까움의 정체가 다만 어른으로서의 측은지심이길 바랬다. 그러나 제 앞에 아이는 그런 소영의 마음은 모른 채 소영의 눈치만 슬쩍 슬쩍 보고있다.

 

 

  

"안 와서..." 

 

"응?" 

 

"....안 들어와서..." 

 

"아, 몸이 안 좋아?" 

 

"아니....그게...아니라..."

 

 

  

민망하게 손으로 제 환자복을 꾸깃꾸깃 만져대던 소민은 이내 슬쩍 걸음을 옮겨 소영의 팔을 엄지와 검지로 슬쩍 잡고 제 쪽으로 끌었다. 아무 말 없이, 소민이 다가오고, 제 옷깃을 살짝 잡아 끌고, 그러면서 저를 올려다보는 그 장면이 소영은 왠지 슬로우모션같았다. 소민은 이제 불안함이 아니라 뭔가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소영은 아이가 끄는대로 끌려주었다.

 

 

  

"옆에...." 

 

"응?" 

 

"있어줘..." 

 

 

 

소민은 소영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호칭도 격식도, 존대조차도 생략된 그 말이 신기했지만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마치 둘이서 늘 그렇게 대화했던 것처럼. 그래서 소영도 자연스럽게 부러 웃으며 소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마. 불안했어?"하고 묻자 그제서야 저를 어색하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아빠가 뭐래요?" 

 

"너 잘 보살펴 달라고 하시더라." 

 

"......." 

 

  

 

거짓말은 힘들다. 잘 보살펴 달라는 말은 사실 형식적이었지만, 부러 소영은 소민의 아버지 몫까지 애정을 담아 말했다. 소민은 소영의 말에 대꾸없이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지금도 숨이 가빠?" 

 

 

 

제 말에 소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다 이내 소영이 재킷을 걸치자 몸을 발딱 일으켜 도대체 왜 그러느냔 표정을 짓는다. 소민의 반응에 정작 당황스러운 건 소영이었다. 주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강아지처럼, 소민은 소영이 병실을 나서는 모양에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킨 것이었다.

 

  

 

"어... 어디가요?" 

 

"편의점. 필요한거 있어?" 

 

"아...." 

 

 

 

혹시나 제가 어디 가기라도 할까봐 놀란 얼굴이 꼭 아홉살 꼬마애 같았다. 소영은 병실문 손잡이를 돌리려다 말고 슬쩍 소민을 돌아보았다. 아픈 아이. 정말로 아파보이는 아이의 얼굴을 한 소민이 새삼 소영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

 

 

  

제가 돌아보는 시선을 그대로 받아치는 눈빛. 전엔 몰랐는데, 소민의 눈동자는 지금보니 약간 회색빛이었다. 아마 갑작스럽게 쓰러진 까닭일 것이었다. 그러나 소영의 입장에선 그런 모습조차도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텅빈 눈동자, 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눈동자였기 때문에.

  

 

 

"잠시 기다려."

 

  

 

갑자기 스치는 생각에 소영은 바로 병동의 데스크로 갔다. 그리고 소민을 담당했던 간호사에게 물었다. "애 밥을 좀 먹이고 싶은데..."라고 하니, 간호사가 "너무 자극적인 음식은 안됩니다."라고 대답하며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내 "언니가 한 분 더 있는 줄은 몰랐네요. 둘 다 되게 미인이네."한다. 큰 병원이 아닌데다가 소민이 자주오던 병원이라서 소민을 아는 것 같았다. 소영은 굳이 언니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고 그냥 예의상 웃어주었다. 소민이 있는 병실로 걸어가는 복도에서 간호사가 말했다.

 

  

 

"올 만한 가족이 없는 줄 알았어요. 늘 간병인을 붙이길래 언니가 한 분 더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네?" 

 

"어디 외국에 있으셨나보네. 입원할 때마다 혼자 있길래..." 

 

"그 전에도 입원했었나요?" 

 

"네? 3년 전에 한 번, 작년에 한 번." 

 

 

 

간호사가 그것도 몰랐냐는 듯 신기하게 소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조심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예전에 처음 입원했을 때는 28주동안 장기입원 했었어요." 

 

"28주요? 병명이 뭔데요?" 

 

"그거 **도로 전복사고, 그거... 어머, 죄송해요. 가족이 아니셨나봐요." 

 

 

 

소민의 입원실 문을 열며 간호사는 직감적으로 소영이 친언니가 아님을 눈치챈 것 같았다. 소영은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28주. 무려 반년이 넘게 혼자서 입원해 있었다고? 그게 말이 돼? 분명 소민에겐 엄청나게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을 게 분명했는데. 아니, 지루한 문제가 아니었다. 3년 전이면 열여섯. 열여섯에 혼자서 1인실 병동을 지켰다고? 반 년 동안? 그 시간 동안 한 명도 옆에 있어 줄 사람이 없었다니.  

 

  

 

도대체 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몸소 살아내는 아이...

 

  

 

새삼 소민에 대해 하나하나씩 알게될 때마다 소영은 제 마음이 더 무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간호사와 함께 다시금 문을 열자 소민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놀란 듯한 눈빛을 짓는다. 간호사는 소민이 익숙한듯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소민은 마지못해 고개만 까딱거리며 목례할 뿐이었다. 소영은 그런 소민을 보며 문득 환자복이 마음에 안든다, 라는 생각을 했다. 쇄골이 푹 파여져 흉부의 뼈가 다 드러나는 것 같아 보기가 안타까웠다. 살가죽이 쪼그라 든 아이는 뼈밖에 없어보였다. 새삼 소민을 그나마 좀 보기좋게 살찌워놓았던 시간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아 다시금 속상했다. 콕콕거리며 가슴을 찌르는 기분. 마음이 정말 물리적으로 아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안타까울까, 왜 이렇게 내가 다 속상한걸까. 자꾸만 제가 싫어하는 종류의 감정이 들어 불편한 소영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얼만큼 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진부한 직업의식에서 나온 물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물음에 평생 대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

 

  

 

소민은 말 없이 소영이 손을 잡아주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영을 올려다본다.

 

  

 

"링거 뺄 거야. 조금 따끔해."

 

"......" 

 

"손 잡는거 싫어?" 

 

"...좋아."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간호사가 링거를 뽑아내고 밴드를 붙여준다. 따끔했는지 소영의 손에 잡힌 손이 움찔한다. 손이 정말 작네. 한손에 쏙 들어오는 손을 보며 소영은 새삼 아이의 손,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영이 소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소민도 따라서 힘을 주려고 노력했다. 소영은 그 느낌에 슬며시 소민을 내려다 보며 빙긋 웃었다. 소민은 웃지 않았다. 다만 저를 쳐다보는 소영을 슬쩍 쳐다보고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간호사가 다시금 먹지 말아야 할 음식종류를 일러주고 나갔다. 소영은 재킷을 벗어 소민에게 내민다.

 

  

 

"....나 나가요? 언니랑?"

 

 

  

어느새 호칭은 언니, 가 되었다.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언니, 라고 말하는 소민의 말에 신기하게도 소영은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응. 병원에서 조금만 더 나가면 맛있는 죽집 있대. 옷 입고 가자." 

 

"......" 

 

"너 병원밥 먹이기 싫어서." 

 

"...응."

 

 

  

꼬물꼬물, 꼼지락꼼지락, 주섬주섬, 침대를 조심스럽게 내려오면서 소영이 내민 재킷에 팔을 끼워넣는 소민이었다. 무슨 엄마옷을 입은 아이처럼 헐렁하게 늘어지는 소영의 재킷. 단추까지 잠궈주자, 민망한듯 소민은 제 바로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영을 쳐다보지 못하고 어색하게 다른 곳을 쳐다본다.

 

  

 

"무슨 죽 먹을까?" 

 

"...아무거나." 

 

 

 

소영은 소민의 목끝까지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 눈을 맞췄다. 싱긋, 웃어본다. 제 미소를 소민은 조금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심히 부담스럽지만 싫진 않은 듯 입꼬리가 올라갈듯 말듯한다. 소영은 웃었다.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켜 익숙하게 소민의 어깨를 감싸며 걸었다. 주춤, 소영의 행동에 잠시 놀라던 소민은 이내 얌전히 따라 걸었다.

 

 

  

"여기서 기다려. 차 가지고 올게."

  

 

 

끄덕끄덕. 로비에서 병원의 출구로 나오자마자 소영은 빠른 걸음으로 차를 가지러 갔다.

 

 

 

 


 

 

* * *

 

 

 

 


 

 

소민은 반그릇을 채 비우지 못하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깨작깨작. 숟가락조차 제대로 쥐지 못하고 휘적거리며 죽을 보던 소민은 이내 물만 들이켰다. 먹는 것도 힘에 부치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죽집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못 먹겠어, 더?" 

 

"배불러요." 

 

"음... 조금만 더 먹자."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표정이 완고하다. 저건 진심어린 거부의사라는 걸 소영은 이제 알 것 같았다. 이젠 소민의 표정이나 말투만으로도 소민의 상태를 헤아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만 같다.

 

  

 

"그럼 포장해 달라고 해야겠다. 아침에 먹이려면."

 

  

 

소민은 소영의 말에 고개를 슬쩍 들었다. 먹으려면, 이 아니라 먹이려면, 이라는 말에 잠시 마음이 요동쳤다. 먹이려면, 먹는 것, 먹는 것... 왜 저를 자꾸 먹이려고 하는 걸까, 이 여자는. 타인의 동정심을 끔찍하리만치 싫어하는 소민에게 소영의 방금 전 그 말은 미묘하게 기분을 간질거리게 했다.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죽을 포장해서 다시 소영의 차에 탔다. 바깥공기가 나쁘지 않았다. 한여름이다 싶더니 어느새 겨울. 소영의 겉옷이 따뜻했다. 키가 크다, 이 사람. 코트 길어. 슬쩍 운전대를 잡는 소영을 보던 소민은 무심한척 말했다. 

 

 

 

"키 커요." 

 

"어?" 

 

"몇이에요?" 

 

"170조금 넘어." 

 

"응." 

 

"넌?" 

 

"쌤보다 작아요."

  

 

 

뭐야, 그건 나도 보면 알거든? 하고 소영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가 다시금 호칭이 쌤으로 바뀐게 의아해 운전을 하면서 슬쩍 물었다.

 

 

  

"아깐 언니라고 부르더니." 

 

"...제가요?" 

 

"응." 

 

"...정말요?"

 

  

 

응? 하고 소영이 소민을 돌아보았다. 그냥 무심히 돌아볼 뿐이었다. 소민이 흐린 말의 의미가 궁금해서. 그런데,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아이는 당황스럽게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에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 낯설어서 소영은 왜 그러냐는 말도 붙이지 못하고 그저 몸이 안좋아졌나 싶어 빨리 차를 몰았다.

 

 

 

 

 

 

 

 

 

  

 

 

 

 

 

 

 

 

 

 

 

 

 

 

 

 

 

다시 링거를 꽂기 전, 담당의사를 만나야했다. 현재 보호자겸 간병인 신분이 되어있던 소영은 소민에게 잠시 쉬라고 하고 담당의사를 만났다. 경과는 괜찮은데 퇴원수속을 자꾸만 미루는 병원측이 답답하고 뭔가 찜찜했던 차였다. 소민이 졸린듯 침대에 앉아있다가 소영이 나가려고 하자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잠깐 전화받고 다시 올게." 

 

 

 

불안해할까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사를 만난다고 하진 않았다. 제 말에 소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보더니 이내 이불속으로 꼬물꼬물 몸을 넣었다. 소영은 불을 꺼주고 스탠드의 밝기를 조절해주었다. 가습기를 확인하고 자고 있으면 돼, 하고 말하자 소민이 슬쩍 이불을 살짝 들추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언닌 어디서 자요?" 

 

"음. 여기 쇼파도 있고." 

 

"침대에서 자도 되는데."

 

  

 

부러 제 옆자리에 사람 한 명 더 누울 수 있는 공간을 남겨놨다는 듯 소민이 슬쩍 시선을 제 옆자리로 두고는 다시금 소영을 바라보았다. 소영은 알겠다고 잠이나 푹 자고 있으라고 하고 문을 열었다. 그러다가 멈칫, 다시금 소민을 돌아보았다. 제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소민은 왜그러냐는 듯 소영을 바라본다.

 



  

.....언니...라고 했지 방금?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소영은 무시했다. 병실문을 조용이 열고 닫으며 새삼 피곤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며칠동안 잠을 제대로 자질 못했다. 퇴원수속이 늦어지면 소민의 옆에서라도 좀 편히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소영은 집에가서 갈아입을 옷을 가져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병동에서 회진을 돌고 오던 담당의사는 간호사에게 건네받은 챠트를 보더니 이내 소영에게 "소민양은 좀 어떻습니까?"하고 바로 물었다. 그건 제가 물어야 할 말인것 같은데...하고 웃으며 말했다가 의사는 차근차근 소영에게 앞으로 선수생활과 관련된 말을 해주었다. 제법 직설적이었다. "못합니다. 어차피 그 상태로 운동을 계속 했다는 거 자체가 무리였어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코치인 남자로부터 들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걸 어떻게 소민에게 말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 실례지만 어떤 관계시죠?" 

 

"네?" 

 

"소민이 보호자분... 친척이신가?" 

 

"아니요, 저는..."

 

 

 

어, 그러니까 저는... 소영은 말문이 막혔다. 나는 아이의 무엇일까. 잠시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소영은 그저 체념한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요." 

 

"네?" 

 

"아는 언니... 같은건데." 

 

"...음."

 

 

 

그냥 넘어갈 줄 알았던 의사는 '언니요'하는 소영의 말에 진심으로 놀란듯 소영을 돌아보며 다시금 소영을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훑어본다. 소영은 소영대로 조금 당황했다. 이런 반응까지 보일 줄은 몰랐다. 그러다가 왠지, 그냥 직감적으로 느낌이 싸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언니, 라는 말에 왜 하나같이...

 

 

 

"언니라고 부르던가요, 소민학생이?" 

 

"네?"

 

 

 

어느새 병동을 걸으며 하던 대화는 도중에 멈추어서 나누는 진지한 분위기가 되었다. 졸음이 쏟아지던 느낌이 사라졌다. 이제 직감에서 퍼져나오는 어떤 확신들을 잡고서 알아내야 할 것들이 생겼다. 소영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의사에게 물었다.

 

 

  

"혹시...무슨 일이 있었나요? 소민이에게?"

 

 

 

 

 

 

 

 

 

 


 

 

 

* * *

 

 

 

 

 

 

 

 

 

 

언니가 늦다, 언니가 늦는다. 







오늘은 제법 많이 늦어. 







그치만 언니는 늦어도 꼭꼭 소민이껄 사온다. 







그래 그거면 됐어. 그거면 돼.

 

 

 

시계, 두 시

 

 

주사 맞기가 싫어, 언니. 같이 가주면 안돼?

 

 

시계, 두 시 삼십사 분.

 

 

안전벨트 꼭 해야지, 바보야.

 

 

주사맞고 맛있는 거 사줘. 나 운동하니까 맛있는거 많이 먹어야 한댔어.

 

 

그래그래, 알았어 이 바보야.

 

 

시계, 두 시 사십오 분.

 

 

 

 

 

소민아 너는 왜 높이뛰기가 좋아? 

 

 

 

 

왜냐면, 있잖아. 막 뛰잖아? 발을 딱 디디고 몸을 뒤집으면서 날아오를 때, 내 눈엔 하늘밖에 없거든. 같이 운동하는 애중에 한 명은 그게 바다처럼 보일 때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게 그냥 이불같아. 파란 이불. 거기에 뛰어들면 그게 포옥 가라앉으면서 나를 감싸줄 것 같아. 그래서 뛰어오르는 순간이 침대에 몸을 날리는 순간 같아. 그런데 있잖아, 언니. 몸이 더이상 올라가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 그 짧은 순간에 있잖아. 응? 내 말 듣고 있어? 그때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그냥 날고 있는 느낌이 들어. 그냥 그렇단 말이야. 그리고 추락할 때에도 나쁘지 않아. 응? 언니, 내 말 듣고 있지? 잘 뛰고 나면... 매트 위에 몸을 던지는 게 꼭 누군가에게 안기는 느낌이야. 푹신푹신하잖아, 일단. 거기에 누워서 하늘보면... 그 하늘이 이불같고, 그래. 내 방 이불 파란색으로 사달라고 한 거 그래서 그런 거야. 야, 듣고 있어? 언니라고 부르라고? 알았어, 언니... 언니!

 

 

 

언니!







언니...!







...언니.

















 

 

 

네가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왜 그렇게 말해요, 다들.

 

 

언니, 언니, 나도 데려가 줘.

 

 

 







 

 

 

 

시계, 두 시 사십육 분.

 

 

그리고 솔직히 공부하는 거 보단 이게 좋아.

 

 

으이구, 바보야. 공부나 해보고 그렇게 말하던지.

 

 

시계, 두 시 오십오 분.

 

 

뭐래 언니도 공부 못하면서.

 

 

너보단 나아.

 

 

시계, 세 시 삼 분.

 

 

언니.

 

 

 

 

안 와.

 

 

맛있는 거 사준다면서

 

 

나한테

 

 

맛있는 거

 

 

사주고 주사도 맞아야 하는데

 

 

 

 

안 와

 

 

 

 

 

 

 

 

 

 

 

 

 

 

 

 

 

 

 

 

 

 

 

 

 

 

 

 

 

 

 

"흐...으....언니...."

 

 

 

 

차라리 보였으면 좋겠어. 다 내탓이라고 해도 좋으니 꿈에서라도 나와줬으면 좋겠어. 마음 속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꿈에서라도 나타나주면 안돼, 언니? 의식이 뒤죽박죽 섞인 속에서 소민은 그리 생각했다. 







소영은 소민의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황급히 소민이 뻗은 손을 잡았다. 의식의 끝자락에서 제가 울고 있음을 알았는지 소민은 갑자기 소리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소영은 소민의 머리를 제 가슴에 안으며 소민을 살짝 일으켰다. 그리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끄윽 끄윽,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울어재끼는 아이는 갓난아이가 우는 것처럼 울어댔다. 그리고 저를 잡은 손을 꽉 지며 제가 일으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와락 안겼다.

 

  

 

"괜찮아? 응?" 

 

"어...어어...으...어...언니가..." 

 

"그래, 그래. 괜찮아, 소민아. 나 누군지 알겠어?" 

 

"흐으...으으...우리 언니가..." 

 

 

 

잠시 발작이 온 거 같아서 소영은 황급히 콜을 넣었다. 그러나 의료진이 오기도 전에 이내 울음을 터뜨리며 깬 소민덕분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새벽이었다. 방금 전까지 밖에서 있다가 들어왔더니 소민이 끙끙 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답답하다며 가슴을 치길래 심계항진 발작임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심장에 쇼크가 간것일까 싶어서 소영은 정신이 아찔했다. 제 품에 안겨서 미친듯이 울어재끼는 소민을 토닥이고 있는데 의료진이 왔다.

 

 

 

"소민아? 잠시 체크 좀 해보자, 응?" 

 

"집에... 갈래..." 

 

"소민아 의사선생님이..." 

 

"집에 갈래요. 집에 갈래. 집에 보내주세요. 집에... 병원 싫어..." 

 

"소민아..." 

 

"집에요. 집 보내주세요. 제발... 제발 보내주세요... 갈래요... 여기 싫단 말이야..." 

  

 

 

소영의 품에서 얼굴도 떼지 않고 울음을 섞으며 웅얼웅얼 뱉어내는 아이의 등을 보던 의사와 간호사는 이내 서로 눈을 주고 받더니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조금 전까지 울었던 소영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가 잠시 간호사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소영에게 눈치를 주었다. 몇가지 체크만 해보겠다는 신호임을 소영은 알아챘다. 겨우겨우 소민을 어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내 다시금 소영에게 확 안겨 고개만 도리도리 흔드는 소민이었다.

 

 

  

"주사 싫어." 

 

"주사 아니야. 집에 보내주시겠대, 의사 선생님이." 

 

"집 싫어." 

 

"그럼 어디 가고 싶어." 

 

 

 

말이 없다. 한참동안 소민이 울음을 참더니 이내 훌쩍이며 살짝 소영의 옷깃을 구깃거리며 잡는다.

 

  

 

"언니 집. 언니 집에..." 

 

"언니?" 

 

"응...언니...언니 집에...당신 집에..." 

 

"응. 우리집에 갈까?" 

 

"응....아빠 집 말고....언니 집에 갈래...." 

 

"그래. 그러자. 나랑 같이 가, 응? 대신 의사선생님이 검사만 조금 해보시겠대. 우리 소민이 얼굴 좀 보자." 

 

 

 

코 끝이 찡했다. 겨우 가라앉힌 커다란 감정의 덩어리가 다시금 북받쳤다. 소영은 겨우 호흡을 조절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제게 매달리다 시피하는 소민은 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그냥 가만히 소영에게 안겨있었다. 결국 의사가 소민의 등을 통해 청진기를 대어보더니 이내 자기들끼리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퇴원은 시켜주는데... 내일 다시 올 수 있겠어요?" 

 

"네. 다시 꼭 데려올게요."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고 고요가 찾아왔다. 울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은 채 소영에게 안겨있는 소민은, 마치 소영에게서 떨어지면 어떻게라도 되는 것처럼 안겨있었다. 그러나 소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침묵했다. 의도한 침묵도 아니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따름이었다. 다만 제 어깨와 가슴팍이 소민의 눈물로 축축한 게 가슴 아팠을 뿐. 







아이의 마른 등을 토닥이며 시간이 계속 흘렀다. 째깍이는 시계소리가 새삼 평화롭다. 새벽의 병실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이 풍경을 아이는 어떤 마음으로 지켰을까. 이 병원 싫어요, 하는 그 목소리는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어린 외침이었다. 반 년이 넘게, 여기에 혼자 앉아서 아침이 오고, 새벽이 가는 그 지독한 시간동안 소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열여섯.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1인실에서 아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감옥의 독방이, 홀로 떨어진 무인도와 다를 바 없는 이 곳에서 아이는 어떤 생각으로 산걸까. 

 

 

 

아니, 사실 늘 말하고 싶었겠지. 싫어요, 슬퍼요, 힘들어요, 하고. 







무엇이...네 목소리를 지워버렸을까. 네 눈물을 지웠을까. 소민아...

 

 

  

"소민아." 

 

 

 

겨울이 오고 있었다. 소영은 제 눈 앞에 창문 밖으로 달무리가 진 하늘이 보였다. 새벽하늘은 까맣다기보다는 푸르스름했다. 혹시 눈이 오려나. 문득 자신의 집으로 소민을 데려가는 이 시간이 더 없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은 추우니까. 

 

  

 

"내가 언니를 죽였어요." 

 

"아니야." 

 

"....맞아요 나 때문에...죽었어요...나 때문에....." 

 

"아니야." 

 

"......" 

 

"네 잘못 아니야." 

 

"......" 

 

"네 잘못이 아니야, 소민아." 

 

"......" 

 

"네 잘못이 아니야...정말...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소영은 메아리처럼 계속해서 소민의 귓가에 자장가처럼 그 한 문장을 들려주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소민아.

 

  

 

2009년 겨울 오후 세 시경. 자매가 탄 승용차가 전복되었다. 첫눈이 오던 날이었다. 첫눈인데 대설주의보가 뜰 정도로 갑작스런 폭설이었다. 얼어붙은 국도는 제설작업이 미처 되어있지 않았다고 했다. 소민의 언니는 소민과 함께 병원에 가고 있었다. 몸관리가 철저해야한다며 평소에도 팔불출처럼 제 동생을 챙기던 그녀는 막판에 핸들을 꺾었다. 왼쪽으로 백팔십도 꺾인 자동차는 반파되었다. 다만 운전자석만. 가드레일에 의해 멈춘 승용차는 에어백이 무색하게 운전석은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차체가 세로로 압축되듯 찌그러졌다. 







그러나, 정말 놀랍게도 조수석만은 기적적으로 무사해서 사람들은 소민에게 네 언니가 너를 살린거라며 말했다. 승용차에서 의식을 잃어가는 찰나의 소민을 꺼내며, 구급대원이 말했다. 공주님, 너는 네 언니 몫까지 행복하게 살아야겠다. 







네 언니 몫까지.

 

  

 

결국 소민의 부모들도 그 아픔을 버티기 위한 방어기제로 마음을 닫아버린 것은 아닐까. 소민에 대한 사랑과 그 언니의 죽음이 뒤섞여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자 그저 무관심한 듯 마음을 닫아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소영은 생각했다. 







첫눈은 누군가에게 설렘을, 그리고 누군가에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주었다는게 아이러니했다. 문득, 소민의 가슴을 열어보면 새까맣게 타버린 재만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아홉입니다, 신이시여. 그때는 열여섯. 왜 운명부터 가르쳐야 했나요. 그거 말고도 아이가 배워야 할 다른게 많잖아요. 편식하면 안되는 것, 체했을 때 소화제를 먹는 것, 떼쓰는 법, 사랑받는 법, 화내는 법, 우는 법, 솔직하게 말하는 법... 







그리고 죄책감 없이 웃을 수 있는 것. 

 

 

  

"....소민아."

 

  

 

제게 안긴 아이의 뺨에 슬쩍 얼굴을 부비며 소영이 말했다. 

 

 

 

"첫눈 오는 것 같아."

 

  

 

그제서야 소민이 스르륵 조심스레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킨다. 빨갛게 충혈된 눈은 소영이 가리키는 밖이 아닌, 소영을 바라본다. 흔들리지만 이번엔 텅빈 눈이 아니라 무언가 터질 듯한 감정을 담은 눈이었다.

 

  

 

"집에 갈까? 우리 집에."

 

  

 

결국 참으려고 했는데 주르륵 눈물이 흘러버려서 소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돌려버렸다. 그런 저를 뚫어지게 보던 아이가 이내 손바닥을 들어 소영의 뺨에 가만히 대어본다. "왜 울어요?" 그러나 이내 소영의 눈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려대며 다시 울어버리는 소민이었다. 티슈를 뽑아 소민의 뺨을 꾹꾹 눌러주며 소영은 제 옷을 소민에게 걸쳐주었다. "너는 왜 우니?" 소민은 소영의 두 손바닥에 갇힌 제 뺨이 따땃해지는 걸 느꼈다.  







"나가자." 







최대한 울음을 감춘채 소민의 눈높이에 눈을 맞추고 소영이 피식 웃었다. 그때서야 빨간 코를 훌쩍이며 끄덕끄덕 제 뒤를 졸졸 따라 나서는 소민이었다.

  

 

 

눈오니까, 춥잖아. 따뜻하게 입어야지.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워주던 소영은 이내 핸드백에서 장갑을 꺼내 소민의 손에 끼워준다. "언니는?"하며 소영에게 장갑을 다시 내미는 소민에게 소영은 피식 웃었다. 난 환자 아니거든? 감기걸릴라, 어서.

  

 

 

"울다가 웃으면 안되는데..."

 

  

 

소영의 미소에 소민이 얼굴을 붉히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소영에게 말했다. 뭐야? 하는 소영의 말에 피식, 저도 모르게 소민도 웃어버린다. "넌 어떻고?"하는 말에 "그러게..."하고 소영의 팔이 나무인양 달라붙는 매미처럼 꼭 붙어서 걸어나가는 소민이었다. 퇴원수속서류를 이미 준비해두었던 간호사가 사인을 요구했다. 소영이 서류를 작성하는 중에 처음 보는 간호사가 이따금 소영과 소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떤... 관계세요? 자매치곤 너무 안 닮았는데..."

 

  

 

결국 궁금함을 못참았는지 물어오는 간호사의 말에 소영은 서류를 작성하다가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 꼬옥, 제 한쪽 팔에 몸을 밀착시킨 채 소민이 소영의 얼굴을 슬쩍 보더니 이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눈을 내리깐채 말했다.

 

  

 

"...그... 어..." 

 

"네?" 

 

"...내가 좋아하는..." 

 

"크게 말해."

 

 

  

웅얼웅얼 거리는 소민의 말에 소영은 서류에 눈을 고정시킨채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크게 말하라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네가 말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말하면 돼, 바보야. 







사인을 마치고 서류를 내밀며 대답없이 붉어진 얼굴을 내리깐 소민을 바라보던 소영은 "갈까?"하고 말한다. 끄덕끄덕. 작은 머리통이 흔들거리고, 이내 데스크를 나서기 위에 몸을 돌리는 찰나, 소민이 간호사에게 나즈막히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 * *

 

 

 

 

 

 

집으로 가는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그세 조수석에서 잠이 든 소민을 바라보며 소영은 천천히 사이드 브레이크를 밟았다. 도착했다. 집. 소민에게 우리 집, 이라고 말했던 그 집. 얼마전만해도 혼자 머물던게 너무나 익숙했던 집. 그리고 그때는 그게 허전한 줄 몰랐던 집.

 

  

 

소영은 제 옆에 잠든 소민을 보며 새삼 참 편안하게 잔다 싶었다. 너는 이렇게 자고 싶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울고 싶었을까? 당연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아이는 얼마나 죄책감을 가지고 참아야했을까. 타인을 거부하는 건 결국 저 스스로를 거부했던 행동이었을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호의를 받지 않고, 스스로를 철저히 가두고, 그리고 죽이는 연습을 했을 아이의 시간을 소영은 새삼 돌리고 싶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핸들을 꼬옥 쥐고 잠시 눈을 감았다. 왜 시간은 지나고 나서야 깨달음을 주는걸까. 진작 알았더라면 너를 조금 더 일찍 데리러 갔을거야. 네게 조금 더 맛있는 밥을 차려줬을 거야. 조금 더 많이... 많이... 잘해줬을거야.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반대편으로 가서 소민을 부축할 생각이었다. 제 겉옷을 소민에게 줬던 터라 블라우스 속으로 금세 한기가 몰아닥쳤다. 소름이 돋아 제 팔을 감싸안으며 황급히 조수석으로 뛰어가듯 걸었다. 그러다가, 멈칫. 소영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톡톡.

 

 

  

어?

 

  

 

제 어깨를 두드리는 그 손길.

 

  

 

또 그 손길이다.

 

  

 

소영은 귀를 기울였다. 차의 정면 유리에서 보이는 소민은 새근새근, 마치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처럼 잠들어있다. 마치 보란듯이, 누구나 봐도 한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아이의 잠이었다.

 

  

 

 

"그 아이를..."

 

  

 

 

소민이 잠든 목소리만큼이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지 이젠 알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이내 눈을 찡긋했다. 눈가에 닿고 흐르는 눈 때문이었다. 두툼하고 하얀 솜뭉치들이 내리고 있었다. 







진짜 첫눈이었다.

 

  

 

그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소영은 울었다. 눈송이인지 제 눈물인지 뺨을 타고 하염없이 무언가 흘렀다.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기다렸다는 듯 슬픔이 차고 올라서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펑펑내리는 눈처럼, 누군가의 슬픔을 대신한 그런 울음이었다.

 

  

 

그리고 소영의 온 몸으로 내리는 눈송이에서 다시금 소리가 들렸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 그렇게 잔잔하고 따뜻하게. 소영의 눈가에, 콧잔등에, 뺨에, 어깨에 내려앉으며 그 소리가 톡톡, 다시금 톡톡, 눈처럼 살포시 그녀를 두드린다. 어렴풋하게 한기가 온기로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톡톡, 다시금 톡톡. 소영에게 내려앉으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 아이를...

 





 

 

 

그 아이를....

 

 





 

 

부디....

 

 

 











 

 

"우리 소민이를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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